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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회 글로 모두 마치려니 내용이 길어서 2주에 걸쳐서 읽도록 <전편>과 <후편>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 긴 글이지만, 인봉한 두루마리의 개봉은 "토지 무르기"라는 것과 " 환란기 42달 기간과 경제 주기 7대 절기 "는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어린 양의 토지 무르기"는 세상구원을 위한 마지막 복음이고, 수단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읽으시고 양심이 허락하시면, 퍼나르기 선교를 부탁드립니다.
<전편> 글이 길어서 내용을 전편과 후편으로 나눔(전편 : 토지 무르기와 일곱 인, 후편 : 희년 주기와 계시록의 시간과 미래).
계시록 5:1의 두루마리와 일곱 인봉을 다시 보아야
두루마리와 일곱 인에 대한 기존의 견해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 5:1)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
계시록이 보여주는 재앙은 두루마리로 봉인된 일곱 인을 떼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첫째, 계시록 5:1의 두루마리를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문서로 본다. 구약성경이 두루마리로 되어있으므로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두루마리가 인봉이 되어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 일곱 개나 되는 도장을 찍어서 봉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알고, 순종하며,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인데 왜 이렇게 인봉되어야 있어야 하는지가 의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봉되어 있다면, 그 인봉된 말씀은 또 하나의 다른 성경이 될 수가 있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어서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이 두루마리를 에스겔서 2:9의 말씀을 따라서 재앙의 내용을 기록해 놓은 문서로 본다. 에스겔이 본 두루마리가 안팎으로 쓰여 있어서 계시록 일곱 인 두루마리가 안팎으로 쓰인 것과 같다. 그리고 에스겔서의 두루마리는 애가와 애곡,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으므로(겔 2:10), 계시록의 재앙이 일곱 인봉을 떼면서 시작하므로 의미상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에스겔서 2:9의 두루마리는 인봉된 것이 아니다. 계시록의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 그리고 계시록의 두루마리는 아무나 뗄 수가 없고, 어린 양만이 뗄 수가 있다(계 5:7). 그러므로 계시록이 말하는 두루마리와 에스겔이 두루마리는 별개로 보아야 한다.
셋째, 이 두루마리를 다니엘서 12:4,9가 말하는 봉함을 뜻하는 문서로 본다. 이 두루마리도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봉함은 히브리어로 “사탐”인데, 인봉을 뜻하는 “하탐”과 뜻이 좀 다르다. “싸탐”은 물건을 오래도록 흠이 없이 잘 보관하라는 말이지, 봉인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계시록 5:1의 두루마리는 열 수가 없도록 인봉이 되어있다.
넷째, 계시록 5:1의 두루마리를 예레미야서 32:10,11의 말씀을 따라서 토지 무르기에서 땅을 거래할 때 증거로 남기는 매매증서, 곧 토지문서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토지문서는 반드시 인봉하게 되어있고, 계시록 5:1의 두루마리도 인봉이 되어있으므로 뜻이 부합하고 있다.
일곱 인봉에서 인은 무엇일까?
그러면 계시록이 말하는 일곱 인에서 인(印)이 과연 무엇일까? 인이라는 말은 문자적인 뜻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인에 관련된 용어의 뜻을 찾아보면, 그 용어 가진 개념 자체가 어렵고, 뜻이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다. 단어의 뜻이 도장을 찍는 것과 봉한다는 의미가 섞여있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뜻도 애매한데 계시록은 관련 용어가 헬라어로, 구약에서는 히브리어이므로 비교하기 모호하다.
인(印)은 헬라어 “습흐라기스”로 봉인, 도장 달린 반지, 인장(a seal), 도장(a signet)이라는 뜻을 가진다. 동사는 “습흐라기조”로 인치다. 증명하다. 감추다. 봉인하다. 인맞다 등의 뜻이다.
인봉과 관련된 구약의 히브리어는 “하탐”이다. 이 말은 날인하다, 도장 찍다. 밀폐하다. 가두다 등으로 쓰인다. "하탐"은 예레미야서 32장 토지 무르기에서 봉인된 매매증서로 나온다(렘 32:11,12,14,44). "하탐"은 계시록 일곱 인의 인(印)과는 문자적으로, 의미상으로도 가장 부합하는 용어다. 다니엘서 9:24의 칠십 이레 예언에서 죄(허물)가 ‘끝나다’, 레위기 15:3에서 피가 ‘엉겼다’, 욥기 26:16에서 문이 ‘잠겼다’ 등의 의미로 쓰였다.
이렇게 볼때 봉인이란 봉함을 하되 도장을 찍어서 봉하므로 아무나 열지 못하게 한 문서다.
계시록 5:1, 봉인된 두루마리는 토지문서로 보는 것이 본문에 부합한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 5:1)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증서를 내가 가지고(렘 32:10,11)
계시록 5:1에서 두루마리에 봉인된 “인”은 ‘토지문서’로 보는 것이 원문의 뜻에 가장 부합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계시록 5장에서 시작하는 인은 문자적으로 권리를 표시한 증서에 도장을 찍어서 그 권리를 증명하는 것을 말한다.
② 계시록 7:2에서 말하는 인도 소유권을 증명하거나 권리 보호하고 보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22). 계시록 5장에서 인은 하나님이 땅의 소유권을 증명하고, 계시록 7장의 인은 사람에 대한 권리를 보증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자로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권리의 일부(상속권과 경작권)를 념겨주고, 인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③ 에스겔서 2:9에서 말하는 두루마리는 인봉된 문서가 아니다. 계시록 5:1의 두루마리는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일곱 인으로 봉인되어 있다. 에스겔서 2:9의 두루마리는 재앙을 말하는 것이므로 누구라도 보고 깨우치게 해야지 인봉할 이유가 없다.
④ 두루마리로 된 성경은 인봉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성경과 인봉하여 감추어 둔 성경으로 말씀이 이중성을 가진다.
⑤ 계시록 5:1의 인과 유사한 용어를 비교하여 보아도 “하탐”과 “싸탐”은 의미가 다르다. 문(門)을 말하면 “싸탐”은 창고의 문을 닫아놓은 정도이고, “하탐”은 닫은 문을 자물쇠(인봉)로 잠가두는 의미를 가진다. 다니엘서가 말하는 봉함된 문서는 “사탐”이므로 누구라도 절차를 밟으면 열 수가 있고, 그 내용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계시록 5:1이 말하는 두루마리 문서는 아무나 열 수가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래서 다니엘서 12:4,9의 문서는 누구라도 절차를 거치면 문서를 펼칠 수가 있다. 계시록 5:1에서 말하는 두루마리는 아무나 펼칠 수가 없다.
⑥ 예레미야의 토지 무르기에서 매매증서에 찍힌 인도 계시록 인과 성격이 같다(거의 같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을 찍고 밀봉하여 오래도록 보존하라고 했다.
⑦ 계시록 5:1에서 인봉한 두루마리는 오직 어린 양만이 그 문서를 열 수가 있다. 이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을 가진 자가 없다(계 5:3,4).
⑧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토지 무르기를 하라고 하고, 인봉한 매매증서를 오랫동안 토기에 담아 보관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렘 32:44).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땅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소망을 미리 알려준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다. 이 언약은 포로 귀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은 포로에서의 귀환한 것으로는 부족하다. 완전한 회복은 귀환한 백성들이 각자 자기와 가족의 생업을 해결할 수 있는 기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의 신호로 토지 무르기를 보여 주는 것은, 기업인 땅과 포도원을 다시 가질 수 있는 완전한 회복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 5:1에서 인봉한 두루마리는 ①~⑧의 이유를 종합하면 이렇게 된다. 계시록 5:1의 두루마리는 여러가지 의견들(성경, 재앙 기록, 봉함, 소유권 문서 등) 중에 소유권과 관련된 것이며, 토지문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토지문서로 보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의미에 가장 부합하고 있다.
물론, 계시록은 상징성을 가진 용어와 내용들로 기록되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토지문서는 실제로 토지문서라는 말은 아니다. 계시록 5:1이 말하는 인봉한 두루마리는, 예레미야 32:11의 토지 무르기에서 인봉한 매매증서를 인용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라고 했던 그 토지 무르기와 그때 작성하여 인봉한 매매증서와 같은 성격의 토지문서를 계시록 5:1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봉한 두루마리는 어린 양만이 개봉할 수가 있다. 이 말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토지는 주인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상속자라는 것과도 뜻이 부합한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그 권리가 있는 자만이 개봉을 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서 계시록에서 말하는 바벨론의 멸망은 구약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바벨론 국가의 멸망을 인용하여 신약시대에 있을 멸망의 대상과 당하게 될 재앙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같이 계시록 5:1에서 말하는 두루마리 토지문서는, 구약시대에 있었던 인봉한 매매증서에 인봉을 떼는 사무적 절차를 따라서 내리는 재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으므로 일곱 인을 다 뗄 때까지 펼치지는 못한 상태로 있다. 그래서 세상은 인봉을 떼는 절차를 따라서 재앙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 두루마리는 일곱 재앙이 모두 끝이 나야만 문서가 열려서 그 내용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 5:1 두루마리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재앙이 끝 난 후에 필요한 것이고, 재앙에 대한 내용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계시록의 일곱 인은 희년법 토지 무르기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희년법 토지 무르기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계 25:24,25)
계시록 5:1의 인봉된 두루마리의 개봉은 희년법인 토지 무르기와 관련되어 있다. 토지 무르기는 나의 땅이 빚 담보로 경작권이 남에게 잡혀있으면 그 빚을 갚고, 잡혀있는 경작권을 되찾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경제생활에서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 나의 땅에서 포도를 심든, 집을 짓든지 나의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 희년법이 말하는 경제구원이다. 그 방법은 구원의 유일한 방식, 속량(가알, 贖良, 대속)이다.
이렇게 내가 값을 치르거나 남이 대신 치러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무르기다. 이때 남이 나를 대신하여 값을 치러주면, 그것을 대속(代贖)이라고 한다. 무르기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첫째, 내가 경제적 형편이 되면 값을 치러서 팔린 땅을 무른다(되찾는다). 이때도 잡힌 땅을 되찾는 것은 대속(代贖)이라고 할 수 있다. 빚에 잡힌 땅을 내가 값을 치러서 담보가 풀리는 것이므로 땅이 남의 수중에 묶여있다가 풀려서 주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된다.
만약에 반려동물이 남에게 빚 담보로 잡혀있다면(팔려있다면), 그 빚을 갚아주고 반려동물을 찾아오면 반려동물은 자기 주인을 만나서 관계가 회복되고 자유를 찾는다. 빚 담보로 잡힌 땅도 이와 같다. 여기서 잡힌 반려동물이나 땅을 사람이 대신 값을 치러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같은 의미가 있다.
둘째, 내가 잡힌 땅을 친족이 대신 무르기를 하여 준다. 형제나 근족이 남에게 팔려있는 나의 토지를 되찾아 주는 것이다. 이것이 희년법이 말하는 전형적인 토지 무르기이고, 대속이다.
셋째, 내가 무르기를 할 수가 없고, 친족도 해주지 않으면 잡혀있는 땅은 만기까지 잡혀있게 된다. 그러면 이런 경우는 무료로 내 땅이 돌아오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빌려 쓴 빚을 땅이 희년까지 생산물을 내어서 대신 갚아준 것이다. 그래서 이때가 희년이다. 내가 몸을 잡혀서 돈을 빌렸으면, 내 몸이 일을 해서 빚을 갚아주어야 몸이 풀리게 된다. 그러나 땅을 잡히면, 땅이 일을 해서 그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 무르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모두 대신하여 값을 치르는 대속(代贖)의 원리가 들어있다. 반드시 값을 치르고 회복하는 시장원리가 들어있다. 시장경제에서 대속은 값도 없이 속량을 하는 무료의 구원원리와 값을 치러서 속량을 하는 유료의 시장원리가 동시에 작동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유일한 방식, 대속이다. 이 대속이라는 속량의 방식은 현실 생활경제도, 정신적 문제나 영적인 죄의 문제에도 해법은 같다.
토지 무르기를 할 자격
토지 무르기의 자격은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계시록 5:1의 두루마리 개봉에도 자격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1) 토지를 무를 수 있는자는 형제, 친족, 그리고 특별한 신분 관계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신분 관계는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이 특별한 인간 관계를 뜻한다. 이것이 레위기 희년법에서는 그 범위가 형제, 친족, 그리고 소속된 지파별 동족까지다. 토지는 무르기나 상속할 권리의 최대 범위가 지파까지라는 뜻이다(민 27:11,8,9). 지파가 다르면 토지 상속권이 없으므로 무르기 의무나 권리도 없다. 물론 토지 무르기는 잡혀있는 빚을 갚으면 풀리는 것이므로 반드시 같은 지파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무른 토지의 상속권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는 경우는 없다. 같은 지파에서도 가까운 친족일수록 무르기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우선한다(룻 4:4).
