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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3회 교토·시가·후쿠이②
나는 은사를 대신하여
호수의 나라 동지들을 격려했다
첫 시가 지도
호수의 나라 시가에 ‘하마오쓰반(班)’을 발족한 때는 1956년으로 이것이 시가현의 첫 광포 조직이었다.
3년 뒤 1959년 3월 23일, 당시 총무인 이케다 선생님은 지도를 위해 처음으로 시가를 방문했다. 확신에 넘치는 어서강의를 비롯해 회원의 집과 숙소, 역 대합실이나 플랫폼 등에서 만나는 벗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려를 보냈다.
선생님은 그때의 심경을 ‘수필 신·인간혁명’에 이렇게 썼다.
“(도다) 선생님이 가지 못한 곳에 내가 대신 파견됐다는 결의로 소중한 동지를 격려한 일이 참으로 그립다.”
은사가 서거한 지 약 1년, 이케다 선생님은 불이(不二)의 제자로서 시가의 천지에 발을 내딛고 존귀한 동지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3·23’은 ‘시가 사제 원점의 날’의 연원이 되었다.
비와호 페스티벌
선사(先師)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은 저서《인생지리학》에서 드넓게 펼쳐진 비와호가, 아름다운 후지산과 더불어 일본의 ‘쌍미(雙美)’로서 ‘전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호수가 특히 장래의 국민인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세계로 웅비하는 기개를 함양한다고 말했다.(《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전집》제1권, 제삼문명사)
은사(恩師) 도다 조세이(戶口城聖)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의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애제자 이케다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이사쿠, 언젠가 비와호 근처에 청년연수원을 만들고 싶구나. 마키구치 선생님도 기뻐하시겠지.”
이케다 선생님은 선사와 은사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 신시대의 젊은 지도자를 육성할 성(城)을 비와호 근처에 만들겠다고 서원했다.
그리고 1971년 9월 5일, 서쪽으로는 비와호가 바라보이고, 동쪽으로는 이부키산이 우러러보이는 마이바라의 땅에서 비와호연수원(지금의 시가연수원)이 탄생했다.
창가 삼대(三代)의 사제 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연수원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광포의 미래를 의탁할 청년들과 여러 차례 대화하고 거듭 훈도했다.
9월 5일 개원식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기념식수와 기념촬영을 열어 멤버들을 격려했다. 개원을 기념해 특설무대를 마련한 정원에서 개최한 ‘비와호 축제’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간이음식점을 돌며 벗에게 말을 건네고 중등부원을 격려하는 장면도 있다.
무대에서는 시가의 전통예능을 선보이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고등부원들은 ‘비와호 주항의 노래’를 합창했다. “고맙습니다. 좋은 노래군요. 다시 한번 다 함께 부릅시다.” 라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환희의 합창을 거듭했다.
이날을 ‘제1회’로 정하고 명칭도 ‘비와호 페스티벌’이라고 바꾼 이 행사는 해마다 시가의 전통 행사로 계속 개최하고 있다.
훗날, ‘미래제’로 명칭을 바꾼 뒤로는 시가현의 미래부원이 한자리에 모여 성장을 서로 다짐하는 정기 행사로 발전했다. 현재 시가에서는 ‘창가패밀리대회’에 그 의의를 담아 혼을 계승하고 있다.
연수원이 자리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부인부 중심자로 활약한 하야시 에미코 씨(비와호왕성현 부인부 주사)는 페스티벌 등 연수원에서 개최하는 여러 행사를 음지에서 계속 지원했다.
“연수원을 개원한 때는 ‘언론문제’가 일어난 직후로, 사회에서는 학회에 대한 몰이해로 계속 비판을 받은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이웃 사람들을 많이 배려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씀씀이에 지역의 반응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모두 페스티벌 등의 행사를 기뻐하고 지역의 유력가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15권 ‘개화’에는 신이치가 ‘비와호 축제’ 등의 행사에 참석해 “몸소 지역과 더불어 이웃 사람들과의 교류에 힘썼다. 그리고 각각의 행사가 지역의 전통 행사가 될 수 있도록 기대했다.”고 씌어 있다.
하야시 씨는 “선생님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나 시가연수원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지역주민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몸소 이웃 우호의 길을 크게 열어 주셨습니다.” 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어머니의 노래’ 발표
제29권 ‘상락’에는 1978년 10월 22일에 개최한 제8회 ‘비와호 페스티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새로운 부인부가(歌) ‘어머니의 노래’가 탄생한 배경이 씌어 있다. 이 ‘노래’를 처음 선보인 무대가 바로 이 비와호 페스티벌이었다.
