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용(無用之用) / 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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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도 있다. 오래전 장자는 이를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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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나리자’나 ‘다비드’ 상을 보러 가고 임윤찬의 연주를 들으러 가는 이유는 그런 작품들이나 연주가 인간 예술성의 한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를 보고 임윤찬 연주를 듣는 것이 우리에게 다른 어떤 쓸모가 있거나 돈을 벌어주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나리자’나 임윤찬의 가치는 이들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루브르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가로 매겨지지 않는다. 그건 그냥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다. 실제로 ‘모나리자’가 관람수익에 당연히 기여하고 그 때문에 누군가는 밥을 먹고 다니겠지만, 그것이 ‘모나리자’의 본질적인 가치는 아니다. 기초과학도 마찬가지이다. 기초과학은 인간 지성의 최전선에서 그 경계를 한 발자국 넓히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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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은 천연기념물과도 같아서 국가가 세금을 들여 보호하지 않으면 멸종되고 만다. 혈세를 들여 반달가슴곰을 보호하는 것은 어떤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생물 종의 다양성 확보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다. 기초과학도 마찬가지이다.
https://www.khan.co.kr/science/science-general/article/202402052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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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뛰기 선수가 되려고 고무줄놀이를 한 사람은 없다. 그냥 즐거워서 뛰어놀았을 뿐이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놀이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밖에는 외(부)적인 목적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칸트는 이런 놀이의 성격을 ‘무관심의 관심’이라고 했다. 예술도 놀이라고 주장했다.
저 달인들(이 글의 제목이 「달인이 되려면」인데 맨 앞에서 에스비에스의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달인을 예로 들었다.)도 처음에는 외(부)적인 목적, 이를테면 돈을 번다든가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연습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과정에서 다루는 대상의 성질을 알게 돼서 물리(사물의 이치)가 트이자 연습 자체가 즐거워졌을 것이다. 이러면 먹고 살려고 했던 일이 놀이로 바뀐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겨운 저 노동을 계속할 수는 없었을 테다. 최고의 경지는 이래서 나온다.
오늘 책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에서 조기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을 보았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152112015&code=960205) 저 책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내 식대로, 조기 교육이 대부분 실패하는 이유를 공부를 놀이로서가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내가 좋아서 해야지 남이 시키면 괜히 싫어진다. 무엇보다도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에서도 교훈을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구체적인 사건을 예로 들어서 교훈이 아닌 것처럼 전달하려고 애쓴다. 아이도 어른도,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명령하면 다 싫어한다. 억지로 놀라고 시키면 안 듣는다. 내 자발성을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학생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발성마저도 없으니 공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랄수록 모르는 것을 알아 가는 데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러다 보면 사람마저도 수단으로 여기는 데 익숙해진다.
https://cafe.daum.net/ihun/jsjy/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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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무관심’을 다른 말로 하면 ‘이해관계에서 자유롭다(disinterested)’다. 이 개념을 공부에 적용하면 이익을 보려고―예를 들어 좋은 대학에 가려고 책을 읽는 등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공자의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말씀이 떠오른다. 공부하는 목적이 아는 데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의대나 법대 가려는 데 있는 것이라면 슬프지 않은가? 공부가 따분하기만 한데,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노는 대신에 부모의 강요와 사회 분위기 때문에 학원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우리 아이들이 불쌍하다. 이들에게 아기 때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누렸던 즐거움을 되살려 주자. 공부를 일이 아니라 놀이로 바꾸자.
첫댓글 https://cafe.daum.net/ihun/jsjy/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