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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湖 李瀷의 經世사상에 관한 一考
1. 머리말
2.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상황
3. 錢荒에 대한 현실인식
4. 중농주의적 경세관
5. 맺음말
1. 머리말
18세기 서울에 가까운 廣州지역(지금의 安山)에서 살았던 星湖 李瀷(1681-1763)의 학문은 實用과 實證을 중시하는 經世致用의 학풍을 이루었다. 그는 평생 동안 仕宦의 길에 나가지 않은 채 近畿地域에서 삶을 영위하며 당시의 사회․경제에 대해 깊은 통찰과 사색을 쌓았다. 특히 그는 重農主義的 입장에서 토지경제를 중시하고, 자신이 처한 농촌사회의 民生을 염두에 두고 ‘經世’의 본질을 고찰하였다. 본 小考는 성호가 농촌사회의 위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하려 하였는지를 고찰한다. 조선시대의 화폐경제에 관한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元裕漢의 일련의 연구 성과가 있다. 元裕漢은 성호의 화폐관을 평가하길, ‘근대를 향한 봉건 이조사회의 자체지향을 무시’하고 ‘당시의 정책담당자들에 비해 복고적이고 퇴영적 성격’을 띤 ‘부정적 화폐론’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 입각하여 조망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실학연구의 한 방법론으로 많은 연구업적을 축적하여 왔으며, 그 의의는 인정하여 마지않는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 내재적 발전론의 요건이 되고 있는 점은 서구적 근대를 향한 지향이다. 따라서 그 틀에 합치하면 ‘근대적’ 또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그 틀에 벗어나는 경우는 ‘봉건적’이며, 시대에 역행한 ‘부정적’이라고 평가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재고해 볼 것은 ‘발전론적 관점’과, 그 요건이 되는 ‘근대성’의 성격이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적 근대 산업사회에는 여러 가지 부정적 측면이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발전론 = 근대 = 긍정적 평가’의 등식은 이제 성립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근대 산업사회의 병폐를 어떻게 하면 축소하고 해소할 것인가를 찾는 것이다. 이에 소고에서는 성호의 경세사상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처한 현대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여, 현대를 고민하는 자료의 하나가 되기를 기대한다.
2.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상황
조선시대는 농업을 위주로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는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통일신라시대 이래 지속된 봉건적 경제제도였던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 점유관계가 폐기되고, 토지 소유권에 기초한 농업생산관계가 점차 부상하게 된다. 즉 국가 권력에 의한 土地分給制에서 토지사유제의 기초 위에 전개하는 地主佃戶制로 전환하여갔다. 하지만 조선전기의 지주는 자신의 토지를 차경하는 전호를 경제적 지배 관계에 그치지 않고, 인격적이며 신분적인 지배를 하여 농노와 비슷한 수준으로 예속하였다. 지주는 전호를 죽지 않을 정도의 상태에서 예속․보호하였으며, 전호는 토지에 부속된 하나의 자연물처럼 토지 그 자체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전호권이 성장하면서, 전호들은 경제 외적 관계를 해소하고 이익 분배의 합리성을 주장하여 갔다. 이에 지주와 농민은 경제적 관계일 뿐, 인격적․신분적인 지배․예속의 관계에서 해소되었다.
한편, 농법의 개량을 통해 재산을 모은 일부 농민도 토지를 구입하여 지주로 성장해 갔으나, 토지 소유가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대다수의 농민은 몰락하여 토지를 잃고 마침내는 임노동자로 전락해 갔다. 즉, 조선 후기의 농촌 사회는 궁방, 아문, 양반, 토호, 부농 등 일부 계층이 대토지를 소유하였고, 대다수의 농민은 無田農民으로 전락하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호는 토지 소유상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 겸병을 제한하여 토지를 가지지 못한 농민들에게도 토지가 돌아갈 수 있게 하려는 토지 재분배론으로서 限田論을 제의하였다. 성호는 대토지 소유자들이 모두 세력가이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무시하고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였으므로, 우선 田地의 소유를 제한하여 점진적 균형을 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개혁안은 뒤에 茶山의 여전론에 의해 비판받게 되었다.
