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서 루터와 관련된 책들이 국내에서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루터의 밧모섬』, 『마틴 루터의 기도』, 『루터를 말하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 『루터와 이발사』, 『대교리문답』과 같은 책들이 출간되었고, 올해에는 『루터의 재발견』, 『21세기를 위한 루터의 영성』 같은 국내 저자의 책들도 소개된다고 합니다. 루터에 대해 깊이 알게 될 기회들이 많이 생긴 것 같네요.
이 글에서는 루터의 삶을 그가 있던 “도시”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이 도시들을 지금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여행과 관련지어서 설명하면 재미있고 도움도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더불어서 루터가 있던 주요 지역에서 가볼만한 맛집도 찾아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직접 먹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서 신뢰성에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해외맛집 사이트의 평가와 구글에서 찾아본 평가, 그리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글들을 번역기 돌리면서 뒤져가면서 정말 먹을만한 곳일지 살펴봤습니다. 이 글이 위의 책들을 흥미롭게 접하기 위한 계기가 되면 좋을 거 같네요.
여기서는 루터의 삶을 크게 두 가지로 간단하게 나눠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문제로 내면의 씨름을 한 것과 교회에 대한 외적인 투쟁으로 종교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에 태어났다고 보기도 하고,[1] 1484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2] 마틴 루터의 아버지 한스는 성을 루더, 루테르 등으로 소리나는대로 적었었는데, 루터의 성을 루터로 표기하는 것이 굳어진 것은 1517년 출판을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3]
루터가 태어난 곳은 아이슬레벤이라는 곳으로, 루터는 죽음도 이곳에서 맞게 됩니다. 아이슬레벤을 비롯한 몇몇 도시는 루터의 도시(Lutherstadt)라는 명칭을 앞에 붙이곤 합니다. 루터의 도시라고 불리는 만큼 아이슬레벤에는 루터의 생가와 루터가 죽은 집, 그리고 루터 기념비와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를 했다는 성 안드레아스 성당이 있습니다.
아이슬레벤에서는 일찍부터 루터를 기념하기 시작했으며, 17세기 말에는 루터의 생가(Martin Luthers Geburtshaus)에 루터를 찾는 순례자들을 위한 박물관을 만들어놓았다고 합니다.[4] 그래서 이곳은 루터에 대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 하나로, 1689년 도시에 화재가 일어난 후 보수작업을 했으며, 건물을 현대화시켜서 건축상으로 별 5개를 받았고, 현재 작센에서 가장 인상깊은 건물들 중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5] 루터의 생가 입장료는 4유로입니다. 다른 루터 관련된 장소들을 패키지로 묶은 티켓을 사면 할인된 가격으로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아이슬레벤은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식당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몇몇 장소를 찾아봤지만, ‘루터솅케 아이슬레벤(Lutherschenke Eisleben)’라는 보헤미안 음식점이 평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구글에서 평점이 5점 만점에 4.4이며, 리뷰들 중에서 평점 3미만이 없는 것으로 보았을 때(평점이 더 좋은 집들 중에는 1, 2점짜리를 준 고객들이 있었습니다) 실패할 확률이 적은 음식점이 아닌가 싶네요. 저작권 문제로 사진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맛보기를 주저하시는 분들을 위해 맥도날드가 이곳에도 있다네요.
루터는 태어난 다음 해에 만스펠트 근처의 도시로 이사를 합니다.[6] 그리고 만스펠트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죠. 루터의 부모는 가정 형편이 어려울 때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유복한 편이었는데, 왜냐하면 루터의 아버지 한스는 광산 감독이 되어서 구리제련소, 넓은 농장, 그리고 많은 건물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7] 루터는 7살 때 라틴어학교에 들어가는데, 본인이 배워보지 못한 라틴어의 격과 수의 변화 때문에 15대나 회초리를 맞았다고 합니다.[8]
만스펠트에는 루터의 부모의 집(Luthers Elternhaus)이 있으며, 여기에는 광산 주인 가족의 삶이 어떠했는지와 같이 당시의 시대에 대해 묘사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고 합니다. 요금은 4유로입니다.