그리고 무르기는 구약시대에는 형제나 친족, 그리고 지파까지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만,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인과 이웃까지 그 대상 범위가 제한 없이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2) 토지 무르기는 무를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형제나 근족이라도 무를 능력이 없으면 무르기를 할 수가 없다.
(3) 토지 무르기는 자원하여서 하는 것이다. 토지 무르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도 당사자가 자원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룻기에서 무르기 1차 의무자는 능력이 있었지만, 자기 재산에 손해가 난다고 무르기를 하지 않았다(룻 4:6). 이렇게 땅을 되찾아주는 무르기나 씨(상속자)를 이어주는 계대결혼이 강제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뒷날 상급이 관련되어 있다. 신명기에에서 계대결혼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는 자는 얼굴에 침을 뱉고, "신 벗기운 자의 집"으로 부르게 되어 있다(신 25:8~10).
룻기에서 보아스는 토지 무르기로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큰 복을 받는다. 그러나 무르기를 하지 않은 아무개는 이름도 없다. 유다의 셋째 아들 셀라도 이 형제의 의무를 게을리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지는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속량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한 다말의 후손에게 돌아간다. 다말의 시동생 오난은 속량의 의무를 여호와의 목전에서 비겁하게 불이행하다가 바로 죽기까지 하였다(창 38:9,10).
(4) 희년법의 토지 무르기는 반복적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반복적 무르기는, 신약시대에는 영구 희년 또는 영구 무르기로 바뀌어 성취되어야 한다. 희년법의 무르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정된 것이지만, 신약시대의 토지 무르기는 그 대상이 지구촌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은 레위기 제사법에서 속죄의 희생 제사가 반복적이므로 영구적인 제사가 필요한 것과 같다. 속죄의 대상도 이스라엘 민족에서 지구촌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반복적이고 범위도 제한적이었던 구약의 무르기와 제사는 신약시대에 영구적이고 온전한(무제한적인) 무르기와 제사가 있어야 한다.
(5) 희년법을 어긴 소유권 토지 거래는 기한(만기)이 없는 거래다. 그래서 이런 거래는 형제나 친족도 무르기가 불가능하다. 희년법에서 사람이 갚지 못한 토지 부채는 땅이 생산물을 내어 빚을 갚아준다. 그러나 토지의 영구 거래는 기한이 없는 거래이기 때문에 땅도 그 빚을 다 갚아 낼 수가 없다. 곧 토지의 영구 거래, 소유권 거래에는 희년이 영영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소유가격 또는 영구 거래에 대한 무르기는 큰 능력을 가진 신분자라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여기에는 크고 영구한 대속자가 필요하다. 바로 어린 양의 희생으로 핏값, 몸값, 목숨값까지 모두 지불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1)~(5)번까지 들어있는 토지 무르기는 레위기 희년법에 있거나 관련되고 있다. 이 무르기는 내가 지불해야 할 값을 남이 대신 치러주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므로 성경이 말하는 속량의 방식이 들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이 되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토지 무르기와 십자가 희생은 값을 대신 치러주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같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 양이 십자가에 희생으로 치른 값은 토지 무르기도 포함되고 있다.
(1)~(3)번은 형제나 친족이 대신하여 주는 것으로 그 방식이 십자가의 구원원리와 같다. 그리고 토지 무르기는 궁극적 완성자는 능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레위기 제사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필요하듯이 레위기 희년법도 그러하다. 그런데 (4)와 (5)번에 해당하는 것은 무르기의 값이 너무 크고, 길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4)와 (5)번에 해당하는 무르기는 예수님만이 그 값을 치를 수가 있다.
그래서 계시록 5:1에서 인봉을 뗄 수 있는 자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다음에 말하는 내용 이해가 필요하다.
죄의 속함과 토지 무르기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레 25:24)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사역)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자를 사하오니 우리의 죄들도 사하여 주옵시며...(눅 11:4)
우리는 짐승이 피를 흘려 죽으면 나의 죄가 사해지는 레위기 제사법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레위기에서 빚을 갚아주고, 나의 땅이 회복되는 희년법 토지 무르기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금도 인정해야 한다. 계시록 5:1에서의 어린 양과 인봉된 두루마리의 개봉에 대한 권리는 토지 무르기와 십자가 희생 사건의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레위기 제사법과 레위기 희년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같고, 이 문제의 궁극적 해결자도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제사법에서 죄를 속하다는 히브리어 “카파르”이며, 원형은 “코페르”이다. “코페르”는 ‘속전’을 뜻하며, 죄를 사하기 위하여 희생되는 대가를 말한다. 여기서 속죄일 또는 속전일을 “욤 키푸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지 무르기에서 '무르다'는 히브리어로 “게울라(수동형 분사)”이며, 동사는 “가알”이다. 이 “가알”에서 토지를 무를 자가 “고엘”이이다. 고엘은 ‘대속자’라는 말이다. 룻기에 토지를 무를 자, “고엘”은 보아스다. 그런데 이 “고엘”, 곧 토지 무르기의 궁극적인 권리자와 완성자는 계시록 5:1에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매년 7월 10일은 죄와 빚을 속하는 날이므로, “욤 키푸림”, ‘속전일’이다. 이날은 값을 치러서 토지 무르기를 하는 날이다. 이날은 구제년(신 14:28), 안식년(출 23:11), 면제년(신 15:1), 희년(레 25:8~10)이 선포되는 날이다. 이날은 죄도 사해지고, 빚이 사라지고, 몸값, 땅값이 모두 사라져서 전국 거민에게 생존권이 보장되고, 자유가 돌아오는 날이다.
에수 그리스도는 속전일 죄의 속함과 토지 무르기를 기도의 모범이 될 주기도로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사해주는 대상은 “빚진 자”가 된다. 개역성경은 이 말을 “죄”라고 번역하였고, 개역개정은 “잘못한 사람”으로 번역하였다(마 6:12, 눅 11:4). 그러나 성경 원문은 “빚진 자”다. 여기서 용서라고 한 번역은 헬라어에서 “압히에미”로 ‘사하다(막 2:5, 눅 5:20, 롬 4:7)’와 같은 뜻이다. 희년법에서 토지거래는 원래 그 자체가 빚 거래다. 경제학적으로도 땅값은 현재 생산된 실물이 아니고, 미래에 생산될 미래가치를 담보하거나 팔아먹은 것이므로 전액이 빚이다.
우리가 진 빚은 서로 갚아주고 사해주어 문제를 해결하여 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값을 치러서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다. 이것이 주기도가 가르쳐 준 빚을 사하는 토지 무르기다.
레위기 제사법에서 죄를 속하는 것과 레위기 희년법에서 빚 담보로 잡힌(팔린) 토지를 무르는 것은 방식이 같다. 그날이 구약시대는 7월 10일 ‘속하는 날(속죄일 또는 속량절)’이다. 이것이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치른 십자가의 희생으로 값 치르기가 모두 완성되고, 종결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기도로 가르쳐 주신 토지 무르기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수단인 속량(贖良, redemption)이다. 이 속량이 토지에는 무르기라고 한다. 그래서 속량과 무르기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문제 해법의 근본적 수단이고, 유일한 수단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이 하는 토지 무르기는 짐승을 제물로 받치는 제사처럼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약점을 가진다. 그래서 제사와 무르기의 효력이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유대교와 기독교는 레위기 속량제도를 보더라도 죄의 속함에 대해서만 말하고, 토지 무르기는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7월 10일 속하는 날이 와도 그날은 죄만 속하는 날로 알고 있다. 7월 10일이 속전일이고, 토지 무르기를 하는 날인 것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신약시대에 와서도 주기도를 드리면서 그 기도문 안에 들어있는 토지 무르기와 빚 사함을 모른다. 그러면 드리는 기도문에서 경제생활 부분은 읽기만 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내용은 모르거나 빗나가는 기도문이 된다. 그러면 기도문이 내용(경제)이 빠져버린 주술처럼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토지 무르기를 너무 모르거나 무관심한 상태에서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을 대하고 있다. 그러면 계시록과 종말의 이해에서도 토지 무르기는 모르고 성경을 접하는 것이다. 토지 무르기는 매년 추수기에 하는 것이다. 그것도 1월 달 초실절 추수에서 시작하여 추수가 끝이 나는 마지막 7월 절기 10일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토지 무르기나 토지 무르기가 완성되어야 오게 되는 희년은 구원의 최종 단계 또는 완성 단계인 종말(종결기)에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종말을 직접 다루는 계시록을 접하면서도, 종말에 필요한 토지 무르기는 빼버리고 계시록을 보게 된다. 그래서 토지의 소유권과 관련이 깊은 계시록 5:1의 두루마리 인봉(印封)을 떼는 데에도, 그것이 토지 무르기와는 관련이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계시록 5:1에서 인봉한 두루마리의 해석은 토지 무르기와는 관련이 없는 성구들을 찾아내어 관련시켜 이해하게 한다.
계시록 5:1의 인봉한 두루마리의 근거는 예레미야의 토지 무르기에서 찾아야 한다.
계시록 5:1에서 인봉한 두루마리는 예레미야서 32장에서 말하는 토지 무르기와의 관련성이 가장 크다. 인봉(印封)이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토지문서에 가장 부합한다는 뜻이다. 인(印)은 소유권의 인정이나 보증을 뜻한다. 농경시대나 지금의 도시 경제시대나 재산목록 1호는 토지 관련 문서다. 그래서 인을 찍어 봉한 재산권 관련 두루마리는, 토지문서로 보는 것이 문자적이든, 내용적이든 본문의 뜻에 가장 부합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봉한 두루마리는 다웟의 사자, 어린 양만이 개봉할 수 있다고 한다(계 5:5,6). 인봉한 두루마리가 어린 양만이 열 수가 있다는 것은 그 두루마리가 토지문서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왜냐하면 토지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인봉을 떼는 권리자는 주인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구가격인 땅값을 없애는 토지 무르기는 친족도 할 수가 없다. 그레서 땅값에 대한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값을 치르신 어린 양만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서 “다 이루었다(다 지불하였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제사법에서 말하는 죗값과 희년법 토지 무르기에 필요한 땅값이 모두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값을 십자가 희생으로 모두 치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다. 그리고 그 상속자는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면서부터 그 땅은 내 것이므로 팔리지 못하게 하였다(레 25:23). 분배받은 토지는 팔리지 말고, 자손 대대로, 영구적으로 상속하여 사용(경작)만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만약에 상속자가 끊어지면, 토지 상속권은 딸에게 넘겨야 한다. 이때에도 상속권은 이 지파나 저 지파에게 넘어가지도 않도록 결혼도 같은 지파 안에서 해야 한다(민 27:8~11, 36:7~9).
이렇게 분배받은 토지는 지파별로 영구 보존해야 한다. 지파별, 가족별 분배받은 토지가 영구로 보존되기 위해서는 무르기와 희년법 준수가 필수적이다. 분배를 받거나 무르기로 되찾은 기업은 내가 죽어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때까지 보존해야 한다. 그래서 에스겔서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에서 하게 되는 토지분배에는 12 지파가 등장한다(겔 47:13,14). 계시록 7장에서도 인침을 받을 때에는 12 지파가 상징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계시록 5:1에서 인봉한 두루마리를 떼는 데에는 장로들이 나서고 있다(계 5:5). 계시록에서 24 장로가 주요 사역자로 등장하는 것은 모두 일곱 인봉을 떼는 작업과 관련이 크다. 토지 무르기, 재산관리, 가족의 결혼, 계대결혼 등 가정에서 필요한 민사상의 중요한 결정에는 증인을 세워야 한다. 이때 그 증인의 역할을 하는 자가 장로들이다(룻 4:2, 신 25:7, 렘 32:10),
기존의 성경 이해는 어디이든 경제가 빠진다.
사람들은 계시록 5:1의 인봉한 두루마리를 개봉 절차에 따른 별도의 말씀이나 내리게 될 재앙을 기록한 문서로 본다. 이런 관점이 일반적이다(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계시록 5:1의 인봉한 두루마리에 대한 해석의 근거를 유사용어가 기록된 에스겔 2:9나 다니엘서 12:4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 구절과 내용을 인용하여 해석한다.
