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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을 가지라 / 시 47:1-9, 행 16:19-24
교회를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 중에도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부흥회 때 부흥강사가 지금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면 손을 주저주저하면서 드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아직 구원받지 못했지만 지금부터 열심히 신앙생활하여 구원받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라면 많은 사람이 손을 든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원의 확신도 없이 그저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구원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구원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다. 이 시대는 확신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다. 사회도,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곧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다. 때때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얘기를 하면 교만하고 도도한 것 같아서 겸손한 마음에서 사양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독교의 진수인 복음을 알면서도 짚고 넘어가지 아니하고 주변의 이야기만 듣고 그것으로 만족할 때가 많이 있는 것 같다.
바울이 유럽 전도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까닭에 그곳에 가면 굉장히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큰 시련을 당했다. 빌립보 동네에 귀신들려서 점을 치는 여종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울과 실라를 따라 다니면서 그들을 향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여’라고 자꾸 얘기를 했다. 성령의 역사는 악령이 더 빨리 알아차리기 때문에 귀신들린 여종이 그들을 자꾸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수입을 많이 올려 주인을 이롭게 한다. 바울과 실라는 그가 너무 불쌍해서 그에게서 귀신을 내쫓았다. 그가 제 정신을 차리게 되자 점을 더 이상 못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여종의 주인이 수입이 끊어진 줄을 알고 바울과 실라를 고소했다. 상관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그들을 몹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어도 태연하게 찬송과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밤중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더니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쇠고랑들이 갑자가 다 끊어져 나갔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간수가 깨어 보니 옥문이 할짝 열려져 있었다. 갇혀 있는 죄수들은 중형을 받은 자들인데 이들을 놓치면 자신이 대신 죽어야 했다. 그래서 간수는 칼을 빼어 자살을 하려 했다. 그때 바울과 실라가 ‘여보시오, 죽지 마시오. 우리가 여기 다 있소’라고 소리를 질렀다. 간수가 등불을 켜고 들어가보니 쇠고랑이 다 끊어지고 옥문이 열려져 있는데도 바울과 실라는 그대로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것은 예화가 아니고 실화이다. 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차이가 이렇게 엄청나다. 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던 것에 비해서 간수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느냐고 무릎을 꿇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주저하는 때가 많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예를 들어 볼까요? 김현희를 여러분도 다 알 것이다. 김현희는 그가 한 행위로 말하면 당장에 사형선고를 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용서를 받고 자유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기도 대단하다. 책을 썼더니 그 책이 수십만부나 팔렸다. 왜 그런가? 그의 행위로 말하자면 사형이지만, ‘나는 과거의 죄를 통회자복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대한민국을 믿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하니까 그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집도 마련해 주고 갖가지 혜택을 주었다. 법으로 말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사람인데 용서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보아도 내가 주인이 될 수가 없다. 내 생각과 마음 먹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죄 투성이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용서함 받은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요,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매우 간단한 진리이다. 금식기도를 하고 고통스러운 훈련을 받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리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당장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내 입으로 주를 시인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TV에 나오는 광고보다 더 못믿겠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사전에 보면 ‘큰 재난과 위험과 파멸에서부터 구출을 받는 것’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예를 들어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 갈 때에 구조대가 그를 구출해 내는 것이 구원이다. 또 용기있는 소방수가 불이 난 집에서 아이를 구출해 내는 것도 구원이다. 기업가가 부도를 내고 쓰러지기 직전에 친구가 많은 재물로 도와주어 그를 사업의 실패에서 구출해 내는 것도 구원이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한다. 나는 다른 것은 다 믿지 않는다. 내가 주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고,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절망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자신이, 빛을 향해서 소망 가운데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구원받은 실체이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주의 전인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다시 재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거에 가졌던 가치관과 세계관과 영생관이 달라졌다.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을 믿기 바란다. 몇날 몇시에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점잖은 교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주저한다. 그리고 마음 속에 의심을 가지게 된다. 분명히 내가 예수를 믿었으면 구원을 받은 것인데, 그 시간을 대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대개 이단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유혹하기 위하여 그런 이야기를 한다. 휴혹받지 말기를 바란다. 