루터는 총명한 학생이었고, 그의 아버지 한스는 아들의 성공을 원했기에 그를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보내서 법학을 배우게 합니다.[9] 그래서 루터는 1502년 9월말 학사 학위를 수여받고, 1505년 석사 학위를 받으며, 1505년 5월에 법학 공부를 시작합니다.[10] 하지만 루터는 신앙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 흑사병으로 인해여 그의 동생들과 학교 교수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것들을 지켜보며 안 그래도 법학 공부에 회의적이었던 루터는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점점 더 고민하게 됨니다.[11]
그리고 1505년, 즉 21살 때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학교로 다시 가던 중 폭풍을 만나게 되고, 벼락 때문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성 안나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갑자기 이런 서원을 했다기보다는, 이미 루터는 수도사가 되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12] 참고로 아버지인 한스는 그 벼락이 마귀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13] 굳게 결심한 루터는 아버지가 사준 비싼 법학 책도 팔아버리고, 수도원 가기 전날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파티를 즐긴 후 마침내 수도사가 되었습니다.[14]
루터는 에르푸르트의 수도원에서 신앙 문제로 씨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그렇기에 수도원의 규칙들을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지켰고 금식도 종종 했습니다. 3일씩 아무것도 안먹곤 해서 말랐던 그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에야 체중이 늘게 되었다고 합니다.[15] 루터는 고해성사를 할 때도 온 마음을 다해서 했는데, 한번 할 때 여섯 시간이 걸리더라도 생각나는 모든 것을 고해했으며, 그것 때문에 예배를 참석 못하게 되면 빠진 만큼 기도해야할 시간들이 추가로 늘어나게 되어서 점점 기도 시간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16]
이렇게 철저하게 모든 것들을 행하는 루터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을 때(1507년), 루터는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자신이 직접(다른 이를 통하지 않고) 말씀을 드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합니다.[17]
그러던 중, 1510년에 루터에게 남들이 바라마지 않던 은혜의 기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로마로 갈 기회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혜택을 베풀어주는 사도들과 성인들의 유물들이 넘쳐나는 금광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로마에 도착하자 감격에 겨워했고 각종 거룩한 곳들을 돌아 다니며 공덕을 쌓고 행복해했다고 합니다.[18] 그러나 그 속에서 의심의 싹이 트게 됩니다. 특히 무릎으로 오르면 영혼을 연옥에서 구해준다는 성계단 성당을 무릎으로 오른 이후, 루터는 이것이 과연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지에 의문을 가졌다고 합니다.[19]
고민만 커진 상태로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에게 변화가 찾아옵니다. 신앙에 대한 고민으로 씨름하는 루터를 지켜보던 루터의 상관은 루터가 신학 교사가 될 재능이 있다고 보았으며, 루터가 성경을 보고 가르치는 것에 시간을 보내면 영혼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를 비텐베르크로 보냅니다.[20] 사실 이 결정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는데, 보통 루터처럼 신앙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교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21] 그러나 루터의 상관인 고해신부는 오히려 루터가 교사가 되면 과거에 제롬이 그랬듯이 유혹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22]
루터는 이렇게 그가 주로 활동했던 무대인 비텐베르크로 오게 됩니다. 이 도시도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라고 불립니다. 비텐베르크도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라서 보통 관광을 목적으로 왔다면 반나절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원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었다가 루터의 집이 되었으며 나중에 박물관으로 개장된 루터하우스(Lutherhaus Wittenberg)가 있습니다. 이곳은 1883년부터 박물관으로 개장해서 방문객들을 받았으며,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이라고 합니다.[23] 2017년 3월 3일까지는 공사 중이라고 하네요. 각 나라의 언어로 안내서가 있으며,[24] 입장료는 8유로입니다.
