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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6:1-27절) 나실인의 誓願 59 사람이 병(病)이 들면, 일단 힘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남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도 엄두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병(病)이 좀 낫게 되면 힘이 생겨서 일어나 앉기도 하고, 또 빨래를 한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결혼식에도 참가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건강하게 되면, 생(生)에 대한 의욕(意欲)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소에 침체되어 있거나, 죄에 빠져 있을 때는 죄를 끊는다거나 혹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은혜를 받게 되면, 나름대로 의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작은 약속(約束)을 하게 됩니다.
즉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를 버리기로 결심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해 어떤 봉사를 하기로 결심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쓸 것을 쓰지 않고, 헌금을 결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결심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결심을 축복하셔서 큰 구원이나, 큰 축복(祝福)이 나타나게 하실 때가 많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붙들려 간 다니엘은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작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벨론 왕이 주는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특히 전 세계를 정복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앞에서 다니엘의 작은 결심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의 그 작은 결심을 기뻐하셔서 결국 그의 소원대로 왕의 진미(珍味)를 먹지 않고도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셨고, 나중에는 느부갓네살의 꿈의 비밀을 푸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나실인 이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나실인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분리시키다.’라는 뜻을 가진‘나자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즉‘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나실인 이라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면 누구든지 나실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작은 한 가지 약속(約束)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나실인 이라고 해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실인도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約束)때문에 몇 가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이 몇 가지 말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은 곧 이 나실인 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운동 경기에는 의외(意外)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어떤 때는 아주 잘할 줄 알았던 주전 선수가 의외로 경기를 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후보 선수가 굉장히 경기를 잘 해서 경기를 뒤집어엎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나라 축구팀도 2002년 월드컵 경기를 치르면서 그 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해내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전에 유명했던 선수들은 별로 경기를 잘 하지 못했는데, 신인(新人)들이 너무나 잘해서 유명한 스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경기에서 우승을 하려면 이런 돌풍(突風)을 일으키는 의외(意外)의 선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영적(靈的)으로 두 가지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기둥은 레위인이고, 그 중에서도 제자장입니다. 이들은 불과 같은 하나님을 자신의 몸 전체를 통해서 막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마치 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바다의 등대는 밤에 항해하는 모든 배들에게 빛을 비추어줍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배(船)가 순탄하게 가려고 하면, 등대만으로는 안 되고 바람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곧 이 나실인 이라고 하는 비(非)레위인 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언제 누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이 나실인들이 갑자기 능력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어서 사람들을 모으고, 전쟁에 앞장서서 적(敵)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했던 것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英雄)들은 모두 다 이 나실인 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나실인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와 같습니다. 목회자는 어디에 죄의 암초가 있고, 어디에 사탄의 함정이 있는지를 밝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평소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평신도들 중에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갑자기 성령이 임하면서 삼손이 되기도 하고, 기드온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이 늘 침체되어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냉소적 신앙에 빠진 자들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고 나름대로 힘을 내고, 작은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Ⅰ.나실인의 서원 6:1-2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실인 제도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나실인’이라는 원어의 뜻은‘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인데, 사실 레위인들도 구별된 사람들이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냥 고유명사처럼‘나실인’이라고 쓴 것 같습니다. 나실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한 평생을 나실인 으로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무엘 같은 경우는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께‘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나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평생을 나실인 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또 삼손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서 부모에게‘이 아이를 평생 나실인 으로 바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삼손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실인이 되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실인은 뭐하는 사람이며, 도대체 어떤 경우에 나실인의 서원을 하게 되는 것일까? 궁금할 것입니다. 나실인이 되는 경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입니다. 