구원이란 것은 날짜나 시간, 물리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들 중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신 분들이 계신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것은 갑자기 머리가 희끗희끗 해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처럼 외모가 달라져서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은 그대로 있는데 어느 순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자녀들이 결혼하고 손자가 태어나 손자와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이다. 물론 극적인 체험으로 구원받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갑자기 불빛 가운데 거꾸러졌다. 맹인이 되었다. 그때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는 순간에 그는 예수를 발견하고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그처럼 극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누구나 다 갖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순수했고 지도자로서 모든 것을 갖춘 디모데를 바울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디모데는 바울처럼 다메섹에서의 체험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교육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는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구원의 체험을 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체험이 없다고 해서 디모데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가 뒹글면서 회개했나? 아니다. 그는 예수님과 나란히 앉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예수님이 날 구원하셨소. 내가 토색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습니다’라고 할 때에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이라’고 예수님께서 구원을 선포하셨다. 고후 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사는 동안에 내가 과거에 갖고 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향의 삶을 살아가게 된 구원받은 사람의 발걸음인 줄로 믿는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몇가지 생각해 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서도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그럴 때에 옥문미 열렸다. 왜 그랬나? 주님이 그들을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는 종교가 필요없다. 내 주인은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상 자기 자신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 프랑스의 무신론 실존철학자인 베르그송은 마지막 그가 죽기 전에 성직자에게 가서 세례를 달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내 주인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계셔야 되겠기 때문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세가지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소속의 욕구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소속감을 분명히 가지고 있을 때에 어디를 가든지 자부심을 가지고 고백을 한다. 둘째는 의미의 욕구이다. 살아가는데 의미가 있어야 된다. 그래야 보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인부에게 일당을 줄테니 마당에 우물을 파라고 했다. 그때 인부는 주인에게 ‘여보시오. 일을 시키려면 똑바로 시키시오. 이렇게 일을 시키는 법이 어디있소? 일이 보람이 있어야지요’라고 말하며 삽을 내던지고 가버렸다. 단순히 땅을 파는 일군이라고 의미가 있어야 되고 성취감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의미가 없으면 동물보다도 못하다. 셋째는 합리적인 안전의 욕구이다. 우리는 안전하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주님께 속해 있을 때에 이 문제가 해결되는 줄로 믿는다. 온 우주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 우리의 생명의 창조주가 되시는 예수님,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할 때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는 길과 진리되신 예수님, 이 주님께 속해 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 참된 평안을 가져다 준다.
대낮에 고아와 부모있는 아이들이 같이 놀다가 해가 지자 부모있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부모없는 고아들은 저녁 때가 되어도 갈데가 없다. ‘어디로 가지?’ 주인없는 인간도 고아와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면 그 주인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롬 10: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이 내 구주인 것을 고백하는 순간에 이미 구원은 여러분에게 임하신 것을 믿기 바란다. 절차가 필요하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용서받은 것을 믿을 때에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쇠고랑을 끊어주시고, 옥문을 열리게 하신다. 죄악의 노예가 되어 있던 나를 자유롭게 해주신 그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것을 믿기 바란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가 없다. 전라북도에서 하루에 28건의 교통사고로 2.8명이 죽는다고 금요일 밤 뉴스에 나왔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 미래를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을 때에 희망과 기쁨이 넘치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넘칠 줄로 믿는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마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기 바란다. 스코틀랜드의 10살 난 메어리 윌슨이라는 소녀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가 바다로 점점 깊이 들어가 마지막에 죽은 순간에 ‘예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자기의 죽음, 자기의 미래를 하나님께 위탁하는 고백을 듣게 된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렇게 죽어갔다. 그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수천 마리의 후조라는 새떼가 레이더도 없고 누가 신호를 보내는 것도 아닌데 2천마일을 날아가 하와이에 가볍게 내려 앉았다. 누가 그렇게 했을까요? 새들도 목적지에 이르게 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의 미래를 목적지에 무사히 이르게 하지 않으시겠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를 때에 여러분의 미래가 구원받는 것을 믿기 바란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갖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용기와 확신이 여기에서 생긴다. 잠 3: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 믿음이 구원의 확신이다. 오늘도 주님이 내 과거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내 미래의 주님이 되시는 것을 믿고 따를 때에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믿기 바란다.
