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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강 새 생명 가운데 행하라 3/13
26.03.31(화)
로마서 6장 1절에서 5절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오늘은 생명 안에서 사는 방법이 어떠해야 되는가 또 어떻게 해야 생명 안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말씀을 좀 나눌까 합니다.
오늘 주로 다룰 범위는 로마서 6장 전체가 되겠습니다. 특별히 지난 시간 배운 내용 중에 여러분들이 오늘 공부를 위해서 꼭 기억해야 될 사실 하나가 있죠.
지난시간에 홍해를 중심으로 설명을 드렸던 것 기억나죠. 우리가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애굽과 가야 될 가나안 땅 양쪽의 입장을 한번 조명해 봤었어요.
예를 들어서 이런거죠.
애굽은 이들의 옛 삶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이제 이들이 가야 될 땅이에요.
문제는 홍해를 건널 때 애굽 쪽에서 보면 히브리 노예들이 뭐 한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수장된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죽는거죠.
여러분 혹시 이런 느낌 들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도 여전히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렇죠. 그래서 늘 그게 이제 갈등이고 자괴감이죠.
나 왜 이럴까 가짜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구나 이 문제에 다 조금씩 발을 디밀고 있고 또 괴로워하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양반제도가 있었죠.
또 노예들이 있었고 어느 나라에나 유사한 제도들이 다 있었습니다.
히브리들도 마찬가지예요. 또 고대사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 노예는 내가 노예면 아들이 아무리 학벌이 좋고 똑똑하게 태어나도 그냥 노예 아들이에요.
이 권고함에서 완전하게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다구요.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한 가지밖에 없어요. 죽으면 돼요. 죽으면 죄와 노예라는 이 모든 사슬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로마서 6장에서는 제가 한 군데만 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뭐에 대하여 죽었다고 되어 있죠.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이렇게 돼 있어요. 여러분 이미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여요.
그러면 시신을 놓고 한번 생각을 해보자고요.
여기 시신이 있어요. 시신을 무슨 쇠붙이 같은 걸로 건드려도 반응이 없죠 왜 죽었기 때문에 여기에다가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1톤짜리 무거운 걸 한번 얹어보세요. 전혀 반응이 없어요. 왜 죽었기 때문에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안에 죄의 환경과 동기만 생기면 바로 촉발이 되고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건 거꾸로 얘기하면 무슨 뜻입니까?
아직도 뭔가 내 안에 살아있다는 얘기예요. 그렇죠. 만약에 내가 죄에 대해서 완전히 정말 죽은자면 그 반응이 일어나야 됩니까? 안 일어나야 됩니까? 일어나면 안 되죠.
죽었으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그랬어요. 그 성경이 거짓말인가 자 여기 인제 우리가 혼란이 있어요.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을 잘 몰라서 그래요.
자 우선 성경의 워딩을 우리가 어떻게 오해하는가? 한번 보도록 하죠.
로마서 6장 1절을 한번 보십시다.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말은 사실상 어떤 말에 받아낸 이야기인가 하면 로마서 5장에 보면 이런 본문이 있어요. 제가 읽어드릴게요. 바로 앞에 부분인데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쳤다고 돼 있죠. 잘 아시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
이 말을 우리가 굉장히 오해하기가 쉬워요 실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 그러면 은혜를 더 넘치게 하려면 죄를 더 많이 지으면 되겠네 이 단어만 보면 그럴 수 있죠.
이게 인제 로마서 5장 20절에 20절의 말씀이에요.
다시 한번 그 본문을 읽어드릴게요. 이렇게 돼 있어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대요
그래서 이 워딩을 잘못 이해해가지고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반문을 사도바올이 의도적으로 한 겁니다.
여러분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죠.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어요. 죽은 자여요. 그래서 원리와 원칙적으로는 죄에 대해서 반응이 일어나지 말아야 돼요.
그런데 일어난단 말이에요. 어떡하면 좋죠.
