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나들이
2023년 6월 19일 모처럼 고향교회를 방문했다. 2025년에 교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 주안교회(朱安敎會)는 언제나 불쑥 찾아와도 어릴 적 추억이 그대로 묻어 있어 친근한 신앙의 요람이다. 1958년에 건축된 전형적인 시골 예배당은 담쟁이덩굴이 운치를 더하여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하는 어머니 품 같다. 중고등부 시절의 주된 활동 공간이었던 이 예배당의 마룻바닥이 어른들에게는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던 은혜의 보금자리였다면 중학생이던 우리에게는 2부 활동에 더 많이 활용했던 친교의 장이었다. 그런 고향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고 부흥하는 모습은 여기를 거친 다수의 교역자들에게 은근한 자부심이다. 우리에게 영적 아버지였던 담임목사(韓景洙 감독)는 이미 고인이 되신지 오래되었지만 그분이 남겨 놓은 신앙의 유산과 흔적만이 뒷사람들에게 무언의 교훈이 되고 있다. 1995년 교회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그 어른의 수고의 땀, 정성을 다한 눈물로 설립된 국제성서박물관은 시대별, 국가별, 언어별로 다양한 성경들의 전시만이 아니라 최첨단 시스템을 통하여 직접 몸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새롭게 탈바꿈하여 최고 성경 교육의 장으로 거듭났다.
그날의 모임은 당시 교회학교를 담당하던 전도사로, 교사로, 때로는 자상한 형으로 우리를 지도했던 선배 목사의 은퇴를 기념하여 고향교회에서 마련한 축하 자리였다. 지난 제81회 중부연회에서 은퇴한 조경렬(趙景烈) 목사 내외, 같은 시대 활동했던 후배들이 만나는 시간이었으니 친근함과 설렘이 샛바람처럼 함께한 모두의 마음을 살랄살랑 두드렸다. 이 만남을 더욱 살갑게 했던 것은 지난날 함께했던 추억 이야기다. 청년은 꿈에 살고 노인은 추억에 산다고 했는데 어느새 그 후배들도 머지않아 은퇴의 길을 걸어야 하는 나이를 이고 있어서인지 모두는 그 추억에 활짝 미소짓는다. 먼저 석경회(釋經會) 이야기를 추억 마당으로 불러냈다. 석경회는 당시 조경렬 전도사가 앞으로 신학교를 지망할 고등부 학생들 중심으로 금요 철야예배가 끝난 후 따로 모인 성경공부 특별반이었다. 밤을 지새우다 보니 사실 성경보다 졸음의 무게가 더 무거웠다.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한참 졸음에 짓눌려 정신이 몽롱한 순간에 갑자기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 13:11)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다가 깰 때’라는 소리에 놀라서 깨고 보니까 나만 졸고 있었던 것이다. 허겁지겁하는 내 모습을 보며 킥킥 거리는 그 비소(非笑)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던 순간이 있었다. 그랬던 그 학생이 파수꾼처럼 평생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설교자로 살아왔으니 오묘하신 주님의 섭리다. 예배 때마다 졸고 있는 교인을 보면 그를 깨우려는 습관은 이일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성탄절 찬양곡으로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제4번 주의 영광, 제44번 할렐루야를 발표하고 뿌듯했던 시간도 추억 여행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음악도 잘 모르던 고등부 시절 이런 대곡을 발표했다는 것 자체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그 덕에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의 향기를 발할 수 있었던 것을 돌아보면 참 좋은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비 오는 날에 장화 없이는 거닐 수 없었던 당시 주안동의 논길을 본 따서 만든 청년부 문학의 밤 ‘진흙제(祭)’ , 형들을 모방한 고등부의 ‘찰흙제(祭)’에 얽히고설킨 이야기, 겨울이면 논에 물을 대고 임시로 조성된 스케이트장 전도대회에서 멋지게 폼을 잡고 빙판을 누비고 다녔던 이야기들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또렷한 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잘 가르치고 기도해 주신 어른의 사랑은 지워지지 않을 글자로 모두의 심비에 새겨져 고향교회의 따뜻함을 몸으로, 때로는 마음으로 고이 간직하며 힘을 얻는다.
목사는 고향교회를 반드시 떠나야 하는 숙명의 삶을 살지만 첫 목회 현장에서 받은 은혜 때문에 제2의 고향교회가 생긴다. 지치고 피곤한 목양의 길목에서도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고향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부재로 점점 멀어지는 고향, 길고 긴 타향살이로 인해 희미해지는 고향, 지금 삶의 안락함과 편안함으로 망각의 저장고에 고이고이 간직되고 있는 고향이다. 이렇게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도 고향은 늘 그 자리에 서있다. 고단한 광야 길에서 만난 시냇가의 편안함은 고향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특혜다.
지금의 고향교회는 내 어릴 적 그 모습은 거의 없어졌다. 그동안 많이 부흥하고 성장했고 시대에 맞는 그릇으로 탈바꿈되어야 하니까 그래야 당연하다. 그러나 이곳에 오면 고향의 푸근함을 먼저 몸이 반응한다. 겨울을 완전하게 날려버리는 훈풍(薰風)이 어디선가 불어와 코끝에 닿는다. 고향의 그리움을 품은 자의 살갗에만 스치는 본능적 감각이다. 모처럼 고향교회에서의 이 만남은 분주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의 ‘여유’와 짧은 ‘만만’의 잔치였다. 고향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이 여유만만(餘裕滿滿)의 시간은 다시 사명이 우뚝 선 현장으로 향하는 각자의 발걸음에 힘이 되었으리라. 그날의 만남은 또 다른 추억을 양산하고 선배의 은퇴는 후배들에게 남은 시간을 새롭게 설계하며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앞서 가는 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 삶의 이정표를 삼을 수 있었던 시간들, 추억이 많은 나이에도 여전히 미래의 꿈을 잃지 않고 천국 소망까지 품었던 고향 나들이였다. 꿈속에서라도 또 가고 싶은 어머니 품이다. 이제는 스스로 그 누군가에게 그런 고향이 되어 주어야겠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사오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71:6).
주안감리교회
복음의 종
담쟁이덩굴이 운치 있던 예배당
시골 예배당 마룻바닥에서 중등부 예배
스케이트장 전도대회
선배 목사의 은퇴 기념으로 모여 대예배실에서 기념 촬영
고향 주안교회에서 마련한 애찬
국제성서 박물관 설립자 한경수 감독 기념홀(국제성서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