그러나 계시록 5:1이 말하는 두루마리는 문자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보아도 가장 유사한 의미를 가진 곳은 따로 있다. 바로 예레미야서 32:11에서 인봉한 매매증서와 그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 이해는 거의 모두 예레미야서 32장의 토지 무르기에서 인봉한 매매증서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계시록 5:11의 인봉한 두루마리에 대한 해석에서 토지 무르기에서 인봉된 매매증서와 성경은 아예 찾아보지도 않는다. 찾아보아서도 그 구절은 일체 인용하지는 않는다.
(참고 : 계시록 연구자들이 계시록에서 구약에서 인용한 구절을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아모스, 호세아, 요엘, 시편 등에서 60여 개 구절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60여개의 구절의 구약 소개에도 예레미야 32장이 말하는 토지 무르기와 인봉한 매매문서는 소개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인봉이라는 문자 자체가 가장 관련이 깊은데 왜 그럴까? 아마도 그렇게 하면 계시록 5:1의 인봉한 두루마리가 예레미야서 32장의 토지 무르기에서 나오는 매매증서와 너무 같아 보이므로, 그런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예 인용과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니면 토지 무르기는 경제 이야기라서 사람들이 싫어하므로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예레미야서 32장의 매매증서를 부정할 수 있다면, 구절 소개와 언급을 하고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대가들이, 주석가들이 토지 무르게 대해서는 아예 용어 언급이 없으며, 해당 구절을 소개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계시록 5:1의 인봉한 두루마리와 예레미아서 32:11의 인봉한 매매증서는 인봉이라는 용어 하나만으로도 관련성이 가장 크다. 그런데도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도 토지 무르기와 인봉한 매매증서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하고 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계시록 해석에서도 경제와 희년은 빼고 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세오경에 든 땅과 희년법을 빼버리는 성경 이해는,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한다. 창세기 11,12에서 땅이 사람보다 먼저 생산물을 낸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경제활동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창세기 26,28절에서 하나님이 그 땅을 다스리게 하려고 사람을 지은 목적부터 빗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족장시대(요셉의 경제), 사사시대(룻의 토지 무르기), 왕정시대의 선지자들의 규탄(희년법 준수 촉구), 포로시대의 소망(이스라엘의 회복과 에스겔의 토지분배)에서도 빠진다.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 초대교회의 유무상통, 공동서신이 강조하는 사회적 관심 등에서도 그러하다(빼버린다).
희년과 경제에 대해서는 성경에 있는 내용도 언급하지 않거나 지나쳐 버린다. 그만큼 희년은 사람들에게 멸시나 망각의 상태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언급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희년과 경제는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고 그친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경제와 희년법만은 일찍이 구약시대부터 유별나게 서자처럼 외면을 당하여 왔다. 계시록의 말미에는 성경 말씀을 임의로 제하거나 더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로 만든 서신”이라고 했다. 마틴 루터가 보는 성경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가 마음에 내키지 않으니 그런 실언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틴 루터가 계시록에서도 희년법을 연관시켜서 이해하는 필자의 글을 보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아마도 “밥에 든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일곱 인봉과 속죄일 토지 무르기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 각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
그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서 살 것이요 그도 소출을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연수가 많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많이 매기고 연수가 적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적게 매길지니 곧 그가 소출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레 25:14~16)
희년법에서 토지 무르기는 매년 7월 10일 속전을 치르는 날 하게 되어있다. 그 이유는 희년법에서 토지는 거래 기한이 희년까지이기 때문이다. 희년 선포도 7월 10일 속하는 날 하게 되어있다(레 25:8~10). 토지 거래에서 거래를 증빙할 토지문서는 그 내용이 매각자와 경작자의 이름, 경작기한, 거래 일자, 거래금액, 토지의 지번 등을 증인이 보는 앞에서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거래 당사자가 인장을 찍고, 보관을 하거나 봉인을 하여 오랫동안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보관하고 있던 토지문서는 7월 10일 토지 무르기를 하는 날 개봉하게 된다. 그래서 거래의 계약 내용을 확인하고, 무르기에 필요한 잔금을 지불하고, 그 권리를 증인이 보는 앞에서 무효화시켜야 한다. 계시록 5:1에서 어린 양이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는 것은 희년법에서 해야 하는 토지 무르기에서 하는 작업과 같은 사무다. 이 사무에는 증인들이 필요한 것도 같다.
그런데 지금 인봉을 떼는 작업은 어린 양,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다. 인봉을 떼는 것은 토지 무르기의 궁극적 종결 사무다. 어린 양이 유월절 희생으로 토지 무르기에서 지불해야 할 값을 모두 치렀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이라는표현을 자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죗값은 물론이고, 토지를 무르는 값까지 어린 양이 희생하여 그 값을 지불했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봉인이 일곱 인으로 된 것은 희년법이 7의 경제 주기에 맞추어져 있는 의미를 반영하거나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지를 담보로 잡힌 빚은 모두 7의 주기로 제정된 안식년법과 희년법, 그리고 일곱 절기의 하나인 속전일에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토지 무르기에 증거로 필요한 토지문서의 개봉 일자도 7월 10일, 7월에 해야 한다.
봉인을 떼는 일곱 절차를 7대 절기가 있는 1월부터 7월까지 일곱 달에 맞추어 보면, 큰 의미가 있다. 일곱 인봉은 6월까지 여섯 인을 떼었다고 보면, 7월 1일은 나팔을 불어야 하는 나팔절이다(레 23:24). 그리고 7월 10일도 희년이면, 희년 나팔(요벨)을 불어야 한다. 계시록 재앙에서 여섯 인봉을 떼고 나면 일곱 나팔을 불게 되는데 이 절차가 성경의 7대 절기와 달력에 딱 들어 맞게 돌아가고 있다. 물론, 계시록이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맞다기보다는 내용적으로 부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전후 사정을 모두 감안할 때, 요한계시록 5:1에서 어린 양이 떼어야 하는 일곱 인봉의 두루마리는 토지문서가 확실시 되고 있다. 이러한 토지 무르기와 일곱 인봉, 7의 수로 제정된 성경 희년법과 계시록의 일곱 재앙에 들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요약하여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일곱 인봉 두루마리를 토지 무르기로 보는 견해들
계시록 5:1에서 일곱 인으로 인봉한 두루마리를 토지문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과 몇 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소개를 하면 『희년과 복음』의 저자 장진광 목사는 계시록 일곱 인봉의 개봉이 토지문서를 소각하는 토지 무르기이며, 이 내용이 계시록 전체에서 본론 부분이라고 한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들이 모두 일곱 인봉의 개봉 절차에 들어있고, 이 개봉 절차를 따라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서로 중복된 사건을 반복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다음 구속사적 접근으로 계시록을 해석한 유도순 목사는 일곱 인봉의 두루마리는 예레미아서의 토지 무르기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계시록을 구속사적 입장에서 영적인 해석법을 취하여 정평이 있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계시록 5:1의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썼기 때문에 숨겨둔 다른 성경 말씀이나 재앙과 같이 비밀로 처리할 내용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일곱 인 두루마리는 오직 어린 양만이 뗄 수가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에 따른 구원사역과 관련된 내용으로 보고 있다.
계시록에서 말하는 비밀은 헬라어로 “미스테리온”, 영어로 ‘mystery’에 해당한다. 이 말은 숨겨진 비밀(secret)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드러나 있지만, 신비하거나 수수께끼처럼 풀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다른 것에서 말하는 비밀문서는 5:1의 두루마리처럼 봉인으로 닫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시록 일곱 인봉 두루마리는 인장을 찍어서 봉한 것이다. 다르다. 이렇게 인봉한 두루마리는 자격이 없으면 열지도 못하는 문서다.
이 외에도 일곱 인봉 두루마리를 토지문서로 보는 분은 계시록 해석에 희년을 넣어서 이해하는 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 등이 있다. 각자의 신앙과 관점은 달라도 성경 해석에서 희년과 토지 무르기를 넣거나 입에 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필자가 보기로는 계시록 이해에서 보석만큼 귀하다.
관련 자료
장진광, 희년과 복음, 1994, 두레문화
유도순, 계시록 5장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어린 양 https://cafe.daum.net/gusoksa/DnwH/314?q
정보배, https://www.youtube.com/watch?v=OvpWa7m8IY8
정동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 봉인 책 https://cbck.org/NewSermon/View/5K8)
계시록 5:1의 권리증과 7:1의 지파별 인침의 연계성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계 7:4)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6)
계시록 5장과 6장에서는 일곱 인봉 두루마리를 개봉하는 내용이다. 7장에서는 이스라엘 12 지파가 인침을 받는 내용이다. 그런데 7장이 말하는 인이란 말도 하나님이 특별하게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5장, 6장 인은 재산권에 관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고, 7장은 사람에 대한 특별한 신분이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7장에서 인을 받는 것은 이스라엘 12 지파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서 자격과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수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으로 12 지파 총수는 144,000명이다. 144,000명은 보통 이스라엘 12지파와 예수 제자 12 사도를 합친 수로, 천 단위는 많은 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144,000=12×12×1,000).
필자는 계시록 7장에서 인침을 받는 자는 5장과 6장에서 토지문서라고 본 일곱 인봉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 필자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계시록이 상징성을 가진 말이지만, 지파라는 용어가 가진 의미를 살펴볼 때 그러하다. 이스라엘 12 지파는 항상 이스라엘 민족에게 분배된 기업의 상속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姓)이 따로 없다. 12 지파가 성이다. 이 성을 표시하는 지파별로 그들의 혈통인 족보와 기업, 그리고 그 상속권을 대대로 이어오고 있다. 또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레 25:23, 민 27:11)..
그래서 이스라엘 12 지파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잇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과 그 민족의 왕통과 기업을 잇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과 기업 상속권은 천국 상속권을 계승해야 할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정통성까지 모두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에 대한 전통성을 그의 믿음만 계승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주는 주제는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큰 민족의 약속은(창 12:2), 아브라함의 믿음만 계승하면 받는 것이고, 땅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필요했던 민수기 상속법은 기업의 상속권이 12 지파별로 이어져야 한다(민 27:11,36:8). 이 상속법과 규례는 영구로 지속해야 할 계명이다(레 25:23). 민수기는 후반부에서 토지를 지파별로 나누는 것과 그 기업을 가족별로 분배하여 그 토지를 영구로 사용(경작), 계승(상속)하게 하는 토지 상속이 주된 내용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12지파에게 토지를 분배하였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땅과 기업, 그리고 희년과 경제는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여 각 시대(족장시대, 사사시대, 왕조시대)마다 후반부에서 언급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면서 12 지파에게 토지를 분배하라고 한다(겔 47:13,14). 필자는 계시록 5장과 6장에서 개봉되는 두루마리는 토지문서라고 보았다. 그러면 이 토지문서에 기록된 내용은 이스라엘 12 지파에게 분배할 기업의 목록과 상속권자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계시록 7:4에서 말하는 인침은 예수 그리스도가 개봉한 두루마리에 기록된 기업 상속권을, 12 지파가 분배받을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계시록은 상징성 언어와 내용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이것을 [이스라엘 12지파의 인침 = 이스라엘 12 지파의 토지분배]라고 등식화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12 지파는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전체를 뜻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인침은 기업 상속권(분배권)이라는 한정된 권리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침은 하나님이 어린 양을 희생시킨 대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죄사함과 영생, 부활, 천국 백성으로 인정하신 모든 사실을 보증하는 증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값 치르기 희생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다(마 20:28, 딤전 2:6, 살후 2:7). 지금 계시록 7장이 말하는 12 지파 144,000명에 대한 인침은 이런 구원의 의미를 모두 담아놓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록 7장이 말하는 인침은 토지 무르기와 기업의 상속권이 들어있는 인침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12 지파의 144,000명의 인침은,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이 받아야 할 기업과 천국을 분배받을 권리를,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기업과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 숫자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이스라엘 12 지파에게 분배할 기업(겔 47:14)과 지구촌 인류가 모두 들어가야 할 천국 입성을 허용, 보증하는 인이라고 보아야 한다(겔 47:22, 히 11:40).
지주제도의 혁파는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과제다.
한국전쟁에서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 덕분이란 평가가 있다. 필자도 그렇게 보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땅을 먼저 만드셨다. 그리고 그 땅은 사람에게 다스리게 맡기고, 소유권은 내게 있으니 영원히 팔리지 말라고 하셨다(레 25:23).
