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신문 인터뷰]
개발로 인해 사라지는 역사를 찾아
-조진석 (파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곳이라는 한마디로 고향을 설명하긴 어렵다. 나를 존재하게 한 근본이기에 고향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고 아련하게 그리운 것이 아닐까 싶다. ‘혜음령 도사’라고 불리는 조진석 씨는 혜음령 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삶의 터전이면서 언젠가는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될 것이며, 내가 가꿔놓은 터전을 자손들이 물려받아 이어나갈 것이기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체가 문화이고 역사라고 조진석 씨는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부터 행동 하나하나 매사에 주인 정신으로 신중하게 가꾸어 나가야 할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성세대의 역할이 중요한데, 생생한 파주 역사 창조를 위해 미력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고 베풀며 실천하는 ‘실천형 파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조진석 씨를 만나 파주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혜음령 도사’라고 알려져 있는데 ‘도’를 닦으시는 건 아니죠?
네. 그건 아닙니다. 혜음령 주변 유적이나 다른 궁금한 것을 묻는 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이곳이 고향이고 종중 일을 보고 있어서 역사와 관련된 것도 조금 알고 있다 보니 안내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감사하다는 인사로 그렇게 불러주시는 겁니다.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하지요.
저는 임천 조씨 천혁의 28세손입니다. 시조는 송나라 태조의 증손자로 979년 국난을 피해 바다를 건너 부여 임천에 터를 잡았습니다. 대전 구봉산 자락 가수원동, 서울 북악산 밑 청운동, 인천광역시 도림동을 거쳐 혜음령 아래에 살게 된 것은 1790년경 저의 7대조부터입니다. 12세 조익, 14세 조원, 15세 조희일, 16세 조석형, 17세 조망·조경창, 18세 조정만, 22세 조기복 할아버지가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분들인데 혜음령 주변에 묘가 있습니다.
- 조기복 묘표가 추사 김정희 친필로 판명되어 파주시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요?
네.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님들의 문화유적에 대한 집요한 사랑과 관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냥 하나의 비석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이분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김정희 친필로 파주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추사 김정희 친필 조기복 묘표는 2가지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추사 김정희의 예서체 친필로서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한 묘표라는 것이고, 둘째는 제자와 척제(성이 다른 일가 가운데 아우뻘이 되는 사람)의 사랑이 있는 유산이라는 사실입니다.
추사가 비문을 써 주게 된 동기는 추사의 제자 조면호의 청에 의한 것입니다. 조면호는 추사의 애제자였고, 조면호는 조기복의 형님 아들이었으니 조카입니다. 조기복은 추사의 7촌 당고모(추사 아버지 김노경의 6촌 누이)의 아들이어서 조기복 입장에서는 외가의 아우뻘이고, 추사 입장에서는 고모님 댁의 형 관계였습니다. 추사가 모함으로 경황이 없었음에도 반듯한 예서체 친필로 묘표를 써준 것을 보면 제자와 척제 간의 사랑이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8년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 조원을 찾아 나선 향토사 위원들에게 묘를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비석이 있음을 알리고 이동륜·성지오·오순희 위원님을 묘역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이후 과천문화원에 알려지게 되고 관심 있는 사학자들의 방문 및 탁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추사 김정희 기념관이 있는 과천문화원에서는 비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탁본을 하면서, 묘역에는 유사 비석을 만들어 세우고 원 비석은 문화원에서 영구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이후 파주문화원 산하 향토문화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차문성 소장께서 입증자료를 찾았고, 2019년 1월 우관제 파주문화원장님과 관계자들이 방문하여 현장을 확인하였습니다.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유산으로 지정의뢰 한 결과 ‘파주시향토유적 제34호’로 지정(2019년 8월 30일)되었습니다.