아 그러면 거꾸로 이해를 하면 나는 가짜일까 그럼 진짜 큰일 나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가 상당히 문제가 생기고 심각해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을 알아야 돼요.
성경은 첫 번째 미래 완료형으로 설명을 해요.
성경에는 놀랍게도 이런 시제가 굉장히 많아요.
두번째는 진행형으로 소개를 해요.
어떤 예를 들어야 여러분 적합할까요?
구약에 한번 예를 들어보십시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대해서 약속한 것을 모세가 글에다 남겨요 그 글을 볼 당시에는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에 안 들어갔을 상태예요.
그런데 뭐라고 얘기를 하냐하면 내가 이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 주었노니 주었노니 과거 완료형으로 썼어요. 근데 문제는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주었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성취해 가느냐 진행형으로 설명하죠. 발 바닥으로 밟는 모든 것을 무슨 뜻입니까? 궁극적인 goal 목적은 미래 완료형으로 설명을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대신해서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사실 영원히 단번에 이루셨어요. 십자가에서 우리 시청자분들 그 사실을 믿습니까? 다 이루셨어요.
근데 그것이 어느 속에서 진행되고 풀어집니까?
예 시간과 공간 속에서 풀어지고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개념입니까? 하나님에게 필요한 개념입니까? 인간에게 필요한 개념이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가 없어요.
어느 한 공간에 메이는 분이거나 어느 한 시간에 속박되고 구속되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2천년 전 과거의 시간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우리에게 이해를 위해서 시제가 필요한 거라고요. 이미 영원히 단번에 십자가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놓으셨어요.
근데 문제는 이것이 그 완성이 어느 속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의 이해를 쫓아서 설명이 되고 진행이 되고 있다고요.
조금 설명이 좀 딱딱하고 어렵기는 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옛 사람의 그림자도 있고 부족함도 있고 이것을 이제 완성해 나가고 있어요.
근데 이 과정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요.
왜 십자가에서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불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 새 생명 가운데라는 말은 이제 그 안에서 뭐만 사실 남았는가 하면 철저히 그분이 우리에게 복되게 하신 그 계획을 순종하고 누리는 작업만 남았다고 누리다 오늘 중요한 게 지난주에도 잠깐 언급을 했죠.
누리다라는 말은 누가 앞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라고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이동되는 작업이여요. 우린 점점 조금씩 조금씩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계속 지금 나가는 과정 중에 있다
학교 다닐 때 이런 그래프를 여러분들 보신 기억이 있을 거예요. 그래프가 이렇게 엑스대 무한대를 향해서 가죠 근데 우리는 늘 이게 쭉 가는 법이 없어요.
늘 어떻게 갑니까?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렇게 가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만 보냐하면 여기서 여기까지만 봐요. 또 여기서 여기까지만 봐요.
그러니까 항상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어떻습니까? 맨날 우리 이러는 것 같아요. 우리는 맨날 올라갔다 또 어떤 때 성령 충만했다가 또 성령 안충만 했다가 성령 충만했다가 안충만 했다가 그런데 하나님의 손길과 그리스도의 구속에 은혜에 붙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 계획 속에서는 엑스대의 무한대를 향해서 이걸 단 진동이라고 그러죠 지금 뭘 가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근데 인간의 인지속에서는 엑스대 무한대를 향해서 가고 있는데 우리가 느끼는 범주는 늘 여기하고 여기서밖에 못 느낀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늘 우리 신앙생활이 매일 그저 그 자리 같아요. 들쭉나는 들쭉날쭉 하는 것 같아요. 단 진동만 느끼는 거예요.
우리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의 그래프를 못 보고 있는 거죠. 이거는 어디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겁니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불같은 열심 속에서 일관된 사랑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선 안 되는 거죠.
또 하나 여기 우리가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2절을 보십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죄 가운데에서 우리가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근데 이게 지금 사실상 그 완성의 자리를 향해서 진행 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3절을 한번 볼까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
놀라운 얘기가 뭐냐하면 예수와 합해서 뭘 받아요. 세례를 받았어요.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뭘 받았어요.
