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배제된 美·日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조약
칼자루 쥔 사무라이, 대륙을 탐하고 조선을 훔치다
고종황제는 조선 두고 美·日간 어떤 협상하는지도 몰라
썩을 대로 썩은 양반들 착취… 국민 의욕도 기상도 잃어
연해주 등 이주민들은 조선인다운 주체성·독립심 가득
기사사진과 설명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인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
러일전쟁의 중재에 나선 미국의 루스벨트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승리한 쪽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루스벨트는 러시아와 일본, 둘 중 하나가 만주에서 일방적인 세력을 가질 경우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정책에 차질이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와 일본이 스스로 지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승기를 잡고 있었지만, 미국의
최선은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강화회담에서 러시아의 뻣뻣한 태도를 못마땅해하면서 자금 문제로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어 애를 태우는 일본의 속마음을 간파했다.
미국과 일본, 두 나라는 이미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한 상태였다.
러일전쟁 초기 일본을 방문한 미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사이에 합의된 이 밀약의 내용은 한마디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한다는 약속이었다. 미국은 이미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을 빼앗았지만 그때까지 열강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1902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고 때마침 터진 러일전쟁이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었다. 이 밀약은 20년 가까이 미 국무부의 비밀문서로 보관되다가 1924년 역사학자 ‘타일러 데닛’에 의해
그 내용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사진과 설명
‘포츠머스 강화 회담’을 성사시킨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
루스벨트는 아시아 국제정치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일본보다는 러시아가 미국의 아시아 진출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이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면서 일본을
러시아에 대한 방패막이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시 일본의 국력을 과소평가했던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을 간과했고,
미국의 이런 계산은 나중에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오판이 되고 말았다.
서양의 강대국들이 러시아를 견제하던 때 조선은 친러 정책으로
러시아에 치우쳐 일본을 자극했고,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정세를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미국은 포츠머스 강화회담을 통해
러시아와 일본 모두의 양보를 종용했다. 그 결과 승전국 일본이 얻어낸 것은 조선에서의 배타적 우월권, 랴오둥 반도 조차권, 그리고 사할린 섬이
전부였다. 전쟁 배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이 회담을 성사시킨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결과를 알게 된 일본 국민은 분노했다.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9월 5일, 일본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수만
명이 총리 관저로 몰려갔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얻은 이익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기대했던 일본은 포츠머스 회담을 담당했던 고무라
주타로를 매국노로 매도했다. 일본은 계엄령을 발표하고 군대를 동원해 진압해야 했다.
이런 혼란을 잠재운 것이 바로 조선을 상대로
맺은 을사늑약이었다. 일본은 전쟁 배상금을 대신할 희생양으로 조선을 택했고,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저항도 못하고 당한 것이었다.
기사사진과 설명
러일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1905년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이다. 사진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주역들 모습. 필자
제공 |
고종 황제는 일본과 미국 사이에 조선을 두고 어떤 협상이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막연히 미국에 대해 좋은 선입견을 갖고 원조를
기대했다.
조선사회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양반의 착취로 일반 국민은 의욕도 진취적인 기상도 다 잃어버린 상태였다. 러일전쟁 동안
서양 기자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은 근육이 발달한 민족인데도 기개나 맹렬함이 없다. 서양 기자들은 이 민족이 예전에는 용맹을 떨쳤지만 수세기에
걸친 집권층의 부패로 용맹성과 진취성을 잃어버렸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 땅과 러시아 연해주는 같은 사람들이 사는데도 사정이 사뭇
달랐다.
영국의 왕립 지리학자 비숍 여사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조선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가는 이곳(연해주) 이주민들은 깨끗하고 활기차며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 고국의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풀 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의심과 게으름,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 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었고 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했다.’
이 글에서 보는 것처럼 연해주에 사는 조선인들은 양반의 착취를 벗어나 자발적으로 너무나 잘살면서
항일운동을 했고, 러시아 혁명 시기에도 자신과 조국의 앞날을 위해 분투했다. 그 중심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고, 대표적인 사람이
최재형이었다.
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체코 군단의 무기가 유용하게 작용하게 되는데 다음 편에서는 체코 군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참고서적: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이광훈 저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