소설에는 본디 신이치가 이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도쿄에서 중요한 회합 등이 열려, 아내 미네코와 장남 마사히로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고 씌어있다.
행사에 참석한 미네코는 신이치가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그래서 저에게 ‘나 대신 가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셨기에, 갑작스럽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그리고 미네코는 신이치가 얼마나 시가 동지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를 말하고, 어제 막 완성된 부인부가(歌) ‘어머니의 노래’를 시가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들려드리라고 해서 테이프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노래가 흐르고 모두 감동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었다. 노래가 끝나자 미네코는 신이치가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에 어떤 마음을 담았는지 전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즐거운 가정의 성(城)을, 지역의 성을 활기차게 지키고 발전시켜주기를 기원 드리며,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미네코는 운동장을 돌며 출연자들을 격려했다. 그러자 어느 노부인이 “다카시마에서 왔습니다!” 하고 외쳤다.
당시는 제1차 종문사건이 한창인 때로, 비와호 서북부에 있는 다카시마는 학회를 비방하는 악랄한 종문 승려에게 시달린 지역이었다.
미네코는 노부인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힘주어 격려했다.
“다카시마 여러분이 보내주신 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괴롭고 분하실지 회장님도 잘 알고 있답니다. 부디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분발해주세요. 무엇이 정의인지 앞으로 반드시 밝혀집니다. 저도 진지하게 제목을 보내겠습니다.”
3년 반이 지난 1982년 5월, 이케다 선생님은 다카시마 대표 멤버들을 만나 혼을 불어넣는 격려를 거듭했다.
다카시마 동지는 고난에도 지지 않고 전진했다. 그리고 그해 6월 6일, 다카시마본부의 문화제를 개최했다. 본부의 멤버 대다수가 출연했으며, 관객 1200명이 대부분 우인이었다. 기쁨과 결의가 넘치는 개가(凱歌)는 대화확대의 파동이 되어 현재 다카시마본부, 기타타카시마본부의 2개 본부 체제로 발전했다.
제8회 ‘비와호 페스티벌’을 개최할 당시 시가현부인부장을 맡은 우에시마 가즈코 씨(시가총현 부인부 주사)가 이렇게 말했다.
“참석할 예정이던 이케다 선생님이 오실 수 없게 되어 확실히 모두 낙담했습니다. 그러나 대신해서 달려와 주신 사모님의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압도되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사모님은 멤버들 앞에서는 한 사람 한사람을 감싸 안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무대 뒤에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건 저 분들에게’ ‘이건 저 식순자들에게’ 라며 적확하고 신속하게 지시하셨습니다. 잇달아 격려의 손을 쓰시는 모습에서 이케다 선생님을 대신해 어떻게든 동지에게 용기를 북돋우려는 진심과 기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도 1981년 11월 23일, 5년 만에 연수원을 방문해 시가의 새로운 여명을 선언하셨습니다. 이튿날인 24일에는 두 차례에 걸쳐 개최한 자유근행회에 참석해 “여러분이 용감하게 광포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쁩니다.” “거듭 창제하고 창제해 복운 넘치고 행복한 인생과 가정을 구축하기 바랍니다.” 하고 시가현에서 모인 벗 2500명을 격려했다.
시가는 혼신의 힘을 다한 스승의 격려를 가슴에 품고, 고난을 이겨내 승리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벗은 설레는 마음으로 우호의 연대를 넓혀 지역과 사회를 희망의 빛으로 비추고 있다.
<기고> 일본 제일의 명랑한 위대한 시가를 건설!
도리이 다모쓰 시가총현장 / 고야마 히로코 시가총현부인부장
1976년 2월 16일, 이케다 선생님은 오쓰회관(당시)에서 “시가여, 일본 제일의 명랑한 위대한 시가를 건설하라!”는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포를 위해, 학회 활동을 위해 아낌없이 땀을 흘리자고 강조하셨습니다.
시가의 광포는 초창기 이래, 동지가 사제공전(師弟共戰)으로 대투쟁하여 강하고 크게 열렸습니다.