그러면 여기서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여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죽었어요. 대신해 죽었어요. 달라요. 위해 죽은 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거야.
그러니까 십자가의 예수님이 죽으실 때 우리를 묶어서 같이 못 박았다고요. 그러니까 원리적으로 틀림없이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겁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깊은 신앙으로 고백해야 돼요.
그러니까 내 안에 여전히 죄가 있는 것은 이것이 시간과 공간속에 그 궁극적인 완성의 자리를 향하여 지금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일어나는 일일 뿐이에요. 틀림없이 마무리되고 완성될 내용들입니다.
왜냐하면 고집과 고집이 부딪치면 누가 이겨요
예 고집 센 사람이 이겨요 그러면 인간이 고집을 부려야 몇 년 부릴 것 같아요.
옛날엔 70~80년인데 요즘 80~90년 부린다고 합시다. 기껏해야 80~90년 고집 부려요 근데 하나님의 고집은 어때요 성경의 하나님 별명 하나 여러분 기억나는 거 없어요. 영원하신 하나님 80~90년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고집 앞에 견뎌낼 수 있어요.
하나님의 고집은 우리를 한번 택하시고 작정한 이상은 아무리 우리가 저 시궁창에 가시덤불 속에 들어누워서 엉망진창으로 살아도 끝까지 기다려요
왜 그런지 아세요. 제가 그 답을 지금 얘기하면 웃을 거예요. 본전 생각나서 본전 구원에 무슨 본전이 있었나 있죠.
우리를 값주고 사기 위해서 십자가에다가 뭘 지불하셨어요. 아들 예수 그리스를 지불했어요.
근데 그런 거래를 거래라고 표현합시다.
그런 거래를 하나님이 아이 아니면 말고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실 것 같애요. 절대 그럴 수가 없죠
아들을 내어 놓으신 그래서 여러분 구원은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절대 공자가 아닙니다.
구원을 누가 공짜라 그래요.
구원은 아드님의 어마어마한 생명의 가치가 십자가에 지불된 놀라운 사건이여요.
그게 우리에게는 거저 임했기 때문에 구원을 공자로 오해하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지불된 값은 환산이 안 되는 값이에요.
그걸 하나님이 아니면 말고 대충 하다가 끝내요
그럴 수 없는 거죠. 뭐 우리 이해를 돕기 위한 개념으로 본전 생각나서라도 그렇게는 안 합니다. 끝장을 보시고 말죠
그걸 성경에서는 뭐라고 얘기했는가 하면 알파와 오메가라 그랬어요. 이 헬라 말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죠
왜 그리스도가 나는 알파 오메가라고 했죠.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 개입하신 이상은 내 인생 속에 계획한 모든 것은 그분이 끝장을 내는 거예요.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고집 안에 묶여있는 거죠. 그래서 이 로마서는 우리에게 임한 구원이 어떻게 설명되고 어떻게 내게까지 왔는가를 설명하는 겁니다.
로마서 6~2강 새 생명 가운데 행하라
여기 또 하나 이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될 게 있어요. 뭐냐하면 5세기경에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냥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정도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썩 그렇게 환영할 만한 얘기를 안 했기 때문에 이분이 무슨 얘기를 했는가 하면 아담안에서 우리가 범죄했다는 말은 우리가 진자 아담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말이 아니고 아담의 영향력으로 우리가 그 죄를 모방하게 되었다.
우리를 죄의 모방자로 약화시켜 놨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듣기에는 이 책이 훨씬 매력이 있죠.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아담 있을 때 우리가 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죄를 그때 같이 지을 수 있는가 이게 펠라기안주의자들의 이론입니다.
5세기에 일어난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그 영향력 때문에 죄를 모방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어거스틴 같은 경우에는 죄를 지었다 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은 자들이 10분의 1을 받았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잘 보세요.