사람이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치게 되면, 굉장히 절망하게 되고 낙심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죽을병에 걸리게 되었다든지, 혹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다든지, 혹은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든지 하면, 사람은 너무나도 많은 고통을 받게 되고, 절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모든 어려움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즉 죽을병에 걸렸다가 나았을 때, 재산을 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도로 찾게 되었을 때, 혹은 죽은 줄 알았던 아이를 도로 찾게 될 때,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단 이뿐 아니라, 나름대로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힘들어 하던, 문제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다 해결 받고, 응답받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많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한 마디의 말씀으로 다 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소자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혹은‘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한 마디의 말씀이면, 모든 병(病)이 다 떠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간사한가 하면, 막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는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새 이런 감사한 마음은 다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즉 다시 일상적인 문제로 돌아오면, 다른 사람들과 옳고 그른 것을 따지면서 사소한 것에 속상해 하면서 감사와 감격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역약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주신 이 감사와 감격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즉‘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결코 쉽게 잊어버리지 않겠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감사하는 마음과 이 감격스러운 마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지키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나실인의 서원을 하면 됩니다. 나실인 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힘을 얻어서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약속(約束)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동안 술을 끊지 못했는데, 술을 끊겠습니다. 라고 하든지, 혹은 그동안 새벽 기도나 금요일 기도를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몇 달 동안 혹은 일 년 이상 빠지지 않고 나오겠다.’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다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의 서원(誓願)을 하게 하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아무리 결심을 해도 속으로 한 것은 몇 일은 고사하고, 몇 시간도 가지 못해서 모두 다 깨어지고 맙니다(작심삼일) 즉‘오늘 부터는 내가 꼭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고 일 년 내내 기도하겠다.’고 결심했으면, 하루도 가기 전에‘오늘은 몸이 좀 피곤하니까 내일부터 하겠다.’는 식으로 마음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술을 끊기로 결심했더라도 친구가 부르면,‘오늘까지만 술을 마시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면서 결심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타협을 해버리면, 결심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 언 기자는 잠28:26절)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장 앞에서 나실인의 서원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실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恩惠)를 그냥 은혜 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스스로 결심을 하고, 약속(約束)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의 침체되었던 영혼도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병들어 누워 있으면, 누가 찾아와도 일어나 앉지도 못합니다. 즉 누워서 사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 같은 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거저 그냥 누워서 목숨만 지탱할 뿐입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고, 힘이 생기면, 자리에서 일어나 앉기도 하고, 어느 때는 빨래를 하기도 하고, 방을 닦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주기도 합니다.
나실인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잘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성전 봉사라든지, 혹은 가난한 자나, 어려운 자들이나, 병든 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 마음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내가 먼저 치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이 한번 은혜를 받고 나면, 그동안 얼마나 내가 앉은뱅이 신앙이었고, 얼마나 내 자신만 생각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 받고 난 후에는 자신의 삶을 남을 위해서 쓰고 싶고, 주님을 위해서 시간과 정력을 드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곧 앉은뱅이 신앙에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냉소적(冷笑的)인 신앙에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실인 중에 하나님은 성령을 주셔서 큰일을 행하게 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사사기에 나오는 영웅(英雄)들인 것입니다. 즉 입다 라든지, 웃니엘 이라든지, 삼손이나, 기드온 같은 사람들이 모두 다 여기에 속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레위인이 아닌,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받고, 주저앉은 신앙에서 일어선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사간과 정력을 주님을 위해서 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삼손은 갑자기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서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 일천 명을 때려죽이는 일을 했습니다(삿15:15절 참조)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恩惠)를 받고, 큰 축복(祝福)을 받아도 그것을 잊어버리는 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주저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잊지 않고, 끝까지 지키며, 이 작은 은혜(恩惠)로 인하여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곧 나실인인 것입니다.
Ⅱ.나실인의 의무 보통 이방종교 같은 경우에는 사람을 신(神)에게 바친다고 할 때, 아주 처참하게 바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바친다든지, 혹은 처녀를 평생 동안 신전(神殿)에서 여사제로 있게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실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 외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직업도 가질 수 있고, 결혼생활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는 지켜야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3절)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나실인의 가장 중요한 규칙이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나, 소주나, 술이란 것은 일체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엡5: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는 성경에서 왜 술 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비교하시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술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령도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술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기분만 변한 것이지, 실제로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변한 것처럼 속이는 것입니다. 즉 술은 기분이 나쁜데도 좋은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또 비겁한 사람을 용감한 사람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나 싸우기는커녕 몸도 가누지 못하게 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기분을 자꾸만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알콜 중독(中毒)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술 취하는 것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는데, 가장 치명적인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비단 술뿐만이 아니라, 중독성이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합니다. 즉 담배도 중독성이 있습니다.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죄(罪)의 특징이 한 순간에 죄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죄에 중독이 되게 되는데, 나중에는 이것을 자기 힘으로는 끊을 수 없어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8:8절)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팔을 자르고 눈을 뽑는 과감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죄는 자를 수가 없습니다. 