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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종으로 살아가기
로마서 6:15~23
(롬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롬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자궁암 말기 증상으로 암 전문병동에 입원한 교우를 여러 차례 심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병상 옆에도 똑같은 병명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60대의 여성분이 여러 차례 방사선 치료와 항암 약물 투여로 머리털은 다 빠지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굴은 짙은 화장을 하고 립스틱까지 빨갛게 칠한 모습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번쩍거리는 굵은 금목걸이를 걸고 제법 커 보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기이하게만 보였습니다. 갈 때마다 그런 모습을 보인지라 너무 궁금해서 기도를 해드린다는 핑계로 입원환자가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무엇인가 하여 여쭤 보았습니다.
그 분은 사채놀이를 해서 제법 돈을 많이 모았다고 했습니다. 아들딸의 며느리와 사위가 있는데 이렇게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야 자주 병원에 면회를 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유난히 외로움을 타는 모습을 보였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면서 더 그랬는지는 모르지요. 정말 그 분은 아들과 며느리 딸이 오면 연신 다이아몬드 반지를 매만지며 “에휴! 나 죽으면 이걸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하면서 푸념 섞인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참 허망하게 느껴졌습니다.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인 재물일까요? 그것을 줄 테니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구에 불과 했습니다.
미국의 애플창업자인 Steve Jobs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 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사업에서 성공의 최정점에 도달했었다.”라고 전제한 뒤 “지금 이 순간에, 병석에 누워 나의 지난 삶을 회상해보면,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주위의 갈채와 막대한 부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 빛을 잃었고 그 의미도 다 상실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고백한대로 헛된 인생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장 귀한 덕목인 사랑에 대한 추억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암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노파나 세계 제일의 거부였던 스티브 잡스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꼭 붙잡고 가야할 영원한 것은 무엇이어야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표현되시는 예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 외에 어떤 것도 영원한 것도 없고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영원한 가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 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허무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진작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의 목전(目前)에서 느껴지는 것 이것이 비극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루신 사랑에 의하여 우리는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의 정점(頂點)은 갈보리 십자가입니다.
저는 어느 날 지치고 마음이 괴로워 하나님 앞에 나와 짜증 섞인 어투로 불평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때까지 하나님은 저를 낮추시고 낮추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얻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초라한 저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쁘십니까?”그랬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님은 저를 갈보리 십자가로 인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가 낭자(狼藉)하게 온 얼굴을 적셔 있었습니다. 눈까지도 부어올라 실눈을 뜨시고 저를 보셨습니다. 저는 그 눈빛을 보고 크나큰 전율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그 눈빛에서 예수님 안에 담겨 있었던 활화산처럼 뿜어 나오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가느다란 눈으로 피범벅이 되어 제대로 뜨지 못하시면서 어떻게 저런 감동이 나올 수 있는지 저도 놀랄 뿐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거꾸러졌습니다. “악인이 여기 있습니다. 죄인의 괴수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입니다. 이제 저는 어쩌면 좋지요?”라는 절규가 저도 모르게 나왔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저를 덮고 있을 때 주님의 말씀이 제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내가 네 마음 안다. 나의 피로 언약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겠니?”하는 다정한 음성이었습니다. 아~ 어떻게 예수님은 십자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의 아버지에게 원망이 없으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자들에게 분노도 없으시며 그 앞에 나와 투정 부리는 어리석은 자의 고백을 들으시며 위로받아야 될 분이 위로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으면 나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도 감격도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유전되어 들어 온 것을 예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십자가의 산 제물 되셨기에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 의로운 자가 되었음을 나눈바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신 길을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될 수 있고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므로 완벽한 의인이 되셨습니다. 그 분을 따르면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됩니다.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될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이뤄집니다.