희년법을 어기고 인간 지주제도가 만든 땅값(미래가격, 영구가격)은 값이 제값(현재가치)보다 항상 2배 정도 높다. 그래서 소유자는 흑자(불로소득)가 나는 것이 아니고, 매년 땅값이 커지는 크기만큼 소유에서 적자가 난다. 소유에서 적자가 나다가 땅을 팔면, 그 적자분 크기만큼 매매차익이 생겨서 겨우 본전(원리금)을 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 매매차익에서 사람이 쓸 수 있는 실물은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GDP 구성요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생산 없이 커진 숫자(가격물)에는 사람이 사용할 실물이나 소득물이 들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매매차익은 소유자의 적자가 매입자에게 전가(이전)될 뿐, 그 사회는 그 적자를 계속하며 실물 없는 초과 구매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땅값이 커진 비율만큼 경제는 인플레이션만 나온다. 지금 우리가 장바구니에서 지불하고 있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은 지난 5년간 올라버린 아파트 땅값과 요물 같은 가상화폐, 각종 파생금융상품 등이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지주제도와 지주제도가 발생시킨 땅값은 땅이 인간에게 내리는 벌금의 성격을 가진다.
생산 없이 커지는 숫자는 경제에서 허수이므로 없애버려야 한다. 그래서 허수만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지주제도는 혁파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면서(계 6:1) 내리는 재양은 사살상 토지 무르기와 지주제도의 혁파를 의미(상징)한다.
복음이 세계에 전파된 이후, 20세기에 와서는 사회제도가 많이 개혁되었다.
첫째는 사회적 신분제도가 개혁되었다 . 양반과 천민의 차별, 적서의 차별, 남녀 차별 등의 철폐가 이에 해당한다(이 개혁은 선진국 기준임. 아직도 이슬람 사회나 미개한 사회는 신분 차별이 심한 상태임). 둘째는 노예제도가 혁파되었다. 윤리적으로는 사람의 노동활동이 신분제도에서 발생하던 주종관계를 탈피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사람의 노동력 배분을 몸값으로 하지 않고, 임금으로 개혁한 제도를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861년 남북전쟁으로 폐지되었다. 이때 미국은 남북전쟁에서 61만 명이 죽었다.
셋째는 정치제도의 혁파다. 군주제도가 민주제도로 바뀐 것을 말한다. 1879년 프랑스 혁명이 대표적 사건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군주제도를 혁파하고, 민주제도를 도입하는데 있었어도 많는 희생이 필요 했었다.
그런데 세계의 지구촌은 사회제도 중에 아직 개혁되지 못하고 남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지주제도의 혁파다. 그런데 이 지주제도는 사회개혁 중 가장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땅에 대한 군주적인 태도, 토지가치에 대한 천년묵은 무지와 오해, 그리고 계층간의 생각 차이, 가진 자의 강한 부정 등으로 개혁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땅을 팔고 사는 거래는 성경 말씀을 정면에서 어겼고(반성경적), 천륜을 어기며(반자연적), 창조질서를 어겨서(비과학적), 경제질서와 시장경제를 기초에서 흔들고(반시장경제) 있는 아주 사악한 제도다. 그래서 반드시 혁파되어야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사악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지주제도는 혁파되고, 토지의 자유 시장임대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토지 사용에 지금처럼 고액의 목돈을 선불로 낼 필요가 없다. 땅을 사용하고, 후불로 세(貰)만 내면 된다. 그 세도 내 것으로 내는 것이 아니고, 땅이 자신의 생산물로 내가 내어야 할 세(貰)를 대신 내어준다. 이것이 희년법이 영구 성취, 완성되는 영구 무르기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사유재산제가 100% 보장되고, 거기에 세금도 필요 없는 자유 시장경제를 실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의 토지 무지와 강한 저항으로 지주제도의 혁파는 가장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다.
요한계시록 5:1에서 하게 되는 일곱 인봉의 개봉은 어린 양이 해야 하는 “토지 무르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계시록이 말하는 각종의 재앙은 토지를 소유하도록 유혹한 우상을 타파하고, 지주제도를 혁파하기 위한 수단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주기도에서 말하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지상왕국)는, 사람이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 무르기를 할 수가 없어서 불가능하다. 토지를 저당잡힌 세상(땅을 팔고 사서 발생한 가격)은 크기로는 100%, 기간으로는 영구적인 빚을 가진 사회다. 땅을 잡힌(팔고 산) 빚을 가진 상태로는 희년이 영구적(∞)으로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땅값은 십자가 희생의 큰 가격(∞)으로 없애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영적, 경제적으로, 개인적, 사회적으로 희년이 성립한다.
미국에서 노예제도의 타파는 서로 생각이 달랐으며, 남북을 분열하여 전쟁을 해야 했다. 청교도 정신으로 세운 기독교 국가라도 생각이 서로 다르니, 전쟁을 일으켜서 61만명이 죽어야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력에 대한 이권 투쟁이었다. 지주제도의 타파는 인간에게 묶여있는 땅을 해방시켜야 하는 과제다. 지금까지 남아있고, 이것이 빗나가서 금융상품으로 둔갑하여 규모가 더 커져버린 지주제도를 혁파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저항과 희생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사람들이 성경 희년법을 알고 스스로 그 법에 순종하면, 이 개혁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주제도의 혁파가 말처럼 쉬울 것 같으면, 희년법이 제정된 이래 3,500년이나 해석도 되지 않고, 토지 무르기가 이처럼 무시당하면서 덮여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적그리스도(요일 2:18)보다 더 엄청난 크기의 금력과 권력을 가진 바벨론, 세상의 음녀와 왕들과 상인들!!
하나님은 땅이 가진 물리적 질서(성질)를 따라 제정하여 준 토지 무르기를 사람들이 스스로 순종하지는 않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부정의 강도가 더 심하여지고 있기 때문에, 일곱 인을 하나하나 떼면서 각종 재앙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에스겔서 38장과 39장이 말하는 곡과 전투가 그 대표적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러한 희생이 있더라도 사악한 지주제도의 혁파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가 더 필요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 토지에 대한 강한 소유욕이다(엡 5:5). 여기에 사탄은 사람의 소유욕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유혹을 한다. 이 사탄이 구약시대는 바알 신이 주도 하였고, 신약시대는 맘몬 신이 주도하고 있다(마 6:24).
토지 무르기에서 토지는 히브리어로 “에레쯔(אֶ֤רֶץ)"다. 성경에서 "에레쯔"는 항상 단수로만 쓰이며, 지구라는 단어다. “에레쯔(אֶ֤רֶץ)"와 "earth(지구는)" 어원이 같다. 땅은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지금의 땅은 상품처럼 팔려있다. 그래서 지금의 땅은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사람에게 팔려있는 것이고, 영적으로는 세상 마귀에게 팔려있는 것이다. 마귀에 팔아먹은 땅을 사람들이 무르기로 스스로 되찾기에는 종교계나 정신계에서 사고의 혁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과 복음이 순수성을 잃고 종교가 되면, 화석처럼 굳어버리는 속성 때문에 그런 사고의 혁명은 기대하기 어렵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지주제도의 혁파는 큰 전쟁으로도 성공하기가 어렵다. 하여서 하나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이 제도의 개혁을 방해하는 사탄을 결박부터 하고 시작하게 된다(계 20:2,3). 그래서 지주제도를 혁파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할 것이다(마 21:41). 그리고 이 제도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포도원의 품꾼으로 남겨둘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비유로 가르쳐 준 포도원 지상천국이다(마 20:1).
그러므로 어린 양이 주도할 토지 무르기와 지주제도의 혁파는 지구촌 인류가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감당하고 풀어야 할, 지구촌 인류의 마지막 과제다. 이 지주제도가 혁파되면 이 지구촌 사회는 큰 변혁을 초래할 것이다. 부족한 사람들이 제도를 운영한다면,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다른 어떤 제도보다 더 자유롭고, 온전한 자유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지금의 경제는 물론, 종교와 정치까지 큰 변혁이 올 것이다.
** 참고) 필자는 성경 희년법이 알려준 온전한 사유재산제도와 자유 시장경제를 살리기 위한 지주제도의 혁파(값을 치르는 토지 무르기)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유재산제도와 자유 시장경제의 틀을 부정, 훼손하는 정부원리(소유규제, 거래규제, 세금중과)를 지지하지 않는다. 지금의 정부원리는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사회주의적 처방책(무상 또는 저가 몰수와 분배, 집산체제 등)은 이미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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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을 마쳤습니다. 글이 길어서 내용을 전편과 후편으로 나눔(전편 : 토지 무르기와 일곱 인, 후편 : 희년 주기와 계시록의 시간과 미래).
<후편> 후편은 희년 주기와 계시록이 말하는 시간(연대기)과 미래에 대한 내용입니다.
7의 경제 주기와 계시록의 시간(미래) 이해
사전 이해가 필요한 70년 포로기와 계시록의 일곱 재앙
계시록이 말하는 일곱 재앙에 대한 기간과 재앙의 특징을 알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겪은 70년 포로기를 다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살아온 기간을 70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는 그 기간이 140년이 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 이후, 느브갓네살에게 잡혀갔다.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난 마지막 3차 귀환은 주전 445년경이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 기간은 약 160년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레미야서를 비롯한 여러 곳(이사야, 다니엘, 스가랴, 역대하 등)에서 포로 기간을 9회에 걸쳐서 70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70년이라고 기록한 성경이 오류일까? 오류가 아니면 왜 성경은 여러 기록자들이 160년 기간을 70년이라고 했을까? 계시록이 보여주는 일곱 재앙을 알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은 이스라엘 민족이 7의 경제 주기를 적용하여 제정한 안식년법과 희년법을 어긴 벌칙이다(대하 36:21).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70회 안식년과 10회의 희년을 어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었다. 총 490년이다. 그 연도는 제7회 희년이었던 주전 1102년부터 17회 희년이었던 주전 612년까지 490년간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70년 포로생활이란, 그 근거가 70회 안식년 기간 490년 동안 7의 수로 제정한 성경 희년법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벌칙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벌칙의 실제 기간 160년과는 관계없이 70년 포로생활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70년은 70이라는 수가 포로생활 기간을 뜻하기보다 70년 안식년간 연속되는 10회 희년 주기 490년 동안 지켰어야 할 토지의 경작법과 거래법을 어긴 것을 뜻한다. 곧 여기서의 70년은 7의 주기로 제정한 희년법 불순종으로 백성들이 당한 경제적 고통을, 상징성 또는 대표성 숫자 70년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70년 포로생활이라고 기록한 성경 이해는 실제로 겪은 포로 생활과 기간보다, 그 포로가 된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70년 포로기는 7의 주기 안식년 70년과 10회 희년 주기 490년 기간의 경제법을 어긴 것을 7의 수로 강조하고 있다. 7의 주기로 제정한 희년법을 지키지 않은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70년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 70 이레도 희년 주기에 관련된 기간이다. 70년 포로기는 지난 490년 10회 희년 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이지만, 다니엘의 70 이레는10회 희년 490년 기간에 포로가 풀려나고, 세상 구원자 메시아가 오는 소망을 알려주는 예언이다(단 9:24). 70 이레는 그 기간을 희년 주기에 맞춘 것이 있고(단 9:24), 성전 중건령(단 9:25)에 맞춘 것이 있다.
희년 주기에 맞춘 70 이레는 주전 465년 도래한 20회 희년부터 10회 희년 490년이 지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한 주후 26/27년까지를 말한다. 그리고 성전 중건령에 따른 70 이레의 기간은 10회 희년 주기 490년과 7년 간격을 두어서 맞추어져 있다. 희년 주기보다 7년 더 잡은 시간의 간격을 두고 미래의 시간에 맞추어놓은 예언이다(단 9:25~27). 그 기간은 주전 458/457년부터 시작하여 7 이레(선지자 활동 종료기), 62 이레(메시아 희년 선포기), 1 이레(영구 희년 도래기)로 구분하여 사건과 시간을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490년 기간은 레위기 25:8절에 근거한 일곱 안식년을 7회 반복하는 희년 주기를 10회 반복하는 490년 기간이었다.
계시록이 반복하여 보여주는 일곱 재앙도 실상은 70년 포로기의 벌칙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계시록이 말하는 천년왕국이나 새하늘 새 땅의 소망도 70 이레의 기간에 따른 세상구원의 시간표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두가 7의 주기로 창조한 창조질서와 7의 주기로 제정한 경제제도와 희년법을 어긴 것에 대한 일곱 재앙, 그 7의 주기로 이루어진 창조질서와 경제질서의 회복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이 말하는 7의 재앙과 회복은 모두 7의 주기로 제정한 희년법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70년을 실제로 70년 포로생활 기간으로만 알고 있다. 아니면 그 벌칙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결과라는 종교적 이유로만 알고 있다. 그러면 70년 포로생활에 대하여 성경이 알려주려는 본질과 의미를 잘 모르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계시록이 말하는 여러 가지 재앙들이 왜 일곱 숫자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보아도 바로 알고, 계시록을 보아도 더 충실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희년법과 경제생활을 찾아낼 수가 있다.
