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정비 윤씨는 투기를 빌미로 폐출되어 연산군 대의 비극을 낳았고,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 민씨는 남편의 변덕 때문에 폐위와 복위를 넘나들며 백척간두의 나날을 보냈다.
이들과 달리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 노릇도 못해본 채 폐비 신세가 된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진성대군의 조강지처였던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남편이 보위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지만 동시에 벌어진 가문의 몰락으로 입궐한 지 이레 만에 쫓겨난 비운의 여인이다.
훗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원자를 출산하고 숨진 뒤 그녀의 복위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장차 국본의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과 사림에 대한 견제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억울하게 빼앗긴 자신의 자리를 되찾지 못했다. 그녀는 생전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지는 않았지만 당대에도 중종의 정비로 인식되었고, 야사에 치마바위 전설까지 더해지면서 비련의 주인공으로 굳어졌다.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는 1487년(성종 18년) 1월 14일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할아버지 신승선이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 이구의 맏딸과 혼인하여 신수근·신수겸·신수영 등 3남 4녀를 두었다.
신승선은 예종 대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에 책봉되었고 성종 대에 좌리공신에 녹훈되었으며 1487년(성종 18년)에는 셋째 딸이 세자빈에 간택됨으로써 명가의 전통을 이었다. 그러므로 신수근과 연산군은 처남 매부 사이였다.
그러므로 연산군의 폐비 신씨와 단경왕후 신씨는 친정으로 따지면 고모와 조카 사이지만 시집으로는 동서지간이었다. 그처럼 거창 신씨는 대를 이어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면서 당대 최고가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506년(연산군 12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파멸 위기에 몰린 호남과 경상도에서 진성대군을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연산군의 총애로 권력의 중심에 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위기감을 느끼고 먼저 정변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그들은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등을 포섭한 뒤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을 끌어들이려 했다. 《동각잡기》에 따르면 박원종이 강귀손을 시켜 은밀히 신수근의 마음을 떠보았더니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을 하는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로 인해 신수근은 반정군의 척살대상 1호가 되었다.
진성대군을 확보한 반정군은 윤형로를 정현대비 윤씨에게 보내 거사 사실을 알렸다. 그때 윤씨는 세자를 보위에 올리자고 했지만 유순과 강혼 등이 거듭 진성대군의 옹립을 주장하여 허락 받았다. 이윽고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그들은 궁궐로 진격하던 도중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을 척살하고, 창덕궁에 들어가 연산군을 사로잡으면서 거사의 목적을 달성했다.
반정 주체였던 박원종이나 성희안 등은 이미 자신들의 손으로 척살한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세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연산군과 긴밀한 신씨의 족친들을 서울에 두면 언제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보고 그들을 모조리 변방에 귀양 보낸 다음 9월 9일에 이르러 중종에게 신씨에 대한 처분을 강요했다.
대군저에 있을 때 아내와 금슬이 두터웠던 중종은 ‘조강지처는 내칠 수 없다.[糟糠之妻不下堂]’라는 《사기》의 고사를 내세워 버텼지만 이미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들의 시퍼런 서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씨는 결국 그날 밤으로 대궐에서 쫓겨나 서촌에 있는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들어갔다.
서촌의 하성위 정현조 집에 머물던 신씨는 중종이 사는 경복궁을 바라보기 위해 자주 인왕산에 올랐다. 신씨는 중종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기 위해 궁중에서 입었던 다홍치마를 바위에 펼쳐놓고 눈물을 흘리다 내려오곤 했다. 중종 역시 신씨를 잊지 못해 자주 경희루에 올라가 인왕산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 그러자 부담을 느낀 공신들은 신씨의 거처를 죽동궁으로 옮겨버렸다.’
새로운 중전이 책봉됨과 동시에 신씨는 짝 잃은 기러기 신세가 되어 버렸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는 그녀는 재혼조차 할 수 없는 시대상황 속에서 원망과 그리움을 품은 채 쓸쓸히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녀의 이런 애달픈 상황을 그려낸 이야기가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로 전해진다.
신씨의 복위는 1739년(영조 1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당시 유생 김태남이 복위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흔쾌히 가납하고 그녀의 신주를 대궐 안에 옮겨 모시게 했다. 이어서 대신들과 논의 끝에 시호를 단경(端敬)으로 하고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올렸다. 그렇게 해서 폐비 신씨는 궁궐에서 쫓겨난 지 무려 232년 만에 단경왕후(端敬王后)라는 왕비의 칭호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