저는 올해로 결혼한 지 32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하나님께서 제게 베푸신 최대의 축복은 제 아내를 제게 보내신 것이라고 늘 고백하여 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저에게 제 아내는 충격적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랑이 내게 느껴지지 않아요”라는 표현입니다. 그 때 제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디서부터 문제인가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한 사건이 떠올려졌습니다. 농촌 목회를 할 때입니다. 12월의 꽤나 추운 겨울이었는데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제 아내가 “아~참! 연탄을 안 갈았네 당신이 가서 갈아줘요!”하는 겁니다. 얼른 아무소리하지 않고 갔다 오면 좋았는데 저는 순간적으로 신경질을 내며 “진작 얘기하지 에~이”하면서 말하고 연탄을 갈고 들어왔습니다. 추운 겨울에 밖으로 돌아서 연탄을 갈고 개선장군처럼 들어오면서 저는 기대를 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이제 어서 주무세요”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아무 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수고했다는 말하면 입이 덧나나?”그랬어요.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흥! 생색내긴 참내”하면서 이불속에서 돌아 누우며 내뱉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 다른 문에 있는 창의 유리를 주먹으로 치면서 화를 불같이 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상처가 제 오른 손목에 훈장처럼 남아 있습니다. 피가 흐르는 손목을 보여줘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내가 참 야속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사랑은 헌신입니다. 저는 그것을 놓치고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은 나를 내어주는 것인데 이것을 버리고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이것이 없으면서 입으로 사랑한다고요?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눈높이 맞추고 그 사람의 기분을 헤아려 주는 것인데 저는 그런 부분이 약했습니다.
그러다 이정모 장로님을 통하여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장로님은 아내에게나 딸에게나 거스른 행동과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딸이 28살이면 어린아이가 아닌데 어느 날 “아빠 손톱이 길어졌네!” 하고 다가오면 신문지를 깔아 놓고 손톱을 정성스럽게 깎아 줍니다. 발톱도 종의 모습을 지니시고 깎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딸아이가 한 밤 중에 육회가 먹고 싶다고 하면 용케 그 소리를 듣고 추운 겨울에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시고 육회를 파는 집을 찾아서 사가지고 와서 맛있게 먹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바로 종의 모습이 되는 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종의 모습으로 그 제자들을 섬기셨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스승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종의 모습을 가지셨던 것을 보여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예수님 안에 가득한 사랑의 표현으로 제자들의 발을 꼼꼼히 씻어 주시며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아 주십니다. 제자들의 발은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녔기에 깨끗한 발이 아닙니다.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발입니다. 그런 발을 만왕의 왕이시오 천지의 창조가 되시는 예수님이 종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의 마음으로 파도처럼 저며 오는 순간입니다.
저 역시 이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뜨레스 띠아스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식탁에 앉으면 사랑의 표현이 담긴 플랑카라는 쪽지가 놓여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나에게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담은 내용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말씀을 들으러 강당에 오면 제 의자에 사랑의 표현이 있습니다. 얼굴도 볼 수 없고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끝임 없는 관심어린 표현이 담긴 쪽지와 자그마한 선물들이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 쪽지는 유월절 집사로부터 보내지는 것인데 나느 그 분을 알지 못합니다. 왕 같은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마지막 저녁에는 예배를 마치고 세족식이 이뤄졌습니다. 그 때 제 앞에 대야에 물을 담아 수건을 두르고 오신 분이 유월절 집사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제 앞에 대야를 놓고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제 양말을 정성스럽게 벗기시더니 제 발을 닦아 주십니다. 60대의 연세였습니다. 제가 40대였으니 저 보다 한창 연배이신 분이 저는 의자에 앉아 있고 그 분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종의 모습으로 제 발을 닦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유월절 집사님은 오른팔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왼손으로 온 정성을 다해 제 발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두 발을 씻은 후 정성스럽게 수건으로 제 발을 닦아 주십니다. 저는 그 때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내가 무엇인데 이 분이 나를 위하여 자기를 낮추고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시는지 어쩔 줄 모르는 감격으로 껴안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을 누려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껴보지 않고야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자기의 실체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의 깊이를 이해치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일본의 엔도 슈사쿠라는 분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는<예수의 생애>이란 책에서 그지없이 유약한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핍박을 받으며 곤고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부활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내 안에 구체화 시키는 것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나 역시 종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남편의 권위와 자녀들에게 아비의 권위를 내려놓고 종의 자리에 내려앉는 연습을 했습니다. 아침에 제 아내는 처형네 조카가 허리를 다쳐 아이를 볼 수 없어 그 아이를 돌보러 아침 일찍 나갑니다. 아이들은 저녁 늦게까지 일들을 하고 정신없이 자면 아이들이 부스럭대는 소리에 깰까봐 조심스럽게 쌀을 씻고 밥을 합니다. 아이들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밥상을 차려 내놓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합니다. 나는 종이니까요! 그전 같았으면 생색을 냈을 것입니다. 이런 아빠가 어디 있냐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은 생색을 낼 수 없습니다. 집안 청소도 하고 아내가 저녁에 들어오면 어른 나가 “어서 와요! 수고했어요!”그럽니다. 쓰레기 버려달라고 하면 아무소리 없이 순종합니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 떡볶이 먹고 싶은데”그러면 얼른 나가서 사다가 접시에 담아 젓가락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차려줍니다. 과일도 깎아 주고 원두커피도 끓여주면서 나는 저들에 자원(自願)하는 종이 되었음을 속으로 고백하며 낮은 자리에 앉기를 기뻐했습니다.