7의 경제 주기와 계시록의 연대기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레 25:8,9) 제 50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희년이니...(레 25:10)
본문은 7 안식년을 일곱 번 반복하면 49년(49 = 7×7)이다. 49 안식년 다음 해가 희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7 안식년 주기도 49년이고, 1희년의 주기도 49년이다. 레위기 25장은 7의 주기로 제정한 희년법을 알려주고, 26장은 이 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레위기 26장은 계명을 어기면 징벌을 받는다는 경고를 7회나 반복하고 있다(레 26:14~46)..
앞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7의 경제 주기는 7의 창조질서에서 시작한다(창 1:28, 2:1~3). 그리고 7의 경제질서도 7 안식일, 7 안식년, 7의 곱수인 49년 희년 주기로 제정되었다. 7의 경제 주기가 시작한 해가 출애굽 다음 해인 주전 1445년이라고 했다. 이 기간은 열왕기상 6:1에서 솔로몬 성전 착공 연도를 주전 966년으로 보는 전통적 계산법에 따른 것이다.
구제년, 안식년, 면제년이 모두 이 7의 수로 제정되었다. 생활 달력에 맞추어놓은 3대 절기와 7대 절기가 모두 이 희년 주기나 7의 수로 제정된 경제법의 거시적 틀 안에 들어있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 구속사의 연대기를 이 희년 주기에 맞추어 이해한다. 70년 포로생활, 다니엘의 70 이레가 이 희년 주기에 맞추어져 있듯이, 계시록이 말하는 일곱 재앙도 7의 주기로 제정된 희년법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이해도 7의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관련성을 찾아보고 있다. 계시록이 일곱 수로 세분하여 보여주는 각종 재앙들은 7의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어긴 것에 대한 징계의 절차로 보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징계를 마친 후에 돌아오는 사회 질서의 회복도, 이 7의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따라서 완성될 것으로 보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기간을 알려주는 연대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만, 계시록이 지루하도록 반복하고 있는 각종 재앙들과 환란 기간과 관련하여 3.5년을 상징성 숫자로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3.5년의 기간을 희년 주기와 연결시켜 보려고 한다. 3.5년은 1,260일, 42개월, 한때 두때 반때로 서로 다르게 기록했지만, 기간은 모두 3.5년이다. 이 숫자에도 모두 7의 경제 주기를 말하는 7의 수가 들어있다.
42달과 1,260일에서 발견되는 일곱 절기와 7의 경제 주기.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2,3)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42달은 6과 7을 조합한(42=6×7) 상징수로 볼 수 있다. 이 기간은 달(月)의 수이며, 성경 달력과 계절과 추수기를 알아야 한다. 성경 달력은 달을 기준하여 만든 음력이다. 성경 달력은 농사철과 경제 절기인 7대 절기도 우리 한국처럼 음력으로 되어있다. 먼저 6개월은 1년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전반기 6개월, 후반기 6개월로 나눈다. 종교력은 달력이 전반기에 시작하고(니산월 기준), 생활력(티스리월 기준)은 후반기에 시작한다. 종교력으로 6달은 추수기를 따른다. 이 추수기를 모두 마친 안식월로 7월이고, 생활력은 이때가 새해다.
생활력으로 시작한 6달 주기가 끝이 나면 7의 주기에 1월 절기가 되고 유월절이 들어있다. 유월절기, 초실절에서 50일째가 칠칠절이자, 신약시대에 성령강림절이다. 그리고 첫 절기 유월절은 1월 14일 보름날이며, 마지막 절기 초막절은 7월 15일 보름날이다. 이 보름날 주기도 6달 주기를 가지면서 7의 주기로 맞게 되는 유월절과 초막절에 맞추고 있다.
계시록 11:3에서 42달은 두 증인이 예언을 하는 기간이고, 13:5에서 42달은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기간이다. 그런데 3.5년의 기간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왜 42달 또는 1,260일을 말하고 있을까? 필자는 계시록이 말하는 각종의 재앙들도 그 재앙의 내용이 중요하기보다, 재앙을 7의 상징수로 세분하여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일곱 수의 의미를 더 중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3.5년을 42달, 1,260일로 달수와 날수를 보여주는 것도, 그때 있을 환란의 의미보다 이 달과 날이 상징하는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3.5년과 42달, 1,260일의 상관관계를 찾아보고 있다. 1년 중 경제 달력이라고 할 수 있는 7대 절기가 6개월 주기 안에 모두 들어있다. 그래서 3.5년의 예언 기간과 환란 기간은 7대 절기 42달 기간과 6개월 주기로 반복하는 7월과 1월에 맞추어 놓고 있었다. 그래서 7대 절기를 7회 반복하면, 6월 주기가 42달 기간이 된다(42달 = 6월×7 안식년의 7회).
7대 절기는 농사철과 경제활동 주기에 맞추어 놓은 경제 달력이다. 7대 절기의 첫 명절은 유월절이고, 마지막 명절이 초막절이다. 이 기간이 만 6개월이다. 예수님은 첫 절기인 유월절에 어린 양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유월절이 포함된 첫 주의 날(日요일)이 초실절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전 15:20).
예수님은 구약의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으로 성령을 보내 주시어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초막절 초막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고(요 1:14), 초막절에 천하만국의 왕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다(슥 14:16).
그러므로 성경달력과 7대 절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속사의 연중 시간표에 해당한다. 이 절기에 따른 구원의 시간표도, 구약과 신약의 시간적 성취가 희년 주기와 같이 정밀 기계나 수학 공식처럼 정확하다. 한 치의 오차나 오류도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계시록 일곱 재앙 안에 들어있는 3.5년의 예언이나 환란 기간은 7년 주기로 되어있는 경제 주기 7대 절기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42달 기간으로 보여주는 계시록의 3.5년의 환란 기간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들어있는 구원의 시간표이고, 그 시간표에 들어있는 말씀과 언약은 구원에 필요한 건축 설계도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래서 42달의 기간은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 기간을 다시 날짜로 계산하여 7의 주기에 맞추어 놓고 있다. 이것이 1,260일의 기간이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1,260일은 7년 주기로 나누면 6개월 기간인 180일(180일=1,260일/7년 기간의 7)이 된다. 이것은 출애굽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유월절 보름날부터 구원이 완성되고 즐겨야 할 초막절 보름날 잔치까지가 180일 기간이다. 그래서 유월절과 초막절까지의 180일 기간을 일곱 추수 절기로 7회 반복하는 기간이 총 1,260일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3.5년의 환란기는 7대 절기의 존속기간인 연간 180일 간의 추수기를 7년간 반복하는 시간의 주기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여섯달 주기 180일 = 30일×6월).
그러므로 이것은 180일 기간을 가진 7대 절기를 일곱 번 지속하는 달의 총수가 42달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계시록이 말하는 전삼년 반, 후삼년 반은 180일간 연속되는 7대 절기가 7회 반복되는 기간에 맞춘 심판과 구원계획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이 되고, 초실절에 부활하여, 오순절에 성령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7월 절기 초막 절기를 따라서 재앙과 구원 사역을 진행하시겠다는 것이 계시록 일곱 재앙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다. 그래서 3.5년의 재앙은 7년 대환란을 뜻하지 않고, 7년 기간에 총 3.5년(42개월)의 대환란을 있을 것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이 말하는 3.5년의 예언 또는 환란은 6달이 7회 반복되는 7대 절기나 경제 주기를 지키는 것과 관련되고 있다. 용이 짐승에게 준 3.5년의 권세는 이런 7의 경제 주기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들의 활동이다. 물론, 계시록이 말하는 3.5년의 기간은 상징적인 숫자이므로 해석은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상징적인 숫자인 일곱 재앙이 7의 주기로 제정한 경제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한때는 1년, 두때는 2년, 반때는 6개월이다. 왜 3.5년, 3년 6개월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성경에서 3년 6개월의 기간은 그 기간 안에서 1년, 2년, 6개월씩 의미 있는 사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엘리야의 때에 기근이 3년이기도 하고, 3년 6개월이기도 하다. 또 아기 예수 탄생과 애굽 피난 기간도 3년 6개월 정도이다. 그래서 한때, 두때 반때의 의미는 1년, 2년, 6개월에 걸쳐서 발행하는 사건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한때, 두때, 반때는 계시록 일곱 인과 일곱 재앙이 연속되는 마지막 때에도 의미가 있는 시간적 절차가 있을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계시록의 3대 절기와 추수기의 심판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 14:4)
계시록 14장은 추수에 관한 내용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계시록 14:4에서 첫 열매가 나오고, 14:14절 이후는 추수에 필요한 이(利)로운 낫을 7회나 언급하며, 두 종류의 추수를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 처음 익은 열매는 유월절 어린 양이 희생되어 초실절 첫 열매로 부활하신 절기와 관련되어 있다(레 23:10,11, 고전 15:20). 그다음 두 종류의 추수에서 14:14의 추수는 곡식 추수다. 곡식 추수를 마치면 맥추절 또는 오순절 성령강림절이다(레 23:15,16, 출 23:16, 행 2:1). 14:18에서 포도 송이를 거두는 것은 초막절이 있는 마지막 7월 절기를 대비하는 추수를 뜻한다. 이때가 나팔을 부는 나팔절이며(레 23:24), 토지 무르기를 하는 속전일이고(레 25:9), 추수를 다 마치고 즐기는 초막절 잔칫날이다(레 23:34,39).
두 종류의 추수는 유월절기 초실절에서 맥추절까지 하게 되는 곡식(보리와 밀) 추수와 마지막 7월 절기를 맞는 열매(포도와 각종 과일) 추수를 상징하고 있다. 두 종류의 추수는 종교력에 따른 유월절 중심의 종교적 심판과 생활력에 따른 속전일과 초막절에 해야 하는 경제적 심판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심판에서 성 밖에는 포도주 틀에 밟혀 흘린 피가 1,600스티디온에 퍼진다. 여기서 1,600의 수는 땅을 상징하는 4의 제곱 수와 충만을 뜻하는 수 10의 곱수로 완전한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의 추수로 마지막 때의 심판을 말하신 적이 있다(마 13:30,39,40). 추수기 심판을 알리는 계시록 14장에서 멸망의 대상은 바벨론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다(계 14:8,9). 이 짐승의 표는 팔고 사는 거래의 증표와 관련되는 경제적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희년 주기와 70 이레, 계시록의 전삼년 반과 후삼년 반
42달 동안 성전이 짓밟히는 기간에 예언하는 두 증인이 있다. 두 증인은 스가랴서 4:3에서 두 감람나무로,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을 주도한 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로 본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시대의 교회라고 한다. 아니면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확언할 수는 없다. 우리는 3.5년의 기간과 그 기간이 가진 의미를 찾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더 중요할 것이다. 계시록의 연대기 3.5년은 경제법에 들어있는 희년 주기와 다니엘 70 이레의 관련시켜서 이해할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전 26년(또는 주전 27년)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셨다. 이 해가 레위기 25장 8~10에서 발효한 희년법 희년 주기가 30회 희년으로 1,470년 기간이 되는 연도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30회 희년은 49년마다 반복된 희년이 신약시대에 성취된 해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시 시작하는 미래의 희년은 49년 주기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시대의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였기 때문에 그 기간이 무기한 이연되어 효력이 지속되는 영구 희년으로 바뀌어졌다. 희년 선포의 수혜자도 이스라엘 민족에서 세계의 모든 인류로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전 26년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한 30회 희년은 지금도 영구 희년으로 바뀌어서 그 실현과 완성을 기다리는 과정에 있다. 그 첫 사역이 죗값과 땅값을 없애버린 유월절 어린 양의 십자가 “값 치르기” 사건이었다(요 19:31). 그런데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이 2년 6개월인지, 3년 6개월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3년 6개월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니엘 70 이레는 10회 희년 주기 490년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기간을 다니엘 70 이레 기간인 490년에 대입하면, 다니엘 70 이레 중 1 이레 기간이 3년 6개월씩 반반으로 나누어져 해석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여기에는 주로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다니엘의 1 이레는 신약시대에 와서 모두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나 초대교회의 스데반의 활동기까지가 다니엘의 1 이레 기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계시록에서 말하는 3.5년의 기간과 전삼년 반, 후삼년 반의 주장은 이미 성취된 과거 이야기가 된다.