비텐베르크에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으로 만든 루터 가든도 있습니다. 500주년 기념으로 나무를 500그루 심어 놓았다네요(100년 뒤엔 100그루를 더 심어야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25] 특별하게 만든 전시회도 있는데, 루터의 95개조 논제를 기념해서 루터나 종교개혁에 관련된 95명의 인물들에 대한 전시와 95개의 보물들에 대한 전시가 있다네요.[26]
비텐베르크의 맛집을 검색하면 음식점 리스트가 47개 정도 검색이 되는데요. 아무래도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음식점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 평가를 보았을 때 추천하고 싶은 곳은 바로 ‘브로이하우스 비텐베르크(Brauhaus wittenberg)’입니다. Lonely Planet에 따르면, 고기를 얇게 눌러서 튀겨낸 돈까스와 비슷한 음식인 슈니첼, 그리고 우리나라의 족발 비슷한 슈바인스 학세(Schweinshaxe)과 같은 돼지고기 요리 등이 맛있고,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량의 음식 메뉴도 있다고 합니다. 슈바인스 학세는 일반적으로 맥주에 돼지 족발을 넣어 삶은 뒤에 오븐에 구워내는 음식으로, 잘 구워내면 풍미 좋고 쫄깃하면서도 바삭한 맛이 일품입니다. 17세기 이후에 등장한 음식이라고 하니, 루터가 먹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요.
한 곳을 더 추천하자면 ‘비텐버거(Wittenburger)’라는 작은 햄버거 가게가 있습니다. 사진도 검색해봤는데 맛나 보입니다. 맛도 좋고 양도 많고 가격도 적당하며 서비스도 좋다고 하네요(이런 멘트 자체가 상술일지도 모릅니다). 브로이하우스 비텐베르크와 비텐버거는 인스타그램에서도 독일인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맛있다고 올린 사진을 검색해볼 수 있었기에 좀 더 신뢰가 가네요(저작권 때문에 사진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이곳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점점 더 성경에 이끌리고, 신앙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가 영적인 고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루터의 관심으로 중세 신학자들의 책들로 돌리려고 했지만, 루터는 다른 책들보다 원전인 성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성경을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밤중에 몰래 도서관에 가서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27] 아우구스티누스가 루터에게 준 영향도 컸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을 읽는 것을 통해서 루터는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크게 받는 당시의 모습들을 경계하게 되고 다른 이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합니다.[28] 재미있는 사실은 루터의 동료였던 카를슈타트는 그러한 루터의 생각에 반박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을 읽다가 결국 루터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9]
그리고 1516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이 출간되게 되고, 루터는 이 성경을 즉시 보기 시작하면서 당시 표준이었던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번역이 갖고 있던 번역 상의 문제들을 인식하게 됩니다.[30] 그는 점점 더 성경으로 중심이 이동해갔으며, 묵상할 때 원어 성경의 원래 의미와 의미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31]
루터가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된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합니다.[32] 루터가 이신칭의를 깨닫는 경험을 탑 체험이라고 부르는데, 곤잘레스는 1515년으로 95개조 논제를 발표하기 이전으로 추정하며,[33] 마이클 리브스는 1519년으로 95개조 이후라고 주장합니다.[34] 셀더하위스는 이것이 1513년에서 1518년까지의 기간 동안 루터가 이와 관련된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며, 그것에 이어서 하나님이 의를 수여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을 1519년에 했다는 것으로 봅니다.[35] 아무튼 이 체험은, 루터가 그토록 고민하던 ‘의로움’을 자신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며,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받게 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 된 체험입니다. 그리고 이 발견을 통해서 루터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의를 선물로 주시고 공유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 되었습니다.[36]
이렇게 중대한 신앙적 변화를 겪던 루터는 뜻하지 않게 종교개혁의 폭풍의 시발점이 됩니다. 면죄부 문제가 발단이 되었는데요. 사실 면죄부는 루터의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고, 여러 번 문제시 되었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을 모으기 위해 이것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요한 테첼이 “주화가 돈궤에 쩔렁 떨어질 때, 영혼은 연옥에서 뛰어오른다.”와 같은 파격적인 홍보를 하는 것으로 인해서 루터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37] 당시 작센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는 마인츠의 대주교의 가문인 호엔촐레른 가문을 견제했기 때문에 자신의 영토에서 면죄부 판매를 금지했습니다.[38] 그래서 비텐베르크에서는 면죄부를 살 수가 없었죠. 그런데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사람들이 약 40km의 거리를 걸어가서까지 해서라도 면죄부를 사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39]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루터는 95개조 논제를 개시하기 전에 97개조 논제를 작성해서 붙였다고 합니다(셀더하위스는 99개 논제라고 봅니다).[40] 이것은 별로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고, 그 다음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 논제를 개시하면서 공식 명칭을 “면죄부의 힘과 유효성에 관한 95개의 논제”라고 붙였는데, 신학자들끼리 토론하려고 했던 이 논제들이 사람들로부터 큰 반응을 얻게 됩니다.[41] 마이클 리브스 같은 학자는 이때는 루터가 이신칭의를 깨닫기 전이라고 보기 때문에, 루터가 이신칭의에 대한 심각한 대척점으로서 면죄부를 반박했다기 보다는 단지 면죄부가 참회의 가치를 깎아내린다는 것으로 인해서 반박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42] 셀더하위스도 “루터는 면죄부 자체를 배격한 것이 아니다. 루터는 비판의 내용을 일시적인 형벌에 한정하기를 원했다. 루터는 면죄부를 사들이는 행위가 은혜를 제공한다는 거짓 안전을 경고했던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43] 루터는 이것이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갈등과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계획하지 않았고, 단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했습니다.[44]