한편, 상품 유통 체계에 있어서도 조선후기는 변화와 발전의 시기였다. 조선 사회는 본래 자급자족적 농업 경제를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상공업 활동은 여러모로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상업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官營手工業 체제에서 자유상업과 私營手工業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윽고 宣祖朝 말엽에는 戰亂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궁핍해진 국가경제의 재건과, 전쟁준비를 위한 군사비 조달 목적으로 銅錢을 鑄造하여 法貨로 유통시키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銅錢은 17세기 40년대부터 일찍이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開城을 중심으로 한 江華․延白․喬桐 인근지방에서 사용하였다. 50년대에는 중국과의 국제무역이 활발하였던 義州․平壤․安州등 平安道 일부 지방에서도 통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7세기 70년대, 정확히 말하면 1678년(肅宗 4)부터는 銅錢(常平通寶)이 법화로 채택되어, 그 유통영역이 국내 각지방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화폐가치에 대한 인식도 점차 심화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두 가지 화폐관, 즉 동전유통에 대한 支持와 批判의 입장이 있었다. 대표적 주전론자는 金堉(1580 - 1658)이 있다. 그는 17세기 전반기에 중앙과 지방의 관료로서 政界와 농촌실정을 체험적으로 인식 파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선진문물을 견문하였다. 이러한 체험에서 그는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해 銅錢의 유통과 보급을 적극 주장하였던 것이다. 실학자 중에서는 磻溪 柳馨遠(1622 - 1673)이 적극적으로 화폐사용을 강조하였다. 그는 화폐를 토지와 함께 국가경제의 근본으로 삼고, ‘天下의 大本’인 토지 다음으로 화폐유통을 중요시하였다. 또 ‘錢貨는 나라의 財用을 돕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所以이다’고 하며, 국가재정과 국민의 경제생활면에서 화폐통용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磻溪의 화폐론은, 때마침 경제 재건의 목적으로 국가가 화폐유통을 장려하던 시기에 맞물려있었다.
한참 뒤에 燕岩 朴趾源(1737 - 1805)8)과 茶山 丁若鏞(1762 - 1836)도 公私경제의 유통 부분에서 화폐의 기능 내지 그 가치를 중요시하였다. 특히 燕岩은 ‘무릇 交易(貿易)은 銅錢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동전의 유통 자체를 전제로 한 국가의 화폐정책 내지는 화폐제도의 개혁을 모색하였을 정도이다. 그러나 화폐경제가 보급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노정되고, 錢荒으로 화폐유통에 부정적 여론이 비등하자 동전 유통을 금지하자는 의견이 주장되었다. 성호도 원칙적으로는 상품유통의 매개체로서의 동전이 발휘하는 기능 내지 그 가치는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밭 갈아먹고 길쌈해서 입고 사는 자급자족적 농촌사회에서 단순히 가볍고 편하다는 이유로 화폐를 유통하는 것은 害가 될 뿐 이라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성호는 동전유통의 금지를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같은 주장을 하던 인물로는 농촌에 살던 農圃子 鄭尙驥(1678 - 1752)가 있다. 이 시기의 星湖와 農圃子의 화폐론은 錢荒의 극복에 포커스가 맞추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화폐가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모두 점진적으로 동전을 금지해 갈 것을 주장하였고, 개혁방안으로 大錢을 주조 유통시켜 화폐의 輕便化기능을 둔화시킬 것과, 민간인에 의한 都給鑄造論을 제시하여 화폐주조에 드는 국가의 재정적 부담을 줄이려고 하였다. 이는 화폐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中央 또는 국가의 특권에 대한 이의 제기라고 할 수 있다.
3. 錢荒에 대한 현실인식
米布라는 실질화폐로 유통질서를 유지하던 조선에 있어서, 경편한 명목화폐의 사용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상인들은 이 변화에 잘 적응하여 큰 이익을 보았지만, 농민의 대다수는 손해를 입고 심한 경우에는 부채를 짊어지고 삶의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점을 성호는 주목하고 농촌경제에 있어서 화폐제의 폐해를 파헤쳤다. 주지하는 바처럼, 화폐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 교환의 수단, 가치의 척도, 保藏의 수단이 그것이다. 교환수단은 화폐의 본래적인 기능이고, 가치척도는 화폐의 부가적 기능으로 물품교환을 원활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화폐 폐지론을 주창하였던 성호이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능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입장이었다. 문제는 세 번째 保藏의 기능이다. 돈이 갖고 있는 이 보장의 기능 때문에 사람들은 교환 수단에 지나지 않는 돈을 상품보다도 중시하게 되었다. 상품 대신에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싶어지고, 그 욕망에 편승하여 돈을 더 만들어 내면, 돈 가치는 그 만큼 떨어지게 된다. 또 돈은 시간이 경과하여도 가치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이자가 붙는 유일한 물건이다. 화폐가 갖는 保藏의 기능으로 피해를 받는 것은 상품을 생산하는 농민층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성호는 18세기 조선사회의 가장 큰 경제 문제였던 ‘錢荒’의 원인으로 고리대금을 지적한다.
