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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료 스크랩 쉽고 재미있는 설교 방법
설맥 추천 0 조회 81 14.06.11 07: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쉽고 재미있는 설교 방법
2008.12.16 23:23
 
쉽고 재미있는 설교 방법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 세미나 열려
'저한테 설교하지 마세요.'

상대가 듣기 싫은 이야기를 자꾸 늘어놓을 때,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대꾸한다. 이처럼 설교란 말은 어느덧 많은 이들에게 '지루하고 딱딱한 잔소리'의 동의어쯤으로 전락하고 만 듯 하다.

그러나 '남의 눈의 먼지를 보지 않고 네 눈의 대들보를 먼저 보라' 고 말씀하시며 외식하는 자들을 위트 있게 꼬집으신 예수님의 설교에 그 당시 제자들은 깔깔 웃음보를 터트리며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국제제자훈련원이 지난 27, 28 양일간 서초동 사랑의교회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라는 주제로 진행한 '새들백 설교 세미나'는 예수님처럼 영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다양한 조언을 베푸는 자리가 됐다.

설교를 통해 청중들의 영혼을 깨우기 원하는 수백명의 목회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진 이번 행사에는 미 새들백교회의 탐 할러데이 목사와 우들랜드 펠로쉽교회의 켈리 슈크 목사가 강사로 나서 'Craft식 설교작성법', '설교를 위한 연구용 프로그램', 삶의 변화를 위해 커뮤니케이션하라' 등의 주제들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그중 '삶의 변화를 위해 커뮤니케이션하라'는 주제의 강의는 청중에게 효과적이고 영향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설교 전달법을 다뤄 많은 참석자들의 주목을 끈 바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강사들은 '내가 설교할 때 던지는 8가지 질문' 에 대해 다뤘다.


1.첫번째 질문은 '누구를 대상으로 설교할 것인가'다.

불신자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교가 지루하고 내 삶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답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슈크 목사는 '예수님은 설교를 할 때 청중을, 바울은 편지를 쓸 때 독자들을 고려했었다.'며, '설교자들은 청중의 필요를 인식하며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청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들의 필요, 상처, 흥미에 관계된 이야기라며, '우리의 설교는 청중의 상처 이야기에서 시작돼 그들의 상처 이야기로 끝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론적인 이야기만 길게 다루는 설교를 비판했다.


2.두번째 질문은 '성경은 청중의 필요에 대해 무엇이라고 답하는가'다.

강사는 '성경의 목적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한 무디의 말, '중요한 것은 설교가 오늘을 살고 있는 청중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한 피니의 말을 인용하며, '설교자가 던지는 메세지는 반드시 청중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셋째, '가장 실제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이에 대해 할러데이 목사는 산상수훈 등 예수님의 설교들은 항상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설교들이었다며, 설교자들은 청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설교를 실질적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 '하라는 강압만 하고,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설교는 청중들에게 죄책감만 가중시킨다.'고 덧붙여 말하기도 했다.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설교를 위해 설교자들은 항상 구체적인 행동을 설교의 목표로 삼고 청중의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해주며 또한 실천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4.넷째, '가장 긍정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할러데이 목사는 '부정적인 내용으로만 설교를 채우는 것은 부정적인 분위기로 교회를 채우게 된다.'고 말하면서,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을 비판하고 억누르며 낙심시키고 있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는 교인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고 했다.

실제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높은 성장을 보인 교회 목회자들의 97%가 긍정적인 설교패턴을, 중간 정도의 성장을 보인 교회 목회자들의 81%가 부정적인 설교패턴을, 낮은 성장을 보인 교회 목회자들의 75%가 부정적인 설교패턴을 유지하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할러데이 목사는 '예수님은 화를 내고 청중을 정죄, 저주하면서 그들의 회심을 강요하지 않으셨다.'면서, '설교자들의 메세지는 말 그대도, '복음', 즉 '기쁜 소식'(Good News)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설교에서 죄의 문제를 다룰 때는, 의로운 행동을 격려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는 태도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5.다섯째, '가장 격려가 되도록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슈크 목사는 설교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된 사람들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불신자들도 자신이 죄인임을 이미 알기에) 오히려 그들이 바른 사람들이 되도록 격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들도 격려를 필요로 하는데, 성도들은 얼마나 더 격려를 필요로 하겠느냐?'고 말하며, '사람들이 기분 좋게 느끼도록 도와주는 것이 죄는 아니다.'고 단언했다.

그는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고 격려하며 위로합니다.(고전 14:3-현대인의 성경)', '그들은(바리새인들은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지우고...(마 23:4 상-현대인의 성경)'라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며, 무조건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 영적인 은사, 즉, 예언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얼마나 나쁜 아버지인가를 드러내기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를 독려하는 식으로 설교자들은 설교해야 한다.


6.여섯째, '가장 쉽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강사는 '쉽다는 것이 피상적이거나 깊이가 없거나 너무나도 단순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막 12:37)'는 성경 구절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은 들은 것의 95%를 72시간 안에 잊어버린다'며, '진리를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 교인들이 이를 잘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설교에서 종교적인 언어의 사용을 피하고, 설교개요를 단순하게 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7.일곱째, '가장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강사는 '가장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능력있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플레빌 이클리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설교자에는 첫째, '사람들을 조작하는 독백형-외판원형 설교자', 둘째, '정보 전달형-교사형 설교자', 셋째, '조직하지 않는 대화형-친구/관계형 설교자'의 3가지 유형이 있는데, 복음 전도에 높은 성장률을 보인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은 3번째 유형의 설교자, 중간 정도의 성장률을 보인 교회 중 94% 교회의 목회자들은 1번 유형의 설교자, 낮은 성장률을 보인 교회의 80% 목회자들은 2번 유형의 설교자였다고 한다.

강사는 '영향력 있는 설교를 위해 목회자는 자신이 삶에서 겪는 몸부림, 진보, 배움을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8.여덟번째는 '가장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강사는 '...말은 언제나 기쁘고 즐겁게 하십시오(골 4:5-6)', '...사람들에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방식으로 가르쳤다(전 12:10)' 등의 성경 구절들을 언급하며, 재미있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성경으로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죄라며, '오늘날의 문화에서 재미없는 설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것과 같은 다양한 전달방법, 그림 언어, 다채로운 이야기, 유머 등을 재미있는 설교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예수님의 설교를 좋은 설교의 모델로 거듭 제시하며 강연을 진행했던 슈크 목사와 할러데이 목사는 이번 세미나를 마무리하며,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친근감'을 꼽았다.

'탁월한 설교자가 되는 방법을 배우는데 남은 생애를 헌신하라'는 강사들의 독려에 참석자들이 세미나장에서 무릎을 끊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가운데, 이번 세미나는 끝이 났다.

 

 

 


 

설교를 위한 간단한 주석방법




주승중

1.

2. 1. 고려할 본문을 정함

3. 1) 본문을 선택함

    설교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다리 놓기 작업인 주석을 할 때 가장 먼저 문제되는 것은 본문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에모리 대학의 설교학 교수인 토마스 롱은 설교자가 그의 설교를 위해 성경의 본문을 선택하는 데에는 대략 네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성경을 통독하며 설교해 가는 법(Lectio Continua)이다. 이것은 본문 선택에 있어서 아주 오래된 방법으로 성경을 책 단위로, 또는 본문 단위로 계속해서 읽고 설교해 가는 방법이다. 초대교회의 문서 중에 하나인 순교자 저스틴의 [변증문](First Apology)에 의하면 설교자들은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릴 때에 사도들의 서간문과 선지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오래도록 읽었고, 그리고 나서 설교자가 강론을 통하여 말씀의 고귀한 사실들을 따르도록 권면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모이면 그 다음 부분부터 계속해서 읽으며 설교를 하였다. 성경을 이렇게 연속적으로 읽어가며 설교하는 방법은 후에 종교개혁가인 칼뱅과 쯔빙글리 등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에서는 많은 목회자들이 수요기도회나 새벽기도회 등의 시간에 이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지역 교회의 상황에 맞추어 성경을 선택하는 방법(Local plan)이다. 이 방법은 설교자들이 자신의 목회계획과 교회력의 절기들, 교단의 특별 주일들, 그리고 교회의 특별 행사 등을 함께 연결하여 거기에 적합한 성경의 본문들을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선택하는 방법을 말한다.


