▲타격대상:남도청(3공수여단), 광주공원(7공수여단), 전일빌딩(11공수 여단), 기타 광주시내 주요거점.
▲투입부대:3공수·7공수·11공수·20사단·31사단·전교사 예하 소속부대. 이 모든 작전은 전교사 蘇俊烈 사령관의 지휘아래 실시된다.(전교사 전 투상보)
상무충정작전은 시민군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光州를 탈환키 위한 작전으 로 27일 새벽 0시1분을 기해 실시돼 이날 새벽 5시10분 완료됐다.
작전결과 해방 광주는 막을 내리고 계엄군이 光州를 장악한다.충정작전이 잉태되는 과정에서부터 실행되는 과정까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작전이 수립되기까지 군수뇌부의 움직임은 광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 책임을 규명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당시 현지에서 작전을 책임지고 있었던 蘇俊烈 전교사 사령관의 국회 증언을 살펴보자. 그는 88년 12월 19일 국회청문회에서 27일 충정작전 입안과정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증언했다.
▲진압작전은 22~24일 동안 대화를 통해서 사태수습을 노력하다 실패로 돌아가자 25일 자신이 구상했으며 육본에서도 지시가 내려왔다.
▲22일 2군에서 평정 진압작전 건의서를 올린 것은 자신은 모르는 사항이 다.
▲27일 작전은 당시 작전참모 白南伊·金순원장군이 자문을 해준 것이다.
▲전교사 사령관으로 내려올때인 20일 전화로 黃永時 육군참모차장으로부 터 9월 군단장 인사때 보직과 관련된 진급을 언질받은 적이 있다.
蘇씨의 증언을 1백% 믿는다해도 광주현지사태를 잘 모르는 2군 사령부가 전교사와 상의없이 22일·23일자로 진압작전을 하겠다고 육본에 건의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할수 없는 일이다.
이뿐아니라 그의 증언은 육본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이라는 문건과도 상치하는 부분이 많다.육본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상에 나오는 충정작전 수립과정을 날자별로 살펴보자.21일 李熺性 계엄사령관실에서 계엄관계 지휘관 및 참모회의를 열어 光州 사태의 대책을 논의, 자위권 발동을 지시하고 계엄군의 외곽 재배치후 폭도 소탕작전은 23일 이후 명에 따라 실시할 것을 결의.
22일 2군사령부는 육본에 23일 조기진압을 주개념으로 하는 충정작전실시 를 건의했으나 충정작전은 한미간 협의사항이니 작전을 24일까지 연기할 것을 지시.
23일 8시50분 李熺性 계엄사령관실에서 陳종채 2군사령관과 관계참모가 참석, 蘇俊烈 장군이 작성한 충정작전을 중심으로 소요진압 작전회의 를 개최, 공수부대는 光州시를 3개지역으로 분할 장악한 뒤 20사단에 인계 하고 퇴각한다는 내용을 확정.
25일 오후12시15분 全斗煥 보안사령관, 盧泰愚 수경사령관, 周永福 국방장관, 李熺性 계엄사령관, 黃永時 육군참모차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蘇 俊烈 전교사령관 책임하에 27일 새벽0시1분 이후에 충정작전을 실시할 것 을 최종결정.26일, 22일부터 미국측과의 협상을 시도한 결과 이날 오후4시 미군의 최종승낙을 받아내자 李熺性 계엄사령관이 충정작전 지침 하달.
27일 충정작전 실시.
육본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이란 문건은 21일 이미 충정작전 실시를 결정했고 23일 소요진압 회의에서 논의된 충정작전의 내용(광주를 3 개권역으로 분리, 접수한 뒤 공수부대는 20사단에게 인계하고 퇴각한다는 부분)이 실제 27일 작전 과거의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25일 자신의 구상하에 작전을 결정했다는 蘇씨의 증언은 당시 계엄군이 시민항쟁부와 협상을 시도하다가 불가피하게 진압작전을 실시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충정작전과 광주항쟁 金泳鎭著)또 蘇씨가 20일 黃永時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진급에 대한 언질을 받았다 는 증언은 신군부가 22일 오전10시 무력진압에 반대해 오던 尹興禎 전교사 사령관을 경질하고 蘇俊烈씨를 신임 전교사사령관으로 발령하면서 무력진 압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육본의 문건과 蘇씨의 증언을 비교해 볼 때 충정작전의 수립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도출해 낼수 있다.
첫째, 진압작전의 세부계획은 22일 발령을 받은 蘇俊烈 전교사 사령관이 입안, 2군사령부를 거쳐 육본에 보고됐으며 주요 작전개념은 조기진압이었다.
둘째, 실시 시기만 남겨두었을뿐 무력진압을 결정한 시점은 21일이었다.
셋째, 작전개시일이 27일로 연기된 것은 한미간 협의를하기 위함이었으며 부차적으로 주도면밀한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넷째,충정작전은 全斗煥·盧泰愚등 신군부 실세들이 참여, 최종결정했다.
다섯째, 미국은 충정작전에 찬성했다.
결국 신군부는 애초부터 수습위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수습은 염두에 두 지 않았고 계엄군을 광주외곽으로 재배치한 직후부터 무력진압을 실시할 것 을 준비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미국의 승인을 얻어내 거칠 것이 없었던 신군부는 부대를 재배 치하고 병력을 확장한 뒤 D데이 H아우어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