1978년 10월 22일, 제1차 종문사건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속에서 개최한 전통의 비와호 페스티벌에는 선생님을 대신해 사모님이 참석하여 ‘어머니의 노래’를 처음으로 발표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신이치는 가사에서 부인부들을 ‘작은 태양’으로 표현했다. 이 페스티벌의 주제는 ‘태양과 함께’이다. 미네코는 신이치와 시가 동지의 마음이 통했다고 느꼈다.”(제29권 ‘상락’)
회합장소에서 사모님은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은 다카시마 동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1990년 10월 22일, 선생님은 후쿠이로 가는 열차 안에서 다카시마회관에서 삼색기를 흔드는 동지에게 “다카시마성 / 당당하게 펄럭이는 / 삼색기 / 열차 안에서 바라보며 / 만세를 외치노라”라는 시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일본 제일의 비와호 근처에 있는 시가연수원에서는 거듭 사제서원의 정신을 남겨주셨습니다.
시가문화회관에서도 처음 방문한 1995년 10월에 멋진 보름달이 빛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꿈의 나라 / 비와호를 비추는 / 보름달이 / 시가는 불국토라며 / 휘황찬란하게 떠오른다”고 읊으셨습니다.
그리고 “불법은 승부다. 싸움을 시작한 이상 절대 지면 안 된다.”고 지도해주셨습니다.
시가문화회관 방문 25주년인 올해, “모두가 전진! 모두가 인재! 돌격25! 시가 꿈의 나라 확대운동!!”을 슬로건으로 하여 절복과 홍교로 행복한 창가가족을 확대해 지역에 열린 전통의 르네상스운동을 의기 드높이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시가의 이케다 문하는 다음 10년을 여는 확대의 실증으로 스승께 승리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후쿠이 사람들에게는
잠재된 강인한 불굴의 정신이 있다
특별한 추억
제17권 ‘푸른 들판’을 펼치면 광포의 스승과 후쿠이 동지가 읽은 수많은 원점을 배울 수 있다.
1973년, 유럽을 방문해 토인비 박사와 대담 등을 마친 선생님은 귀국하고 아흐레 뒤인 6월 5일에 다케후시(당시)에서 개최한 후쿠이현 간부회에 참석했다. ‘푸른 들판’에는 이때 방문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아울러 선생님은 “후쿠이에는 특별한 추억이 있다.”며 후쿠이를 생각하는 마음과 그때까지의 후쿠이 방문을 회상하고 그 광포의 발자취를 언급하며 ‘미래의 지침’을 제시했다.
소설에는 후쿠이현이 여러 차례 재해를 입은 사실을 소개하고 “신이치는 그 비참한 재해를 생각하면 몹시 애처로웠다. 또 불법(佛法)에서 설하는 ‘국토’의 숙명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언급하며 동지의 사명을 말했다.
“후쿠이 사람들은 연거푸 덮친 재해에 지지 않고 감연히 일어섰다. 신이치는 거기서 후쿠이 사람들에게 잠재된 강인한 불굴의 정신을 느꼈다. 그 사람들이 진실한 불법(佛法)에 눈을 떠 광선유포를 위해 분발한다면 자신을 인간혁명하고 나아가서는 ‘국토’의 숙명마저 전환케 할 것이 분명하다.
성훈에는 ‘화(禍)도 전환되어 행(辛)으로 되리라.’(어서 1124쪽)는 말씀이 있다. 숙명을 전환하기 위한 묘법(妙法)이다.”
1959년 3월 24일, 스승은 그 새로운 역사의 막을 열겠노라는 결심을 가슴에 품고 후쿠이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다케후에서 연 지도회에서는 <시조깅고전답서>(어서 1143쪽)를 강의했다. “이 신심을 수지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나는 단언하고 싶습니다.”라는 외침이 벗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듬해 1960년 2월 7일 밤, 선생님은 교토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가나자와로 향했다. 도중에 쓰루가역에서 정차하는 시간이 있었다.
현지 동지들은 선생님을 뵙고 싶다며 한밤중의 얼어붙은 겨울 날씨 속에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멤버임을 알아차린 선생님은 고민했다. ‘푸른 들판’에는 그때의 심경이 밝혀져 있다.
“밖은 추울 텐데요. 그런데도 모두 지도를 구하러 모였습니다. 훌륭한 구도심입니다. 그 진심이 존귀하고 고맙습니다. 꼭 만나서 한 사람 한사람을 끌어안듯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나가면 어떻게 될 까요….”