    세 번째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많이 선호되고 있는 방법으로 설교자의 무작위적인 선택에 의존하는 방법(Preacher's choice)이다. 이것은 설교자가 매주 그 때의 필요에 따라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하는 것을 말하는데, 설교자의 자유와 융통성이라는 장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위한 본문 선택의 방법 중에 가장 문제점이 많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법의 첫째 문제점은 설교자가 매주일 적당한 본문을 선택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러다 보면, 많은 경우에 설교자가 어떤 주제를 잡고 거기에 성경을 삽화식으로 끼워 넣는 식으로 본문을 사용하게 될 위험이 많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이렇게 설교자가 무작위적으로 성경을 선택하다 보니, 거기에는 통일성과 체계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방법은 성경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읽고 설교하기 보다는 설교자 개인의 주관적인 선택에 의하여 성경이 읽혀지고 설교되어짐으로 회중들은 성경 전체를 듣기 보다는 설교자 한 개인의 선호에 따라서 성경을 토막으로 듣게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 시킨다. 흔히 설교자들은 자기가 잘 알고 좋아하는 본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경 본문이 설교자의 기호에 따라 선택되어진다면 말씀의 보고(寶庫)가 회중들에게 풍성하게 전달되지 않는 그런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여기 한 성도가 설교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성직자들이 예배에서 우리에게 성경 구절을 10여 절씩 낭독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        만, 성경을 정규적으로 낭독할 계획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만 설교자의 취향대로 골라서 자기 목적에 맞게 적용시킨, 서로 연결되어 있지 못        한 구절들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해력은 성직자의 손에 달려 있       고, 단순하고 무지한 자들은 설교자의 제멋대로의 견해에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목       사는 그가 원치 않으면 성경의 어느 부분도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곳을 골라서 마음 쏠리는 부분부터 읽기 시작할 수 있으며,        내키는 대로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성경       구절들을 토막 내어 성경으로 하여금 자기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말하도록 할 수 있       습니다”


    한 성도의 원망을 담은 이 규탄의 편지는 하나님의 다양한 말씀의 꼴을 먹기를 원하는 회중들의 요구를 담은 절규이기도 하다. 이들의 외침이 들리는가? 사실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에 10년, 2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선포되지 않는 성경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왜 그런가? 그런 성경책들은(예를 들어 욥기, 소선지서, 레위기 등) 열등한 말씀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경본문이 설교자에 의해서 아무런 기준과 방향도 없이 무작위적으로 선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에 의하여 기준과 방향이 없이 던져 주는 말씀과의 만남보다는, 때에 따라 적절한 말씀을 먹고 싶어 하는 회중들을 진정 바라볼진대 이제 한국교회의 강단에는 본문선택을 하는 데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보고가 활짝 열려야 하며, 이를 위하여 아주 좋은 방법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력과 성서일과(Lectionary)를 통한 방법이다.

    

    성경은 66권의 책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배 시간에 읽혀지고 선포되어져야 한다. 40년 목회 후 은퇴할 때에 만약 한번도 설교하지 않은 성경책이 한 권이라도 있다면 그는 어쩌면 이후에 주님 앞에 서는 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설교자가 예배 때 읽혀지고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기호와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서 선택한다면 이런 결과는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하여 예배 때에 읽혀지고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적인 체계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구집(lectionary)이다. 즉 성구집에 의한 본문선택, 이것이 바로 성경본문을 선택하는 네 번째 방법이며 프린스톤의 설교학 교수였던 토마스 롱(Thomas G. Long)을 비롯한 현대의 많은 설교학자들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권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구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드릴 때에 말씀선포를 위하여 정리되고 의도된 성경말씀의 목록이다. 즉 성구집들은 역사적으로 4세기에 이르러 초대교회가 “교회력에 따른 계획에 의하여 성경 말씀을 예배 시간에 읽도록 정리해 놓은 것1)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성구집은 그 기원이 유대의 회당예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예배 시간에 성경말씀 전체를 체계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모습은 유대교의 회당에서부터 있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당예배의 영향을 받은 초대교회도 어떤 형태의 성구집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며, 4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형태가 비록 오늘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정된 규례와 절기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이렇게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온 성구집은 지난 1983년 전 세계의 개신교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동 성구집”(The Common Lectionary)이 나온 이래 현재 많은 교회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공동 성구집”은 1992년에 “개정판 공동 성구집”(The Revised Common Lectionary)이 만들어지면서 현재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회 등의 모든 개신 교회에서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2)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장신대의 설교학 교수였던 정장복 교수와 주승중, 김운용 교수 등에 의해서 해마다 펴내고 있는 “예배와 설교 핸드북”(예배와 설교 아카데미)에 의해서 소개되어 사용되고 있다. “개정판 공동 성구집”은 매주일 구약의 말씀, 서신서의 말씀,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고 3년을 주기로 읽고 설교할 수 있도록 성경 전체를 교회력을 따라 배열해 놓았다. 그러므로 만약 설교자가 이를 따라 설교하면서 매 주일 본문을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고 할 때에 9년이면 성경 전체를 예배 시간에 한번 읽고 설교할 수 있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말은 회중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9년 또는 10년 정도만 주일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여도 그 회중은 예배 시간에 성경을 한번 읽고 그 읽혀진 성경이 해석되고 선포되어지는 것을 듣게 된다는 말이다. 40년을 예배 드려도 한번도 예배 시간에 읽혀지지 않고 설교되지 않는 본문이 많은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의 회복인가?


    성구집은 이렇게 설교자들에게 예배 시간에 성경 거의 전부를 읽고 설교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회중들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듣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설교자들이 성구집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성구집의 사용은 성경 전체를 읽고 설교하게 만든다. 그리고 성구집은 무엇보다 성경이 먼저 말씀하게 한다. 즉 성구집은 설교자로 하여금 세상의 상황이나, 설교자의 관심과 기호를 먼저 말하게 하기보다는 성경이 먼저 말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강단에서 말씀의 전체성이 회복되기를 진정 원하는가? 그렇다면 성구집을 사용하라!3)  


4. 2)  본문의 시작과 끝을 재고함

5.     성경 본문은 인위적인 창조물이다. 성경은 각기 독립되어 있는 작은 본문들로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성경은 그것들 자체가 편지들, 법적인 저작들, 역사적인 설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의 정경, 즉 일련의 문서들이다. 성경으로부터 취한 한 본문은 보다 큰 벽지 두루마리 중 일부를 잘라낸 부분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잘라 내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이 전체적인 디자인과 어떻게 조화되는지 볼 수 없게 된다.

6.

7.      우리가 찾아야 할 본문은 혼자 서 있는 그런 본문이 아니다. 모든 본문은 그 주위의 문맥과 연결이 되어 있으며, 한 본문은 일관성 있고 합리적인 사고의 단위(Unit of thought)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설교자는 자신이 선택한 본문의 시작과 끝이 일관성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는 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번의 설교에서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이 취급되어야 적절한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오히려 설교자는 그 선택된 본문이 그 자체로서 통일성을 갖고 있고, 하나의 분명한 단일사상을 갖고 있어서, 그것이 설교에 사용될만한 초점을 갖고 있느냐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제일 먼저 즉 본문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 (Reconsider where text begins and ends). 이렇게 설교의 시작과 끝을 하나의 단일 사상을 이루고 있느냐의 여부를 통해 결정함이 중요한 것은 본문을 어디서 시작하고 끝내느냐에 따라 주제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8.

(1) 사고의 단위(중심사상)

    아무튼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성경말씀을 여러 번 통독하고, 그 다음에 특정한 한 설교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을 만큼의 단위를 나누어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성경적 설교의 본문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설교의 기초를 성경말씀의 어떤 사상 단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성경을 여러 번에 걸쳐 읽으면서 성경저자의 생각을 더듬어 가야한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의 경우를 본다면 이것은 보통 한 문단 단위로 잡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의 각 문단은 사상 체계의 한 단위의 윤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보통 앞뒤 문단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며 저자의 사상에는 또한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에 따라서 한 문단 또는 그 이상의 문단을 설교를 위해 선택할 것이다.