특히 포도즙이나, 생 포도나, 건포도까지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나, 음료는 포도였고,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가장 맛있는 과일이나, 음료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왜냐면 언제 성령이 그에게 임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은 언제든지 성령의 충만이 임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의 재미있는 일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즉 골프가 너무 재미있고, 세상 음악이나, 영화가 너무 재미가 있으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실인들은 세상의 가장 재미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도대체 너희들은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사느냐? 그때 우리는‘성령의 재미로 산다.’고 대답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포도주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 영화나, 드라마나, 세상의 스포츠가 주는 재미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극상품의 은혜요, 축복(祝福)인 것입니다. 두 번째 나실인의 규칙은 머리를 자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 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나실인은 나실인 기간 동안에는 머리를 자를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나실인인 경우는 한 평생 머리를 자르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평생 나실인 인데도 들릴라 에게 속아서 머리가 밀리는 바람에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모두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의 머리를 자르지 못하게 하셨을까? 옛날에는 머리가 주인을 나타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인들이 처녀로 있다가 결혼을 하면, 머리에 비녀를 질렀습니다. 이것은 그 여자에게는 주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반지를 꼈는지, 끼지 않았는지를 유심히 봅니다. 만약 남자나, 여자가 반지를 끼지 않고 있으면, 이혼을 했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독신(獨身)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들이 결혼을 해도 귀찮아서 반지를 잘 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지, 반지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반지를 끼지 않으면, 아주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주의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머리를 기르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인(主人)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기르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표시였습니다. 여성들은 남편이나, 남자 친구에 대한 감정을 머리 스타일로 표시를 할 때가 있습니다. 즉 머리를 잘 기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숏컷 으로 자르고 나타나면,‘이제부터 너는 별 볼일 없다’는 표시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실인들은 머리를 길게 기름으로 자신의 모든 생각이나, 감정을 하나님께 맞추게 됩니다. 즉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인이나, 아이들보다도 하나님의 일이 먼저입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이 양해를 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믿고 은혜를 받으면,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요청을 받아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더 우선적인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즉 어떤 집에서는 부모가 뭐라고 말을 해도 ‘자녀는 성경공부가 더 중요다’고 하면서 밥도 먹지 않고 뛰어간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의 일을 최우선적으로 하게 됩니다. 처녀들의 경우도 애인이 없을 때는 집안일에 여러 가지 신경도 쓰고, 도와주기도 하지만, 일단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이제 집안일은 끝장난 것입니다. 오직 남자친구와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음악회를 가고, 영화 구경하러 가고, 싸돌아다니는데 전적으로 헌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데이트 중인 것입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말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면 지금 하나님과 열애(熱愛)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열정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위기도 이기고, 죄도 이기고, 유혹(誘惑)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讀者)님들 모두 하나님과 열애(熱愛)에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즉 누군가가 물으면‘나는 지금 하나님과 연애 중’이라고 대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사실 외모 같은 것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즉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머리를 깎을 때가 되었는지,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세 번째 나실인의 규칙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6-7절)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의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靈魂)은 떠나고, 몸만 남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시체(屍體)는 썩기 때문에 빨리 매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굉장히 신성(神聖)하게 생각을 했고, 특히 이방 종교에서는 죽은 자와 가까워지는 것이 더 영생(永生)의 세계에 가깝다는 식으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인도에 갔다 오신 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인도에서는 시체도 데리고 버스를 타는데, 똑같이 차비를 낸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시체도 사람이기 때문에 차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시체(屍體)에는 더 이상 남은 것은 없기 때문에 신성(神聖)시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즉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죽은 자에 대해서 영생(永生)을 비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또한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도 하지 않습니다. 고전10:20절)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지만, 돌아가시면, 그 역시 한줌의 흙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는 나실인이 부패한 시체(屍體)와 가까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금지시키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실인들에게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부패(腐敗)하기 쉬우며, 일단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떠나면, 인간의 모든 일은 급격하게 부패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인간관계를 아주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만날 때는 모든 것이 신선하고, 아름답지만, 일단 은혜(恩惠)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급격하게 부패하고 썩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부패(腐敗)하는 이것입니다. 일단 부패하는 모든 것들은 멀리해야합니다. 그래서 나실인들은 세상적인 모임이나, 만남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왜냐면 거기서 나오는 대화들이 모두 다 썩은 송장 냄새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부모나, 형제가 죽었을 때도 장사하는데를 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를 장사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마8:22절)..죽은 자들이 그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는 가장 무정한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일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쓸데없는 격식(格式)이나, 쓸데없는 체면(體面)에 너무나 정력을 많이 낭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 죽은 것입니다. 힘을 그런 쓸데없는데 낭비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영혼(靈魂)을 살리는데, 정력을 다 쏟아야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Ⅲ.나실인의 언약을 어겼을 때 우리 인간 세상에는 신선한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나실인의 서원(誓願)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본의든, 타의든, 이 서원(誓願)을 깨트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어물쩍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서원(誓願)을 깨트린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9-11절)누가 갑자기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면 그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니 곧 일곱째 날에 밀 것이며, 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 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 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말미암아 얻은 죄를 속하고 또 그는 그 날에 그의 머리를 성결하게 할 것이며”
