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싸랑하는 간이역 열분.
원래 10편의 씨리즈로 만들어 모든 에페소드를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최근에 다사랑이 팔도 다치고 이런 저런 우환이 겹치는 바람에 이번달
말까지 내야 되는 금강산 연수에 대한 보고서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면서...
금강산 연수를 다녀와서......
자동차공학과 4학년 김 강
푸르스름한 기운이 양지벌을 물들이고 있는 가운데, 제 6차 어학연수단에 뽑힌 학생들이 하나, 둘씩 속속 둔덕 도서관 현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들마다 마치 초등학교 학생이 소풍을 가는 듯 설레임에 볼이 약간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17일부터 20일까지의 일정으로 이번 연수가 잡혀 있었는데, 적어도 오후 4시 30분까지 동
해항에 도착해서 모든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해야 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나야만
했다. 거의 7시가 다되어갈 쯔음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는 힘차게 동해항으로 출발하기 시
작했다.
금강산관광으로 운행중인 유람선은 총 세척이었는데, 계절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호, 봉래호, 풍악호 가 운행중이었다. 우리 일행은 최고 1천 600명이 탈 수
있다는 봉래호에 탑선하게 되었는데 선원중 상당 인원수가 외국인인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
했다. 스카이 라운지에서 만난 필리핀 출신의 죠엘에게 이유를 물어 봤더니, 이 배는 현대에
서 만든게 아니고, 원래는 카지노 유람선이었다고 한다. 배의 소유회사도 물론 외국인 계열
의 회사였고 말이다. 어찌됐든간에 덕분에 어학연수의 기회도 맛볼수 있는 일석이조의 즐거
움을 떠올리며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선원들은 대부분 가족과 떨어져 있고 동해의 망망대
해를 헤쳐 나가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나 전화로 달래곤 한단다.
갑판위에서 내려다 보는 동해의 파랗고도 신비한 물결이 뱃머리의 양좌우로 흩어지고며 하
얀 물보라를 연출해 냈으며, 수면으로 반짝이는 햇빛들은 버스에서의 긴 여정 때문에 다소
지쳐있던 일행들의 기분을 전환시켜주기엔 충분하였다.
저녁 식사를 선내의 식당에서 먹었는데, 평소 자취생의 본이 되고자 노력을 하고 있던 중
이였으므로 주위의 눈치를 사전에 철저히 무시하고 본능이 지시하는 바대로 먹어댔다. 간혹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이 주위로 다가와 약간 어설픈 우리말로 주문하겠냐고 물어 봤을땐
그나마 얼마 가지고 있지 않던 주머니 속의 달러가 바로 지출되어 버릴까 두려워 함부로 주
문을 하지 못했는데 .... 나중에 알고 보니 식사할 때 주문한 음료는 공짜란다.
밥을 먹고 나서 나와 같은 방을 배정받은 국제학부 1학년생인 종혁이와 학교생활의 애로
점, 영어공부의 방향 등등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시간에도 봉래호는 북녘 땅을 향해 잿빛 바다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이튿날, 우린 아침을 먹고 곧바로 간선에 옮겨타서 장전항(고성항으로 불리워 지기도 한
다.)에 첫발을 내딛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옛되어 보이는 얼굴의 북한측 군복을
입고 부동자세에 무표정으로 서있는 군인이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띄는 빨간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금강산 관광객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 '라고 씌여진 문구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우린 입국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금강산 (한반도 등줄기 윗부분인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백두대간이 한번 멈추었다가 다시 큰 줄기로 뻗어 나가는 굵은 마디에 해당되고
일만이천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봉만학을 이루고 있다. 940여종의 식물이 있고 , 주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비교적 따뜻한 곳이긴 하지만 비와 눈이 많이 오는 지
역) 산행을 시작했다. 만상정 주차장까지 일부구간은 철책으로 드리워져 있었는데, 이 공사
를 하기 위해 많은 북한주민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십여내지 오십미터 정도마다
곳곳에 군인들이 우두커니 서서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의 나이
는 대부분 16~7살이며 의무복무기간은 7년이라고 한다. 왼쪽 버스창문으로 온정리( 금강산
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 조선시대 왕들이 온천을 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할정도로 온천
수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집들은 시멘트로 이뤄 진걸로 봐서 중.상위층 정도가
되어야 이곳에 살 수 있다는 안내원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마을 사람들이 일하는
걸 지켜 볼 수 있었고 지게에 나무를 이고 가는 소년들을 보면서 우리 나라의 잃어버린 옛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지만 한편으론 낙후되어 있는 북한 주민의 삶을 보고
서 같은 동포로서 연민의 정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버스가 약간 가파른 경사를 타기 시작하자 미인송 ( 평균수명이 100 ~ 200년정도이고 높
이는 대략 15~20m 정도.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띄고 있는 소나무과. 원래 만그루 이상이 되
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송화가루를 채취하고 이 목재로 비행기를 만들었기 때
문에 그 때 상당부분 손실되어 지금은 3km 반경내로 줄어들었다. 이 미인송은 전세계적으
로 북한을 포함 세군데밖에 없다고 한다.)