자신이 나가면 분명 모두 환호성을 지르고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신이치는 숙고한 끝에 다른 승객을 배려해 수행한 간부에게 전언을 부탁했다. 이윽고 열차가 출발했다. 선생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 뒤로 선생님은 후쿠이를 방문할 때마다 쓰루가역에서 기다린 ‘구도심 넘치는 벗’의 일을 이야기했다.
사명감에 불타는 후쿠이 동지는 그 뒤로도 홍교 확대를 위해 힘썼다. 그리고 1961년, 대망의 후쿠이지부가 결성되었다. 1964년 12월에는 후쿠이, 에치젠, 쓰루가의 3개 지부로 이루어진 후쿠이총지부가 탄생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965년 2월, 선생님은 두 번째 후쿠이 지도에 나섰다. 그리고 1967년 8월, 본부체제로 바뀌고 나서 개최한 ‘후쿠이본부 간부회’에 참석해 ‘무의왈신(無疑曰信, 의심이 없음을 신이라고 한다.)’에 관해 말했다.
1972년 3월에는 쓰루가시립체육관에서 동지 3500여명과 기념촬영을 했다. 그때, 선생님은 현실에서 생활하는 곳을 떠나 다른 어딘가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끝까지 분발해 진실한 불법의 힘을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분투하자고 외쳤다. 또 1년 뒤에 방문하겠다고 약속하고 전진의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스승이 다섯 번째로 후쿠이를 방문한 1973년 6월 5일, ‘후쿠이의 날’의 연원인 이날에 후쿠이현 간부회를 개최했다.
이 날을 목표도 동지는 지역광포를 위해 꿋꿋이 달렸다. 그리고 선생님의 방문이 결정되고 나서 대블록(훗날 지구) 1세대 홍교의 결실을 맺었다. 광포를 위해 홀린 땀으로 멋진 승리의 무지개를 만들어 상쾌하게 스승을 맞이했다.
<기고> 청년이 빛나는 후쿠이 신시대를 향해
가이자키 도모유키 후쿠이현장 / 호소카와 미키 후쿠이총현부인부장
‘얌전하다. 소극적이다.’라는 후쿠이현 사람들의 기질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후쿠이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 ‘상식’을 깨주신 분이 바로 이케다 선생님이었습니다.
6·5 ‘후쿠이의 날’의 연원은 1973년 6월 5일에 개최한 후쿠이현 간부회입니다. 선생님은 여러 차례 큰 재해를 당하면서도 불요불굴(不德不屈)의 정신으로 일어선 후쿠이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니치렌 대성인 불법으로 반드시 이 향토를 본질적으로 대혁명할 수 있다고 나는 선언합니다.” 하고 용기를 불어넣는 성원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디 후쿠이 사람들의 넘치는 활력을 살리고자 ‘후쿠이 르네상스’를 이룩하자 외치셨습니다.(소설 《신·인간혁명》 제17권 ‘푸른 들판’)
그 뒤, 이 영원한 지침을 원점으로 후쿠이 광포는 황금의 발자취를 새겼습니다.
제1차 종문사건의 발단지 중 하나인 후쿠이는 악승에게 유린당한 괴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그 가장 괴로운 시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 선생님의 격려로 동지들은 참고 견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1990년, 선생님은 9년 만에 후쿠이를 방문해 “여러분은 멋지게 승리했습니다!” 하고 용기 넘치는 ‘개가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올해는 30주년의 가절을 맞았습니다. 최근 후쿠이는 ‘행복도 순위’에서 몇 번이나 일본 1위에 빛나는 동경의 땅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써주셨습니다.
“나는 후쿠이 벗들과 함께 증명했습니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미래는 자신의 손으로 연다. 인재의 힘을 끌어내 새로운 지혜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곳이 번영한다.”(2018년 9월호 ‘펌프킨’)
우리는 ‘청년이 빛나는 후쿠이 신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향토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짊어질 끝없는 ‘인재의 푸른 들판’을 열어 가겠습니다.