또한 10분의 1을 받은 누구도 10분의 1을 받은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10분의 1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여러분 잘 보세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이에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10분의 1을 바칠 때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10분의 1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때는 아직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바쳤는데 레위도 바친 걸로 흉내 냈답니까 바쳤다고 할 수 있답니까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것이 보통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대표성의 원리여요. 대표성의 원리 그러니까 이런 얘기입니다.
펠라기안주의자들처럼 우리가 아담의 죄를 모방한 게 아니고 어거스틴이 이야기처럼 아니 바울의 로마서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한 거예요.
그래서 그 아담의 계열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실질적으로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고 실질적으로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 된 거예요.
같은 원리로 같은 원리를 잘 들으셔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셨어요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예수님의 그 죄 에 대하여 모든 값을 지불하실 때 아까도 설명을 드렸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러니까 그분의 부활의 첫 열매인 생명 안에 묶여 있는 자는 이미 그 죄값이 이미 지불되고 부활의 약속을 받아 있는 사람이에요.
이게 문제는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사실이 아니고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취된다는 걸 얘기합니다
근데 아까도 설명을 드렸지만 우리 느낌은 뭐예요?
맨날 이러는 것 같아요. 아니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그렇게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남아요.
뭐냐하면 그러면 하느님이 그렇게 하지 말고 바로 확 오시면 안 되나 우리는 그냥 한꺼번에 좀 이렇게 어떻게 하시면 안 될까
그 정도 능력이 안 되실까요? 천만에요. 창조주세요. 주권자여서요. 왜,그러지 못하겠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아직도 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될 하나님을 택한 자들이 많아요.
여기에는 왜 그 멀고 길고 험한 순례길 끝까지 한꺼번에 모든 걸 하시지 않고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라는 과정 속에서 이 일을 진행하시는가 여기에는 선교적 명령이 암묵적으로 남아져 있는 겁니다.
아직도 이 땅끝에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땅의 피 부름이 가득하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동시에 두번째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 설명했던 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얻을 때 벌거벗는 불가운데서 구원 얻는 자와 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과정 속에 우리는 어떡하는 거죠. 자꾸 벗겨내는 거예요. 불순물들을 뽑아내고 돌로 정으로 돌을 쳐서 다듬듯이 우리를 다듬고 우리를 만져서 익혀놓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아니 그리스도의 신부로 다듬어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결국 성경의 모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이야기는 놀랍게도 전부 웨딩 스토리 아니에요. 에덴 동산에서 그 아름다운 완전했던 내 뼈 중의 뼈여 살 중에 살이라고 시중의 시를 토해냈던 그 아름다운 아담의 가정은 무너지잖아요.
죄로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뭘로 완성이 되죠.
어린 양과 신부의 혼인잔치로 마무리되잖아요.
그때 모든 신부들에게 흰옷을 입히셔서 그 옷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은 옷들이 보혈의 피의 공로 밖에는 그 불결해지고 더러워지는 우리 인생의 옷을 씻어낼 방법이 없는 거죠.
우리의 연약한 모습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쌓아놔 주시는 거죠. 그 완성의 날을 주님은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과정 속에서 계속 참고 기다리고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우리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또 하나는 땅끝까지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 때문에 오늘 우리는 한 세 가지 정도로 정리를 다시 한번 해보십시다.
첫째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죄의 종이 아니다.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우리를 묶어서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 근거는 십자가여요. 함께 죽었어요.
여러분 이 변질될 수 없는 진리와 사실 앞에 우리는 오늘도 감히 얼굴을 다시 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거죠. 가슴이 뛰는거죠. 그래서 우린 매일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에 함께 죽은 것을 순례길 마칠 때까지 그분의 사랑의 종으로서 사는 거죠.
율법의 종이 아니라 이 세 가지 약속이 우리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신앙생활의 힘을 새롭게 하는 근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율법과 남편의 비유를 통해서 복음에 조금 더 깊은 설명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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