이 날 경로는 만명의 사람과 만가지 사물이 형형색색 들어서 자색을 갖춘다하여 봉하여
진 '만물상' 코스였다. 만상정 주차장에서 내려서부터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었는데 최종
목적지는 '망향대'라는 전망대였다. 해발 1,040m의 거리. 이리저리 험준하게 들어서 있는 돌
들을 보면서 다소 움추려들긴 했지만 일흔둘이라는 연세에 지팡이로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내딛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산을 올라가다 갑자기 쓰러져 산악구조반에 실리어 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그외에도 수많은 노인들의 발걸음속에서, 심지어 가까스로 돌이
지났음직한 아기를 등에 둘러메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가슴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이유
모를 어떤 의무감에 우리는 행진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제일 아쉬운 점은 맘
내키는대로 사진기로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안내원이 들려주는 만물상
의 이곳저곳에 사려있는 흥미진진한 전설과 설화들로 대신 채워 나갔다 . 높이 3미터의 '관
음폭포', '육화암'( 금강산을 사랑하여 자기의 호마저 봉래라 지었던 양사언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육화암'이 아니라 , 건너편으로 바다라보이는 상관음봉 줄기의 바위
벽을 '육화암'이라 한다. 상관음봉 줄기의 바위벽은 길이가 100미터나 되며 모양이 삐죽삐죽
모난 데다가 색이 희어서 달빛 아래서는 틀림없이 육각의 눈송이로 보인다. 그래서 '육화암'
또는 '눈바위'라 불리운다. ) , 세 명의 신선형제가 하늘에 내려와서 금강산에서 놀다가 그
절경에 반해서 그대로 돌로 변했다는 '삼선암', 귀신의 얼굴로 보인다 해서 붙여진 '귀면암',
도끼에 찍힌 듯 측면에 그 자국이 나있다 하여 붙여진 '절부암', 벼랑턱이 말안장같게 생겨
안심하고 쉴수 있다 하여 붙여진 '안심대', 바위틈새로 흐르는 물을 마시면 지팡이마저도 잊
고 가버린다는 '망장천'. 우리들의 전래 민화에 전해져 오는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전해
져 오는 '천선대' 등을 거쳐 제1에서 3 망향대까지 오르는 사이에 안내원으로부터 설명을 들
었는데, 곳곳에 일어나는 진한 운무는 묘한 신비감마저 더해 주었다. 해금강( 금강산은 일호
봉을 기준으로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으로 나뉘어 진다. 우리가 이번 연수에서 가본 곳
은 외금강쪽에 속한 두 개의 코스다. )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망향대에서 실컷 맛
보고 진한 운무가 걷혀지길 간절하게 기다렸지만 기미가 보이지 않아 발걸음을 되돌려 내려
오는데, 만상정 주차장에 다 내려왔을 때쯤에서야 운무가 걷히기 시작해서 너무나 아쉬웠다.