향토 르네상스를
‘푸른 들판’에는 신이치가 다케후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아이를 데려온 부인부원과 몇몇 고적대원 등 만나는 벗을 잇달아 격려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오후 4시 반부터 시작하여 분위기가 무르익은 현간부회는 어느덧 신이치가 지도할 차례가 되었다. 신이치는 후쿠이의 역사를 들어 후쿠이 사람은 긍지와 기개가 넘치고 우수한 힘이 있다고 언급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후쿠이현은 ‘보수적인 왕국’이라 불려 얌전하거나 소극적인 성격이 마치 이곳 후쿠이현 사람들의 특성인 것처럼 보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후쿠이 사람들의 본디 성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대부터 지닌 긍지와 기개 그리고 실력이 현대에도 맥맥히 저류를 이루고 있어, 조건만 갖추면 멋지게 그 꽃을 피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보수적인 왕국’이라 불리는 현실을 전환해 활력을 되찾을 길은 무엇인가. 대성인은 ‘묘(妙)란 소생의 의(義)이고’(어서 947쪽)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생명의 대법인 니치렌 대성인 불법으로 이 향토를 본질적으로 대혁명할 수 있다고 나는 선언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용기와 활동에 달렸습니다.
아무쪼록 ‘후쿠이의 르네상스를 반드시 성취하겠다.’고 서로 맹세하며 용감하게 전진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찬동과 결의에 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계속해서 신이치는 도쿠가와시대 말기에 후쿠이 지방에서《난학사시(蘭學事始)》의 저자 스기다 겐파쿠와 난학의 진흥을 위해 힘쓴 하시모토 사나이 등이 배출된 예를 들며 이렇게 강조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후쿠이현은 잠재력이 넘치는 지역적 특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향토에서 커다란 장래성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과거의 ‘불교왕국’을 새롭고 진실한 ‘불교왕국’으로 다시 만드셨으면 합니다.”
‘묘법으로 향토의 르네상스를!’이라는 스승의 사자후(師子吼)는 후쿠이 제자의 서원이 되어 생명에 새겨졌다.
신이치는 준비한 원고를 마치자 합창단과 역에서 만난 고적대 멤버 등에게 간담하듯 말을 건넸다. 1960년에 쓰루가역에서 신이치를 기다린 멤버들에게는 “여러분과 만날 수 없었던 만큼 그날 밤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진심을 말하며 거듭 격려했다.
끝으로 신이치는 ‘다케다부시’를 지휘하고 후쿠이 동지를 격려했다.
이튿날 6일, 신이치는 총합본부장인 다야마 가쓰지의 집을 방문해 거듭 대표 간부를 격려했다.
여자부이자 직원인 가쿠다 미야코 씨(후쿠이총현 총합부부인부장)는 당시 이케다 선생님이 동지를 격려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선생님은 저희 얼굴을 보면서 ‘함께 근행합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을 본존님께 확실하게 기원해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신 다음 함께 근행을 해주셨습니다.”
훗날, 가쿠다 씨를 비롯한 멤버는 선배에게서 “선생님은 피곤하신데도 불구하고 후쿠이 광포의 미래를 위해 청년부인 여러분도 불러 근행을 해주셨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후쿠이를 생각하는 스승의 마음, 청년에 거는 기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심을 끝까지 수지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승리자입니다
“저도 1972년 기념촬영 때 선생님이 ‘금은 어떤 역경에도 금’이라는 예를 들어 ‘여자부는 복운을 쌓으세요.’라고 말씀해주신 지침을 가슴에 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디에 있더라도 선생님의 제자답게 빛나자고 결심했습니다.
후쿠이는 제1차 종문사건 당시 일찍부터 비열한 종문 승려들이 학회에 가하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거듭되는 격려, 그 중에서도 1973년 ‘묘법으로 향토의 르네상스를!’이라는 지침과 후쿠이현 사람들의 기질을 이야기하며 멤버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셔서 힘을 내어 꿋꿋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1981년 11월 24일, 반전공세의 간사이 지도에서 후쿠이의 다케후문화회관을 방문한 이케다 선생님은 벗에게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심만은 그만두면 안 됩니다. 신심을 끝까지 수지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승리자입니다.”
“사회는 착실하게 나아간 사람이 최후에는 승리한다.”
스승의 격려로 후쿠이의 벗은 성실하고 착실하게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평화·문화·교육 운동에도 힘을 쏟아 벗이 학회를 깊이 이해하고 신뢰와 공감의 유대를 넓혔다.
선생님은 사랑하는 후쿠이 동지에게 보낸 장편시 ‘영원한 상승 간사이를 찬탄한다’에서 이렇게 외쳤다.
“‘향토 르네상스!’를 위해 / 정의로운 지역광포에 앞장선 / 후쿠이의 성실한 현자들이여!”
지금 후쿠이의 벗은 스승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개가를 울려 퍼뜨리는 사명에 불타오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항상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