    가령 눅 10:25-37절은 눅 10:38-42절 만큼이나 분명한 단락을 이루고 있다. 각 문단이 강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설교자의 본문이 눅 10:25-42절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제 그는 하나의 조금 큰 이야기 속에 두 개의 작은 단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다른 하나는 조용히 앉아서 듣는 것이 “좋은 편”이 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만약 설교자가 본문을 눅 10:25-42까지 잡는다면 그는 한 설교에서 두 개의 사상을 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수도 있다. 주중에 TV나 radio 등을 통해서 수많은 메시지를 듣고 있는 오늘의 회중은 이렇게 두 마리의 토끼를 쫓으려고 우왕좌왕하는 설교를 들을 때, 결국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한 편의 설교에서 많은 내용을 듣지만, 막상 교회 문을 나설 때에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지?”(so what?) 라는 질문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눅 10:25-42에서 보는 것처럼 본문의 단위를 어떻게 잡고 시작하고 끝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며, 특별히 복음서의 경우는 한 문단을 중심하여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또 다른 예는 비유의 말씀들이다. 즉 비유들은 단위 결정의 중요성에 대한 좋은 예들이다. 마태는 포도원의 일꾼 비유에서 (19:30-20:16)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을 서론과 결론에서 하고 있다. 이 사실은 비유 속의 한 구절(8절)에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설교자가 본문을 마태 19:30에서 20:16로 정한다면 그는 그 비유에 대한 마태의 해석, 즉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는 마태의 해석에 대하여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설교자의 본문이 20:1-15까지의 비유 그 자체라면, 그 해석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라” 하는 등의 메시지로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시작을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끊느냐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 중심 메시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의 본문을 정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원칙은 누차 강조하였거니와 본문이 하나의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는가? 를 물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약성서와 비유 등을 통하여 그 단위의 예를 보았으나, 구약성서를 보아도 이 단위의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구약의 서술적 이야기(Narrative)를 본다면, 설교자는 한 두 문단 이상의 긴 본문을 다루게 될 것이다. 가령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 이야기를 설교 할 때 설교자가 한 문단만 설교한다고 하면 그는 이 이야기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설교자는 마땅히 사무엘하 11장 전체와 12장 일부를 합한 본문에서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죄와 그 죄의 결과를 그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를 설교할 때는 그 이야기가 하나의 설교의 단위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잠언 같은 지혜문학 작품 등은 컨텍스트 와는 별개의 자체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그 단위가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발견되어지는 것인데, 예를 들어 신약에서도 야고보서 같이 기독교 지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것들도 있다. 또 복음서들 안에도 일반 상식적인 어구나 구절들이 모여서 된 격언 묶음이 있는가 하면(막 9:42-50), 혹은 기도와 같이 특별한 주제 하에 가르침을 모아 놓은 단위도 있다. (눅 11:1-13) 만약에 누군가가 이 가르침들 중에서 한 가지를 골라서 취급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또 구약의 시편 같은 시문학의 경우에는 문단이 대체로 시의 연이나 절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 한 절만을 강해하기 보다는 전체 시를 다루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직접 이 문단들을 구분해 놓으시지는 않았다. 우리가 가진 번역본들에서의 문단구분은 원전에 나타난 사상의 흐름을 쉽게 구별해 보려고 생각했던 편집자들의 결단을 반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번역본에서의 문단 구분은 다른 번역본에서의 문단구분과 다를 수 있다. 심지어 히브리어나 헬라어 원본들까지도 문단 구분에 있어서는 편집자의 의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번역본들이, 혹은 성구집들이 본문을 잘라낸 방식을 약간은 의심어린 눈으로 항상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주일에 설교할 본문이 성구집에 눅 4:16-21절(예수님의 갈릴리 전도시작의 사건)로 제시되었다고 할 때, 설교자들이 던져할 의심은 16절이 확실한 새로운 단락의 시작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21절이 과연 끝일까? 하는 의심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성구집은 16절에서 본문을 끊었지만 30절이 16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의 진짜 끝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바로 그 예이다.


   결국 결론은 이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본문의 단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의 발전과 변이라는 중심원리에 의해서 결정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본문의 길이는 상관이 없다. 한번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이 취급되어야 적절한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 선택된 본문이 그 자체로서 통일성을 갖고 있고, 하나의 분명한 단일 사상을 갖고 있어서, 그것이 설교에 사용될만한 초점이나 구속력을 갖고 있느냐를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성경적 설교의 본문을 정하는데 있어서 따를 원칙은 바로 이것인데, “설교의 기초를 성경말씀의 어떤 사상 단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몇 가지 실마리들

    우리가 이런 원칙에 의해 본문의 단위를 결정할 때 참고가 되는 실마리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제가 달라지거나, 또 하나는 문학형태가 달라지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삼상 16:14-23상반절,(여호와의 신이 사울을 떠남) 마태 6:19-33,(하나님과 재물) 고후 9:1-15 (연보준비의 필요성과 연보의 풍성한 결과) 등에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각각을 하나의 단위로 보게 만들어 주고 있다.


    또한 성서의 저자들에 의해서 제시되는 문학적인 단서는 그 자료에 대한 간략한 서론이나,(렘 11;1), 혹은 시간(막 1:32), 장소(마 8:28), 사건(요 5:1)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결론적인 진술로 끝나든지(행 16:5), 아니면 그 전의 사건에 대한 반응을 기록하든지(막 1:28), 또는 본문의 문학 장르가 달라지든지(예를 들어 산문체에서 시문체로), 그리고 그 내용의 분위기가 달라지든지(예를 들어 위로에서 심판으로) 할 때에 그런 것들도 각 단위로 나눌 수 있는 단서들이 될 수 있다.  


    이것 이외에도 설교자는 본문을 확정하는데 있어서 다른 여러 가지 자료들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데, (가) 좋은 스터디 바이블에 있는 각주들은 사람들에게 다르게 읽히는 말들 중에 중요한 것들을 소개해 준다. (나) 좋은 주석들 역시 이미 문제 거리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어서 설교자의 수고를 덜어 준다. (다) Bruce Metzger의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4)라는 책은 설교자들에게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작은 책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모든 중요한 본문상의 이독(異讀)을 나열하고 그것의 증거를 간단히 제시해 두었으며, 그 모든 것은 책, 장, 절별로 정리되어 있다.


9. 3) 본문에 대한 신뢰할만한 번역본을 정함

    성경적 설교를 시도하려는 설교자는 무엇보다 먼저 주석가로서 성경 기자가 첫 수신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원 의미(original idea)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기록된 성경 언어의 문법적인 분석과 본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하여 그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가 성경 원어를 읽고 분석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본문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유용한 사전과 주석 등을 확보해서 이 기본적인 본문 연구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컬럼비아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였던 웨이드 휴이(Wade Huie, Jr)는 설교를 위하여 본문에 대한 일차적 연구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주어진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찾기 위하여 원어 성경과 각각 달리 번역된       여러 권의 성경을 내 앞에 펼쳐 놓는다. 그리고 원어 사전을 비롯하여 성구 대사전, 성      경 사전, 본문을 문법적으로 분석해 놓은 책들을 펴놓고, 그 본문을 나의 말로 다시 쓴      다. 그리고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말      씀의 전후 관계와 시대적인 상황들을 비롯하여 중심된 단어와 구절들을 세밀히 연구 분      석한다”5)      

그의 이런 모습은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모범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설교학 교수만이 할 수 있거나,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설교할 본문을 하나의 사상 중심으로 확정지은 후에 진행되어야 할 설교 주석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는 성경 본문을 사역해보는 것이다. 즉 본문 확정 후 주석의 첫 번째 단계는 본문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해 보는 것이다. 설교자의 번역(사역)을 좋은 번역본들과 비교해 보는 가운데 본문의 원어를 통해 본문을 다시 읽는 단계, 이것이 바로 주석의 첫 단계라는 말이다. 물론 설교자가 성경 원어를 읽고 분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목회상황은 설교자들에게 원어를 가지고 씨름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설교자들은 만일 본문의 원어를 번역(사역)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면, 최소한 개정 표준성경(New Revised Standard Version)과 같은 믿을만한 영어 번역본을 통해서 본문을 읽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과 표현들을 두서너 다른 좋은 성경 번역본들과 비교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교회에는 성경 번역본들이 몇 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커다란 번역상의 차이나 문제가 드러나 있지도 않다. 그러나 영어 성경은 아주 다양한 번역본들이 있다. 그것들 가운데는 성경 원어에 아주 충실하게 번역된 것이 있는가 하면,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 같이 상당한 의역본도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원어로 설교주석을 할 능력이나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면 최소한 몇 개의 좋은 영어 성경(가능하면 Study Bible)을 가지고 비교 분석하면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6) 그리고 이 때에는 가능하면 의역된 번역본은 참고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은 번역 성경들과 혹은 우리들 자신의 번역을 비교하면서 그 다양성과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목적은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특별히 영어 성경 번역본들을 참고로 할 때, 설교자들은 번역본들의 각주(footnotes)들을 잘 검토해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어떤 단서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번역본들은 때때로 그 본문에 대한 차선(a close second choice)의 번역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에 설교자들은 문체상의 차이(stylistic)를 넘어선 어법상의 차이(difference in wording)를 발견한다면 그것을 메모해 두어야 한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면 표시를 해 두었다가 후에 주석을 찾아 대조해 보아야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깨달아 알기 위해서이다. 




10. 2. 본문에 대한 이해를 구함

11.