토색질을 금지하는 것은 土豪를 억제하는 것 만한 것이 없고, 토호의 作奸은 高利貸金보다 더한 것은 없다. 농사의 이익은 두 배에 지나지 않으나 간혹 풍흉의 차이가 있고, 상업은 이익이 비록 많으나 본전을 밑지는 때도 가끔 있으니, 고리대금을 경영하여 수고롭지 않고 편히 앉아서 후한 이익을 취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봄에 돈을 빌어도 많은 곡식을 살 수 없는데, 가을에 이자를 갚을 때에는 穀價가 헐하므로, 많은 곡식이 지출되며 원리금이 점점 자라나 마침내 집을 팔고 전답을 팔아 재산이 탕진되고 만다. 그러므로 백성이 파산되는 것은 거의 고리대금 때문이니 이는 모두 돈의 폐단인 것이다.
고리대금은 화폐의 保藏기능에 따른 부산물이다. 화폐가 교환의 수단으로 원활하게 순환한다면, 농민이 봄에 빌린 곡식 값과, 가을에 갚을 곡식 값은 일정하게 된다. 그러나 화폐의 보장 기능 때문에 봄에 빌린 원가는 가을이 되면 이자가 붙어 곡식으로 환산하면 훨씬 많은 양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고, 더욱이 銅錢의 품귀현상으로 穀價가 떨어져 결국은 원가에 비하여 두배, 세배의 손해를 당하게 된다. 생산자인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화폐의 보장기능은 ‘牟利’ ‘罔利’로 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여기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錢神의 개념과, 돈에는 특별한 권한이 있다는 錢權의 개념이 자리 잡게 된다. 錢荒은 이러한 상황에서 생겨났다. 몸속의 혈액처럼 유통과 순환이 생명인 화폐가 고리대금업자의 ‘牟利’ ‘罔利’의 계책으로 私庫에서 잠자는 동안, 사회는 유통에 필요한 동전이 없어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화폐의 본래 기능인 유통이 원활하다면, 화폐는 굳이 동전의 실질가치 만큼 동이나 은으로 만들지 않고, 종이를 이용한 지폐를 사용하여도 신용도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보장의 기능의 역효과로 한번 私庫로 들어가면 나올 줄 모르는 상황이 되면, 유통되는 돈의 양은 줄어들기 때문에 사회는 전황을 겪고 상품가치는 하락하게 된다.
돈이 가지고 있는 속성 가운데 시간이 흘러도 가치가 하락하지 않고, 오히려 이자라는 것에 의해 자체증식을 하는 것을 주목한 것이다. 사람들이 米布를 돈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돈은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단순한 교환을 위한 수단에서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 성호가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 있다. 조선의 경우, 얌전한 서생이 글공부를 팽개치고 돈놀이를 하여 갑자기 천금의 재산을 모아 고리대금업자로 전락하는가 하면, 부인이나 아이들도 입만 열면 利를 말하는 지경이라고 설명하면서, 남녀노소가 利를 추구하는 당시의 세태를, 마을 아이들은 머리털도 아직 마르지 않고 겨우 손발을 움직일 만하면, 문득 營利를 꾀하고, 귀한 집 총각도 몸은 높은 당에 있으면서 저자 시세의 낮고 높음을 가늠하여 모르는 자는 기롱을 받는다. 까닭에 咫尺인 곳과 한 줌 사이에도 利慾을 다투는 장소 아닌 곳이 없으니, 풍속이 드디어 크게 변해버렸다. 라고 한다. 양반가의 자제조차도 이욕다툼의 아수라장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영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성호에게는 위계질서 및 사회구조를 변질시키는 요인으로 받아들여졌다. 화폐의 경편함은 검소와 절약의 생활대신에 사치와 낭비의 생활을 조장하고, 돈은 특별한 물건이라는 의식이 확산되어, 농민들은 모두 그 錢神에 휘말려 본업인 농사를 버리고 상업으로 바꾸는 자가 늘어난다고도 말한다. 이것은 성호가 화폐를 자신이 처해있는 조선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심각한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자료이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이다. 각자 士農工商의 職分에 따라 생업에 종사하고, 그 위에 질서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營利만을 추구하여 職分을 무시하게 되면 국가의 기본 체제가 불안하게 된다. 이 점이 바로 성호가 화폐제를 허용하기 어려웠던 사정이었을 것이다. 성호는 장사를 하는 자가 지금보다 많은 적이 없었는데, 이유는 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17) 상인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농민의 몰락을 의미한다. 농민은 앞 절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성호의 경세사상에 있어서 왕조사회를 유지시키는 基底이다. 성호는 四民이 정해진 직분에 충실하여 참된 재화를 생산하는 것을 이상적 사회상으로 상정하였다.