안내원에 따르면 날씨가 맑은 날에는 망향대에서 해금강과 동해을 볼 수 있다고 우리 옆구
리에 바람을 가득 집어넣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 근처에는 북측 안내원 아가씨들과
아저씨들 몇 명이 관강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영미씨 사건 때문에 나는 그 주변
에만 머무르고 그저 대화를 엿듣기만 했는데 지금에 와서야 정말 후회가 된다. 북한 안내원
중의 한 아저씨는 조그마한 무제 연습장에 연필 한자루로 금강산의 이곳저곳을 스케치해두
었는데 관강객들이 그걸 보고 저들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북한은
예술쪽 방면은 일일이 품급을 매겨 놓고 있단다. 참, 한가지 또 빼놓을 수가 없는 부분은 이
번 기회에 '남남 북녀'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장을 진하게 한 것 같
지 않은데, 뽀얗게 하얀 백색의 피부.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기분좋게 해주는 그 시원한
웃음.
뭐, 일행중의 어떤 여학생이 이들은 차출되어 왔기 때문에 북한에서 제일 이쁜 여자들일 것
이라고 말하며 반박하기도 했는데, 알아본즉 차출이 된게 아니라 온정리 마을사람들 중에서
뽑혀서 온거란다. 하하하.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는 만물상의 손짓을 뒤로하고 우린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온정
각 휴게소로 향했다.
온정각 휴게소 바로 옆에 위치한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평양모란봉교예단을 보기
위해서였다. 세계 1, 2위의 서커스가 전부 북한이라는걸 이날 처음으로 알았다. 25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하고 잠시 회의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웬만한 공연의 표값이 그 정도 할것이란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끝에 그 찰나적
고민으로부터 벗어나 표를 사들고 들어갔다.
평양 모란봉 교예단은 문화성 산하의 예술단체로 북의 대표적인 교예단인데 그동안 모나
코 국제교예축전 등에서 대상과 금상을 수십차례 입상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바가 있으
며 , 매년 수십차례 이상의 해외 순회공연도 실시하고 있는 단체이다. 이들 극단배우들은 인
민배우라는 칭호를 듣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연예계 스타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
다.
우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남한의 봉춘 서커스단과 북한의 평양모란봉교예단과 비교하면서
농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막이 열리고 '눈꽃조형'이란 작품으로 시작된 '공중 2회전', '널뛰
기', '장대재주', '봉재주' 등의 연이은 공연장면은 실로 압권이었다. 상당한 높이의 공중에서
연기를 함에도 밑에 전혀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점 때문에 무척이나 놀랐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우레와도 같았던 박수의 여운을 공연장에 남긴채 우린 봉래호로 돌아
왔다.
삼일째, 아침에 일어나 낯선 곳에서의 해돋이를 선상갑판에서 즐기고 싶었지만 날씨가
흐린 관계로 또 한번의 아쉬움을 도로 접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구룡폭포가 우리들의
관광코스다. 어제 만물상 코스에 비해서 펑지이긴 하지만 거리는 무려 이십리나 된다. 신계
사터( 신계사 -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는 명찰이다. 신라
법흥왕 6년 (519)때 보운조사가 창건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
려들과 같이 작전을 계획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를 인솔할 조장이 이번처럼 많은 젊
은이들이 그것도 대학생들이 이렇게 단체로 온적이 한번도 없었고 처음이라서 북한측 안내
원들도 대단히 우리에게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어제 조장이 북한측 안내원들하고 대화에 갹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당부를 한 반면에 오늘
우리를 인솔할 이 조장은 오히려 우리에게 일정범위안에서 많은 대화를 해볼 것을 권고했다
. 아무래도 북한측 안내원들과 대화 몇마디라도 나누지 않는다면 필시 돌아가서 후회할 것
같은 맘이 들어서 오늘은 꼭 짧게나마 말 몇마디라도 건네보리라고 굳게 맘을 다져 먹었다.