12. 4) 기본적인 이해를 위하여 본문을 읽음

13.      이 단계는 본문의 구문론(syntax of the text)과 단어 등의 직선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본문이 “그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 하더이다”라는 말씀이라면, 설교자는 바리새인,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의 유전이 무엇인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유대의 의식 가운데 손 씻는 행위에 관한 것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성경사전,7) 신학사전,8) 성구사전,9) 혹은 주석의 서론 등을 참고로 해야 한다. 즉 이 단계는 본문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기본적인 단어라든지, 구문론 등을 살펴봄을 통하여 그 기본적인 의미를 알아보는 단계이다. 

14.

15. 5) 본문을 더 넓은 컨텍스트 안에 놓아봄

16.      좋은 주석서들이나, 믿을만한 성서사전들 안에서, 설교자는 설교자가 고려하고 있는 본문이 들어 있는 책에 대한 대개의 개요를 발견할 수 있다. 설교자의 본문이 어떻게 보다 넓은 구조 안에 맞아떨어지고 있는가를 검토함으로, 설교자는 그 본문이 그 책의 전반적인 흐름과 발전 가운데 어디에 오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17.    예를 들어 “삭개오의 이야기”(누가 19:1-10)가 주어진 본문일 경우 어떤 주석에 의하면 삭개오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라고 하는 보다 큰 컨텍스트 안에 놓아서 기독론(예수의 사명과 운명)을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둔다. 그러나 또 다른 주석에 의하면 삭개오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제자도와 거절당한 왕”이라고 하는 컨텍스트 안에 놓아서 제자도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기의 본문을 보다 넓은 문맥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8.

19.     특별히 성경의 몇몇 본문들은 (주로 복음서들에 나타난 것들로서 예를 들어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 마태 20:29-34, 마가 10:46-52, 누가 18:35-43 ) 같은 본문이 한 곳 이상에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다루고 있는 본문이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어 지는 경우에, 그 본문의 병행구절들을 주의 깊게 비교해 보면 때로는 작은, 또 때로는 큰 차이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때로 성경의 기록자가 어떻게 보다 큰 문맥의 흐름과 강조 안에 그 본문을 배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 단계에서 공관복음 대조표라든지, 공관복음서 대조연구(성종현 엮음. 서울: 장신대 출판부, 1993) 등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20. 3. 본문에 더 깊이 들어감

21.

22. 6) 본문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임: 끊임없는 질문을 하라

23.      성경주석의 기술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성경본문에 어떻게 질문을 던지는가를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주석이란 쉽게 표현하면 성경 본문에 어떻게 질문을 던지는가를 깨달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저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려면 설교자는 본문을 향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즉 설교자는 본문을 계속 반복해서 읽으면서 마음  속에 떠오르는 모든 가능한 종류의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본격적인 주석의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24.

25.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함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설교자로 하여금 잘못된 방향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즉 우리는 잘못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으며, 또한 본문이 좋은 질문들에 대해 답을 주고 있는 것을 듣기를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우리가 이미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질문들에 대해서만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본문에 의해서 주어지는 당혹감과 문제점들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본문의 음성에 우리의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26.

27.       그러므로 주석의 이 단계에 있어서는, 설교자는 마음속에 떠오는 모든 가능한 종류의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주석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던진 질문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불가피하게 잘못되어진 것으로서 혹은 함축성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질 것이다. 주석의 뒷부분에 나오는 내용들은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타당성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여하튼 설교자가 본문에 성실하게 귀를 기울이고, 제기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모든 질문들을 제기할 경우에, 설교자가 본문의 음성을 듣고, 우리를 향한 본문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될 기회가 더 증가하게 될 것이다.

28.

29.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은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들은 설교자의 신학적 전통에 의하여, 교회력의 강조점들에 의하여, 현대적 상황들에 의하여, 그리고 때로는 본문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복잡하면서도 흥미가 있는 측면들에 의하여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역시 가장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질문들은 대화의 파트너들 사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에서 오게 된다. 즉 질문들은 본문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총체적인 상황으로부터 오게 되는 것이다.

30.

31.     예를 들어 구약 아모스 5:21, 24을 볼 때, 여기에서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32.

33.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집회들이나, 축제들, 그리고 의식들을 거부하신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런가?”

34.

35.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어떤 요소들이 우리의 예배에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36.

37. “신학적으로, 공법과 정의는 두 개의 분리된 특성들인가? 아니면 동일한 문제의 두 가지 측면인가?”

38.

39. “우리의 종교생활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가 아모스 시대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궁핍한 자들을 압제하는 부분들이 있는가?”

40.

41. “예배가 정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정의가 예배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들은 어떻게 보일까?”

42.

43. “이 본문은 나쁜 소식같이 들인다.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good news)인 것은 언제인가? 동시에 나쁜 소식이자 좋은 소식인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동일한 사람들에게?”

44.

45.     이렇게 설교자는 본문을 향하여 모든 가능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설교자는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때로는 이렇게 자유롭게 흐르며 질문하는 시간을 넘어서 곧바로 주석서들이나, 본문에 대해 전문가가 해석해 놓은 작업으로 가고자 하는 유혹이 설교자들에게 다가 온다. 물론 성경의 전문가들에게 의논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너무 일찍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석서들은 많은 가치 있는 도움을 제공할 수 있고, 그것들은 우리의 주석을 점검하고 인도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주석서들이 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본문이 오늘 듣는 이들의 특별한 상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바를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는 주석가들이 아닌, 설교자가 바로 회중들에 의하여 보내진 사람이며, 오직 설교자만이 마땅히 질문해야 할 질문의 범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을 향한 주석가의 질문들은 설교자의 탐구 작업을 도와주는 것이지, 그 작업을 대체할 수는 없다.

46.

47.     따라서 주석의 첫 단계에서 설교자가 회중을 대신하여 본문과 씨름하며,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주석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본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설교자의 독창적이고, 상상력에 의한 활동이다. 이것은 바로 brainstorming하는 것과 같다. 여기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몇 가지 제안이 있다.

48.

49. (1) 의역(paraphrase)을 해보라

    첫 번째 방법은 본문을 의역을 해보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 한 내용 가운데 이미 설교자는 본문에 대한 사역을 시도한 바가 있다. 바로 그 사역을 이제 설교자가 자신의 말로 혹은 현대어로 다시 써 보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설교자가 이렇게 본문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쓰고자 시도한다면, 질문들이 쉽게 표면 위에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설교자가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본문을 제켜 놓은 다음에 그 본문을 기억나는 대로 설교자가 자기 말로 써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본문과 내가 기억나는 대로 쓴 것을 비교하여 보는 것이다. 사실 설교자가 설교를 위하여 설교 주석을 할 때 본문을 얼마나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교자는 본문을 최소한 20번 이상을 읽어야 한다. 약 20번 이상 본문을 읽고 나면, 그리고 본문에 대한 사역을 하고 나면 설교자는 본문의 내용을 거의 기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본문을 자신의 말로 기억나는 대로 써 본 후에, 그것을 본문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만일 설교자가 자기 말로 기억나는 대로 쓴 내용이 본문과 다르다면, 특별히 제외된 부분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 제외된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외되었는가? 아니면 어떤 면에서 그것이 골치 아픈 것이기에 제외되었는가? 혹은 설교자의 의역 가운데 강조되어진 점들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본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사와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설교자는 본문을 자신의 말로 의역해보고, 그것을 기억나는 대로 기록하여 본문과 비교해 보는 가운데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본문과 대화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 불필요한 것들은 제거될 것이지만 말이다.


50. (2) 만일 본문이 이야기라면(narrative) 각 등장인물의 입장에  서서 다양한 관점에서 그 이야기를 체험해 보라.

    그 다음에 설교자가 본문에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만일 본문이 이야기(narrative)라면 각 등장인물의 입장에 서서 다양한 관점에서 그 이야기를 체험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치유사건(막 3:1-6)이 본문이라고 할 때, 설교자는 예수의 역할, 손 마른 사람, 회중의 한 사람, 바리새인의 관점 등에 서서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설교자가 그 당시에 바리새인이었다면 본문이 어떻게 이해되어지는가?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는 예수는 얼마나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지금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율법을 범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한 가지 설교자가 주의할 것은 설교자는 이 때 가능한대로 누가 영웅이고, 누가 악당인지에 대한 판단내림을 유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본문을 읽을 때 바리새인은 악당, 나쁜 놈이라는 전제하에 읽는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 관점에 대해서 미리부터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자신을 각 등장인물과 동일시하여 보고, 그 등장인물의 세상에 대한 이해에 동정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설교자는 본문에 훨씬 더욱 깊이 몰입되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51.

52. (3) 처음 보았을 때, 이상하거나 부적절해 보이는 내용을 자세하게 검토해 보라.

