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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을 맞으며
해담 조남승
얼마 전 태안반도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역의 오일장 구경에 나섰다. 홍성 오일장에서 장터국밥을 먹고 잘 익은 늙은 호박 두 개와 대봉 한 상자를 샀다. 호박은 맷돌 호박과 물동이 호박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를 더 샀었는데 벌써 다른 것은 다 기억에서 멀어져갔고, 물러지는 대로 하루에 한두 개씩 먹고 있는 홍시와 호박만이 소소한 행복감을 안겨주고 있다.
며칠 전 뒷방에 있는 호박을 살펴보니 표면이 하얗게 분이 나 있었다. 난 아내에게 “호박 더 놔두면 지난해처럼 좀 상할 것 같은데, 두 개 다 손질해서 하나는 국 끓여 먹고, 하나는 호박고지를 만들어놓았다가 동짓날에 팥 넣고 찹쌀떡을 해 먹으면 좋지 않겠어?”라고 하자 아내도 흔쾌히, 동의하면서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올해의 동지는 노 동지(老冬至)라서 팥죽을 쒀 먹어야, 되잖아? 동짓날이 동짓달 그믐날이어서 완전 노노 동지이니까...”라고 하였다. 난 “그래? 그러면 팥죽을 쒀먹어야지, 근데 팥죽도 쑤어먹고 호박떡도 해 먹으면 더 좋지 않겠어? 그리고 떡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아침마다 한 개씩 꺼내먹으면 좋을 거, 아냐.”라고 응수하면서 행동은 이미 커다란 호박 두 개의 손질에 들어갔다.
호박의 배를 가르자 진한 주황색 내장 줄기에 호박씨가 한 주먹씩 매달려 있었다. 내장을 발라내고 겉껍질을 벗긴 다음 한 개는 국 끓이기 좋게 썰어서 몇 개의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에 갈무리해두고, 하나는 호박고지로 말리기 좋도록 길쭉길쭉하게 썰어 빨래건조대에 널어 거실 창문가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호박씨도 깨끗이 씻어 잘 마르도록 창문가에 펼쳐놓았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온 집안에 달콤한 호박 향기가 가득하여 옛 추억이 새롭게 떠올라 나의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내가 어릴 적 시골에 살 땐 맷돌 호박은 심지 않았고 물동이 호박만 심었었는데, 눈이 오려고 날씨가 잔뜩 흐려지면 어머니께선 “남승아, 눈이 올 것 같으니, 호박국이나 끓여 먹게 네 맘에 드는 호박으로 골라잡아서 손질 좀 해다오?”라고 하시었다.
그러면 난 닳고 닳아 칼날처럼 얇아진 오래된 놋숟갈을 꺼내 들고 물동이만 한 늙은 호박을 박박 긁어 겉껍질을 벗겨내 드렸다.
똑같은 국이요, 똑같은 떡인데도 산촌에 함박눈이 아득히 내리는 날에 시루에 호박범벅 떡을 쪄 가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커다란 양푼에 한가득 떠내서, 창밖에 내리는 하얀 눈발을 바라보면서 숟갈로 떠먹는 맛은 겨울철 눈 내리는 산촌의 운치에 딱 어울리는 맛이었다.
또 추운 날 아침에도 뜨끈한 호박국에 밥을 말아 밥숟가락에 고춧잎 짠지를 올려놓고 김을 후후 불면서 먹노라면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언제였던가, 어머니께서 여러 농산물을 보내주셨는데 그중에 조그만 비닐봉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얼른 꺼내 보니 “몸에 아주 좋은 것” 그리고 그 밑에 “만병통치”라고 씌어 진 볼록한 편지 봉투가 소중하게 넣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편지 봉투를 열어보니 호박씨가 한가득 있었다. 세상에 그 작은 호박씨를 손톱으로 하나하나 일일이 까서 보내주신 것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애쓰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TV에 어느 박사가 나와서 호박씨가 사람의 몸에 아주 좋다는 방송을 하여 보내주셨다는 것이었다. 난 지금도 늙은 호박만 보면 어머니의 그 지극한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날씨가 건조하여 며칠 만에 널어놓은 호박고지가 아주 잘 말랐다. 하지만 시골에서 살 때처럼 장독대 위에 싸리나무로 만든 채반에 여러 날 동안 널어놓아 밤에는 찬 이슬에 얼고 낮엔 햇빛과 바람에 마르기를 거듭하면서 자연적으로 숙성 건조되어야만 제맛이 날 텐데 그렇진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잘 마른 호박고지를 갈무리하면서 동짓날에 찹쌀 호박떡을 만들어 먹을 생각을 하니 사뭇 동지가 기다려진다.