4. 중농주의적 경세관
성호의 경세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保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便民’, ‘良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서의 民은 모두 미숙하고 나약하며 불완전한 존재로 군주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필요한 대상이다. 물론 이런 성호의 對民觀은 정치를 민에 대한 군주의 敎化, 또는 德化로 상정하는 유학적 사유 속에서 볼 때는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데 이 경세관 속에는 성호 나름의 경학적 이해와 그 실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保民’은 말 그대로 백성을 보호하여 주는 것이다. 백성보다 풍부한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고매한 인품을 닦은 군주와 신하가 德治․仁政에 의해 백성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이 ‘保民’의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성호는 맹자의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백성들이 각기 자신의 즐거움을 즐기도록 聖王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라고 하였다. 위의 ‘보민’이 정치제도의 큰 틀을 염두에 둔 문제 제기라고 하면, ‘便民’과 ‘良民’은 경제시스템과 실제적 생활 레벨의 작은 틀을 주목하고 있다.
‘便民’이란 민생의 안정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참된 재화’의 풍부한 생산에 의해 민생안정을 실현하는 것으로, 왕도정치의 要諦이기도 하다. 성호는 백성이 바라는 바는 부귀영달이 아닌 단지 一身의 편안함에 그치기 때문에, 지배자는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로부터 생명을 보전하고, 탐관오리에게 재산을 침탈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便民’의 내용이라고 하였다.
다음 ‘良民’은 백성에게 교화를 베풀어 백성을 어질게 양육하는 것이다. 유학에서 인간과 금수의 차이는 성인의 가르침에 의한 교화의 有無로 나누어진다.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길은, 유학적 사회윤리와 개인윤리를 가르치고, 그것에 바탕을 둔 예법사회를 구성하고, 예(관습)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즉 ‘재화가 넉넉해지고 농사짓기와 베짜기 기술이 능숙해지면, 가르침을 베풀어 孝悌의 도덕적 행위를 익혀 풍속을 순화시키는 것’을 ‘양민’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성호의 경세관의 성패 여부는 재화의 확보에 달려있다. 당시 성호가 살던 안산은 지리적으로 서울에 가깝기 때문에 농촌임에도 상품유통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중요시 한 것은 돈보다 상품 즉 생산물이었다. 무릇 땅에서 생산되어 서민에게 유익하게 되는 것을 財貨라고 한다. 재화는 衣食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이 여러 가지 용도의 器物이나 藥物 따위인데, 이 외에는 소용되는 것이 없다.