그러나 루터의 생각 이상으로 그의 행동의 영향력은 엄청났습니다. 루터가 자신의 논제에 대해 설명한 소책자는 2년 동안 덴마크어, 화란어, 체코어 번역을 제외하고도 22쇄나 인쇄되었습니다(루터는 이에 대한 인세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45] 그리고 이런 움직임에 대항해서, 요한 테첼은 맹렬하게 반박하고 루터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그는 면죄부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46]
루터는 이런 반응들로 인해서 놀라고 두려워했을지 모르지만, 주변 상황은 루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쪽의 사람들은 외부세력이자 면죄부를 파는 것과 연관된 호엔촐레른 가문에 대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면죄부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이 곱게 보이지 않았죠. 게다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지지했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 수많은 성물과 유물(18,870여개)을 모았고,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개념으로 순례자들에게 연옥에서 보내야 할 어마어마한 시간의 죄(1,902,270년)를 용서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47] 많은 이들이 방문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안겨주길 바라던 프리드리히에게 면죄부 판매는 실질적인 손해를 안겨주는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루터를 지지했습니다. 왜냐하면 테첼이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이라서, 이 사건을 도미니크 수도회와의 경쟁 관계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48] 게다가 교황 레오 10세도 루터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새로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해야 하는데, 그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황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49] 그래서 루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루터를 로마로 소환했을 때,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루터를 보호하려고 그것을 반대하자, 로마 가톨릭 교회는 황제를 뽑는 문제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됩니다.[50] 또한 이때 결국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데, 독일의 선제후들은 강력한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려고 했고, 그들에게 있어서 루터는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51] 여러모로 루터에게 유리한 일들이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것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요소들이 되었고, 어떤 사람의 기획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이렇듯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계획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의 탁월한 지략과 계획으로 종교개혁의 초기 상황이 흘러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개혁이라는 흐름을 불러왔고, 루터가 성경이 이끄는대로, 성경의 가르침을 붙들며 나아갔을 때, 결국 개혁은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처음부터 교황제를 반대하지는 않았는데, 점차 이것에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1519년에 루터는 신학자 요하네스 엑크와 토론을 벌이게 되는데, 엑크는 의도적으로 최종적인 권위가 성경에 있는지 아니면 교황에게 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결국 루터는 성경에 있다고 대답하게 됩니다.[52] 중세신학에 능통했던 에크는 성경에 능통한 루터를 상대하면서, 이런 질문을 통해 루터를 후스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단으로 연결시킨 후 만족스러워 했습니다.[53] 에크의 의도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결국 루터를 투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를 통해서 루터를 “성경적 신앙의 수호자”로 여기는 이들이 증가했습니다.[54] 그리고 루터는 이 사건들을 통해서 점점 더 교황제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55]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성경으로 반박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루터는 자신이 옳았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520년, 루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루터는 당시 인쇄기 3대가 못 따라갈 정도의 굉장히 빠른 속도로 책을 저술했는데, 일반 대중들도 접하고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집필했다고 합니다.[56] 이때 저술한 주요한 책은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유수』,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첫 번째 책에서 루터는 교황이 가장 큰 권위를 갖는다는 것과 성경 해석은 교황만이 할 수 있다는 것과 교회 개혁을 위해서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도 교황만이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도전합니다.[57] 이 책을 공개하고 6일 후에 초판 4000부가 다 팔렸는데, 당시에도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합니다.[58] 두 번째 책인 『교회의 바벨론 유수』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7가지 성례에 대해서 공격하며, 세 번째 책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복음을 설명하면서 창녀가 왕비가 되는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지를 이야기합니다.[59] 심지어 루터는 이 책을 교황에게 헌정합니다.[60]