동짓날과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동지(冬至)는 이십사절기의 하나로서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인 약력 12월 22일경으로 연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로서 이와 반대인 하지(夏至)와 상대되는 날이 동지인 것이다.
해가 서산에 지면 밤이 찾아들고, 밤이 다하면 또다시 동산에 먼동이 떠 오르듯이 더 오를 수 없이 다 올라가면 내려와야 되고, 또 다 내려가 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이듯이 우주의 운행원리도 마찬가지이다.
동짓날 역시 낮의 길이가 더 짧아질 수 없을 정도로 다 짧아졌으니 그다음 날부터는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니 동짓달 기나긴 밤도 동지 다음날부터는 짧아지기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주 운행의 원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동지 다음날부터 짧았던 해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여겼기에 동지가 지나면 사실상 해가 바뀐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동지팥죽에 새알심을 넣어 쑤어 가지고 새해에 맞이하는 나이 숫자만큼 새알심을 먹었다. 그리곤 한 살 더 먹었다면서 동지를 작은 설이라는 뜻이 담긴 아세(亞歲)라고 불렀다.
동지팥죽은 동지시식(冬至時食)으로서 동짓날 밤이 가장 길기에 음의 기운 또한 가장 강하여 음의 성질인 귀신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고 여겼기 때문에 귀신을 쫓고 액운을 막기 위해 동지팥죽을 쑤어 대문, 변소, 부엌, 외벽 등 집의 여기저기에 뿌려놓고 나서 온 식구들이 함께 먹으면서 덕담을 주고받았다.
옛 어른들은 동짓날 팥죽을 먹지 않으면 귀신의 해코지를 막지 못하여 잔병이 끊이질 않아 일 년 내내 몸이 불편해지며 쉽게 늙는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선 귀신을 쫒는 다기보다는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가족 친지끼리 따뜻한 팥죽 한 그릇이라도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의 정을 돈독히 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먹는 것보다도 더 깊이 있고 멋스러운 전통적인 풍습이 있었다. 옛 한옥들은 난방시설이 잘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추운 겨울이 되면 방안에도 우풍이 심하여 냉랭한 기온이 품 안에 감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옛 선비들은 몸과 마음을 한껏 웅크리고만 있지 않고, 마치 설한풍(雪寒風)을 이겨내고 향기를 내뿜는 한 송이의 설중매(雪中梅)와 같이 아무리 방안이, 추울지라도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경서(經書)를 읽으며 학문을 하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이처럼 옛 선비들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가장 추운 심동지절(深冬之節)인 동지 다음날부터 9일을 아홉 번 곱한 81일을 구구(九九)라고 하며, 그 81일이 다 되면 매화 향과 함께 새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그래서 새하얀 한지 위에 붓으로 81송이의 매화 모양을 그려놓고 하루에 한 송이씩 붉은색을 칠하여 홍매화로 피워내면서 추위를 이겨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하루하루 매화를 피워내며 새봄을 기다리는 아주 낭만적인 풍습이었던 이 그림을 두고 추위를 물러가게 한다는 뜻으로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고 하였다.
그렇게 동지 다음날부터 한 송이 한 송이 붉은색을 칠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한 송이까지 다 칠함으로써 81송이의 홍매화를 모두 다 피워내고 나면 절후는 경칩과 춘분의 중간인 삼월 초 순경에 이르게 된다.
드디어 완성된 ‘구구소한도’를 떼어내며 영창문을 열고 뜰 앞을 내다보면, 겨울, 내내 마음속으로만 그려오던 매화 가지에 봉곳한 꽃봉오리가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고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코끝에 새봄의 향기를 전해온다.