둘째는 다니엘의 1 이레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본다. 70 이레 중 69 이레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나 공생애 기간 사역으로 성취가 되었으나 1 이레는 미래의 마지막 때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소위 간격설이 이에 해당한다. 소위 말하는 “7년 대환란”은 여기서 나오는 주장들이다. 이 주장은 다니엘의 69 이레 기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연도까지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다니엘의 69 이레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다. 그래서 69 이레를 상징적 기간으로만 보는 한계를 가진다. 필자는 희년 주기와 다니엘의 70 이레는 상징성을 넘어서 정밀 기계나 수학 공식처럼 정확다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보기로는 다니엘 70 이레 중 남은 1 이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활동으로 전삼년 반이 성취되고, 남은 후삼년 반은 미래로 무기한 이연(효력 지속)되어 있다고 본다. 곧 계시록이 말하는 3.5년의 기간은 반복적 희년이 영구 희년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십자가의 값 치르기 효력이 무기한 지속되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진행은 되고 있지만 나약한 인간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완성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 때에 3.5년 기간 안에서 대변혁이 일어나서 완성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남겨둔 3.5년은 7대 절기를 달수로 표기한 6개월과 그 6개월 기간을 7회 반복하는 수의 조합을 뜻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러면 7의 주기로 제정된 희년법은 영구 희년으로 기간이 변하여도, 7의 주기가 가진 경제적 의미는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7의 주기로 제정한 경제 질서와 7의 수로 제정된 희년법과 각종 절기는 신약시대에도 폐지되지는 않고, 계속되고 있어야 한다. 신약시대에도 유월절이 부활절로, 칠칠절이 성령강림절로 성취되어 지키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이것은 7의 주기로 제정한 경제 제도가 신약시대는 더 좋고 온전한 제도로 수정, 보완, 개혁되어서 지켜질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7의 주기에 들어있는 경제적 의미가 생활에서 그 필요성이 계속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계시록 두 증인, 사흘 반의 죽음과 부활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3)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계 11:11)
계시록 11:2에서 42달 동안 성전 마당이 짓밟히는 기간에 예언하는 두 증인이 있다. 두 증인은 스가랴서 4:3에서 두 감람나무로, 스룹바벨 성전 건축을 주도한 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로 본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교회(12 지파 공동체)와 신약시대의 교회라고도 한다. 아니면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로 보기도 한다(송태근, 요한계시록 강해, 유도순, 요한계시록 파노라마). 또한 계시록 11:10절에서 선지자라고 하므로 두 증인은 구약시대의 대표 선지자 엘리야와 신약시대 선지자 세례 요한(신약시대의 엘리야, 말 4:5) 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세는 가장 큰 선지자로 기록되었다(신 34:10).
그러므로 어느 것도 확언할 수는 없다. 신약시대에도 공동체에서 죄를 짓거나 중대사에는 두세 사람의 증인을 세워야 한다(마 18:16).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사실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도 증인이 필요하다(눅 24:44~49).
죽은 자의 시체가 장사되지 못한 곳에는 족속과 방언과 나라들이 있었다는 것은 두 증인이 소속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모세는 애굽에서 광야 공동체를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직접까지 인도하였고, 모세오경을 쓴 율법의 대표적 증인이다.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대표자 자격을 가진 증인이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엘리야를 대신한 신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푼 증인이다.
두 증인이 예언을 하는 동안 엘리야의 때처럼 비가 오지 않고 여러 가지 재앙이 내려지고 있다(계 11:6). 이때 무저갱에서 짐승이 올라와서 전쟁을 일으키고, 증인들을 죽이게 된다. 큰 성이 있는 길에 시체가 있으며, 그 성은 소돔과 애굽이다. 그런데 이곳이 영적으로는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다. 이 짐승들은 죽은 자들에서 사흘 반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그러나 사흘 반 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들어와서 죽은 자들이 일어서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그들도 목격하게 된다(계 11:1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당할 재앙과 그 재앙 이후에 있을 부활의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흘 반이라는 말이 계시록 11장 9절과 11절에 걸쳐서 나온다.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여 3.5일간 장례도 못하게 되고, 그 기간(3.5일)이 지나면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계시록 11장 초반에서 성전 척량이 있고, 두 증인의 3.5년 동안 예언을 한다. 그다음은 짐승들이 나타나서 전쟁을 일으켜서 증인들이 죽고, 3.5일 동안 장례를 못하게 한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3.5일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3일이나 4일이 아니고, 왜 하루의 절반인 0.5일을 추가하여 3.5일이라고 할까? 이것이 해석의 관심사다.
계시록 11:9,11에서 말하는 3.5일은 1일(日)을 년(年)으로 보아서 11:2,3이 말한 삼년 반(1,260일)의 기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3.5일을 소위 전삼년 반, 후삼년 반의 기간에 맞추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같은 11장에서 사건의 기간을 3.5년이라고 하고, 다시 3.5일을 말하는 것은, 3.5일이 연수로 표시한 삼년 반과는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계시록 11:7부터 짐승이 나타나서 일으키는 재앙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곳, 3.5일간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장례 기간 3.5일이 지나면 증인들(또는 성도들)이 부활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지진도 일어나서 7,000명이 죽는다. 그런데 3.5일은 7일의 절반이다. 계시록 11:2,3에서 말하는 3.5년의 기간은 7년의 절반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11장에서 말하는 3.5일(日)과 3.5년(年)은 7의 주기 안에 들어있는 7의 주기 절반 기간이다. 왜 기간을 무를 자르듯이 중간에 잘라서 절반씩 나누어 놓았을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하시던 고난주간이 7일 기간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마 12:40). 그래서 계시록 11:9,11에서 말하는 3.5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서 부활하기까지의 3일 기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계시록이 말하는 3.5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희생으로 무덤에 있었던 기간보다 0.5일이 더 길다.
여기에 시간으로 따지면 예수 그리스도는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여 토요일을 지나서 주일(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요 20:1). 시간으로는 40여시간 밖에 되지 않고, 날짜를 기수로 계수하여 3일 기간에 속한다. 그러나 목요일에 하신 세족식, 성찬식,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 등을 포함하면 목, 금, 토, 일 4일 기간이므로 3.5일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목요일에는 유월절 예비일로 어린 양을 잡는 유월절 음식 의식도 치르셨다(마 26:19). 한편으로 목요일에도 예수를 모함하여 죽이려는 무리들과 가롯 유다의 반역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반역은 계시록 11:7에서 말하는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장례 기간 3.5일과는 11:8에서 말하는 영적인 의미까지 비슷하다.
그리고 계시록이 말하는 3.5일은 미래를 예언하는 상징수다. 그러므로 70년 포로기가 160년 기간이라도 70년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3.5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3.5일의 수로 상징화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계시록 11:7 이하에서 관련 구절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 죽음과 장례의 기간, 그리고 장례 기간(사흘 반)이 지나면 증인(성도)들이 부활하는 것까지 그 과정이 같다. 이때 지진이 나는 것도 같다(마 28:2, 계 11:13). 기간을 뜻하는 날짜의 숫자만 0.5일 또는 시간에서 차이가 날 뿐 의미가 모두 비슷하다.
그래서 계시록 11:9,11이 말하는 3.5일은 1주일을 둘로 나눈 상징수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한 기간은 7일을 뜻하는 고난주간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고난주간의 구원 사역을 그 주의 초반 사역과 후반 사역으로 나누면 절반 기간을 3.5일로 나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주간 초반기는 주로 왕의 신분으로 해야 할 통치 행위를 하셨다. 수요일은 기록이 없다. 수요일이 지난 후반기는 십자가 대속 사역이 중심이었다.
그래서 계시록 11:9,11에서 3.5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받으신 고난주간 중에 후반기(3.5일)의 대속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래에 성도들이 당할 고난과 그 고난을 이겨내고 부활하는 소망을 증인의 죽음과 부활을 묘사하며 알려주고 있다.
영적 상징(계 11:8 이하) : 소돔 또는 애굽(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 두 증인의 사망과 장례 3.5일 -> 3.5일 후 부활 승천
예수 그리스도(마 27:26) : 골고다(십자가 못 박히신 곳) -> 희생과 무덤 3일 -> 3일 후 부활 승천(고전 15:4)
<참고1> 70년 포로 ≠ 포로기간 160년 => 70년 포로기는 70 안식년 490년동안 토지경작법과 토지거래법을 어긴 벌칙
<참고2> 사흘 반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부활(계 11:9,11) ≠ 예수 그리스도의 사흘 기간 죽음과 부활 => 고난주간 후반기(3.5일) 구원사역
계시록 죽음과 부활 3.5일과 고난주간의 일곱 사역
(고난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희생, 부활의 기간)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주간에 7일 또는 8일 기간으로 입곱 사역을 하셨다. 먼저 종려주일은 왕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장례를 위해서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날도 이날이다(토요일 저녁 6시 또는 일몰이면 주일이 시작됨). 월요일은 성전을 청소하고, 화요일은 성전에서 강론을 하고 논쟁을 펼치셨다. 주제는 무려 20여 개나 되는 항목이며, 내용은 주로 왕의 통치에 필요한 생활경제에 대한 강론이었다. 고난주간 행적과 강론은 복음서 전체에서 1/3의 분량이라고 할 만큼 방대하고 비중도 크다.
그리고 수요일은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행적을 나타내지 않은 수요일 사역도 구속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다음은 목요일은 세족식, 성찬식,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같은 신앙에 관련된 가르침과 의식을 치르셨다. 그리고 금요일은 모함을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이다. 토요일은 무덤에서 안식일을 보내며, 안식일을 지키셨다. 그다음 주일날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서 부활하셨다.
7일 또는 8일간 행하신 고난주간의 행적은 전반기가 일, 월, 화 3일이며, 후반기가 목, 금, 토, 일 4일이다. 중간에 속하는 수요일 행적은 성경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가 없다. 8일간 행하신 사역은 수요일을 빼면 일곱 가지 사역을 하셨다. 고난주간 한 주의 전반기는 왕의 취임(日), 왕의 청소(月), 왕의 강론(火)을, 후반기는 종교의식(木), 십자가 희생(金), 안식(土), 부활(日) 등으로 총 일곱 사역이다. 그리고 水요일은 기록이 없지만, 사람들이 모르게 행하신 다른 사역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 11:9,10에서 말하는 3.5일 동안 성도들(또는 두 증인)에게 나타나는 죽음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주간에 행하셨던 후반기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7의 주기를 양분하면 고난주간의 후반기는 3.5일이 되며, 이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다. 그리고 고간주간에 초반기인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은 성전에서 왕의 통치와 강론을 펼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려주일부터 다음 주일까지를 왕의 도성 입성과 부활이라는 큰 사건을 7일(엄밀하게 말하면 8일) 기간에 맞추어서 행하셨다. 그러나 수요일은 행적은 일절 나타내지 않으신다. 왜 그랬을까? 7의 주기로 행하시는 예수님의 고난주간 사역은 구속사에서 핵심이 되는 큰 사역이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의 일곱 사역은 7의 주기로 제정된 창조질서의 경제질서의 회복과도 관련이 크다. 하여서 계시록에서 3.5년의 기간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고난주간 일곱 가지 사역과 기간은 70 이레에서 1 이레로 이어지는 전삼년 반과 후삼년 반의 전 기간의 범위로 크기를 확대시켜 이해할 수 있다.
고난주간 십자가 구원사역과 전삼년 반과 후삼년 반의 3.5일
7의 주기로 이루어진 창조질서와 경제질서 안에 희년 주기와 70 이레가 들어있다. 계시록이 말하는 3.5년의 기간과 3.5일의 기간도 모두 영구로 지속될 희년 주기와 70 이레가 보여주는 7의 주기 안에 들어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고난주간의 사역도 이 7의 주기에 맞추어서 일곱 사역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초림기에 성취하신 전삼년 반과 재림기 직전에 이루어질 후삼년 반의 사역은, 고난주간 일곱 사역에서 전반기 사역과 후반기 사역으로 나누는 것과 비슷하는 뜻이다.