신계사터를 뒤로 하고 선담을 지나서 조금 더 가면 구룡연 주차장이 나오는데 , 이 일대
를 '오선암'이라고 한다. 이 오선암 앞에 관광식당인 '목란관'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한끼
먹는 자리값은 서울의 무궁화 다섯깨짜리인 하얏트호텔의 저녁식사 한끼보다도 더 비싸다고
한다. 목란은 북한의 막강한 권력자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 목란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고 북한의 국화도 이 때문에 '목란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국동 캠퍼스에서 5월 정도에 볼
수 있는 목련과 목란이 어떻게 다른지는 나의 짧은 식견으론 알길이 없었다. 가능한한 가이
드 옆에 졸졸 따라다니며 북한사회와 생활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퍼부어 댔는데 ,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귀찮아하지 않고 상세한 설명까지 덧붙여
준 그분께 이 자리를 빌리어 감사의 맘을 전한다. 북한에서는 1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200
원 정도, 북한 돈으로는 2원 16전이다. 우리나라 환율은 시시각각 달라지지만 북한의 환율은
고정적이다. 2원 16전은 김일성의 생일이 2월 16일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일반 노동자들은 한달 봉급으로 50원, 공무원들은 100원, 인민배우( 이들은 하
루 12만원 하는 금강산 여관에서 지낸다. 금강산 여관은 북한에서 우리나라 무궁화 다섯깨
와 비슷한 등급의 호텔을 의미한다. ) 들은 120원정도 고정적인 봉급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조의 버스운행을 책임지고 있는 조선족 출신의 운전기사 영실씨에 따르면 북
한내에서도 암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 얼마든지 암달러가 융통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돈의
가치는 별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꼼꼼히 따져 보니까 남과 북이 엄청나게 경
재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을 절감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담소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는 사이 구룡폭포의 입구라고 볼 수 있는 금강문 ( 금
강문은 큼지큼직한 바위들이 길을 막은 한가운데 기억자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 모습이며
, 돌계단으로 된 층층대를 따라 빠지게 되어 있음. 칠선암이라고 한다. )을 지나는데 가이드
가 웃으면서 이곳을 지날 때 착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통과시 돌이 무너져 내린
다고 하길래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강문을 지나면 막혔던 계곡이 훤히 트이
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옥류동이라 일컬어 지는 곳이다. 옥류동은 물줄기가 구슬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위쪽으로 옛날 옛적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가 실수로
두알의 구슬을 흘리고 간 흔적이 남아있는 연주담이란 못이 나온다. 이 날은 어제 저녁부
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끊임없이 내렸던 관계로 빗물이 불어나 폭포수가 금강산의 계곡 이
곳저곳으로 휘몰아치고 굽이치는 광경을 쉴새 없이 연출해 냈는데 그 소리만으로도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었다. 거기서 기슭을 타고 좀더 올라가면 비봉폭포가 나오는데
이곳은 외금강의 '구룡폭포', '십이폭포', 내금강의 '옥영폭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폭포로 꼽
히는 것이다. 원래는 '상팔담'으로 해서 이번 코스의 최종목적지인 '구룡폭포'를 가볼 심산
이었는데 ,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길이 위험한 관계로 '구룡폭포'쪽으로 바로 발걸음을 돌렸
다. 구룡폭포는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 대흥산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잘 알려져 있다. 대략 삼십미터 정도의 높이로 가늠되어지는데 '상팔담' 위로부터 밑으로
떨어지는 '구룡폭포'의 장엄한 광경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게 하
는데 조금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구룡폭포를 관찰할 수 있는 정자엔 북한측 안내원
아가씨가 두명이 있었는데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말을 건네 보았다. 약간 옛된 얼굴의 그
녀 이름은 박영심. 나이는 22세. 우리나라의 만화 주인공 이름과 똑같다고 농을 건넸더니 얼
굴을 다소 붉히며 자신이 어떻게 만화 주인공 이름과 똑같냐고 반문한다. 행여 오해를 살새
라 영심이라는 만화주인공이 아주 착하고 성실하게 묘사된다고 하니깐 싱글벙글 웃는게 기
분이 좋은 듯 보였다. 주위에 같이 있던 일행중 1학년 두명의 남학생이 같이 참석하게 되
었고 우린 대략 이십여분정도 다른 관광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대화를 나누었다. 대학
생이라는 우리들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사상을 역설하며 일본과 미국의 한반
도 간섭을 격렬한 어조로 비판했는데 그 순간마저도 그녀가 순수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
일학년 중의 한명은 헤어지기가 너무나 아쉬운 나머지 사진을 찍을 수 없냐고 여쭈어 보지
만 자신은 괜찮지만 밑으로 내려가 그걸 선전용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안된다
고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말에 대신 악수를 청하고 손을 흔들며... 일행과 같이 아래
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려오면서 또 다른 북한 안내원인 이영희 , 32세 정도. 잠시 애기를
나누었는데 우리 일행에게 너무나 친절하게 대 주어서 참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번엔 북
한 아저씨와 애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밥에 김치, 국종류 대충 이 세가지 정도로 식사를
하고 퇴근후에는 TV를 보거나 구기종목으로 여가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애기를 나누면서, 나는 이들이 쓰레기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금강산처럼 참으로 때묻지 아니한 순박한 사람들이라는걸 가슴에 와닿게 진하게 느낄수가
있었다. 우리 남한에서는 사회의 지도층 또는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직위에 걸맞는 명
예보단 개인적 욕심을 탐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그게 잊혀진 일로 치부되어 버리기도
하는데 이곳에선 저들마다 개인적인 기준에 따른 명예를 상당히 중시하는걸 느낄수가 있었
다.