    본문을 향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본문과 대화할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은 본문을 읽을 때 첫눈에 이상하고 무엇인가 맞지 않는 것같이 보이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집중해서 탐구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을 신중하게 읽어나갈 때 무엇인가 이상하고 부적절하게 보이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사건을 생각해 보자.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빈 들"(막 6:35)에 모여 있는 큰 무리의 사람들을 "푸른 잔디"(막 6:39)에 앉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첫눈에 조금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이 수많은 무리들은 “빈 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광야에 나와 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그곳은 사막과도 같은 곳이 아닌가? 사막은 어떤 곳인가? 그곳은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곳이다. 광야는 물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삭막한 곳이 아닌가? 그런데 마가는 이 광야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푸른 잔디”위에 앉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6:39). 분명히 여기서 광야와 푸른 잔디는 무엇인가 맞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마가는 예수님이 빈들에서 큰 무리의 사람들을 푸른 잔디에 앉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을까? 당연히 마가의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나가는 설교자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서 설교자는 본문과 대화하기 시작하게 된다. 설교자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시작하게 되는데, 다음과 같이 그 대답을 전개할 수가 있다. “어쩌면 마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광야에서 꽃이 피게 될 것이라고 했던 이사야의 환상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라”(사 35:1-2). 이 말씀은 장차 도래하게 될 메시아왕국의 영광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마가는 의도적으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려고 이런 표현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가는 또한 이 사건에서 그 날의 군중들을 “목자 없는 양”(막 6:34)과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푸른 잔디”위에 앉게 하시고, “다 배불리 먹게”(막 6:42)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에스겔 선지자가 그려주었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 낼지라...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드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겔 34:11-14). 마가는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고 있던 무리들을 주님께서 푸른 잔디에 앉히고 좋은 꼴로 풍족히 먹이는 모습을 묘사하는 가운데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푸른 잔디”에 큰 무리들을 앉으라고 명하셨던 모습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시 23:2)라는 시편 말씀을 연상시켜 주기도 한다.


   결국 마가의 광야에서의 “푸른 잔디”는 이런 여러 구약의 말씀들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푸른 잔디”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첫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내용을 통해서 본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본문과 깊이 있는 대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53. (또 다른 예: 롬 1:15.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54. 복음은 주로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을까? 바울이 말하고 있는 로마에 있는 너희는 도대체 누구길래?)

55.

56. (4) 그 본문의 무게중심(a center of gravity)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 보라.

    본문과 대화하는 네 번째 방법은 본문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 보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본문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상, 즉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이다. 그런데 흔히 이 말씀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말할 때 마다 인용되어진다. 즉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설교할 때마다 설교자들은 이 말씀을 인용한다. 물론 그렇다. 이 말씀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으며, 이것은 반드시 선포되어야 할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말씀을 보다 넓은 문맥(context)속에서 읽을 때, 이 말씀은 죄에 대한 것이 중심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이 말씀을 롬 3:21-26이라는 보다 넓은 문맥에서 볼 때에, 롬 3:23 말씀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기보다는 더욱 중요한 개념인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서론적으로 쓰이고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본문의 무게 중심은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설교자가 본문의 진정한 무게 중심인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설교는 제쳐두고 “인간의 죄”에 대해서만 설교한다면, 그는 성경 본문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롬 3:21-26은 그 구성이 포크 댄스와 같이 되어 있는데, 율법과 예언, 죄와 구속 같은 개념들을 향해 빙글빙글 돌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의”라는 중심 주제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결국에는 그 주제로 돌아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가장 중요한 무게 중심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죄가 아니고, 자비를 베푸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에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이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한다고 할 때, 설교자가 우리 자신이나 사람들의 죄성에 대해서 잠시 가리킬 수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설교자의 방향은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히브리서 9장 27절의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은 흔히 “사람은 반드시 한 번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에 인용되는 말씀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흔히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할 때에 이 말씀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 말씀 역시 보다 넓은 문맥에서 볼 때에(히 9:11-28), 그 무게 중심은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는 사실에 있기보다는 구약 제사 제도의 참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에 있다. 즉 히 9:11-28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하므로 단 한번의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하게 되었음을 가르쳐 준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계속해서 죄의 용서를 구해야 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피 값을 미리,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치루심으로 이제 성도들은 더 이상의 죄의 값을 치룰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바로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먼저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한 번 죽게 되었다고, 즉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27절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무게 중심은 죄의 값으로 우리가 죽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값을 예수님께서 단번에 치루어 주셨다는 예수님의 제사장적 사역에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본문과 대화할 때에 본문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본문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만일 설교자가 이것을 묻지 않고 주석을 한다면 설교자는 자기 마음대로, 혹은 본문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하게 되어, 본문말씀이 말하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본문에 주입하는 “아이세지시즈”(eisegesis)를 하게 될 위험이 높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본문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 보라.


57. (5) 본문 내의 또는 그 배후의 상충하는 부분을 찾아보아야 한다.

     본문과 대화하는 다섯 번째 방법은 본문 내의 혹은 그 배후의 상충하는 부분이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본문에서 서로 반대되는 내용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지, 아니면 그 배후에 숨어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인간의 의사소통에는 말하는 내용과는 반대되는 그 어떤 것이 있음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방을 좀 깨끗이 치워라”는 명령을 한다면, 그 말속에는 자녀의 게으름을 책망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며, 자녀가 부모를 말을 잘 안 듣는다는 불손종(일종의 저항?)의 의미도 포함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명령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게으름 또는 저항을 함축한다. 그런가 하면 "자기! 나 사랑해?"라고 묻는 질문은 그 속에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어떤 질문은 지식과 불확실성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제 막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한 교대 출신의 신임 선생님에게 교장 선생님께서 “당신은 훌륭한 선생님입니다”라고 선언한다면, 이 말에는 물론 그 선생님이 실제로 훌륭한 선생님일수도 있지만, 사실은 가능성이 덜한 것을 쓸어버리려는 시도일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선생님이 지금은 경험이 없어서 부족한 점이 있지만, 앞으로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의 의사소통(communication)에는 반대되는 그 어떤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성경 본문에도 바로 이런 내용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본문과 대화하고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바로 이런 상충들이 본문 내에 혹은 그 배후에 있는 지를 확인하고, 있다면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마가복음 8장 33절에서 보는 경우와 같이 본문의 내용이 상충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설교자는 이렇게 본문이 담고 있는 상충되는 내용인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며,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를 질문해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때때로 성경은 마태복음 22장 20-21절에서 볼 수 있듯이 상충이 본문과 그 배후 모두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의 와중에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의 와중에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의 자체는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라는 상충이 보여 진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의 배후에는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 하는 내적인 상충이 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질문, 즉 납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에 몰아넣으려고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한가 불가한가?(마 22:17)”라는 질문을 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치하에서 성전세와 인두세를 내야만 했었고, 이 세금에 대해서 항상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를 인정하면 유대인들의 반발을 받게 되고, 거부하면 로마 정부에 반역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이 가지고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상충보다는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라고 하는 아주 예민하고 중요한 상충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과 대화할 때에 이렇게 본문이 담고 있는 상충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위의 경우처럼 이렇게 상충되는 부분들은 그 배후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58. (6) 본문과 그 전후의 내용간의 연결을 살피라.

    설교자가 본문에 질문을 던지며 대화하는 여섯 번째 방법은 본문과 그 전후 내용간의 연결을 살펴보는 것이다. 사실 성경본문은 각기 독립되어 있는 작은 본문들로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성경은 그것들 자체가 편지들, 혹은 법적인 저작들, 역사적인 설화 등 다양한 문학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의 정경, 즉 일련의 문서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경으로부터 취한 한 본문은 보다 큰 벽지 두루마리 중 일부를 잘라낸 부분과 같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그것을 잘라 내었을 경우에, 설교자는 그것이 전체적인 구도와 어떻게 조화되는지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택한 본문은 그 주위의 문맥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설교자는 본문과 그 전후의 내용간의 연결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마가복음 8장 22-26절에는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소경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 소경에게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하셨다. 처음에 예수님은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그런데 그 소경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24절)라고 대답함으로 보이기는 한데 아직은 희미하게 보인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에 다시 안수하셨고”(25절) 그의 눈은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소경에게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하셨다. 왜 그랬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단 한번만 만지시면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고, 때로는 말씀만으로도 치유의 능력을 행하신 주님께서 왜 이 경우에는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하셨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서 한번 더 안수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광풍이 부는 갈릴리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이시며, 말씀만으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이 본문만을 보아서는 예수님이 두 번씩이 안수하신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본문의 바로 앞에는(막 8:14-21)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거기에는 육적인 양식에 연연해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영적 실제에 관해 가르치고자 노심초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막 8:1-10)이 있은 뒤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가지고 온 떡이 한 개 밖에 없었다(막 8:14). 그래서 제자들은 “우리에게 먹을 떡이 없다”(막 8:16)고 걱정을 하였다. 몇 개의 떡 조각을 가지고서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떡을 만들어 주셨던 예수님께서 그 배 안에 함께 계셨건만 제자들은 먹을 떡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안타깝게 보시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17-21)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바로 소경을 두 번 안수한 사건이 본문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본문 다음에 바로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의 전후 문맥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결국 소경을 두 번 안수한 사건은 제자들의 영적인 인식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제자들의 영적인 인식의 성장과 그 소경의 시력 회복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를 해석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 소경의 점차적인 시력의 회복은 바로 제자들의 예수님께 대한 인식의 성장과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의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전후 문맥의 연결성에도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을 잘못 해석하게 되고, 때로는 무리하게 풍유적(allegorical)으로 해석을 하거나(예: 예수님의 십자가 못 세 개: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 자신의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는 “주입식 주석”(eisegesis)을 하게 된다.        