제가 종의 자리에 머물며 주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심을 깨닫게 되고 언제나 내 편에 서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간절한 기도와 더불어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하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내가 행함으로 사랑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종을 이루는데 있어서 방해하는 요소를 물리쳐야하는데 이것은 상처로 파생되어지는 죄입니다.
17~18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하시면서 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죄가 상처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지하고는 상관없는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상처 말입니다.
저에게 상처는 4살 때 어머니로부터 떨어지는 경험입니다. 어린 나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박탈감이 제게는 있었습니다. 강원도 춘천에서 시발택시(어감이 좋지 않습니다만 실제로 있었던 택시입니다.)를 타고 강원도 홍천의 시골마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11월 말의 날씨가 을씨년스럽게 추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차 안에서 자고 있다가 다 왔다고 깨워서 일어나보니 밖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제 마음에는 두려움과 더불어 설움의 눈물이 왈칵 뒤엎어 왔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된다는 결심과 더불어 입을 꼭 다물고 참아 내었습니다. 고모의 손을 꼭 잡고 논둑길을 걸어가면서도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습니다. 내가 울면 고모가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움 때문 이였지요. 네 살짜리 꼬마가 버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엄마 떨어진 설움을 삼킨 것입니다.
그 때의 추억은 제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고 제 마음에는 누구에게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묘한 심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지요. 부부 싸움을 하다가도 내뱉는 말이 그러면 집을 나가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 말은 버림받지 않으려는 방어적인 기제였습니다. 이 상처는 가족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을 두려워 먼저 내가 돌아서 버린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제 심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되나하는 불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처를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그 상황에 들어가 나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표현한 것이지요. 그 때에 어머니의 눈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를 보내시고 뒤 돌아서셔서 자식을 보내놓고 하염없이 우셨던 어머니의 눈물 말입니다. 그 어머니의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열 손가락 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더냐? 자식 보내는 어미의 찢어지는 내 마음 네가 알기나 하느냐?”는 목소리가 제 마음에 와 닿으면서 저는 또 다시 목 놓아 운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제 마음에 와 닿으면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의 상처가 치료함 받았습니다.
상처는 영어 Scar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서 C라는 단어를 Confession 즉 고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즉 상처를 고백하면 Trans라는 변화의 T자로 바뀝니다. 상처가 변화되어 하늘의 별과 같이 된다는 뜻입니다. 헨리 나우엔 이라는 분은 <상처받은 치료자>라는 책에서 상처에서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방해하는 요소는 죄에 있습니다. 이런 죄의 배후에는 많은 부분들이 상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상처는 피해를 입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에 이로 인하여 파생된 감정의 변이(變異)에 대해서는 쉽게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상처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누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감각이 무디고 누구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상처가 그 안에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처를 고백하십시오! 그 상처로 괴로운 감정을 하나님께 그대로 내뱉으십시오! 상처는 십자가의 피로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해방 받으므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가 이 세상세서 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까지 가져갈 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그 분의 생명을 주시고 풍성케 하시고자 했던 열매가 바로 이 열매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까? 내가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본에 의하여 우리나라는 36년간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일본 경찰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힘을 받았었지요. 그런데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마자 한국인을 무섭게 다뤘던 경찰마저도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사탄은 승리했다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의로운 분으로 인정하여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마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전(逆轉)되어 불의한 자로 정죄함을 받게 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도 정죄하거나 핍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로부터 행방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마귀의 농락에서 벗어나 의의 열매를 맺고 의의 종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승리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승리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더 나가 풍성한 생명을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