아까 잠시 언급했던 우리 조의 차량운전기사 영실아저씨와 나는 막간을 이용해서 많은 대
화를 나눴다. 특히 이곳 온정각 휴게소의 모든 직원 아가씨. 모든 운전기사들은 현대의 방침
에 따라 조선족 출신들이 대부분인데 주로 이곳에서 활동적인 조선족 동포들, 그리고 현지
의 사정, 북한에 대한 조선족 동포들의 생각들에 대해서 여쭤 보았다. 조선족 동포들은 현지
에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다 할지라도 현지사회에 기용되기가 쉽지 않고 또 그에 걸맞는
교육기관도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근래에 들어서 우리 나라의 뜻있는 인사
들이 현지에 대학기관도 만들어 주고 여러 가지 경제적 보조도 해주어서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온정각 상품판매소의 조선족 아가씨는 내가 남한의 대학생이라고 하니 고려대학교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아마도 우리 나라 남대생과 모종의 섬씽이 있었는 듯 하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긴 하지만. 이곳 직원들은 보통 일년 계약제로 일하고 있으며 입국관리소 근처의
콘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엔 도서관과 시청각실이 있어서 퇴근후엔 운
전기사들과 아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국 소설을 읽고 우리나라 비디오도 많이 본단
다. 아가씨들 경우엔 시청각실에서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외국어 공부에도 열심이란다. 한가
지 흠이 있다면 보수는 현지보다 괜찮은 편이나 가족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그리움을 옆
서 몇 장에 다 채울 수 없는 점이라고 한다. 일행이 물건을 구입하고 있는 동안에 아저씨는
버스 안에서 빌린 책을 읽고 있었는데 '백야 3.8'이란 소설이었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한 견
해로 어쩌다가 화제가 옮겨졌는데 운수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는 믿기지 않을만큼 우
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박식한 지식과 상당한 수준의 견해를 지니고 있어서 속으로 무지 놀
랐다. 순간 이 땅의 대학생으로서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우리 나라의 대학생으로서 과연
진정한 지식을 확충해 나가고 어떻게 해야지만 그 지식을 하나의 배움으로 끝내 버리는 죽
은 지식이 아닌 산 지식으로 , 단순한 앎에서 행동으로 옮겨 나갈수 있는지에 대해 잠시나
마 생각해볼만한 계기가 되었다.
금강산의 마지막 여정을 마치고 우린 봉래호로 다시 돌아왔다. 장전항을 떠나는 간선 위
에서 좀전에 떠나온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자꾸만 우리는 무언가를 두고 온듯한 허전
함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허전함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 가슴에 설명할 수 없는 충
만함으로 파생되어진 하나의 그리움 때문이었을거라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삼일째 밤, 우린 다소 늦은 시간대에 간담회를 가졌는데 주변에 손님들이 많이 있었고 배가
롤링현상 때문에 전날보다 흔들거리고 바람이 꽤 매섭게 불고 있었던 관계로 다음 날 버스
안에서 이번 연수의 소감을 발표하기로 하고 삼삼오오 흩어져 각기 이번 여정에 대한 느낌
들을 나눠 가졌다. 우리를 인솔하신 학생처 담당 서성규 교수님께선 우리가 20대라는 나이
에 그것도 학생신분으로 이렇게 금강산에 와본 것을 가슴속에 최대한으로 받아들이라고 말
씀하셨다. 무언가 새로운 곳을 꿈꾸고 경험을 한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희망이란 여행을 통해서만
계속 꿈꾸어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20대는 무언가를 단시간내에 결과적 산물로 일구어
내야 하는 기간이 아니라 30대에 날개짓을 힘차게 펴며 비상하기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생각
하면서 삼일째 여정에 대한 소감을 마친다.
