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여행객에게 최악의 날씨는 비가 오는 것이다. 그날 하루는 그저 무료하게 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이 꼭 그런 날이다. 그런데 오늘은 비뿐만 아니라 기온도 어제와 다르게 급강하 하여 겨우 4도를 오르내린다. 창을 열자 추적이는 비를 뚫고 오싹한 한기가 확 달려든다.
일기예보로는 로키산 아래 동네는 비가 아니라 눈이 온단다. 여름이 코앞인데 그곳의 예상 적설량이 무려40cm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폭설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로키산은 그런 일이 흔하다고 한다. 위도는 겨우 40도 정도이나 워낙 고지대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 볼더가 해발 1600m다. 말하자면 우리의 태백산 꼭대기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셈이다.
<창밖으로 본 눈이 오는 풍경>
그제 등산한 곳이 해발 1900m 정도니 거의 한라산 정상을 오른 셈인 것이다. 이러다 이번 여행에는 로키산을 오르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눈이 길을 막으면 차량 통행이 불가할 테니 말이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창으로 제일 먼저 시야로 들어오는 것이 동네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로키산맥이다. 낮은 산 뒤쪽의 고산엔 늘 하얀 만년설이 반짝거린다.
만년설을 처음 본 것은 서부 유럽을 여행할 때의 알프스에서였다. 버스를 타고 이탈리아로 향하던 중 멀리 산 위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만년설을 보았다. 아주 멀리서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처음 본 만년설이라 잔뜩 흥분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마침내 며칠 후 케이블카를 타고 몽블랑의 엄청난 만년설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다. 그때의 흥분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자동차 번호판에 로키산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많은 여행객이 만지고 밟아 색깔까지 더러 누렇게 변한 만년설 한 자락을 처음으로 만지기도 하고 밟아보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다시 만년설을 못 볼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로 일본 여행에서도 만년설을 보았고, 알래스카에서도 보았다. 특히 미국의 로키산맥은 길게 남쪽으로 이어져 내리는 내내 산 정상은 모두가 만년설로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늘 보는 만년설이 되어서 그저 그런 모양이라고 지나치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창가로 다가가서 왼쪽의 로키산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희한하게도 늘 보는 만년설인데도 아침에 올려다보는 만년설은 싫증이 나지를 않는다. 물론 낯선 풍경이기도 하거니와 멋진 그림이기도 해서 올려다보는 재미가 별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어린 시절 문지방에 올라서서 쳐다보던 동네 앞산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정겹게 만년설이 다가오기도 하는 것 같다.
로키산은 콜로라도 주의 상징으로 자동차 번호판에도 그려져 있다. 미국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는 세금을 포함해서 대부분이 주정부의 권한이다. 그러니 자동차 번호를 부여하고 번호판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당연히 주정부의 권한이다. 그러다보니 각 주마다 자동차 번호판에 제각각 주의 상징을 넣어 얼른 구별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콜로라도 번호판에는 로키산이 그려져 있고, 하와이는 무지개가 그려져 있다. 워싱턴 주는 가문비나무가 번호판 한가운데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로키산 정상>
로키산은 눈이 많으면 아예 길을 통제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면 정상 코앞까지 멋진 풍광을 즐기며 차량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곳에는 주차장이 잘 마련되어 있고 멋진 산장 매장에서는 커피며 각종 기념품을 팔고 있다. 그곳에서 정상까지는 걸어서 오르게 된다. 정상까지 곧게 뻗은 계단을 올라가는데 거리가 약 2~300m 정도였던 것 같다.
걸어 오르는 거리는 백두산 정상 부근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백두산도 대부분을 차로 오르고 마지막 정상을 오르는 곳만 300m 정도 걸어 올랐던 기억이 난다. 어떻든 겨우 그 정도의 거리인데도 로키산 정상 부근이 3600m나 되는 고산이라 호흡이 거칠어지기도 하는 곳이다.
창밖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비가 그칠 줄을 모른다. 거기에 기온까지 떨어지니 오늘은 하는 수 없이 집에만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일기예보는 뇌우와 우박까지 올 수 있다고 하는 터라 더욱 그렇다. 건조한 사막 지역에 이렇게 종일 비가 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하기야 건조한 사막 지역에 비가 자주 오면 건조하다고 하거나 사막이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날은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타고 등산을 하던 사람들이 종일 집에만 있다는 건 더러 고역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도 한참 달리기를 즐기던 때는 비가 오면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뱅글뱅글 뛴 적도 있었다. 물론 자동차 매연이 염려스러워 만족할 만큼 달리지는 못하므로 집으로 들어갈 때는 지하주차장에서 집까지 20층 계단을 뛰어오르기도 했었다.
마침내 집 앞에 이르러 숨이 턱까지 차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감을 느끼곤 했었다.
비가 오고 기온이 급작스레 떨어지니 집앞 도로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다. 어쩌다 지나는 사람이 보일 때가 있기는 한데 그럴 때마다 그들이 우산을 쓰고 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우산을 쓰고 갔다면 그는 틀림없이 백인은 아님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