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의 잔여 세력들
이성계는 조정의 명령으로 명나라를 치러 갔다가 오히려 원나라를 쳐서 명나라를 돕는 결과를 낳았다. 위화도에서 다시 되돌아 와서 역적이 되었다. 즉 고려를 친 결과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원나라를 도우라는 명을 받았지만 정반대로 명나라를 도운 셈이다.
여기서 이방원을 한 번 살펴보면 이방원은 쌍성무부의 자식답게 어릴 때부터 호방하고 칼이며 활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술좌석을 마련하여 학식과 정치력, 어느 면에서도 출중한 정몽주를 회유하기로 하고 조선의 영입을 떠 보는 시를 읊었으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더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서 백년까지 하리라.”
이렇게 운을 띄워 보았으니 계략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정몽주가 이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즉석에서 화답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일언지하에 거절의 詩였음을 이방원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심복인 조영규에게 지시하여 선죽교에서 살해 하였던 것이다. 이 선죽교가 지금 이북에 있다. 선죽교 다리에 피가 서리어 아직까지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 그 원한이 하늘에 닿았으며 그의 충절이 천추만대에 까지 지금도 우리의 뇌리에 정몽주를 모르는 이가 있으랴!
이때가 위태로운 국운 이였다. 막상 천하를 손에 쥔 이성계였으나 충신들은 호락호락 그의 수중으로 쉽게 몰려들지 않았다.
야은 길재도 관악산에 숨어서 노래를 불렀다. 없어진 고려가 노래를 부른다고 다시 올 것이며 충신들의 한과 울분은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송도 사람들은 이 노래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너도 나도 부르고 다녔다.
나라가 이성계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니 고려의 충신들은 나라가 바뀌어도, 조선으로 개국을 했어도 너의 나라가 싫어서 차라리 숨어서 굶어죽을지언정...
이성계를 단단히 배척한 72현의 고려의 신하들이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두문동과 72현을 잠깐 살펴서 정리하여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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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문동칠십이현 [杜門洞七十二賢]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遺臣)을 이르는 말.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瑀)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 ·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빚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성계 일파에 몰살을 당했으나 일부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고 전해지나 살았어도 철저히 이를 숨기고 살았으니 살아남은 사람은 전해지지 않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 계속 -
* 다음 회에는 이성계가 명실 공히 고려의 뒤를 이어 조선을 개국하였다. 개국 할 때 이성계 일파의 많은 사람들 중에 고려의 충신들을 영입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충절은 목숨과도 바꿀 의향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충절과 기개를 가진 몇 분을 더 조명하고자 함. 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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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속의 보물을 찿기 전에 먼저
네 두 팔에 있는 보물을 충분히 이용하라.
그대의 두손이 부지런하다면
그 곳에서 보물이 샘 솟듯 솟아날 것이다
오늘도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