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지기님 안녕하세요
이것은 추측인데 경북 북부지역 전체가 신라 김씨 부족의 세력안에 있었지 싶어요.
신라 초기는 박씨 석씨 왕이 먼저 있었고 ,미추왕 전후로 신라 김씨들이 신라의 왕권을 잡았다고 추측해 봅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진한의 전신인 신라인들이 마한과 언어와 풍습이 달랐고 벼농사를 지을줄 몰라 농업기술자를 마한에서 보내주었다는 기록과 신라의 학자 최치원은 만리장성을 쌓는 고된 노역을 피해 만리장성 강역의 연나라 사람이 신라 유민일 것이다 주장하기도 합니다.
초기 신라인들은 낙랑등 한사군 유민이었다는 기록이 있고,그 당시 시대 상황이 흉노의 분열로 인하여 남흉노가 한나라에 귀순해 왔다는 설,흉노와 선비가 대규모로 통혼하며 집단 융화되었다는 기록,중국 한나라가 이이제이 전략으로 이 선비 흉노 집단을 고구려 접경에 이주시켜 한사군에 편입시켰으리라 추측하고,한의 쇠락과 고구려의 강성기의 변화의 시기에 신라로 내려와 6부촌 비슷한 것을 만들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현재에도 신라김씨 본관이 경북 북부지역 그 세력권에 포진해 있습니다.
안동 권,신 안동 김,구 안동 김, 의성 김, 선산 김씨등.
처음에는 대구 북쪽 의성 근방에 많이 모여 살다가 안동의 큰강 낙동강,예천,영주의 내성천 등 고구려 경계로 진출하였으리라 추측해 봅니다.주요 전탑 5개 중에서 3개가 안동에 있는데 이런 전탑은 투후 김일재의 본거지인 감숙성에도 많고 용성문화가 발달한 중국 조양 에도 많다고 들은거 같습니다.중국에는 한번 홍수가 나면 진흙이 풍부했다고 합니다.북쪽 황하강은 서해로 흘러오는 과정에서 태산에 막히고,남쪽 양자강 진흙 뻘층이 중국 남부 성급 도시들을 삼켰는데 수천년이 지나도 뻘층 도시유물이 발굴해 보니 남아 있더라고 합니다.물도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전탑 문화도 한국에는 몇개 없는데 중국에는 흔하게 많은걸로 보아서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김일재의 후손들이 산동성 웨이하이 근처땅을 봉지로 받았는데 그곳 사람들이 금성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근방에 문등 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중국 학력고사 1등 교육 도시라고 합니다.또 문등 탕씨가 있는데 투후 김일재의 후손들이 중국 신나라 왕망이 패했을때 한반도로 도망칠때 김씨를 탕씨로 바꿔서 숨어 살았다고 하며 김씨를 만나면 한 일족이라고 반가워 한다고 합니다.김병모 교수,또 재야 사학자 김재섭 선생도 휴도왕의 첫째아들 김일재의 후손이 신라김씨,둘째아들 김윤의 후손이 김해 김씨 설을 재기하기도 합니다.((신라 라는 국명을 왜 신라 김씨들이 사용했을까 유추해 보니,신라 통일을 이룬 문무왕 비석에 조상의 뿌리를 투후 김일재로 기록했으며,이종사촌인 왕망이 이종사촌간인 김씨 세력과 한나라를 접수해서 세운 나라가 신나라인데,옛날 선조들이 신나라를 공동 경영한 경험이 있으므로 신라 한자어 그대로 해석하면 옛날 신나라를 재탄생시겼다.이어 받았다.는 뜻이 되고.
라(羅)는 한자 뜻이 그물,실을 꼬다,까다,실을 잣다.이어받다.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한가족이다.는 뜻이 파생되어 나올수 있으므로 연관이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삼국유사등에도 신라 김씨 출현 설화에도 신라 왕성의 북서쪽 계림에서 황금색 탄생 설화가 있는데
넓게 해석해서 북서쪽 방향이면 신라김씨 주둔지인 경북 북부지방이며.청도나 경산쪽 방면에서 이서국인가 압독국 부족이 쳐들어 왔을때 신라 왕궁을 도와준 대나무 잎 군사도 경북 북부 김씨 기마군단이었다는 뜻일수도 있고,김유신이 자기 후손들의 안위에 대해 혼령으로서 미추왕 혼령에게 하소연 하는 혜공왕때 설화도 신라 왕실의 확실한 개척자인 경북 북부출신 미추왕 신라김씨 창업주에게 하소연 하는 내용이라고 추측합니다.
신라김씨 여진 청나라 시조설도 , 안동 대도호부((안동 대도호부 위치는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의 행정 중심지) )자리 뒤에 산이 있는데 오랜옛날부터 동성이라는 큰성이 있었으며,현재 동네 이름이 城津(성진)골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서 이 마을에 동성이 있었으리라 추정해 봅니다.동성 옆에 국보 16호인 전탑이 있는 법흥사라는 통일 신라시대때 건립된 절이 있는데 ,함보(큰뜻을 펼치려는 뜻을 상자속에 감추어 놓은사람)가 이 절에서 어떤 큰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추정해 봅니다. 권행의 아들로 추정되는 여진족 시조 함보의 아들이 극수(여진족 추장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 인데 극수(克守)의 한자 뜻은 끝까지 지킨다입니다.함보는 조상의 뿌리가 신라 김씨 계통이며 이를 잊지 말라고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안동 지평 ,이곳 지형이 북쪽 영주에서 만나는 안동댐과 동쪽 영양에서 오는 양쪽 물길이 만나는 극수입니다.안동의 또 다른 명칭이 영가(
永嘉)인데,(영)자는 두 물줄기가 분기된 모양을 본뜬 상형자이고 (가)자는 아름답다는 뜻으로 강의 형상이 곧 지명이 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전탑이 있는 동네 이름이 지평 이라는 이름입니다.여진,청나라 역사서에는 시조 함보가 신라에서 온 신라 김씨 계열이다 까지는 확인되고,고려사 절요에는 평주 승려 함보 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또 초기의 후손 이름 중에서 영가 라는 이름의 여진족 지도자도 있었고,고려 조정에서도 안동 권 시조 태사와 똑같은 벼슬을 여진족 족장에게 주었으며,고려사에서도 권행의 후손설이 많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조에서도 해사록 등에 권행의 후손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이 동네 고성이씨 사람들을 지평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안동의 별칭이 고창,길주,길원,지평 이었읍니다.전국 어디서나 강가 평평한 곳에 지평이란 이름을 많이 썼습니다.양평 양수리 (두물머리)근처도 지명이 지평이었습니다.
역앞이나 역전압(누를 압: 아주 가까운 ) .평주나 지평이나 둘다 강가의 토사가 퇴적되어 평평한 땅.
다른 간접증거 :몽고 원나라 4대 준마중 한명인 무칼리 에게 여진족 정복 사령관을 맡기고 권황제 라고 칭하게 했다.
징기즈칸 이름도 아버지가 다른 부족 적장의 아내를 빼앗아 그 적장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으로 붙였음
적장의 성을 전리품으로 이긴자가 쓰는 것은 당시의 몽골 지도자들의 관례였고,여진 황제의 뿌리가 권씨 였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여진족 정복 사령관 무칼리에게 권황제 칭호를 쓰도록 허락했다고 보입니다.
첫댓글 권오율님 안녕하세요 항렬이 35세 같으신데요.? 역사에 많은 지식과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여러 역사의 글을 기재 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