넷째날,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배는 동해항에 정박해 있었다. 선원들의 환송을 받아가며 우
린 동해항을 벗어나 여수로 향하였다. 주로 동해안 일대고속 도로를 타고 내려왔던 것 같은
데 우린 경주에 들러 통도사라는 사찰에 들리게 되었다. 경주하면 석굴암이나 불국사에 대
해선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가보았기 때문에 어렴풋이나마 기억의 단면을 더듬어 보기
라도 할 수 있었지만 통도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통도사 입구쪽엔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
고 늦더위를 식힐려는 듯 많은 사람들이 계곡물에 들어가 있었는데 주변에 눈에 띄는 쓰레
기물들이 생각나니까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금강산이 생각났다. 그때 산에서 내려오면
서 많은 관광객들이 목소리 높여 '우리도 산을 저렇게라도 (반강제적으로라도) 보호해야 한
다'고 주장했던 소리들이 다시 귀에 들려 오는 듯 했다. 통도사 입구에 보면 통도사 부도원
( 신라 15대 , 선덕여왕 , 조율법사에 의해 646년에 창건)이 우리의 발걸음을 환영해 주었
다. 사찰 한가운데로 들어서니까 기와, 연등에 축원문을 써줘서 팔고 있던데 그 가격이 5만
원 정도 하였으므로 종교의 상업적인 면모에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통도사의 가
장 윗쪽 근처의 못 가운데 핑크 색 나무가 곱게 화장으로 치장한 여인의 모습으로 왕래를
반겨주었는데 주변 아저씨한테 물어 보니 그 나무가 '백일몽'이라고 한단다. 일행중에 여학
생 한명과 같이 그 사찰안을 거닐며 대화를 나눴는데 여학생이 말하길 자기는 우리 한국문
화재에 대해서 특히 그 미적 가치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고 단지 주변 풍경과 어울러지는 모
습이 좋다라고 말한적이 있었는데 , 기실 나 또한 학문적으로 비평가들이 정의해 놓은 몇마
디 말 외에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문화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해 나
감으로서 얼마든지 관광자원을 개발하여 외국인이 내한하였을 때 깊은 인상을 새겨둘 수 있
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중에 한 남학생이 북한 안내원하고 이야기를 하던 도중
에 금강산으로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오니까 북한 안내원이 의아해하면서 우리 나라에는
이런 좋은 데가 없냐고 묻더란다.)
조만간 속초에서 출발하여 장전항까지 이어지는 항로를 개발하고 장전항 부두 쪽에 호
텔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가이드를 맡은 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는 금강산을 다 보
고 왔다고 말할 수가 없다.( 금강산은 총 22개의 등반코스가 있고 우리가 가본곳은 겨우 두
군데에 불과하니까) 다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특히 내가 아쉬워 하는 부분은 금강산 연수
를 가기전에 각 조별로 충분한 사전지식을 쌓아 보지 못했다는 점인데 다음번 어학연수부터
는 이런 부분이 학생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참여로 개선되었으면 한다. 내가 금강산 연수를
갔다온 직후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게 소감을 물어 오는데, 그들에게 난 이 딱 한마디만 할
뿐이다. "금강산은 말 그대로 금강산이다" 라고........
그렇다고 하여 내 말의 본의가 아무것도 얻질 못하고 왔다는 소리는 결코 아님을 주지해
주길 바란다. 단지 그것을 이 여백의 공간에 늘여 놓고 내가 이를 산 지식으로 옮기는 일에
게을리하게 될까봐서 쉽사리 말문을 열지 않는 까닭에 연유함이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길 바
란다.
난 그렇게 할 것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스무개 경로의 등반을 언젠간 해볼 것이며, 언젠
간 나의 반쪽과 장전항의 여관에서 , 혹은 내 후손들의 손을 마주잡고 아직도 가시지 않은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서 가볼 것이다.
끝으로 신분증 분실 때문에 하마터면 금강산 연수단에 합류하지 못했을 나를 위해 보증을
서주셔서 기꺼이 동참시켜준 서성규 교수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을 올리며 이만 끝을 맺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