성호가 재화 중에서도 중요시 한 것은 생존에 필요한 것, 즉 입고 먹는 것의 생산과 확보에 있었다. 성호의 경세론에서 국가존립의 기본요건은, ‘民’과 ‘土地’에 있다. 성호는 人君과 民의 관계를 서로 ‘報惠’하여 마치 어버이가 자식을 기르고, 자식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아, 그 어느 한쪽도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유교의 전통적인 父子의 혈연관계를 확장시켜 君臣관계에 대입하는 논리이다. 즉 ‘孝사상’의 외연을 확산하여 ‘君臣’관계를 형성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성호는 이러한 전통적인 父子君臣관계의 孝論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군신관을 피력하였다. 군주가 없다하여도 백성은 그 스스로 자신의 몸을 扶養할 수 있지만, 백성이 없으면 군주는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니, 백성의 혜택이 군주의 혜택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여기서 군왕 존립의 근거는 백성에 있다. 전통적인 專制 군주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관점이다. 이론상 유학적 정치의 틀은 君에 의한 德化에 있지만, 실제로 근거하고 있는 것은 民力임을 성호는 직시하고 있다. 생존의 바탕이 되는 ‘참된 재화’의 생산 주체인 백성은 그 자력으로 생존할 수 있지만, 군주로 상징되는 통치체제는 백성의 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즉 군왕의 존재 의의는 생산의 주체인 백성의 보호와 안정을 도모함에 있다는 견해이다. 같은 관점에서 성호는, 국가 경비(國用)는 民力에서 나오는 것이니, 民에게 부족함이 있는데 군왕이 풍족하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도 한다. 생산의 주체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군주 및 지배자 계층의 好衣好食을 죄악시하고 있다. 이런 성호의 군주관은 明末淸初의 황종희․ 고염무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봉건론에 입각한 군주관을 제시하여 天子로서의 專制君主論를 비판하고 지방분권적인 향촌지역의 권익을 주장하였던 사상적 조류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호의 군주관에 대한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별고에서 고찰할 예정이다. 따라서 그의 군주관의 위치를 사상사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在地士族인 성호의 관점은 확실하게 향촌민의 권익 보호 쪽에 있었음을 지적 할 수 있다. 성호가 상정하는 군주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이 곡식과 포목과 같은 참된 재화를 안심하고 생산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창고와 백성의 창고에 재화가 비축되고 제도와 법이 엄중해서 탐관오리가 私腹을 채우기 위한 苛斂誅求를 하지 못하며, 놀고먹는 자의 제도권 일탈을 징계할 수 있게 된다.
성호에게서 재화(富)란 먹고 살 곡식이 창고에 얼마나 비축되어 있는 가로 가늠될 뿐, 時流에서 추종하는 돈(금은)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가 멀다. 돈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고루 나누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할 뿐, 그 이상은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는 도구가 된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화폐의 지배에서 벗어나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백성이 번성한 다음에는 부유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은 윗사람이 재물을 내어 보조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 요령이 세 가지 있으니, 농사에 힘쓰게 하는 것 (務農), 검소함을 숭상하게 하는 것(尙儉), 토색질을 금지하는 것(禁奪)이다.
첫 번째는 백성이 부지런히 경작에 힘써 생산량을 늘리게 하는 것이고(務農), 두 번째는 검소한 생활자세로 재화를 절약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법적인 보호로 백성의 재산을 탐관오리의 침탈과 고리대업자의 농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성호는 특히 ‘務農’을 治者의 의무로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治者가 농민을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따라, 경작의 생산량이 변하고, 민생의 안정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농촌 경제 상황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전호의 권리가 성장하면서 성립한 농토 경작권인 도지권 이다. 이것은 소농경영이 일찍 정착한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었던 조선의 독특한 관습으로 17세기 이후에 발달하였다. 즉, 소작농은 도지권에 의해 그 소작지를 영구히 경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주의 승낙을 받지 않고도 임의로 타인에게 자유로이 매매, 양도, 저당, 상속할 수 있었다. 도지권은 매우 강대하여, 만일 지주가 이를 소멸시키고자 할 때에는 먼저 소작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상당한 대가를 지급하여 이를 매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도지권은 대체로 소작농이 자신의 노동력과 자본을 제공하여 개간한 농토에서 생기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지권은 국가의 인정과 보호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務農’은 治者의 적정한 보호노력으로 빛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尙儉’은 성호가 강조하는 생활 윤리의 가장 중심 덕목이다. 검소를 숭상하는 생활풍토의 조성은 조선후기 농촌사회의 건강성을 유지시키려는 의도이다. 상인과 공인의 활발한 활동으로 조선후기의 상품유통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또 농민들도 상품농업의 경영과 잉여 노동력의 가내수공업 활용으로 수입의 증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전국적으로 亂廛이 발달하여 농촌경제는 예전과 다른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호는 과소비가 생기고 결국에는 농사에 힘쓰기보다는 末利를 추구하여 離農하는 결과가 초래함을 근심하였다. ‘禁奪’은 제도의 개선을 통하여 소농민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발상이다. 힘들게 생산한 재화를 억울하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탐관오리와 고리대업을 하는 土豪의 작폐를 금지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것 또한 治者의 경세를 통하여 실현되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禁奪’은 무엇보다도 치자의 경세역량으로 성패가 좌우되는 사항이다. 제도적 정비와 보완을 실시함에, 치자의 편리와 이익보다는 민생의 안정을 우선목표로 설정하였다. 성호가 주장하는 限田法이라던가, 수취제도의 개선은 그 실례가 될 것이다.
