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라는 품격
_ 조재형 시인의 산문집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를 읽고
지난밤은 적당히 바람이 불었다. 잠결에 듣는 빗소리는 정답고 조근조근했다. 친구의 꿈을 꾼 것 같다. 병 든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새들새들 시들어가던 친구는 방금 신접살림을 차린 고운 홍안의 새댁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치워도 치워도 넓어지는 집에서 누군가의 새벽밥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빗소리에 젖은 불꽃이 자꾸 꺼졌다. 차분히 다시 불을 붙이고 찌개를 끓이는 동안 시간은 새벽을 향해가는 느낌이었지만 눅눅한 어둠 속에서 불현듯 혼자 있을 언니가 걱정되었다. 오늘은 언니에게 가보아야지 중얼거리며 꿈에서 깨었다.
새벽에 꾸는 꿈들은 두서없고 뒤죽박죽이고 신산하다. 꿈에서 깨어 한참을 멍하니 앉아 꿈 같은 빗소리를 듣는다. 싸한 가슴 한켠이 쉬이 갈앉지 않는다. 침대 옆에는 지난 밤 읽다 둔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가 말없이 펼쳐져 있다. 잠들기 전까지 산문집 속에서 이런저런 이유들로 잊은 척 묻어둔 이들을 만났던 것이 덧난 가슴앓이처럼 꿈으로 이어졌나 보다.
지난밤 나는 잠시 빈 집의 말없는 주인이 되었던 것일까.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잊었다가 다시 기억하는 일이 새삼스럽고 힘에 부쳐 끝까지 모른 척하려던 것들을 꺼내본다. 꿈 속까지 찾아온 사람들과, 시간을 지나온 집들과, 기억조차 구부러진 골목길, 배경처럼 서 있던 나무와 먼 산을 떠올려본다. 그 모두는 이미 비처럼 스며들어 아무리 쓸어내고 닦으려 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더 넓고 더 멀리 번져갈 뿐이다.
조재형 시인의 산문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를 읽는 시간은 낯설지 않은 기시감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아련하고 스산하고 뭉클하고 흐믓하고 기쁘기도 한 온갖 마음들이 빈집을 꽉 메우는 시간이다.
삐걱거리는 그 집의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손잡이는 여전히 따뜻하다. 안마당에 천천히 내려앉는 바람에서 잘 띄운 푸른 곰팡내가 난다. 햇살은 말갛고 떠다니는 공기는 처연하고 잔잔하다. 누군가 몰래 다녀간 듯 뒷마당에는 식지 않은 온기가 남아 있다. 그런 것들은 서로 잘 어우러져 오랜 그리움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빈 집이 웅얼거리는 말을 말없이 듣는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인지, 돌아갈 수 있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인지, 가늠하기 힘든 모호한 경계 속에 집은 떠 있다. 모호하기에 모호했던 존재들이 잠시 또렷해진다. 언니와 친구들도 거기에 그렇게 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미처 하지 못한 미안함을 전한다. 까무룩하고 아스라하게 속울음이 새어나온다. 너무 할 말이 많아 말문을 닫고 명치 아래 깊숙이 숨긴 울음 때문에 비 내리는 밤마다 불명의 신열을 앓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나는 왜 작가의 빈집에 들어서서 빗물 같은 시간을 기억하는가.
작가의 빈 집에서 나는 복고라는 시간의 품격을 만난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금, 너무도 적절한 이 계절에 작가는 자백과 고백 사이에 복고라는 시간의 집을 단단하게 지었다. 단순히 오래된 것, 낡고 촌스러운 것, 뜬금없는 것이 결코 아닌 세련된 복고의 지붕을 얹은 집. 그가 완성한 집에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복고라는 시간의 품격을 만난다. 그 집은 오랜만에 찾아갔는데도 흡족한 표정으로 맞아주는 산 같아서 바라보기 편하다. 행운마저 숨기고 살아가는 질투의 도시를 깨끗이 잊게 만드는 집이다. 그 집 앞에는 자기들만의 걸음걸이로 새롭게 나이테를 만들어가고 있는 나무가 자란다. 흔한 듯 흔하지 않고 예스럽되 새롭다. 복고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시간의 가치를 품고 있다. 그 집의 품격은 복고의 완성에서 나온다.
작가의 집에서 나는 다시 맛볼 수 없는 자장면의 기억처럼 다시 맛볼 수 없기에 가장 간절한 맛으로 박제된 순간을 만난다. 낯선 이야기라고 말한 이야기들은 전혀 낯설지 않다.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르는 세상이어서 오히려 위안을 주는 것들이다. 구겨진 지폐에는 애써 펴지 않아도 충분히 흐믓한 인정이 있다. 빨간 잡지에 숨었던 아찔한 호기심을 기억하는 순간 쇠락해가는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돋는다. 사례금 만 원에 담긴 진정성에 고개를 끄덕인다. 요한 형님의 가난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었는지를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공주할매에게는 귀한 아들 금동이보다 더 귀한 은동이가 있었음을 안다. 달원씨의 종소리처럼 어김없는 약속이 주는 믿음과 염광씨의 약속어음처럼 지독하고 일방적인 지지에 지지를 보낸다. 비로소 주름살로 도색한 죽음의 이정표가 생기고 그것은 또 하나의 방향인 것을 안다.
작가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토해내기까지 너무 오래 고독을 방치했던 h처럼 몸을 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비로소 구겨진 ‘나’를 꺼내보며 쓸데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들어주지 못했던 종진형의 노래를 그리워하는 시간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조재형 시인이 주는 첫인상은 깔끔하고 모던한 편이다. 작가가 말한 칼날 같은 눈빛을 장전하고 버버리코트 속에 정갈한 무늬의 와이셔츠와 어울리는 베스트를 갖추어 입은 모습은 차도남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런데 그의 칼날은 서늘하지만 길지 않아 위협적이지 않다. 예민한 눈빛이 잠깐 풀릴 때 그는 한없이 넓어 보인다. 아마도 그가 빈집을 말없이 짓는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요즘 불고 있는 레트로와 어게인열풍들을 바라보면서 나이가 먹을수록 과거가 더 좋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말을 떠올린다. 그런데 지나간 것에 애틋한 느낌을 갖는 건 나이를 초월한 우리 인간의 영원한 속성아 아닐까 생각한다.
사라진 줄도 모르게 사라진 것들로 채운 집 한 채를 짓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많던 언니들과 햇살처럼 쏠려 다니던 친구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턱없이 부족했지만 사실은 그득했고 시리고 추웠지만 어쩌면 가장 따뜻했던, 그곳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다시 그때로 돌아가 묻어둔 그리움의 뺨을 쓸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복고만큼 품격 있는 그리움의 반추가 또 있을까.
첫댓글 지나간 일들이 꿈처럼 반추되네요. 항상 밝아 보이시는 조재형 선생님, 한보경 선생님의 몸 어딘가에서 깊은 그늘의 집을 발견한 느낌입니다. 좋은 산문집을 조명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살다가 그게 그리움인지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꺼내 본 빛바랜 사진첩에 있는 그 집, 지금 그 집은 비어 있고 주인은 멀리서 사진첩을 넘기고 있습니다. 주름진 추억은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펴며 말을 하네요. 버버리코트가 잘 어울리는 작가의 겨울 분위기의 서늘한 눈빛, 씨익~ 웃음으로 봄이 되는 현장을, 한없이 넓은 이미지의 지점을 한보경 선생님은 잘도 조명해주셨네요.빈 집 가득 담아낸 두 분의 언어의 품격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