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졸업반 시절, 우리 교육학과의 부속실 중에는 '교육과학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은 곳이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박숙희 교수님을 연상시켰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교육공학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좌우간 그 방의 이름이 무엇이든 교육과학연구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무렵 나는 유명 교육학과에는 다들 이렇게 연구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씩 교수님들이 나누어 주시는 프린트물에도 그런 이름들이 등장한 것으로 보면 다른 학교 교육학과에는 연구원들도 많고 연구도 많이 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우리학교는? 우리 교육학과는? 우리도 연구소(실)가 있었지만 그곳에는 연구원 대신 예비역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멤버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장걸, 최윤선, 김근규, 나 그리고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 한 사람을 포함해 다섯 명이 있었고, 다른 예비역 학형들은 해질 무렵 그곳으로 찾아와 우리를 식당(술집)으로 인도하느라 잠깐 들렀을 뿐이었다.
사실 우리가 모여서 딱히 같이 한 것은 없고, 공강시간이나 수업을 마친 후 이곳의 넓은 책상의 한 켠을 차지하고 각자 할 일을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과학생회실과는 구별되는 4학년 왕고들의 개별 공간이나 휴게실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누구도 막지 않았지만 졸업반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 그곳에 모여, 우리는 잡담도 하고 커피나 담배도 먹었다. 그때 그 시절에는 방 안에서 담배를 피워도 큰 터치가 없었다. 물론 김 모 교수님은 예외였다. 나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원래 이 멤버들은 임용시험 준비반으로 결성되었다. 그러다 내가 이 좋은 공간을 발견한 이후 자연스레 이들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 4년 동안 우리과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삼수생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 학기만 마치고 군대에 갔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왔을 때 대부분이 여학생이었던 동기생들은 졸업을 한 학기만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과에 끼지 못했던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나는 대학 4년을 거의 학생회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늦게나마 둥지를 찾아 교육학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가로이 책을 읽는 장면은 내가 보기에도 꽤 낭만적이었다. 거기서는 대부분이 고시학원에서 나온 교육학 기출문제집이나 <도덕교육론> 같은 두꺼운 책을 읽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옆에서 무얼 읽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그런 것은 보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날도 예비역들의 꼬임에 다들 식당에 갔는데 어쩐 일인지 나는 혼자 그 방에 남은 적이 있었다. 6월, 학기가 마칠 즈음.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늦은 오후 사범대 4층. 김태영의 ‘오랜 방황의 끝’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복도 너머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복도 창틀에 기대어 대담하게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러면서 괜시리 훌쩍거리기도 하고, 이랬어야 했는데 저렇게 할 걸 그랬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모두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나온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몇 군데에서 윤리를 가르쳤다. 그러다 어떤 학교에서 대학성적표를 다시 뽑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석차가 나온 성적표를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 성적표에도 석차가 나온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놀랐다. 내 성적표에는 33/34라고 적혀있었다. 이건 꼴찌라는 뜻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선배, 다음 주 조영태 교수님 수업 발표인데 어떻게 하는지 좀 가르쳐 주세요”라며 쫓아다니는 후배들도 있었다. 내 졸업 평점은 4.50만점에 3.33으로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낮은 줄은 몰랐다.(80점이면 꽤 괜찮은 점수 아닌가?) 나는 처음에 이거 또 무슨 오류인가보다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근거가 있었다. 나는 코스모스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공과목을 거의 00학번들과 들었다. 그러나 중간에 한 학기 휴학을 해서 그들은 봄에, 나는 여름에 졸업한 것이다. 내 의문은 과연 저 34명의 정체였다. 내가 포함된 이 34명이 00학번이라면 이들의 성적표에도 내가 들어간 34명이 나올텐데 나는 그들이 졸업한 이후에도 한 학기 동안 학점을 이수했고, 성적을 추가했다. 그렇다면 그 34명은 01학번인가? 그럴 수도 없다. 이들도 내가 졸업할 시점에 아직 학점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평점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억울한 사정을 누구한테도 털어놓고 상담 받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아무한테도 말 못할 부끄러운 고민을 혼자서 하다 내린 결론은 이미 지난 과거지사라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가 벌써 10년도 넘었다. 그런데 이제와 돌아보니 그때 했던 그 생각이 낯설게 느껴졌다. 무엇이 이상한가 하면, 바로 내가 꼴등을 하면 안 되는 이유다. 내가 어째서 후배들보다 성적이 좋아야 하는가? 혹시 나는 내가 이 촌구석에 있는 지방사립대에 다닐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아무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 들통이 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면, 내가 4년 동안 학생회관을 들락거렸던 일도 정의감이 아니라 근거없는 우월감 때문이 아니었나 의심이 든다. 이것만이 아니다. 신입생환영회 자리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두 살 어린 동기들이 이 지역 대학 서열을 읊을 때 나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전북대, 원광대, 전주대 그 다음이 우석대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학교들 이름을 다 처음 들어봐서 그런 줄은 몰랐어.. 기차역이 옆에 있길래..”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멀리까지 이름 없는 대학에 유학을 가느니 차라리 신학교에 들어가라고 한 적도 있었고, 나는 중간에 편입할 생각으로 영국에 갔다 포기하고 온 적도 있었다. 그 후 유명대학 분교에 몰래 편입했다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런 내막은 모르실 것이다. 삼수생이었던 나는 우리과 신입생 합격자 예비후보 7번이었다. 내 앞에 7명이 자리를 비워준 덕에 나는 우리 교육학과에 문을 닫고 들어왔다. 나머지 복수지원한 학교들에 합격하기에는 터무니 없는 수능성적이었다. 그러니 내가 꼴등으로 졸업한 것이 대단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4년 동안의 학업수행 과정일 것이다. 내가 다른 학생들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는 점은 졸업을 앞두고서야 학생회관을 겨우 빠져나와 사범대학 연구실로 들어 왔다는 점에 잘 나타난다. 3.33을 기특하게 여기었던 것도 지난 4년 동안의 내 행실, 수업에 대한 충실도가 은연중에 감안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또 한 번 놀랄 일이 있었는데, 대학원 석사과정의 성적표를 받았을 때였다. 내 성적은 4.50만점에 4.43이다. 이 점수는 평생 받아 보지 못한 점수로, 나는 1등이 분명할 것이다. 물론 1/1이다.
2004년 10월 익산, 라병년(96)과 김진숙(98)의 결혼식. 이 날 주례는 김태호 교수님이 하셨다.
첫댓글 바로 이전 게시물의 조영태 교수님 글을 읽은 내용이 생각납니다. 인간으로써 가지는 그 고통 위에 싯타르타의 철학이 시작되고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럼 나의 무지에 대한 고통은 지를 향한 무한한 가능성의 토대?’ 하고 자조적으로 웃었네요. 저는 학문에 대해 잘 알고 싶고, 잘 하고 싶은데 타고 난 천성이 주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양상은 조금 다르겠지만 글을 읽으며 선생님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였단건 안 비밀….;;
잘 지내시죠~~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숨이 막히도록 긴장했던 교수님의 강의시간을 버텨냈던 날들이 그립습니다. 학생신분이었던 때가 좋았습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맞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수업 받을 때가 좋았습니다. 한국어로..
이번에 꼭 뵙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코로나 끝나면 꼭 다같이 뭉쳤으면 합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