다음은 성호의 중농주의적 경세관의 근거가 되고 있는 유교경전의 고찰이다. 그는 백성을 고무시켜 재물을 생산하는 방법으로, 재물을 생산하는 데에 방법이 있는데, 생산하는 사람은 많고, 먹는 자는 적으며, 만들기는 빠르게 하고, 쓰는 것을 천천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 유교주의적 경제론에 널리 인용되는 大學의 문구를 제시하였다.
첫 번째 ‘생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놀고먹는 사람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열에 넷 다섯은 재주도 덕도 없으면서 사지를 움직이지 않고 사대부처럼 생활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천백 년 내려온 고질병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선조의 蔭德으로 사는 사람, 승려, 道士, 광대류가 그것이다. 이들은 비실용적인 하찮은 재주로 이유 없이 丁役을 면하는데, 농사를 해치고 재물을 축내며 서로 모여 도둑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하였다. 성호는 이들을 모두 농업에 복귀시키는 것이 상책이지만, 만일 불가피한 경우는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 인원을 제한하여 문서로 관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성호의 평소 지론인 ‘士農合一’26)을 확인할 수 있다. 독서인인 선비라고 할지라도 家率을 양육하기 위한 ‘治生’을 등한시 할 수 없으므로 필요에 따라서는 농사도 지어야 하고, 또 밭두둑에서 농사일 하는 농부일지라도 학식과 덕행이 뛰어나면 천거하여 政事를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개인의 능력에 따라 상호의 직분을 교대할 수 있다는 유니크한 발상이다. 성호는 봉건왕조의 사회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四民의 職分은 고수되어야 하지만,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서로의 직분을 교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시점은 성호자신이 士이지만 농촌에서 거주하면서 農事를 도외시하지 않고 관심과 참여를 하였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단, 그의 이런 시점이 四民의 평등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士와 農民을 염두에 두고 부분적 개방을 인정한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의 ‘먹는 자가 적다’는 것은,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하는 자를 줄이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좁고 재력이 약하므로, 필요하지 않은 관직은 요량하여 줄이면, 먹는 자가 적게 된다는 것이다. 나라는 작은데 녹을 먹는 관리의 숫자가 대국과 비슷하다면, 그 부담은 결국 힘없는 농민이 짊어지게 된다. 백성의 살을 벗기고 기름을 짜내서 불필요한 관리를 양육하지 말고, 합리적인 지방경영으로 관직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하기를 빠르게 한다’는 것은, 농사철에 부역을 시켜서 농사 때를 빼앗는 따위 짓을 하지 않음이다. 이것은 지방관의 책임사항이다. 생산량은 예전보다 훨씬 증가하여 사치풍조도 갑절이 되었건만, 아직도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은 잘못된 재화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성호는 빈부의 차이를 곡식의 많고 적음으로 생각할 뿐, 보물 따위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水災나 旱災와 같은 위기 상황에 백성과 국가를 지켜주는 것은 창고에 비축된 곡식일 뿐,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동전으로는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곡식을 증산하기 위해 전지의 개간과 농법의 개량이 필요하지만, 놀고먹는 도둑들 때문에 地利를 도모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여기서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도둑의 퇴치를 강력히 제의한다. 성호는 정상적으로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계층을 민생을 위협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간악한 무리의 제거를 통하여 농사에 전념하여 생산량을 증가하고 민생이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다. 여기서 도둑이란 결국 離農하여 체제 밖에서 遊離하는 농민이다. 도둑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하여 농민들의 자체적인 감시체계를 만들고, 또 이동의 자유를 억제하여 농민을 토지에 고착시키고자 하였다.
네 번째 ‘쓰기를 천천히 한다’는 것은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이다. 검소함의 반대인 사치함은 輕便한 화폐의 유통으로 가중되므로, 곡식과 포목 같은 실질화폐를 유통시켜 사치함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聖人이 먼지방의 희귀한 물건을 배척하였던 것은, 백성에게 모범이 되어 검소함으로 인도하려는 뜻이었다고 설명하고, 末業을 억제하여 本業에 힘쓰도록 백성을 인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터를 일정한 거리로 한정하여 그 수를 줄여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도록 풍속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성호는 務農과 검소한 풍기를 통하여 화폐지배에서 민생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방법은 단순한 논의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경세의 주체인 君이 정책으로 立法하여 실천할 것을 제의하였다.