운치 있고 낭만적인 삶을 살아간 옛 선비들은 추운 겨울을 춥다고 말하지 않고, 가슴으로 추위를 녹이며 대필(大筆)에 먹물을 듬뿍 찍어 밑둥치가 고목이 되어버린 뜰 앞에 매화나무를, 힘차고도 멋스럽게 한지 위에 옮겨놓고, 중필(中筆)로 가지를 그린 다음 세필(細筆)로 매화 가지에 81송이의 매화 모양을 그려 찬바람이 스며드는 영창에 붙여놓고, 애절하게 이별한 그리운 임을 그리듯이 하루하루 한 송이 한 송이씩 붉은색을 정성껏 칠하여 방년(芳年)에 이른 소녀의 입술같이 빨간 홍매화를 피워내는 옛 선비들의 고고한 멋스러움이야말로 우리 조상들의 기개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게다가 온 대지 위에 눈이 하얗게 뒤덮인 겨울밤에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영창에 스며든 달빛을 흠뻑 머금은 구구소한도에서 풍겨오는 암향부동(暗香浮動)의 매화향에 밤을 지새우며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을 그리워했을 옛 선비들의 풍류가 떠올라 가슴이 뛴다.
매화 향에 취한 선비들
이렇게 선비들이 좋아한 매화는 백매(白梅), 홍매(紅梅), 옥매(玉梅), 겹매, 홑매, 수양매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리고 매화를 두고 이른 봄 제일 먼저 피어난다, 하여 화형(花兄)이라 하였는가 하면, 의인화하여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이라 칭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하였다.
또한 추위를 이겨내며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절조(節操)를 찬양하여 철학적으로 지사(志士)라 하였는가 하면, 봄볕에 피어나는 수많은, 꽃들과 어울리지 않고 동지섣달에 피어나는 조매(早梅)와 동매(冬梅), 아직 눈발이 가시지 않은 정초에 맹춘(孟春)의 냉랭(冷冷)함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암향부동(暗香浮動)을 은은히 풍기는 한매(寒梅)와 설중매(雪中梅)를 두고 한사(寒士)라 하였다.
문인과 화가라면 이렇게 고매하고 고결한 매화의 아름다움과 은은한 향기에 어찌 깊은 정이 젖어 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수많은, 문인들과 화가들이 매화에 대한 시를 읊조리고 화폭에 매화를 그려왔다.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는 한사(寒士)라 칭하는 추위에 피어난 매화를 보며 “스스로 향기로운 덕을 안고 있으니/ 풍설이 몰아침을 시름할까 보냐.”라며 매화의 설한고절(雪寒孤節)을 찬양하였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두고 삼은(三隱)이라 일컬어왔는데, 근래에 들어서서 야은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을 삼은에 포함시키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을 정도로 도은은 당대의 대학자였다.
이러한 이숭인은 매화를 두고“곤음(坤陰)이 힘을 부리는 것 막기 어려워/ 만물이 뿌리로 숨어들어 찾기 어렵네// 어젯밤 남쪽 가지에 흰 송이 하나 생겨났기에/ 향 사르며 단정히 앉아 천심(天心)을 보네.”라고 읊었다.
세상에 매화를 하늘의 마음에 비유하다니 우주 자연의 섭리를 얼마나 철학적으로 멋지게 풀어낸 것인가!
겨울 삼동이 되면 천지에 가득해진 음기와 추위에 짓눌려 삼라만상이 죽은 듯 숨죽인 채 고요함에 빠져들게 된다.
마침내 그 정적이 바닥의 끝자락에 이른 동지를 맞으면, 하늘은 드디어 만물이 다시 소생할 수 있도록 한줄기의 양기를 태동시킨다. 이는 만물을 다시 살리고자 하는 변함없는 하늘의 뜻이요, 천리(天理)인 것이다.
이를 두고 이숭인은 매화 한 송이에 천심(天心)의 향기가 담겨 있음을 읊고 있다. 한마디로 매화를 천심(天心)의 상징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또한 정도전도 “천지간에 음기(陰氣)가 꽉 차 있어/ 어느 곳에서 봄빛을 찾는 담// 기특하기도 해라, 저토록 수척한 것이/ 얼음 서리 물리쳐 내네.”라며 얼음 서리를 물리친 양기의 전령사로 매화를 찬양하였다.
