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갈머리 남편님 주변머리 마누라님 / 김 미
거울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대던 남편이 외출 준비를 하고 나섰다.
“소갈머리 없는 남편, 이발도 할 겸 사우나 다녀오리다.”
정기적으로 이발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남편을 따라 머리 염색을 하려고 단골 미장원으로 향했다. 두어 시간이 흐른 뒤 십 년은 젊어진 듯 화색이 도는 노신사와 생기 넘치게 깔끔해진 중년 여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들어선다. 서로 달라진 머리 스타일을 너스레를 떨면서 추켜 세워준다. 사실 그럴 리 없지만 진심만은 가득 담긴 칭찬임을 아는지라 배시시 웃고 만다. 남편은 소갈머리가 없다. 난 주변머리가 없다. 아참, 남편은 주변머리까지 없다. 중년을 뒤로 하고 노년의 터널로 들어선 우리 부부의 머리카락이 변해가는 모습을 애칭삼아 서로 놀리며 하는 말이다.
남편은 새치 때문에 이십대 중반부터 염색을 시작했다. 형님의 다분히 장난기 섞인 폭로 덕분에 알게 됐다. 친정아버지의 멋진 로맨스그레이를 떠올리며 남편도 근사하게 나이 들기를 내심 바랐다. 이발소에서 염색을 하면 눈이 시큰거린다는 핑계를 대던 날부터 꽤 오랜 세월 무보수의 전담 미용사로 염색 봉사를 했다. 흐르는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날이 갈수록 정수리부터 휑해지며 서리가 내려앉은 남편. 줄어드는 머리숱을 손끝으로 느끼며 밉지 않은 타박을 하면서도 애써 무심한 척 했다. 어느새 내 이마도 끝없이 점점 넓어지며 귀밑머리부터 하얗게 물이 들기 시작했다. 세월이 우리를 비켜나주길 은근히 바랐던 욕심이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동안의 두 살 연하 남편과 닭살 돋는 부부애를 과시하며 동창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는 멋쟁이 친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보다 앞서 늙어가는 내 모습이 얼마나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지 거울을 볼 때 마다 눈물이 나.”
어설픈 위로 대신 눈을 흘기긴 했지만 눈가가 젖어든 친구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 세대 대부분의 연상인 남편들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 어쩔 도리 없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구부정해진 어깨와 무뎌진 감성으로 무덤덤하고 익숙해진 표정의 남편 모습과 내 모습이 겹쳐지며 애틋함으로 가슴이 아려왔다. 함께 나이 들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살뜰히 챙기지 못했던 일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눈앞이 흐릿해졌다.
남편은 작년 가을부터 노안으로 안과 방문이 잦았다. 외출할 때는 선글라스를 꼭 쓰고 머리 염색은 절대 하지 말라는 처방을 받았다. 그 이후로 검은색, 탈색된 회갈색, 흰머리가 뒤섞여 딱히 표현하기 애매한 머리색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당하게 외출을 한다. 흰머리는 그동안의 삶의 노고에 신이 내려 주신 은빛 훈장으로 이해한 걸까? 회갈색 머리는 홀가분해지기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로 받아들였나보다. 젊은 날의 윤기는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검은 머리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건강한 삶을 누리라는 신의 격려이리라.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담담하게 삶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지혜로움이 아닐까 싶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애처로움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주고 서로 닮아가며 동행할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점점 줄어들며 사라져가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으리라. 소갈머리 드러낸 채로 주변머리 부족한 채로 민머리가 될 때까지 넓은 아량으로 서로 배려하며 오래오래 함께하기를 소망한다. 미련스레 움켜쥐고 있던 부질없는 욕심과 일렁이던 잡념들을 흘러가는 세월 속에 다 놓아 보내리라. 따뜻하고 소중했던 추억 한 조각 가슴에 품을 수만 있다면 무얼 더 바라겠는가? 아직은 쌀쌀한 바람결이지만 저만치서 따사로운 햇살이 아른아른 거리는 설레는 봄날이다. 겨우내 빈둥거렸던 게으름을 털어내고 32년을 함께한 은발의 남편과 손을 꼭 잡고서 봄맞이 산책이라도 나서보련다.
(선수필 2017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