즉 나실인이 어디에 앉아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죽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 나실인 서원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되고, 큰 것은 아니지만, 작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쳐서 속죄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는 제물로는 가장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적지만 하나님 앞에서 서원이 깨어진 것에 대한 속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머리를 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삼손이 들릴라와 데이트를 하면서 술을 마셨을까? 마시지 않았을까? 성경에는 삼손이 술을 마셨다거나, 마시지 않았다는 말은 일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보면 술을 마셨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머리를 밀고 다시 시작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머리가 밀린 삼손을 들릴라가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어물쩍 넘어갔기 때문에 들릴라에게 속아서 머리털이 밀리고, 눈알까지 뽑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을 자백하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1서 1:9절 참조)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祝福)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 년 된 숫양을 가져다가 속건 제물로 드릴지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한 때에 그의 몸을 더럽혔은즉 지나간 기간은 무효니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꾹 참고 기다렸는데, 그 모든 것이 무효가 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하면, 너무나도 억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군인이 군대에서 의무복무를 다 했는데, 무엇인가 잘못되어 처음부터 다시 군대생활을 해야 한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더 오래 봉사하거나, 구별된다고 해서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너무나 오래 기다리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원점(原點)에서 시작하신 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기다려도 결코 우리는 억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이 정상인으로 돌아갈 때도 그냥 기간만 다 되었다고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 앞에 정해진 제사와 예물을 다 드리고, 일반 생활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13절 이하에 기록된 것을 보면 나실인이 되는 것보다는 나실인 해제(解除)되는 것이 더욱 복잡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핸드폰 계약하는 것보다 해지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더라고 하는데 나실인도 그렇느냐? 고 묻습니다. 13-15절)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그는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왜 이렇게 나실인의 의무 기간이 끝나서 해제(解除)하는 것이 이렇게 복잡한 것일까? 그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다음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18-20절)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의 머리 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숫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받들어올린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나실인은 자기가 서원한 기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실인의 축복(祝福)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처음에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대로 그 감동과 축복(祝福)은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실인의 의무는 하나님께 반납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머리 털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밀어서 번제물을 태우는 불에 넣고, 같이 태웁니다. 그리고 요제라는 것이 나오고, 받들어올린 넓적다리라는 것이 나오는데, 요제(搖祭)는 흔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제(擧祭)는 들었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바쳤다가 다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나의 모든 정상적인 삶을 받아서 이제는 포도주도 마시고 머리도 자르며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은혜는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론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祝福)하게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가장 유명한 축복(祝福)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 축복(祝福)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나실인의 헌신과 봉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祝福)을 하시는 것입니다. 22-26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률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우선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祝福)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그 첫째 복(福)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번째 복(福)이 모든 위기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도둑이나, 강도들도 많았고, 기근(飢饉)이나, 질병(疾病)이 닥쳐도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축복(祝福)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됩니다.
둘째 복(福)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빛을 비추시는 복(福)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태양빛에 비유를 하고 계십니다. 즉 밤은 위험합니다. 그리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낮은 위험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生命)그 자체입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 모든 복(福)이 다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 존귀도 있고, 부귀도 있고, 위기를 해쳐나갈 지혜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계속 성경에서 캐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복(福)은 평강(平康)주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 평강(平康)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고통이나. 전쟁이 없는 소극적인 평강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갈등(葛藤)과 도전(挑戰)을 믿음으로 이긴 평강(平康)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평강(平康)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심령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축복(祝福)의 황금기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으면, 계속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축복(祝福)이 공급되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교만해서 말씀을 멀리하거나, 숨어서 죄짓지 않으면, 축복(祝福)이 차서 넘치게 됩니다. 결국 모든 성도들이 축복(祝福)을 받고, 모든 기도가 응답되며, 병자들이 없어지고, 똑똑하고, 훌륭한 자녀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祝福)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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