고려를 이어온 조선조에 와서도 문인 선비들은 청정(淸淨)하고 청진(淸眞)한 매화의 고결하기 이를 데 없는 아름다운 기품을 당시의 성리학과 연결 시켜, 미선일치(美善一致)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렇게 고매한 품격을 지닌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매란국죽(梅蘭菊竹)이라 부르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해왔다.
또 소나무와 대나무를 포함시켜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송죽매(松竹梅)의 절개를 찬양하였다. 따라서 선비들은 고결한 매화를 문인화의 소재로 하여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매화 그림엔 까치나 참새를 함께 그려놓고 까치 작(鵲)자나 참새 작(雀)자를 넣어 매작도 라고 하였다.
특히 퇴계 이황은 달빛 머금은 월매(月梅)의 자태에 빠져들고 가슴에 젖어 드는 향기에 취해 밤을 지새웠을 정도로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이토록 매화를 사랑하다 보니 무려 100여 수에 이르는 매화와 관련된 시를 남겼다.
퇴계는 44세 때“막고산(藐姑山)신선님이 눈 내린 마을에 와/ 형체를 단련하여 매화 넋이 되었구려// 바람맞고 눈에 씻겨 참모습 나타나니/ 옥빛이 천연스레 속세를 뛰어났네// 이소(離騷)의 뭇 화초에 끼어들기 싫어하고/ 천년이라 고산(孤山)에 한번 웃음 웃네.”라며 매화를 예찬하였다.
여기서 막고산 산신령이란 살결이 빙설(氷雪)같고 보드라우며 깃털처럼 가벼운 신선을 말한다. 이러한 신선이 하필 눈 덮인 마을에 내려와 매화로 화신하였다 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매화를 청정함에 비유한 것인가.
그리고 매화에 대하여 뭇 화초에 끼어들기 싫어 고산(孤山)에서 홀로 피어났다며 매화의 고고함을 노래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청진(淸眞)함을 상징화하였다.
퇴계 이황과 두향의 매화사랑
이처럼 매화를 극진히 사랑하였던 퇴계 선생이 자신 못지않게 매화를 아주 좋아하였으며 시서예(詩書藝)가 뛰어난데다 목소리까지 청아하고 아리따운 어린 낭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바로 두향(杜香)이란 관기였다.
혹자는 도학군자(道學君子)라 칭하는 퇴계 선생이 무슨 관기와 사랑을 나누었겠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퇴계에겐 그 당시 그만한 정서적 사연이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었다고 할 것이다.
퇴계 선생은 48세 때 충북 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18세의 어린 두향이를 만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은 일찍이 첫째 부인 허 씨가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산후통으로 인하여 한 달 만에 세상을 뜸으로써 27세에 상배(喪配)를 당하였다. 퇴계가 아내와 사별한 뒤 3년째 되던 해에 예안에 귀양 가 있던 권질(權礩)을 찾아갔다.
그때 권질은 이황에게 "집안의 참극으로 정신 줄을 놓아 버린 여식을 자네가 아니면 맡아줄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내 딸을 좀 맡아주게"라며 간곡히 부탁하였다.
퇴계는 그런 연유에 의해 권질의 여식을 계비(繼妃)로 맞이하게 되었다. 권 씨 부인은 정신이 혼미한지라 수시로 난처한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퇴계는 조금도 탓하지 않고 늘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고 보살펴주었으며, 전처의 아들들에게도 친모처럼 잘 모시라고 일렀다. 그런데 아이를 출산하면서 난산으로 인하여 아이와 함께 세상을 뜨게 되고 말았다.
그러한 상처(喪妻)의 애통함이 있은 다음 해에 단양군수로 부임을 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의 참상(慘喪)까지 당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의 고통과 쓸쓸함으로 공허함 속에 애타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토록 애끓는 차가운 바람으로 텅 비어버린 황량한 가슴에 봄바람같이 따뜻한 사랑스런 여심(女心)이 안겨 왔으니, 그 여인의 진정한 위로의 마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날로 쇠약해져만 가는 퇴계 선생의 몸과 마음이 두향의 정성으로 나날이 회생되어 지고, 뜨거운 사랑까지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찾았을 때 단양에 온 지 9개월만인 음력 10월에 풍기군수로 전근발령이 떨어졌으니 이 무슨 여인과의 운명이 이토록 가혹하단 말인가!