그리고 루터에 대해 교황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카를 5세가 1519년에 황제로 선출되고 1520년에 대관식을 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황제 선출로 인해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잘보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20년에 교황은 루터에게 60일 내로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교서를 내리는데, 루터는 더욱 대담하게(물론 두려움도 있었지만)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교서를 불태워버립니다.[61] 물론 교황도 루터의 책들을 불태우라는 교서를 내렸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어떤 이들은 루터의 책을 불태웠고, 또 다른 이들은 루터의 적들의 책들을 불태우기도 했다고 합니다.[62] 결국 루터는 파문이 됩니다.
하지만 교황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교황 측에서는 1521년 열리는 보름스(Worms)의 회의에서 그 파문에 황제에 의해 그저 승인되기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프리드리히가 황제에게 루터의 입장을 들어보도록 설득했고, 루터를 지지하는 이들도 많았기에 황제가 이를 수락합니다.[63] 그래서 루터는 보름스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보름스에서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변론할 기회가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황제와 여러 제후들 앞에서 그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요구를 받게되고, 하루 정도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루터는 그 다음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선언합니다.[64]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성경의 증거나 또는 명백한 이성적 논증에 근거하여 설득력 있게 분명히 반박하지 않는 한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 나는 오직 내가 인용한 성경 구절에 묶여 있습니다. 나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나는 상황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한다면 구원이 위협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65]
그리고 루터가 이렇게 극적인 선언을 했다는 것을 밖에서 들은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쏟아냈으며, 도시에서는 황제를 옹호하는 스페인 병사들이 루터를 죽이라고 외치고 백성들은 이에 반대해서 부딪치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66] 마찬가지로 엄청난 일을 한 루터는 숙소로 돌아와 “달려갈 길을 마쳤도다!”라고 두 번 외쳤다고 합니다.[67]
하지만 결국 보름스에서 루터의 파문은 승인되었고, 그는 이단자로 선언되었습니다.[68] 황제는 루터를 처벌하려고 했지만, 그의 생각대로 루터를 처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몰래 루터를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데리고 갑니다.[69] 거기서 루터는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1522년 출간) 여러가지 저술 작업에 몰두하고, 루터의 다른 동료들은 비텐베르크에서 실제적인 개혁을 추진합니다.[70] 그런데 그 개혁들이 점점 격해지고, 게다가 스스로를 선지자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자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옵니다.[71]
그리고 비텐베르크에서 머물면서 계속 종교개혁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들 이후에도 황제는 루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는 프랑스와의 갈등과 이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 등으로 인해 자신의 뜻대로 단번에 루터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종교개혁은 점점 더 퍼져나가게 되죠. 보름스에서의 일 이후 독일에서 있었던 종교개혁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은 다른 인물들을 이야기할 때 더 다뤄보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자신의 신앙의 문제로 씨름하던 루터는 결국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국가 전체와도 씨름하는 종교개혁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투쟁을 치른 후 1546년, 추운 겨울에 루터는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아이슬레벤으로 가지만, 결국 거기서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이슬레벤에서 삶을 시작한 루터는 그 곳에서 삶을 마치게 되죠.
이렇게 루터가 있었던 지역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루터의 삶과 종교개혁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보았습니다. 루터에 대한 흥미가 생기셨다면, 처음에 소개한 책들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멜란히톤이나 츠빙글리 같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