59.

60. (7) 본문을 많은 “눈”을 통하여 보라.

    설교자가 본문에 질문을 던지기 위한 일곱 번째 방법은 본문을 여러 다른 관점들을 통하여 거듭해서 읽어보는 것이다. 여러 다른 관점이라 함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문을 다시 읽어보는 것을 말한다.


    설교자가 택한 본문이 여자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부자라면? 가난한 사람의 입장이라면? 집 없는 사람, 농부, 어부, 도시 거주자, 고용주, 노동자, 실업자, 어린 아이, 부모의 입장이라면? 교회 밖의 안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설교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눈에는 본문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즉 설교자는 본문을 읽고 또 읽고 연구하며, 설교자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으려고 해야 한다. 그러면 전에는 본문을 통해서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진리가 발견되어 질 수가 있다.


    사실 여기가 바로 설교자가 상상의 눈을 통하여 회중을 주석하는 곳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본문을 주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회중에 대한 주석(exegesis of congregation)도 해야 한다. 이 메시지를 듣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본문에 대한 주석을 잘하고, 그래서 본문의 메시지를 찾아낸다 하여도, 그 메시지를 듣게 될 회중에 대한 분석이 없다면, 그 메시지를 그들의 삶속에 올바로 적용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회중에 대한 분석이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본문에 대한 주석을 하면서 동시에 회중의 입장에서, 회중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주석해야 한다.


    지금까지 설교학에서는 본문에 대한 주석을 먼저 철저히 하고, 그래서 본문에서 메시지를 발견해 낸 다음에 마지막으로 그 메시지를 회중들의 삶에 적용하는 작업을 해 왔다. 물론 이 방법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현대 설교학에서는 본문을 주석하되 회중의 입장에서, 그 메시지를 듣게 될 회중들의 입장에서 본문을 주석하고 읽음으로서 본문 주석의 과정에서 동시에 회중들에 대한 주석을 함께 할 것을 권면한다. 그래야 본문이 오늘의 회중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정확하게 들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러려면 설교자는 그 설교를 들을 가능성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주석의 과정에서 상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하여 아는 바를 상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관점에서 본문과 대화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목회자의 심방은 설교사역에 있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목회자는 심방을 통하여 회중들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는 그들의 삶의 정황을 알아야 본문이 기록된 삶의 정황이 오늘의 회중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정확하게 적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 대도시의 교회들 가운데, 특별히 아파트촌에 위치해 있는 대형교회들이 교인들이 원하지 않으면 심방을 하지 않는 모습은 설교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야 어떻게 목회자(설교자)가 회중들의 삶에 제대로 적용할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결국 피상적인 적용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심방을 통한 목회자료(싱방카드 같은 것)를 들고, 이제 교회에 출석한 지 한달 밖에 안 된 젊은 부부들을 생각하고, 고부간의 갈등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회중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이제 한참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들을 생각하고, 가장이 실직하여 삶의 위기에 처한 가족들이 회중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생각하며, 실연을 당하여 상처와 절망 가운데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부도 위기에 몰려 한숨 짖고 있는 중소기업의 사장이 회중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삶이 너무나 힘들어 자살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회중석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본문이 그들을 위하여 무슨 말씀을 주실 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본문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즉 설교자는 그들의 목자--대변인--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회중들에게 할 말을 얻기를 바라면서 본문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본문이 오늘의 회중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분명한 음성으로 설교자에게 들려주실 것이다.

61.

62. (8) 본문의 질문에 대답을 시도해보라

    설교자가 본문에 질문을 던지며 대화하는 여덟 번째 방법은 본문이 던지고 있는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 어떤 중요한 질문에 해답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하듯이 본문이 던지고 있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런 후에 그 질문이 어떤 것이 될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 어떤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면, 설교자는 먼저 그 질문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에스더 4장 14절에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모르드개의 질문이 있다. 이 말씀은 모르드개가 위험에 처한 유대인을 위하여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 용기 있게 탄원할 것을 요청하는 말씀 가운데 나오는 질문이다. 이 질문 속에는 모르드개의 투철한 역사의식이 담겨져 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당신께서 작정하신 대로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에 그 도구로 사람을 쓰시는데, 부르심을 받은 이는 그 분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할 것뿐이다. 만일 부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모르드개의 질문에는 바로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설교자는 먼저 그 질문이 담고 있는 뜻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설교자는 그 질문이 현대의 청중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설교자는 본문의 질문을 오늘의 상황에 대입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보아야 한다. 즉 설교자는

“그렇다면 오늘날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또는 진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그런 경우에 과연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를 하고 순종할 수 있겠는가?” “만일에 순종할 수 없다면 그것을 무엇 때문일까?”


“오늘 우리의 삶은 우리의 환경이나 혹은 우리가 기꺼이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 더 제한되고 있는가?”


“만일에 내가 환경에 더 지배되어 주님의 뜻을 거역하게 된다면 왜 나는 주님의 뜻보다는 환경에 더 지배를 받고 있는가?”


“그리고 나로 하여금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등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바로 이런 여러 가지 다양한 질문들을 통해서 설교자는 현대의 청중들과의 접촉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본문의 질문을 통해서 오늘의 청중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이 가지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먼저 그 질문에 가지고 있는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고, 그 다음에 그 질문이 오늘의 회중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럴 때 2000년 전에 쓰여지고 전달되었던 말씀은 오늘도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의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63.

64. (9) 본문이 하고 있는 바를 물어보라

    설교자가 본문에 질문을 던지며 대화하는 아홉 번째 방법은 본문이 하고 있는 바를 물어보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본문이 명령하고 있는지? 노래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지? 경고하고 있는지? 논쟁하고 있는지? 기도하고 있는지? 암송하고 있는지? 등을 물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설교자가 본문이 지금 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것은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어 설교자에게 주어진 본문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씀이라면, 그 말씀이 기쁜 찬송을 여는 서정시의 경우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등한히 하는 사람들을 나무라기 위하여 사용되는 경우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즉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같은 말을 하고 있을지라도 서로 다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선포되었기 때문에, 본문은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같은 말이라고 해도, 그 상황에 따라서 그것이 노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경고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항상 본문이 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때에 본문이 하는 일은 보통 그 본문의 형식이나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상황(context)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 10:34-36에서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을 분리시키고, 집안에 원수를 만드는 칼을 가져 오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경우에 있어서 설교자가 본문을 해석할 때 알아야 할 것은 본문이 어떤 상황 하에 놓여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상황이 교회에 무관심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경우라면 이 본문은 어떤 일을 할까? 그것은 독자들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심지어 집안의 희생이 있더라도 최우선의 충성과 흔들리지 않는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이미 제자로서의 사명을 위해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많은 것을 지불하고 있는 교회를 위한 것일 경우에는 이 본문은 어떤 기능을 할까? 그것은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하면서 격려하는 것이 된다. 즉 본문은 가족마저 믿음 때문에 부인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격려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설교자가 본문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어떤 본문이 교훈하는 것인지, 잘못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인지, 축하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사하는 것인지의 여부는 종종 그 형태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다. 즉 그것이 찬양 시인지, 고백인지, 잠언인지, 비유인지, 논쟁인지, 아니면 축복인지 등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할 때 그 본문의 형태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석의 과정에서 본문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주석의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단계는 자유분방한 호기심이 미덕이다. 설교자는 이 과정에서 결과를 요구하는 통찰과 개념들로 백지들을 가득 채워야 한다. 후에 그것들 중에 일부는 어리석고 불필요한 것으로, 또 일부는 현명하고 중요한 것으로 판명이 될 것이다. 이 주석의 과정, 즉 대화의 과정이 끝나고 나면, 설교자는 이러한 통찰들을 학적이고 비평적인 주석들에 의해서 시험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설교자는 자신이 본문에서 들은 것을 테스트하는 작업으로 넘어가야 한다   

65.       