2.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권능을 믿는 사람이다.
바울과 실라가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하는 중에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움직였다. 지금까지 죄와 악령에 붙잡혀 있던 내가 그 쇠고랑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온전한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마치 점치는 여자에게서 악령을 내어쫓을 때에 그가 온전한 사람이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전 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러분은 쇠고랑에 매여 있지 않은가? 옥중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 모든 쇠고랑을 끊어버리고 참된 자유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구원의 확신이 여기에서 임하게 된다. 내 자식이 죽어가고 사랑하는 아내가 암에 걸리고 남편이 하는 일이 뜻대로 안되어 파산지경이 되었을 때 하늘을 향해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구원해 주신다. 그 구원을 믿을 때에 구원의 확신이 있는 줄로 믿는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의 놀라운 역사이다. 소련의 레닌그라드에 가면 성 아이작 템플이라는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 있다. 이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시다는 증거로 그 가운데에 과학적으로 돌아가는 지구를 만들어 놓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로 바뀌자 그것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대신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행적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들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여러분의 지배자는 과학이 아니다. 재물도 명예도 아니다. 우리를 창조해 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우리의 주인이신 것을 믿기 바란다.
3.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변화의 체험을 한 사람이다.
바울과 실라가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때에 간수는 그들에게 세례를 받고 변화되었다. 사도 바울을 매로 쳤던 그 사람이 이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때로 내가 변화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변화를 받았다. 그런데 영적인 문제보다 물질적인 문제가 앞서게 되면 이 변화가 자꾸 흐려지게 된다. 그래서 솔제니친은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공산주의의 박해로 종교를 싫어하게 만들었고, 서구 사회에서는 삶의 의미를 물질적인 행복의 추구로 종교를 약화시켰다.’ 오늘 주님을 예배드리러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은 예수 믿기 전과 지금을 한번 비교해 보기 바란다. 몇 년 지난 동안에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연한 변화가 아니다. 캄캄한 밤이 갑자기 환한 대낮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점점 내 양심이 달라지고 의식구조가 달라져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이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된다. 인간의 참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물질추구로부터 방향을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가 쓰레기 공해이다. 세계에서 쓰레기를 가장 많이 버리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 지금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다고 그런대로 되어 가지만 아직은 멀었다. 몇년 전 세계 잼버리 대회가 강원도에서 열렸을 때 독일 잼버리 회원들이 자기 나라에서 하던 대로 쓰레기를 분리수거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쓰레기 차가 오더니 그 분리수거한 쓰레기를 몽땅 한꺼번에 모아서 거두어 가는 것이었다. 독일 청소년들은 이렇게 하다가는 한경오염이 독일에까지 미친다고 본부에 항의를 했다. 그랬더니 본부측에서는 쓰레기 수거를 항의한다고 벌점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았다. 기본적인 훈련이 안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기본적인 문제가 흔들릴 때에 모든 것이 흔들린다. 우리의 생활 쓰레기도 문제지만 삶의 쓰레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의 죄악의 쓰레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수거할 것인가?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죄악의 쓰레기는 다 소각되고 온전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믿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주님만 붙들고 있으면 영원 문제, 마음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을 믿기 바란다.
제주도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할머니가 제주도에 가려고 비행기표를 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할머니에게 ‘할머니, 제주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여기 제주도행 표를 사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제주도에 가봐야 알지,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십니까?’ 이는 마치 미래에 하나님 나라에 가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천국을 가보지도 않고 천국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다. 믿음의 문제이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을 전적으로 믿고 나아갈 때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는다. 우리를 죄악과 흑암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소망의 길을 열어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믿고 고백할 때에 이미 여러분은 구원받을 것을 믿기 바란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1997-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