영명한 군주는 백성의 살림을 마련하면서 반드시 검소하도록 가르쳤다. 검소함의 반대는 사치한 것인데, 사치를 버리지 않으면 검소한 풍습은 일어날 수 없다. 버리도록 하는 방법은 집마다 금단하고 戶마다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곧 법을 마련하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제도가 변하면 의식이 바뀌며, 또 그에 따라 생활의 질도 바뀌게 된다. 성호는 평생을 재야의 지식인으로 지냈지만, 이처럼 항시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의 문제점을 제도의 변경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경세의 자세를 지녔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제도와 법의 틀을 마련하는 긍극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짚어 볼 필요성이 있다. 성호가 “智者는 법을 만들고 愚者는 법의 제약을 받게 된다”28)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농민은 국가 통치에 있어서 보호와 관리의 대상이 될 뿐 동업자는 될 수 없었다. 그의 경세론은 결국 농민의 賣産敗家를 구제하고 방지하여, 넉넉한 國用을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유사시의 기근과 병란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중농주의적 경세관은 우선적으로 농본주의 국가 체제의 유지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6. 맺음말
전형적 농본사회였던 조선에 상업유통의 활성화에 힘입어 화폐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가치관의 혼선 및 경제 질서의 혼란이 유발되었다. 성호가 살았던 조선 후기에서 조선왕조가 당면한 과제 중 가장 시급한 것은, 戰亂 뒤의 비참한 국민생활을 구제하고 궁핍한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大同法이 확대 실시되고, 收取體制가 개편되었다. 그런데 세금의 화폐납은 농민을 이중수탈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화폐납 이전과 동일한 양의 상품으로는 세금을 충당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실제적으로는 화폐납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양의 상품을 팔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성호는 조선후기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이런 문제점의 원인을 ‘돈의 지배’에서 찾고, 그 폐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명목화폐의 사용을 줄이고 쌀이나 베와 같은 실질화폐사용을 권장하였다. 유통에 있어서 실질화폐의 불편함은 인정하지만, 화폐의 輕便함을 추구하다보면 사람들이 사치에 빠지고 소박한 인간성을 상실하는 폐해를 야기하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성호는 인간의 생존이라는 시점에서 상업사회보다는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다운 삶이 유지되는 농경사회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의 이상사회는 농경에 근거하면서 유교적 예가 존중되고 지켜지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회야말로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라고 통찰하였다. 이런 사회에서는 대학 이 제시하는 경제윤리에 따라, 그 가르침을 생산현장에서 실현하여 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민의 생존을 보장하는 제도이며 禮라고 하였다. 또 이것은 그의 경세사상의 요체이다. 인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이 화폐사용의 금지로 형용되었던 것이다. 산업사회가 극도로 발전한 오늘날의 현안을 고찰함에 있어서 성호가 제시한 생명을 살리는 ‘참된재화’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주제어 : 경세관, 화폐관, 생존권, 중농주의, 참된 재화.
【국문초록】
소고는 18세기 서울근교 안산에 거주하면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實用과 實證의 학풍을 창도한 성호 이익의 경세사상의 일면을 살펴본 것이다. 성호는 상품유통경제가 활발한 18세기의 역사적 상황에서 다른 실학자와는 달리 화폐 사용의 폐해를 지적하고, 실질화폐인 米布를 사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민의 생존을 위한 근거로서 재화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연암그룹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상업발전을 도모하지 않았던 성호의 재화관에 기인한다. 그의 경세사상의 특징은 중농주의에 의해 실현하고자 하는 점이다. 즉, 중농주의에 의해 이상적인 농촌질서와 국가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상정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백성의 생산을 향상시켜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민생이 안정되면 국용도 풍족해져 국가체제는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이런 가설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호는 ‘務農’ ‘尙儉’ ‘禁奪’을 강조하였다.
성호는 진정한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는 중농주의에 의한 실질적인 생산의 향상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유교적 가치관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예법사회의 구축을 강조하였다. 이런 그의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고리대금업과 같은 기생적인 영리활동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호는 보장수단으로서의 화폐 기능을 부정하고, 인간의 생존을 위해 입는 것 먹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참다운 재화’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