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150년을 살아남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정답일 수도 있다. 삶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는 의미에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목적, 의미, 가치’와 같은 ‘이념’을 절대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무엇이든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일 테다.
만물이 그러하겠지만 인간에게 인간 개개인은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그러니 인간을 수단화하거나 도구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칸트, 아도르노)
그처럼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며 칸트식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절대적인 정답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칸트 자신의 요청도 칸트 자신의 말대로 ‘규제적 이념으로 요청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럴 경우, ‘규제적 이념에 대한 요청’은 그 ‘이념’에 공감하거나 동의하는 이들에 의해 수용되거나 존속할 것이다. 그 ‘이념’은 개개인이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로 존중받게 하는 것일 테다. 그럴 때 개개인의 공감이나 동의에 이를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 ‘이념’이 ‘자본 권력’의 논리에 따라 강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회의 지배권력의 이념이 지배적인 이념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맑스) 하지만, 한낱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존중받고 싶은 개개인들에 의해 그 ‘이념’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칸트의 ‘요청’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면서 규제적인 힘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이념적 규제, 타인에 대한 요청과 공감과 동의에 의해 삶의 정답들은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삶에서 인간 개개인이 ‘지배권력’과 맺는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나 맑스의 ‘소외된 노동’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인간에 의한 인간(자연)의 억압을 넘어서는 관계를 만드는 것일 테다. 누가 주인이, 지배권력이 되느냐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지배와 억압이 없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억압적인 지배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평등한 삶’은 다른 인간으로부터 억압당하기를 욕망하지 않는 인간들의 요청에 의해 가능할 ‘규제적 이념’일 뿐일 테다. ‘자본 권력’이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 ‘민주적인 삶’은 ‘생산수단’의 소유 방식을 민주화할 때 가능할 뿐일 테다.
2024. 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