그래서 계시록 11:9,11에서 3.5일은 미래의 재림기 후삼년 반의 기간 끝에 있을 죽음과 부활 기간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초림기에 성취된 전삼년 반의 기간 끝에 실제로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주간 사역 중에서 후반기 사역(3일 또는 4일 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상징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성취된 전삼년 반 중 고난주간 십자가 사역 3일 또는 4일 = 재림기에 있을 후삼년 반의 기간 중 3.5일의 죽음과 부활 사건
그리고, 고난주간 활동 중 수요일 사역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전삼년 반과 후삼년 반의 활동이 중간에 나타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고난주간 수요일 사역이 나타나진 않은 것은 기간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사역은 잠재되어 있어서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난주간 수요일 사역은 보이지 않지만, 고난주간 전체 기간 사역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잠재된 활동 기간의 지속적 상태를 법률과 경제 용어인 "기간의 이연(移延)"이라고 하였다. 모두 희년 주기와 70 이레, 7의 주기로 진행된창조질서와 경제질서인 7의 주기 틀 안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고난주간의 사역은 세상을 구원하고, 왕이 실제로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까지 포함하는 것이므로 아주 큰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구약에서 짐승이 피를 흘려 죽는 속죄 의식처럼 1회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난주간에 값을 치른 희생 사역은 그 효력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그때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면, 천지창조의 때와 금지한 선악과를 취한 아담의 때까지 소급하여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고난주간의 통치 행위와 십자가 대속은 구속사의 전체를 집대성한 만큼 크고, 완성적인 것이다. 세상 죄를 대신한 고난과 죽음, 그리고 세상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역사적 가치는 그 값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므로 고난주간 통치 행위와 십자가 대속은 그 효력이 공생애 기간(전삼년 반)은 물론이고, 재림기에 있을 후삼년 반의 기간, 그리고 최후의 심판까지 거의 모든 기간 사역의 범위까지 확대시켜 적용할 수 있다. 또 십자가 사역은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계시록 11장이 말하는 3.5일 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고난주간 사역을 역순으로 뒤집어서 적용하면, 계시록이 보여주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들까지 유추할 수가 있다. 3.5일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성도들이 부활이 일어난다는 뜻이 된다. 그다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은 마지막 때가 되면 못을 박은 자들이 오히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은 목요일에 행하신 세족식과 성찬식 등은 마지막 때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경배의식 등으로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계 19:9).
그런 다음 고난주간 초반기에 있었던 왕의 취임과 생활강론으로 알려준 왕의 통치는 십자가 희생 사역으로 인하여 시행하지 못했던 사역이 남아있다. 그래서 재림의 때 또 그 직전기에 성취될 지상왕국에서는 초림기에 하지 못한 왕의 세상 통치를 직간접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고난주간 화요일에 성전에서 가르치신 천국 경제법과 성전강론에서 밝혀놓은 통치 방식과 내용을 현실 통치에서 시행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실 세상 통치 중에서 경제적인 부분은 포도원 천국 비유로 보여 주신 포도원 천국 경제법이다(마 20:16, 21:43). 이것이 계시록이 말하는 천년왕국이다. 물론, 천년왕국은 왕의 직접 통치인지, 천사들과 하게되는 간접 통치인지는 확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는 천년왕국이 임할 때까지도 모르는 부분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주간 사역은 신약시대에 영구 희년으로 이어지는 7의 희년 주기와 70 이레가 연계되어 있다. 여기에 계시록이 말하는 전삼년 반, 후삼년 반과 3.5일에 대한 십자가 구원사역과 재림기(또는 천년왕국) 구원사역인 죽음과 부활은 의미상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진다. 이를 요약하여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희년 주기와 계시록 연대기의 종합 정리
필자는 희년 주기 490년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포로 생활과도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희년 주기 490년과 다니엘의 70 이레 490년은 7년 격차로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간의 상호 관련성은 정밀기계처럼 정확하며, 이 주기를 맞춘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는 수학 공식처럼 틀림이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이렇게 희년은 정확하게 주기를 맞추어 선포되고(눅 4:19)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은 되지 못하고 있다. 희년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희년을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선포한 희년을 알면 그 희년을 생활에서 지켜서 복을 받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구속사에서 희년과 관련하여 함께 하는 주제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에 대한 기간의 인식 문제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도 이미 시작은 되었지만(막 1:14,15), 아직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것은 희년이 성취는 되었으나(눅 4:21)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과 같다.
그리고 계시록의 핵심 주제인 종말에 대한 시간 인식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말하는 신약시대의 종말은 구약시대의 종말과는 용어에 포함된 함의(含意)가 다르다. 구약시대의 종말은 말 그대로 세상 끝을 말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종말은 세상 끝을 말하기 보더 시간의 범위가 넓다.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역으로 이미 종말의 때가 왔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사건은 그 자체로 다 이룬 것이다(요 19:30).
사도행전 2:17은 초대교회에서 성령이 임한 사건을 말세의 때라고 한다. 야고보도 지금의 때를 말세라고 한다(약 5:3). 사도 요한도 주후 90년경에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으니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하였다(요일 2:18).
그러나 그 종말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시작은 되었으나 아직 완성은 되지 않은 것이 신약시대의 희년(영구 희년)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며, 계시록이 말하는 종말이다.
이러한 종말에 대하여 예수님은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어야 세상 끝이 온다고 하였다(마 24:15). 그리고 그때는 아무도 모르므로 항상 깨어있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성도들은 재림기에 다시 오실 신랑과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 주인과 청지기의 위상관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기름 준비하고, 받은 달란트로 열심히 일하며, 그 달란트를 사용할 줄 알아서 작은 자들을 찾아보며 살아야 한다.
이것은 희년과 천국을 공짜로 주는 선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천국을 기다리기만 하다가 오는 신랑을 놓치며, 가진 재물은 있는 것도 빼앗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양과 염소로 구분할 때, 짐승의 표를 받아서 염소가 될 수 있다(마 25:46).
계시록의 주요 내용 요약 정리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로마 황제의 정치적 탄압과 우상숭배 아래 성도들이 받는 경제적 고통과 그에 따른 성도들의 신앙적 또는 경제적 생활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말세를 맞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과 신앙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계시록 일곱 재앙은 7의 질서인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어긴 대가로 받아야 할 각종 심판을 보여주고, 7의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회복하는 내용으로, 구원을 성취시키는 계획이고, 시간표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총이 충만한 구속사를 보여주며,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다스릴 심판의 때와 세상 통치를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세상 유혹을 이긴 성도들에게는 영생과 복락을 주고, 승리의 면류관을 약속하는 소망의 책이다.
이러한 계시록이 상징으로 보여주는 의미(내용)를 몇 가지 큰 주제별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유월절 어린 양(출 12:3) => 계시록의 어린 양(계 5:6)의 대속 => 초림과 재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② 예레미야서의 칼과 기근과 전염병 => 계시록의 여러 재앙들 => 미래에 있을 전쟁과 각종 재앙
③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 계시록의 구원 받은 성도들 => 미래에 구원받을 성도들
④ 구약시대 징계 받은 유대교인들 => 계시록의 징계 받을 일곱 교회 => 신약시대 거짓 종교인들
⑤ 바벨론과 바벨론의 패망(단 5:30) => 계시록의 바벨론의 멸망(계 17장, 18장) => 로마 또는 신약시대의 세상 권력자의 멸망
⑥ 1세기 소아시아 일곱 도시 경제구조 => 우상숭배와 짐승의 표(계 13:17) => 땅의 왕, 음녀, 상인들의 멸망
⑦ 예레미야의 인봉한 매매증서(렘 32:11) => 계시록의 인봉한 두루마리(계 5:1) => 신약시대 토지 무르기의 완성
⑧ 여호수아 12지파의 토지분배 => 12 지파의 인침 받음(계 7:4) => 에스겔 12 지파 토지분배(상징성, 대표성) 또는 지구촌 희년 왕국의 실현(왕노릇)
⑨ 에스겔 희년왕국(겔 46:17,18) => 계시록 천년왕국(계 20:1~7) => 이스라엘 또는 지구촌의 희년법 실현(왕노릇)
⑩ 창세기의 천지창조(창 1장) =>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계 21장, 22장) => 종말과 창조질서의 회복(알파와 오메가)
미래의 구원과 재림에 대한 가설(예상) = 성경 구속사와 구원 여정의 파노라마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언제 재림하게 될까? 천년왕국은 있는가? 없는가? 있으면 어느 시기에 있을 것인가? 이것에 대한 논의가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다. 계시록이 말하는 시간과 재림은 미래에 있을 일이다. 이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예수님이 알려 주셨다. 그리고 계시록은 상징성 숫자와 언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계시록만으로 미래의 시간을 내다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계시록이 알려주고자 하는 시간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속사에는 일정한 패턴의 시간 흐름이 있다. 그래서 미래의 있을 사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계시록의 시간은,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한 구속사의 시간표를 가지고, 미래의 시간에 대입하여, 그 대강의 시기나 절차를 추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성취된 구속사의 패턴을 가지고, 미래에 있을 사건과 시간을 추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전체 과정(여정)을 하나의 동영상처럼 펼쳐가며 살펴보는 구속사의 파노라마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선택과 땅을 주는 구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먼저 창조하신다(창 1:1). 그리고 사람을 지어서 생기를 불어넣고,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다스리게 하신다(창 1:26,28).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육적인 세계는 하나님, 사람, 그리고 땅이라는 3요소가 필요하다. 아니면 죽어서 육은 사라지고 영이 살아야 하는 하늘(천국)이 필요하다. 그래서 죽어가는 천국은 하나님, 나의 영, 그리고 영이 사는 하늘(천국)이 필요하다.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 사람, 그리고 공간(땅 또는 하늘)의 3요소가 바른 관계를 유지하거나 회복할 때를 말한다. 이것이 창조질서이고 구원질서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불러서 세운다. 그곳은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간의 바른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땅을 준다는 약속을 하면서, 길고 긴 구원 여정을 시작하신다.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왔으면, 준다는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정착된 생활로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사람, 그리고 땅의 3요소를 갖춘 지상 나라다. 이렇게 차지한 땅을 지키고 나라를 이루어 살다가 죽으면, 그 수고의 상급으로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다(히 11:8~10).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구속사는 이것이 구원의 여정이고, 완성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살아생전에 자기 땅을 얻지 못하고 남의 땅(우상숭배자 가나안 족속의 땅)에서 유랑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일가족 70여 명을 애굽으로 데려와서 땅과 경제를 아는 요셉 총리에게 맡겨두었다. 그리고 언제인가는 다시 약속하신 땅을 주어서 구원을 완성하려고 하신다. 땅의 구원을 완성해야 천상의 세계인 하늘(영생) 구원도 완성할 수가 있다. 여기서 전자는 지상에 있는 나라이고, 후자는 천상에 있는 천국이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구원하기 위하여 땅을 주는 역사는 길고도 험하다. 하나님은 그런 구원의 여정을 미리 알고 계시기에 아브라함에게 4대가 400년이 되어야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횃불언약을 하셨다(창 15:13~15). 횃불언약은 요셉이 죽은 후 400년만에 그의 십대손 여호수아가 요셉의 뼈를 갖고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뎌서 성취되었다(요셉의 사망연도 주전 1806년, 가나안 정복연도 주전 1406년). 그리고 아브라함에 대한 횃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따라서 땅을 주고, 그 땅을 관리하는 희년 언약이 되었다. 희년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완성된 구원으로 죽어가는 천국이나 마지막 새 예루살렘을 선물로 받게 된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예수 초림의 과정
구속사에 전형적인 구원 과정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1446년 1월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홍해를 건너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율법으로 받고, 광야 공동체를 세우고 생활 동동체에서 필요한 희년법도 제정하였다. 다음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토지를 기업으로 받고, 희년법을 지키는 경제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앞에 두고 불순종하여서 그 땅을 진입이 40(38년)이나 늦추어진다. 약속의 땅도 홍해의 구원처럼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만, 주신 땅을 모두 정복하지 못했다. 약속의 땅 정복은 다윗이 왕이 되어 주전 1,000년 경 시온성을 차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약 400년이 걸린 셈이다.
다윗 왕국이 탄생한 후 다시 1,000년이 지나서 메시아가 왔고, 신약시대가 시작된다.
신약시대의 구원과 예수 재림의 과정
신약시대는 세상 죄악에서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구원의 증표로 세례를 받으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교회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라고 하였다(고전 10:2).
그다음은 남은 과정이 천국 백성이 되어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절차가 남아있다. 이런 신약의 구원 과정을 출애굽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출애굽시대에 애굽은 신약시대 세상과 같고, 그 당시 홍해를 건너는 것은 신약시대에 세례를 받는 것과 같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세운 광야 공동체는 신약시대에 교회 공동체와 같다.
그러면 출애굽 시대의 광야 공동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다윗 왕국을 세운 다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그러면 신약시대는 교회 공동체가 앞으로 맞아야 할 단계는 어떻게 될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 다음은 맞은 공동체는 약속의 땅과 다윗 왕국이므로, 이것을 신약시대에 교회 공동체에 대입하면 교회 공동체 다음은 지상왕국이 있어야 한다.
