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리를 건너다, 경복궁 야간기행` 미디어 파사드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경복궁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이었다. 경복궁에 들어서자마자 다리를 수놓은 오색의 빛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영제교 아래엔 노루와 자라, 용 등 12신이 되살아나 뛰놀았다. 고즈넉한 선율이 흐르는 영제교는 21세기에서 금방이라도 세종의 연회가 벌어질 것 같은 15세기로 통하는 다리였다.
경복궁 야간 관람에 참가하고 있는 시민들
지난 달 27일부터 문화재청과 한국콘텐츠 진흥원이 주관하는 문화재 활용 융복합 콘텐츠 ‘시간의 다리를 건너다- 경복궁 야간 기행’이 열렸다. 최근 부상한 미디어 파사드전이다.
‘미디어 파사드’란 미디어(media)와 건물의 외벽을 뜻하는 파사드(facade)가 합성된 용어로, 건물 외벽에 LED 조명을 비춰 영상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기존의 벽면에 설치된 LED로 영상을 상영하는 방법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형태다. 영상을 투사하기 때문에 영상의 변형, 확장, 복제가 무궁무진하다.
미디어 파사드전이 열리고 있는 경회루. 다양한 색의 조명이 건물에 감성을 입혔다.
새로운 감성의 미디어 파사드가 갖는 장점은 세 가지다. 건축물이 외피의 한계를 벗어난다는 점, 감성과 스토리를 갖는다는 점이다. 단순한 외양의 조선 시대 건축물은 미디어 파사드를 통해 색동, 전통문양, 현대 건축, 서울의 모습까지 담아내 새로운 역사적 대상물로 재창조된다. 다채로운 변형을 통해 기존의 건축물이 갖고 있던 일회성을 탈피해 역사를 올곧이 상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무생물 건축물이 감성을 갖게 된다. 경회루에 비친 색색의 조명은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붉은색에선 정렬을, 푸른색에선 냉정을, 흰색에선 평화를 느낀다. 다채로운 색상에선 장엄함을 느끼기도 한다. 색과 조명을 받은 건축물은 인간과 교감하는 매체로 작동한다. 미디어 파사드의 메시지 전달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셋째, 건축물이 스토리를 갖는다. 건축물에 투영되는 영상은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D-500일을 맞아 평창 동계올림픽 준비위원회는 서울 광화문에서 올림픽 성공 개최 염원을 담은 미디어 파사드전을 개최했다. ‘하나 된 열정’이란 대회 슬로건에 맞게 문화, 미래세대의 참여와 영감, 새로운 아시아와 평창이라는 세 가지 이야기를 그렸다. 색색의 종이가 봅슬레이 무대를 배경으로 흩날린다. 파사드를 이용한 공익 광고, 상업 광고도 늘고 있어 미디어 파사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 500일을 앞두고 성공 염원을 담아 광화문에 상영한 미디어 파사드전.
영상대중화에 기여한 미디어 파사드
우리나라에서 미디어 파사드는 2004년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이 처음 시도했다. 다소 거친 화소의 LED 조명으로 나무와 사슴, 눈 등이 표현됐고 건물 전체를 선물 상자로 만들었다. 처음 도입된 만큼 눈길을 끌었으나 투박한 모습이었다.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2011년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미디어 파사드전이 서울스퀘어에서 열렸고 후기 모더니즘 팝아트 작가 줄리안 오피의 작품이 상영됐다. 걸어가는 사람들, 인사동, 등 다양한 작품이 상영됐으며 서울스퀘어는 미디어 파사드의 대표 주자가 됐다. 기상캐스터가 나오는 오늘의 날씨가 대형 TV에 띄워지듯 서울스퀘어에 띄워졌다. 작품뿐 아니라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날씨와 교통, 미세먼지와 같은 정보들은 미디어 아트와 도시 문화의 융합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후 롯데백화점 부산 광복점, 상암 DMC지구의 IT 관련 사옥들, 강남의 IBK 성형외과 건물 등 전국 곳곳에서 미디어 파사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해외에선 중국의 그린픽스, 독일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 벨기에 브뤼셀의 덱시아 타워 등이 유명하다. 특히 브뤼셀 덱시아 타워는 15만개의 LED 조명을 사용해 38층 전면부를 격자무늬의 기하학 패턴으로 채웠다. 창문 하나하나를 컴퓨터로 조종할 수 있으며 알파벳을 나열해 자신의 이름을 띄우거나 메일을 전송할 수 있게 했다. 메신저 역할이 극대화된 미디어 파사드 형태다.
미디어 파사드는 영상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미디어 아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미디어 파사드는 매스 미디어의 속성을 갖고 있다.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고 누구나 제작자로 참여할 수 있다. 건물을 지나가는 사람에 따라 색이 변한다든지, 건물에 영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띄울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남자 주인공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여자 주인공을 위해 메시지를 띄우는 것이 대표적이다.
미디어 파사드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옥외 광고법 개정으로 인한 디지털 광고물에 대한 재조명이다.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이 올 7월부터 발표되면서 화려하고 역동적인 광고를 제작하려는 기업이 많아졌다. 앞서 살펴본 IBK 성형외과와 롯데백화점 부산점이 대표적이다. 기업의 아이덴티티와 주목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미디어 파사드는 디지털 광고에까지 확장될 전망이다.
경복궁 `시간을 건너다`전, 미디어 파사드와 고전 무용을 결합한 공연
경복궁 미디어 파사드전을 보기 위해 지난 9월 27일 몰린 인파는 1,000여명에 달했다. 덕수궁과 흥례문을 비롯 광화문 일대에서 연출되는 미디어 파사드전은 ‘문화가 있는 날’과 맞물려 전통 문화를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시간을 건너다’전은 문화재청이 문화유산과 첨단기술이 결합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내·외국인 관광객에게 제공하기 위한 기획이다. 2013년 광화문에서 시작한 미디어 파사드전은 3년째 계속되고 있다.
공동사업자인 한국콘텐츠 진흥원은 개인의 영상 제작을 위한 교육도 실시했다. 9월 20일부터 총 8강의로 전체 24시간의 교육이 실시되고 있으며 교육 내용은 이론과 제작, 멘토링 등이다. 우수 창작물은 100만원 상당의 금액을 받고 CKL 버츄얼 센터에서 상영된다.
미디어 파사드 `낭만을 상상하다` 덕수궁 공연. 10월 `문화가 있는 날` 다시 열린다.
경회루 미디어 파사드전은 개천절까지 마무리 되었지만, 덕수궁에선 10월 25~27일 미디어 파사드전을 다시 한번 진행한다. 궁궐이 가을 밤 감성을 적시듯, 미디어 파사드의 확산으로 한층 깊어진 감성영상시대를 기대한다. 한편 경복궁 야간관람은 10월 28일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 야간관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경복궁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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