둘이 함께 갈 수 없는 당시의 규율에 의해 퇴계는 혼자서 풍기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이는 술상 앞에서 거문고를 튕기면서 작별의 밤을 보내야만 했다.
애절하게 울리는 거문고 소리에 서로가 술잔을 비워내며 헤어짐의 아쉬움과 슬픔을 달래면서, 퇴계가 먼저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라고 시 한 수를 읊고 나서 ‘내일이면 떠나는구나.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구나.’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두향이가 붓을 들어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우는데/ 어느덧 술도 비워 없어지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라며 술잔에 눈물을 떨구었다.
날이 새자 드디어 가슴 깊이 정든 단양을 떠나갈 수밖에 없는 퇴계는 두향이의 가슴에 정이란 한 글자만을 깊이 새겨놓고 무거운 발길을 돌려야 했으며, 두향이는 자신의 정이 오롯이 담긴 수석 두 점과 홍매화 화분 하나를 건네주며 이별의 슬픔을 온 몸으로 삼켰다.
퇴계는 풍기에 가서도 두향이의 따뜻한 보살핌과 정을 늘 잊지 않았으며, 두향이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분매(盆梅)를 애지중지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퇴계 선생은 그렇게 일 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그 다음 해의 9월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가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유수 같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퇴계가 68세에 이르렀을 때 준비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17세의 소년 임금 선조가 퇴계에게 여러 차례나 도와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여 노구를 이끌고 상경을 할 수밖에 없었다.
퇴계는 서울에서 몇 달간 머무는 동안 그 유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선조에게 바치고선 또다시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동안 가까이서 모시던 김취려(金就礪)라는 제자가 스승의 쓸쓸함을 달래드리고자 분재 매화를 선물하였다.
분매를 받은 퇴계는 기쁜 마음에 “신선 같은 매화(梅仙/매선)가 쓸쓸한 나의 짝이 되어/ 객창 깨끗한 꿈길도 향기로웠네.”라며 매화를 반겼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갈 땐 분매를 가져가기가 곤란하여 그냥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제자 김취려는 스승의 분매에 대한 각별한 정을 짐작하고 도산에 계신 스승께 분매를 보내드렸다.
이를 맞이한 퇴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일만 겹의 붉은 먼지에서 벗어나/ 속세 밖으로 와서 늙은 나의 벗이 되었네// 일을 좋아하는 그대가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찌 해마다 빙설(氷雪) 같은 얼굴을 볼 수 있었겠나.”라고 시 한 수를 읊조렸다.
퇴계는 이렇듯 두향이와 김취려가 보내온 매화를 애지중지하며 지내다가 70세에 이른 음력 12월을 맞으며 몸이 많이 위중해지자 옆을 지키는 사람에게“저 분매 좀 옆방으로 옮겨놓아라. 나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민망하구나.”라고 하였다니 병고에 시달리면서까지도 매화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드디어 임종이 가까워지자“저 매화에 물 좀 주어라.”라고 명한 뒤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평안하게 운명하였다.
한편 풍기 군수를 거쳐 고향인 안동의 도산서원으로 가 있는 선생을 그리면서, 단양 강선대에 움막을 짓고 홀로 외로움을 달래며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수절해온 두향은, 선생의 부음을 듣자 4일간을 걷고 걸어 도산서원에 도착하여 꿈에도 그리던 선생을 사후에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살아서는 보지 못하고 선생이 세상을 뜬 후에야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었음이었다. 두향은 선생의 장례가 끝나자 다시 단양의 강선대로 돌아와 남한강에 꽃다운 몸을 던져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이 얼마나 지극하고 처절한 슬픈 사랑이었는가!
바야흐로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두향이 선생에게 보냈던 매화는 지금도 도산서원에 자리 잡고 서서 해마다 봄이 되면 길손들에게 다소곳이 해맑은 미소를 보내고 있으며, 두향의 묘소가 있는 단양의 강선대엔 두향이의 가슴에 지닌 임을 향한 일편단심의 향기가 서리서리 서리어있어 사철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두향이 생전에 선생을 섬기는 마음이 실로 극진하였던지라 퇴계의 후손들은 선조(先祖)의 애인인 두향에 대한 배려심이 돈후 하였기에 묘소를 자주 찾아 성묘하였다고 한다. 퇴계의 십 세 봉사손 이 되는 고계 옹(古溪 翁)은 두향의 산소에 술잔을 드리며 다음과 같이 추모하였다.