그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 왕국을 지나서 초림 예수를 맞은 것을 비교하면 신약시대 교회 공동체는 지상왕국이 있은 다음 예수 재림이 있게 된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교회 공동체 다음 맞게 될 미래는 지상왕국과 재림의 절차가 남아있다. 물론, 이것은 애굽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 과정과 신약시대의 교회 성도들이 맞이하는 구원 과정이 단계가 같다는 가정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예상은 하나의 가설에 해당한다.
그래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는 구속사의 동일한 방식이라면, 우리에게 남겨진 미래는 이렇게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광야 공동체는 다윗 왕국이 있은 다음 초림이 있었으므로, 신약시대 교회 공동체는 다윗 왕국에 버금가는 지상왕국, 곧 천년왕국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다음 예수 재림이 있다는 예상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보면 예수 재림은 천년왕국이 있은 다음 있는 것이므로 후천년설이 된다.
지상왕국과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
그리고 미래에 있을 지상왕국과 재림도 그 시간이 지체되는 이유를 출애굽 여정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홍해를 건넌 다음 해 들어가야 할 약속의 땅이 40년이나 늦추어진 것은 광야교회의 불순종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구원을 받았어도 불순종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은 발도 디뎌보지 못하고 광야에 설다가 죽어야 했다. 그리고 다윗 왕국도 불순종으로 인하여 나라가 실패하고 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맞게 된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교회도 곧 이루어질 것 같았던 하나님의 나라가 2,000년이나 지연되는 것은 우리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구원받은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불순종이 계속된다면 약속된 지상왕국의 진입은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이 말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영혼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최후의 심판인 백보좌 심판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하는 구속사 전체가 하나의 맥락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원의 과정은 시작 단계가 있고, 시작한 구원은 완성되는 단계가 있다.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았으나 그 구원의 완성은 적어도 400년이 넘어서야 가능했다(창 15:14). 출애굽에서 홍해를 건넜어도 약속의 땅을 얻기까지는 광야에서 40년, 다윗 왕이 시온성을 정복하기까지 400년이 걸렸다.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는 기간 약속을 한 횃불 언약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까지는 43회 희년 주기 2,107년이 소요되었다.
신약시대는 예수 초림과 공생애의 희생으로 그리스도인들른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완성 단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신약시대의 종말을 말할 때 등장하는 “이미, 그러나 아직은(already, but not yet)”이라는 관용어다. 이러한 종말관은 미래에 있을 종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구원의 과정과 역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신약시대에도 주전 26/27년부터 43회 희년 주기 2,107년이 지나려면, 주후 2133년까지다. 아직 109년이 남아있다(2024년 기준). 반복된 희년이 영구 희년으로 바뀐 신약시대인데, 예수님이 구약시대에 세고 계셨던 희년 주기를 적용하실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지상왕국은 출애굽 백성들이 들어가야 했던 약속의 땅과 같은 현실적인 세상에서의 사회적 구원 상태를 말한다. 출애굽에서 불순종자는 광야에서 살다가 죽어야 했지만,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불순종하면 어떻게 될까? 개인적인 믿음은 신실하여도 성경이 말하는 사회구원은 불순종하는 경우를 말한다.
신약시대 지상왕국에서는 수명을 마칠 때까지 죽지는 않고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받아야 할 기업과 해야 하는 역할이 차이가 나거나 제한을 받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지상왕국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복음 전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예수 재림은 자꾸 늦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다섯째 인을 뗄 때 순교자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의 심판을 신원하고 있다(계 6:10). 이때 하나님은 아직 그 수가 차지 못하였으니 그 순교자의 피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신다(계 6:11). 하나님은 이렇게 지상왕국과 재림을 늦어지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예상들은 신약시대에 교회가 맞게될 미래의 시기나 절차를 대입하여서 상상해보는 가설에 불과하다. 이렇게 예상한 천년왕국과 재림의 시가는 후천년설과 같은 결과가 도출되고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후천년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미래에 있을 세상과 그 시기를 예상해서 하나의 시나리오를 써 보는 것이다. 다른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이러한 구속사의 긴긴 여정을 구속사의 과정으로 보고, 그 예상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을 부른 이스라엘 구원과 세상 구원(구속사적 과정)
시대 구분 | 세상 | 선택과 영혼구원 | 신앙과 생활훈련 | 지상구원과 나라 (영혼구원+ 생활구원) | 구원의 완성 |
족장시대 | 우르 | 부름 | 믿음과 유랑생활 | 총리의 구원과 통치 | 약속의 땅 |
출애굽시대 | 애굽 | 홍해도하 | 광야 공동체 | 약속의 땅과 왕국 | 초림시대 |
신약시대 | 세속 | 세례 | 교회 공동체 | 약속의 나라와 왕국 | 재림시대(?) |
계시록구원 | 세상 | 어린양 | 일곱교회, 일곱 재앙 | 교회에서 왕국으로 | 새예루살렘 |
천년왕국과 희년이 필요한 이유(종합)
앞에서 몇 번 언급하였으므로 정리를 위한 요지만 밝히면 다음과 같다.
(1) 토지 무르기의 종결 : 토지 무르기의 종결 사역은 경제구원과 지상왕국 건설의 마지막 종착지다.
(2) 희년의 성취와 완성 : 구약시대의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신약시대의 영구 희년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땅과 희년법은 분명히 성경 말씀이고,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경제구원의 방법론이다. 약 3,500년간 덮여있는 성경의 희년법이 세상에 알려지면, 땅과 상품의 물리적 성질도 식별하지 못하고, 소유욕만 부추기며, 세상을 유혹하는 기존의 경제학과 사회과학은 다시 써야 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3) 초막절의 신약적 성취 : 유월절은 부활절로, 칠칠절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으므로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도 성취되어 한다(슥 14:16). 이날이 한국에서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의 명절이 될 한가윗날이다. 그런데 성경 초막절이 한국 한가윗날이라는 말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희년법에 대한 반응처럼 “아멘”을 하지 않는다. 참! 기이한 현상이다. 미국 명절 추수감사절 감사 메시지는 아멘이 있어도, 성경 명절이요, 세계의 축제일이 한가위라는 말에는 아멘이 없다.
(4) 이스라엘의 온전한 구원 :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한 구원은 그 후손의 족보를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완성되어야 한다. 각자 생존권이 걸려 있는 중동의 땅의 문제, 이스라엘과 이슬람인들 간의 얽히고설킨 앙금은 능력자의 특별한 조치가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5) 사단 결박의 통치 수단 : 사람은 타고난 원죄와 버리지 못하는 탐욕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자력으로는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이 세상에 지상왕국을 이뤄내지를 못한다. 그래서 세상을 물질로 유혹하는 사탄을 결박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무천년설은 성령 강림으로 성도들이 사탄을 이길 수 있다고 보아서 이미 사탄이 결박된 것과 같다고 본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성령을 받고도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갈등이 일어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부부를 보면 사람은 성령을 받아도 타고난 탐심을 이겨내지 못한다. 야고보서는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고 꾸짖고 있다(약 5:3)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사탄을 이겨도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는 늘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 권력 아래 있다. 그래서 세상을 유혹하는 사탄의 결박은 사회구원을 위하여도 반드시 필요한 필수 수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 복음 전파의 최후 수단 :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면 구원을 완성할 수가 없다. 천년왕국은 한시적 기간이지만,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보여주면서 구원자의 수를 늘리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다.
(7) 사회구원의 필요성(최소 희생과 최대 구원의 비책) : 천년왕국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온전한 나라, 곧 사회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계시록이 말하는 각종의 재앙은 세상을 심판하기보다 사회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야 하는 궁여지책이다. 이러한 재앙을 내려서라도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개인구원을 판별하는 백보좌 심판에서 불못에 던져질 자들이 줄어들고 구원자가 늘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구원은 알고 있고 관심도 크지만, 사회구원은 잘 모르거나 관심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8) 공생애 때에 하지 못한 왕의 통치 행위 :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3년 6개월 간 희년을 선포는 하였으나 나사렛 회당에서 전원 이 거부하기 때문에 시행하지는 못했다(눅 4:21,22). 고난주간에도 십자가에서 치러야 할 값 치르기 사역으로 왕의 통치는 하지 못했다. 성전에서는 천국경제에 필요한 강론을 하고, 시행은 못하셨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초림 때에 강론만 펼치고, 하지 못한 왕의 통치와 천국 경제법을 실현시킬 것이다. 이 왕의 통치는 사단을 결박한 천사(계 20:1)와 24장로, 그리고 순교자들과 표를 받지 않은 특별 사역자들(계 20:4)이 위임 통치를 하게 될지, 예수님이 재림하여 이들과 협력하여 직접 통치를 하실지는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계시록은 일곱 재앙의 주요 대상을 바벨론, 음녀, 땅의 왕들과 상인들로 보고 있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마지막에는 세상 권력과 물질을 탐하거나 결탁된 종교와 정치, 종교와 경제를 심판하겠다는 말이다. 왕정시대에 이스라엘은 바알 신을 끌어들여 그 신이 표방하는 이방제도를 따르고 여호와가 제정한 계명들을 지키지 않았다. 특히 물질과 관련된 경제법과 희년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하여 애굽, 바벨론을 불러서 치게 하였고, 나라까지 잃게 하였다. 철권 정치를 하는 로마를 내세워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여 2,000년간 땅과 나라 없는 백성들로 만들어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했다. 주신 땅과 백성들, 그리고 나라를 지키라고 희년법을 주셨는데, 백성들이 그 법을 지키지 않으니 하나님이 이런 징계를 내리셨다.
지금 세계는 이슬람이 날로날로 불어나고 있다. 그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줄어들고 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복음이 전세계로 전파되어야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데 하나님이 이런 실상을 모르실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경고를 받거나 칭찬을 받았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지금 모두 사라졌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과 로마를 통하여 징계를 하였듯이,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무슬림(이슬람)들을 불러서 활동하게 두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이런 현상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남의 일로만 여긴다. 세상은 죄악으로 빠지든, 말든 나만 신앙생활 바로 하고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서 사명감이 있는 분들은 예수님을 알리는 전도는 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죄악으로 혼탁하거나 희년법 불순종으로 발생하는 각종 세상 문제는 별개로 생각한다. 신앙 공동체는 신앙만 지키면 그것으로 천국 티켓이 주어지고, 생활 공동체에 대한 것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생각과 행위를 제거해야 그게 순수 복음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신앙 공동체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이다. 계시록이 말하는 각종의 재앙은 이런 현상 때문에 개인의 신앙과는 관계 없이 모두가 당하게 될 인류 공동의 화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남아서 약속의 땅을 들어갈 방법은 오직 하나다.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말씀으로 약속의 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전한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바른 믿음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우상숭배가 무엇이고 왜 우상숭배를 하는지?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라는 당부가 과연 무엇인지를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도 다시 보고, 새로 알아야 할 것이 많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성경 말씀을 임의로 빼거나 더하는 데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계 22:18,19). 성경은 66권 전체를 하나의 몸에 비유할 수 있다. 창조질서와 성경의 전체 구조에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몸의 한 쪽 팔과 다리는 땅이다. 또 다른 한 쪽의 팔다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희년법과 경제생활을 빼버리고 성경을 보게되면, 성경은 몸통에서 팔다리 하나씩을 빼버린 성경 이해를 하게 된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도 그런 기형적인 성경을 보고 있고, 그렇게 이해하며, 기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어린 양이 하게 되는 일곱 인의 개봉과 토지 무르기는 이런 기형적인 몸과 삶을 바로 잡는 마지막 수단이고, 절차다.
성경은 우리를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하다. 그래서 주신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거나 빗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자요 지혜자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하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보고, 듣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려주시고, 삶에서는 복을 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시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혀는 분이 아니고,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오셨고, 다시 또 이 땅으로 오실 분이시다.
고난주간 십자가 값 치르기로 우리를 죄에서 살리시고, 땅값까지 사하셔서 천국을 이루어주실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 이제 계시록에 대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계시록까지 들먹이고, 이런 말들을 써야 하는지는 늘 자신을 곱씹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자판을 두들겼습니다. 땅과 희년에 대한 글(내용)은 “A=B”인 것도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그 특성상 “A=B”라고 할 수는 없어서 조심스러운 부분까지 땅과 희년을 넣어서 이해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오류가 있거나 고쳐야 할 내용은 지적을 해주시면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땅과 희년을 넣으니 뚜껑을 열기도 두려웠던 계시록이 조금은 보여서 제 자신도 신기하게 느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어린 양, “에레쯔(אֶ֤רֶץ, 지구) 고엘!!”, 경제구원의 완성자, 어린 양의 토지 무르기는 계시록 전체의 본론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