4. 본문에서 들은 것을 테스트함 (Testing What is Heard in the Text)


7) 본문을 역사적으로 탐구한다 (Explore the text historically)

    앞서서 계속해서 강조하였듯이, 성경의 저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려면 설교자는 본문을 향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즉 설교자는 본문을 계속 반복해서 읽으면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가능한 종류의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본격적인 주석의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위한 주석이란 곧 성경 본문에 어떻게 질문을 던지는가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설교자가 이렇게 본문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설교자가 이런 주석의 단계를 거치면 그는 백지에 많은 내용들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다 설교를 위하여 중요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불필요한 것들 일수도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아주 중요한 내용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이제 설교자는 본문에서 들은 많은 내용들을 테스트하는 작업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첫 번째 테스트 작업은 바로 본문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성경의 본문들은 종종 출애굽 사건, 혹은 예루살렘의 파괴 등과 같은 역사 안의 사건들을 말한다. 즉 성경 본문들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본문 내의 역사”(the history in the text)와 “본문의 역사”(the history of the text)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는 주전 6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다니엘서 자체는 주전 2세기 중반에 기록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의 본문이 이렇게 두 가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그 책 안에 묘사되어 있는 시기와 그 책이 기록된 기간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으며, 앞서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들은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바른 시기에 대한 해석인지를 구별할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어떤 내용들은 잘못 해석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고, 어떤 것은 올바로 해석한 유용한 것으로 판명이 될 것이다.


    좀 더 복잡한 예를 들어보자. 고린도 전서 10:1-5을 보면 거기에는 네 가지 차원의 역사가 나온다. 즉 이 본문에는 (1) 출애굽 사건 자체(The Exodus event itself)의 역사가 있으며, (2) 출애굽기 내의 이 사건에 대한 서술적 묘사(the narrative description of this in the book of Exodus)가 있으며, (3) 후기의 유대적 해석(the later Jewish interpretation)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4) 고린도라는 상황 속에서의 바울의 이야기의 사용(Paul's use of the story in the context of the situation at Corinth)이라는 역사적인 측면들이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이 가지고 있는 이런 역사적인 차원들을 다 염두해 두고서 본문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의 목표는 가능하면 이런 역사적인 차원들을 많이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본문에서 들은 많은 내용들을 역사적으로 올바로 점검할 수 있게 되며, 결과적으로 본문을 보다 더욱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교자가 본문에 대한 이런 역사적인 차원들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본문의 저작권, 기록연대, 사회적인 배경 등의 다루고 있는 신구약 성서개론서들이나 좋은 주석들의 서론 부분에서 찾을 수가 있다. 특별히 최근에 나오는 참고서들은(reference works) 과거의 역사 비평학에서 놓쳐버린 사회학적(sociological) 그리고 정치적인(political) 관점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Walter Bruggermann: "The Social Nature of the Biblical Text for Preaching" in Preaching as a Social Act: Theology and Practice)


8) 본문의 문학적인 특성을 탐구하라 (Explore the literary character of the text)

    설교자가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견하고 들은 많은 내용들을 점검해야 할 두 번째 작업은 바로 본문의 문학적인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의 여러 가지 유형들은 그 자체의 독특한 문체적인 특징들(stylistic features)과 구성 양식(pattern of construction)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성경은 많은 다양한 문학 장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본문들은 탄식의 시, 잠언, 비유, 서신 등의 다양한 장르들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장르는 그 자체의 형태와 구성의 관례를 따르고 있다.


예) Walter Bruggermann의 분류

(가) 원시설화 (The Primal narrative)

(나) 확장된 설화 (The Expanded narrative)

(다) 파생적인 설화 (Derivative narratives)

(라) 제도화된 문서 (Literature of institutionalization)

(마) 성숙한 신학적 숙고의 문서 (Literature of mature theological reflection)

(바) 교훈과 소명의 문서 (Literature of instruction and vocation)


    물론 이것들은 완전한 범주들은 아니며, 그리고 모든 본문도 이러한 범주들 중의 하나로 산뜻하게 자리 잡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범주들은 설교자들로 하여금 각 본문의 문학적인 기능들과 본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넓은 문학적 범주들과 조화되는 것에 덧붙여서, 성경본문들은 또한 탄식의 시들, 잠언, 비유, 서신 등의 특별한 장르들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들 장르의 각각은 그 자체의 형태와 구성의 관례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의 본문이 어떤 문학적인 장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본문과 대화하고 던진 질문이 올바로 된 것인지를 확인할 수가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성경 안에는 비유, 시, 잠언, 연설, 은유, 역사, 법률, 계약, 전기, 묵시, 설화 등 다양한 형태의 문학 장르가 있다. 그러므로 시를 해석할 때에는 법률서를 해석할 때처럼 해석하면 안 된다. 비유를 해석할 때에는 역사서를 해석하는 것처럼 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본문이 설화 이야기라고 한다면 설교자는 본문과 대화하며 질문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누구이며, 왜 성경의 기자는 그들을 이 이야기에 포함시켰을까?” “주인공들은 서로 대조적인가?” “이야기의 발전에 따라 인물들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환경은 이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구조가 이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며 통일성을 부여하는가?” “어떤 갈등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가?”


   그러나 만일에 설교자의 본문이 “시”라면 그 질문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흔히 시인들은 보통 이야기를 해주는 대신 삶의 의미와 삶의 혼란함에 대한 느낌이나 반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에는 진실로 통하지 않으나 느낌에는 진실로 통할 수 있는 상징적인 언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말의 비유적 표현이나 상징적 표현은 그 말에 생명력과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부는 가뭄이 들 때 “땅은 비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것을 “땅은 비를 갈급해 한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시인은 비가 와야 한다는 사실과 느낌에 모두 진실로 통하는 말을 의인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이 “시”일 경우에는 그 질문이 다음과 같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말의 비유적 표현이나 상징적 표현 배후에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가?” “시인은 그의 사용하는 언어를 통하여 어떤 느낌을 표현하고 있는가?” “시인은 그의 사상을 바로 표현하기 위하여 어떤 문장 형식과 구조의 어떤 요소들을 이용하고 있는가?” “꼭 같은 진리를 산문으로 표현한다면 상실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본문의 문학 형식이 무엇인가에 따라 설교자가 본문과 대화하며 질문할 때, 그 질문이 달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의 문학형식을 점검함을 통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본문을 향하여 던진 질문들이 올바로 된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던진 질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고, 또 어떤 것들은 아주 중요하고 유용한 것들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설교자들은 본문의 문학적인 특징들이 성경읽기와 해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기 위해서 본문의 문학적인 장르를 점검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는 토마스 롱(Thomas Long)의 Literary Forms of the Bible을 참고하라. 

    

9) 본문을 신학적으로 탐구한다 (Explore the text theologically)

    설교자가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견하고 들은 많은 내용들을 점검해야 할 마지막 작업은 바로 본문을 신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본문 말씀에 대한 비평학적인 신학적 탐구는 역사적인 분석을 통해서 본문의 구조로부터 언뜻 발견한 하나의 줄거리를 뽑아내는 작업을 포함한다. 즉 설교자는 이 과정에서 인간과의 관계 내에 계신 하나님에 관하여 본문에 제시되어 있는 특별한 가정들과 주장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견한 기초적인 배경자료들은 성경의 각 책에 제시되어 있는 이런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들과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아무튼 이 단계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신학적인 용어들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믿음”, “은혜”, “주”, “계약”, “육신”, “영광”, “구세주” 등의 단어들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사용되고 있든지 기억(memory)과 의미(meaning)로 진동하는 강력하고도 풍부한 신학적인 개념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이러한 어휘가 본문 속에 들어있다면 좀 더 긴장하여 그 어휘들에 대하여 점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들은 어떤 본문 안의 신학적인 단어를 성경 전체의 맥락과 조화를 이루도록 이해하는 것과, 그 본문 가운데 사용되어 있는 동일한 단어의 명백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 사이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설교자는 더욱 분명하게 본문의 뜻에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는 시편 기자가 시편 1편에서 의미하고 있는 바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 적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 적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고전 9장 8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리를 말하면서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여기서 율법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구체적인 구약의 한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9절에서 분명히 그것을 밝히는데, 여기서 그는 “모세의 율법” 즉 신명기 25장 4절 말씀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고전 9장에서의 율법은 곧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구체적인 하나의 말씀을 말한다. 