강선대의 옛 혼은 그 윽도 한데
나지막한 무덤에 물결이 친다.
개포 가 엔 풀빛도 시름겨운데
달이 뜨면 학들도 날아들리라.
전하는 시와 노래 꽃다운 이름
옛이야기 나누며 잔을 드누나.
무덤을 지켜 달라 부탁하고
돌아오는 뱃길에 해가 지누나.
영조 시대의 문인인 월암 이광려는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면 강선대의 바위도 응당 없어지려니”라고 두향이의 정절을 극찬하였다. 또한 퇴계의 제자로 임진란 때 영의정을 지낸 한산이씨 아계 이산해의 후손들도 스승의 애인이었던 두향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선생의 훌륭한 인품의 덕만이 아니라 두향 자신의 인격 또한 선생과 짝이 될 만한 여인이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왕조시대에 한낱 관기에 불과하였으나 시서악(詩書樂)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품행이 올바르고 지조와 정절이 뛰어남으로써 오랜 세월이 흐른 현세에 와서도 그를 존경하고 칭송하며 그의 묘소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세상의 이치와 인심이 이러하거늘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찌하여 의리와 신의를 저버리고 정심정도(正心正道)를 벗어나 삿된 마음으로 그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인지 걱정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마음이 없으면 봐도 보이질 않는다
우리의 속담에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 는 말이 있다. 국가의 공조직이든 사조직이든 조직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소속된 집단의 존재가치와 존립 목적에 따른 자신의 역할수행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마음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이, 곧 양심을 지키는 길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맡고 있는 본연의 업무에 전심전력하지 않고 엉뚱한 생각에 한눈을 팔게 되면 자연히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 또한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수행을 소홀히 한 결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니 직업적 양심을 저버린 것이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전반에 걸쳐 안전사고에 대한 인식이 모두가 둔해졌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형 사고들에 의하여 안전사고에 대한 충격이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사고의 위험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는 안전 불감증이 사회의 각 분야에 만연될 대로 만연되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고는 사후 수습보단 사전 예방대책이 우선되어야만 한다. 아무리 사후 수습 대책을 잘 세운다 해도 이미 사고가 발생하고 나면 피해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병을 아주 잘 고치는 화타와 편작과 같은 명의가 있다, 한들 병이 나지 않도록 평소 건강관리를 잘하는 것만 하겠는가?
한 해가 다 되어가는 현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되돌아볼 때 극도로 혼란하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금만 관심 있게 살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인하여 사회 전체가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말았다.
우리의 옛 선비들은 동짓날에 ‘구구소한도’를 그리면서 여여(如如) 한 마음으로 인격도야에 힘써왔거늘, 나 같은 소인배는 그저 호박떡이나 해먹을 궁리를 하고 있는 터에 세상을 향하여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 또한 도리가 아닐 것인즉 동짓날을 맞이하면서 용기를 내어 한마디 하고자 한다.
대학(大學)의 7장에 “심부재언(心不在焉)이면, 시이불견(視而不見)하고, 청이불문(聽而不聞)하며, 식이부지기미(食而不知其味)니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질 않고, 들어도 들리질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곧 마음이 있으면 천 리도 지척이요, 마음이 없으면 지척도 천 리인, 것이다. 국가 사회적인 모든 분야의 조직에 몸, 담고 있는 공직자들이 각자 맡은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의 함양은 물론, 정신을 헛된 곳에 빼앗기지 말고 오직 국민의 안위와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항상 떠나지 않아야 한다.
또 어느 분야이든 사안이 중첩될 때는 완급 경중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여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부분에 행정력을 집중하여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행복의 원천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안전 불감증에서 오히려 안전 과민증으로 대전환을 해야만 할 때이다.
동짓날을 맞으면서 간절히 바라건대 우리의 사회가 모쪼록 평화스럽게 안정되고 번영해나가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의 진영 간에 밤낮으로 벌리고 있는 다툼을 자제하고 오직 국익과 국민의 안위를 최우선의 가치로 하여 서로가 지혜를 모아 협력하는 상생의 길을 펼쳐나가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