- 파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역 연구 성과와 아쉬운 점 등을 말씀해주세요
2008년 여름에 조원의 묘를 안내해 드린 이후 이분들의 권유로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연구소에서 파주에 있던 누정(樓亭) 위치 조사를 했는데, 황보인 선생의 은행정(銀杏亭) 터를 찾아 위치를 비정(알려지지 않거나 확실하지 않은 대상에 대하여 다른 유사한 것과 비교하여 그 성질을 정함) 했습니다. 선비들이 자연경관을 즐기고 휴식을 취하며 때로는 토론을 벌이고 시문을 즐기고 풍류와 친교를 나누며 학문을 연마한 장소가 바로 누정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며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찾았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문산천 인근에 자리한 만장산 자락과 창만리 벌판을 오가며 눈에 들어온 고령산과 금병산의 모습에 감탄하며 조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의주대로 파주 구간 조사와 동파역의 위치 비정, 감악산에서 있었던 소사 연구, 조선 중기 여류시인 옥봉 고찰, 용미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번으로 보는 의주 대로의 위치 비정, 민통선 문화유적 보고 등을 연구하였습니다. 찾아다닌 만큼 더 궁금해지고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그래서 더 활발히 연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 활동에서 얻어진 결과물들이 잊혀진 역사가 아닌 기억되는 역사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옛길 조사 중 선유리의 변화와 선유산업단지의 출현으로 옛길의 존재 자체가 없어졌듯 지역발전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역사의 숨결이 사라져 가는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계획 수립의 전제는 우리 고장의 어디든 역사적 측면에서 한 번쯤은 재고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어디든 옛 분들이 존재한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지역 연구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는지요.
딱히 어려움이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백학산 석각을 찾으러 갔을 때입니다. 자료에 나타난 위치를 지도를 들고 찾던 중 자동차를 몰고 간 곳이 막다른 농가 주택의 허술한 앞마당이었습니다. 주인이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며 못마땅한 눈치를 주었습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찾고자 하는 것을 소상히 이야기하니까,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지뢰밭 푯말에 두려움을 느끼며 백학산 계곡에서 석각을 찾은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 번은 작대기를 들고 묘지 주인이 쫓아 온 적도 있습니다. 2022년 여름 새벽녘, 비지정 문화재 조사차 묘역 금석문을 조사 촬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소리 지르며 두 사람이 나타나 노발대발합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사연을 이야기하자 넙죽 절하고 “잘 부탁한다.”라며 인사하고 사라진 일도 있었답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일까요?
불혹을 넘긴 나이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부모님을 모시고 산 일입니다. 한동안 떨어져 살던 가족이 힘을 모아 편찮은 부모님을 봉양한 것이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종중 일도 보게 되었고 종중재산을 다시 찾은 일은 제 개인적으로나 종중 차원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 숙원이던 종중 재실 신축을 완공했고, 묘역을 정비하고 종중의 수입을 창출할 수 있게 된 것도 보람입니다. 또 친척 아저씨를 통해 오신 손님을 안내하면서 400여 년 전 안타깝게 헤어진 조원의 소실 옥봉의 묘단을 만들고 신주에 모셔 해마다 사랑했던 낭군님과 함께 제사를 모시게 된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덜 가졌음에 만족하며 부모님을 위해 수고하는 아내가 있고, 정진하며 자라 나는 아이들 꿈나무가 있는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4대가 한 지붕 아래서 지내며 사랑이 있고 웃음이 있고 아이들의 노래가 들리는 곳에 가족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즐겁게 웃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제가 살고있는 이곳은 오래전부터 서울시립묘지가 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면서 서울시가 이용하는 좀 더 생산적인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고자 하면 의견을 모아 한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기회가 있으면 지역민들과 함께 고민하며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일조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분단국의 최접경 지역 파주시민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조진석 씨는 주변에서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는 것이 많기도 하지만, 성품 자체가 너그럽고 수용을 잘하는 성격이라 바쁜 중에도 짬을 내어 봉사한다. 파주 역사를 초등학생들이 알기 쉽게 동화로 만드는 일에도 동참해 벌써 세 권에 다섯 편의 동화를 쓰기도 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좌우명이면서 생활신조라고 한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사 정성을 다한다는 조진석 씨의 활약이 용미리의 변화뿐만 아니라 파주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터뷰 작가 김선희 汀彬
kimsunny020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