   그러나 고전 15장 56절에서 바울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을 율법이라”는 말을 할 때의 “율법”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윤리적, 종교적 요구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의 본문에 나타나 있는 이런 중요한 신학적 어휘들에 대해서 민감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신학 단어집과 중요한 신학적 단어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주석들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결론적으로 종합해보면, 설교자는 이제 이 점검의 단계에서 본문을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검토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자신이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견하고 들은 모든 내용들을 검토하고 시험해 보아야 한다. 즉 이제까지 본문과의 대화를 통하여 발견한 내용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제거되어야 할 것인가? 또 그것들 가운데서 오히려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또한 어떤 새로운 개념들이 추가되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런 내용들을 점검하는 가운데 설교자는 더욱 더 분명하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10) 본문을 주석들 안에서 검토한다 (Check the text in the commentaries)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를 위한 주석의 여러 단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 동안 설교자는 본문과의 대화를 통한 많은 자료들을 갖게 되었고, 그것들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즉 이제까지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견한 내용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제거되어야 하고, 어떤 것은 더욱 강조되어야 하며, 또 어떤 새로운 것들이 추가되어야 하는가? 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설교자가 주석의 단계에서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바로 주석서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발견한 것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것이다.10) 유명한 구약학자인 버나드 앤더슨(Bernard W. Anderson)은 “왜 주석서를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에 “주석서를 보는 것은 어떤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단계가 아니다. 사실상 주석서는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서들은 설교자들의 “마지막 분석의 단계”를 위하여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다. 앤더슨은 우리가 주석서를 설교 주석의 마지막 분석단계에서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본문을 개별적으로 해석하지 않거나, 혹은 개별적으로 해석할 수 없고, 더 큰 해석의 범주 즉 사적인 견해들이 검토되어지고 부유해지고 수정되고, 심화되는 분별력 있는 공동체 내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즉 설교자가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아무리 개인적으로 그럴 듯한 내용을 발견해 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통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검증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주석서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주석서들을 통해서 개념들과 관점들은 교환되어질 수 있으며, 설교자의 본문에 대한 이해는 도전 받는 동시에 향상되어질 수 있다. 설교자가 책상 위에서 주석서들을 통해서 신뢰할 만한 더 많은 음성들을 들을 수 있다면, 그 대화가 더욱 풍요롭고 흥미로운 것이 되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좋은 주석서들은 설교자에게 올바른 방향을 지적해 주고, 본문에 대한 설교자의 그릇된 해석을 제거해 줄 수 있다. 그것들은 본문에 관한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고, 설교자가 언뜻 보았을 때에 발견할 수 없는 본문의 문제점을 드러내 줄 수도 있다. 최근의 주석서들은 비평적인 본문 해석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장로교 출판사에서 번역을 시작한 Interpretation은 아주 좋은 해석학적인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으며, Word Biblical Commentary 역시 원문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자료들이다. 그리고 최근에 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는 『메인 아이디어시리즈』는 설교의 중심사상(Main idea)을 찾는 점에 있어서 좋은 자료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설교자들은 이미 잘 알려진 기존의 성서학자들의 의견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된다. 보다 덜 전통적인 관점들--자유주의자들, 여성운동주의자들, 심리분석주의자들 등--로부터 나오는 것들에게 귀를 기울임으로 모두를 향한 본문의 온전한 의미가 탐구되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대부분의 좋은 주석서들은 우리가 고찰해 온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기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가 주석의 길을 따라 가는 동안 발견해온 것들을 정제하고 도전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석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은 주석서들을 통한 점검이다.


   그러나 이제 설교자들이 마지막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주석서들은 우리의 설교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회중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는 바로 설교자이다. 그리고 회중들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이도 설교자이다. 그러나 주석서들은 회중들의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알려줄 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설교를 들으려고 하는 회중들을 향하여 홀로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주석서들은 가장 잘해야 이 다리를 반쯤 함께 건너갈 뿐이다. 설교자는 결국 주석의 마지막 단계를 홀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5. 설교를 행하여 나아감(Moving Toward the Sermon): 다리를 건너는 여행      

11) 설교자를 포함한 청중들에 대한 본문의 주장을 진술한다. (State the claim of the            text upon hearers including the preacher)

    설교는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른 언어, 다른 시대 그리고 다른 문화 속에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만남을 가져오는 작업이다. 그래서 존 스토트(John Stott)는 설교를 가리켜 “다리 놓기”(Bridge-building)라고 하였다. 즉 참된 설교란 성경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 사이에 다리 놓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기록된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그 내용을 오늘의 현실과 관련시켜서 선포함으로써 믿음, 생명 그리고 선한 행위들을 산출해 내는 작업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협곡을 건너는 작업이 바로 주석작업이다. 우리는 그 동안 바로 이 다리를 건너는 주석의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리를 건너는 주석 작업의 마지막 과정이 주석서를 통한 최종적인 점검이었다. 그런데 이 다리를 건너는 작업에 있어서 마지막 동행자였던 주석서는 가장 잘해야 다리를 절반밖에 건너지 못한다. 이 다리를 건너는 작업은 결국 설교자 홀로 해야 한다. 주석서들은 본문에 대해서 많은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고, 설교자의 그릇된 해석들에 대해서 제동을 걸 수는 있다. 그러나 주석서들은 가장 중요한 것, 즉 본문이 오늘의 회중, 특별히 설교자의 회중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교자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다. 즉 주석서는 설교자의 회중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문제들과 상황들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바로 그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석서들은 가장 잘해야 주석의 다리를 설교자와 함께 반쯤 밖에 건너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주석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설교자는 설교자를 포함한 회중들에 대한 본문의 주장을 묘사함으로써 본문과 설교간의 간격을 가로지르는 첫 번째 밧줄을 던지게 된다. 즉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설교 자체를 창조하기 위하여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 설교를 듣게 될 사람들과 관련하여, 이 본문이 말하고 행하고자 하는 바는....(중심사상)....이다.” 바로 이 단계가 설교의 진행과정에서 설교자가 성경본문에 대한 주석으로부터 설교 그 자체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즉 회중을 대신하여 성경에 들어가 직접 성경본문과 씨름한 설교자는 그가 발견한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이제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다시 말해서 본문으로부터 설교로의 이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은 보는 것으로부터 증언하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말하는 것으로, 듣는 것으로부터 말하는 것으로, 깨닫는 것으로부터 증언하는 것으로의 이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자가 완전히 다리를 건너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설교의 초점과 기능(The Focus and Function of the Sermon)

    이제 이 시점에서부터 설교자는 설교 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설교자는 이제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설교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옮아간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는 결국 설교자가 지금까지의 모든 다리 놓기(주석) 작업에서 최종적으로 발견한 본문의 중심사상을 말한다. 그래서 유명한 설교학자 프레드 크레독(Fred Craddock)은 주석의 목적은 “설교자가 찾는 요점(the point)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가 설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설교의 초점” 혹은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고, 설교자가 설교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설교의 목적” 혹은 “설교의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공부를 하였다.


    모든 설교들은 이 “초점”(중심사상)과 “기능”(목적)들 주위로 모아지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발전시키는 과정(다리를 건너는 과정)의 첫 단계에서 설교의 초점진술과 기능진술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여기서 초점진술이란 “설교의 중심이 되며, 전 설교를 통제하며 통일시키는 주제를 간결하게 표현한 문장”(A Focus Statement is a concise description of the central, controlling, and unifying theme of the sermon. In short, this is what the whole sermon will be "about.")을 말하며, 간단히 말해서 전체설교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다. 기능진술은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회중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을 표현한 문장(A Function Statement is a description of what the preacher hopes the sermon will create or cause to happen for the hearers. The function statement names the hoped-for change.)을 말한다.


    설교자가 전 주석의 과정을 통해서 이 초점진술(중심사상)과 기능진술(설교의 목적)을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이제 다리를 건널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여러 가지 설교의 형태(분석설교, 대지설교, 인물설교, 설화체 설교, 이야기 설교, 대화체 설교 등)를 사용하여서 설교의 뼈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살을 붙여서 성경의 원저자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게 된다. 



[참고문헌]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 하던 로빈슨 지음, 정장복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설교. 후레드 크레독 지음, 김영일 역. 서울:컨콜디아사, 1989.

설교학 서설. 정장복 지음. 서울: 엠마오, 1992.

증언으로서의 설교. 토마스 롱 지음, 정장복. 김운용 공역. 서울: 쿰란 출판사, 1998.

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타트 지음, 정성구 역. 서울:풍만출판사, 1985.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Bruce Metzger. London: United Bible Societies, 1975.

Biblical Exegesis. rev. ed. John H. Hayes & Carl R. Holladay. Atlanta: John Knox Press, 1987.

Positive Preaching and the Modern Mind. P. T. Forsyth.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0.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The Consultation on Common Text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3

 

 

 

하나님 이 땅 고쳐주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상한 이 땅 회복하여 주소서

이 민족이 여호와의 민족입니다. 이 민족 여호와를 바라보며 기도하나이다.

주의 영광이 이 땅위에 임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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