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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65
9월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연중 제2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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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영적 삶이 성숙할수록>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진리를 간결한 한 마디 진술로 요약하고 계십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삶이 성숙할수록 깨닫게 되는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을 따르는데서 오는 기쁨, 보람, 행복, 위로는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단맛들은 ‘이것’을 넘어서고 나서야 찾아오는데, ‘이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작은 죽음, 매일의 순교, 순간순간 나를 버림,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한 긍정적 수용...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히 내게 맡겨진 몫을 다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전적으로 투신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가 있겠습니까? 영성적 성숙의 결과는 겸손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영적 완성의 시작은 하느님 없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인정함입니다.”
한 저명한 성서학 교수님께서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피정강론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덕은 어떤 덕이겠습니까?”
“신앙? 희망? 사랑? 정의?...?”
“아닙니다. 다 부차적인 덕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덕은 겸손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특징 중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크심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겸손으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로, 건강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병든 사람들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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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오늘은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성 빈센트 드뽈 기념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살고 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여러 수도회를 세운 성 빈센트 드뽈이 처음부터 그렇게 거룩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젊었을 때 출세하고 싶어서 일찍 사제서품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신학교 시절엔 아버지가 형편없는 옷차림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아들을 찾아왔을 때 체면이 깎일까봐 창피해서 만나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시골 출신으로 돼지치기를 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참으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살아보았던 두 번에 걸친 하느님 체험은 성 빈센트 드뽈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첫 번째 체험은 그가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도 여섯 달 동안 침묵을 지킨 일입니다. 두 번째 체험은 어떤 신학박사가 신앙의 유혹에 빠져있는 것을 돕기 위해 그 유혹을 자신이 대신 받겠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유혹이 그에게 주어졌고 그는 유혹에 빠질 듯하면 ‘사도신경’을 베낀 종이를 가슴에 품고 그 위에 손을 대며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신앙에 대한 심한 유혹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서원합니다. 그 때부터 마음을 괴롭히던 유혹과 고통은 사라지고 신앙에 대한 확신과 영혼의 평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떠한 모습을 닮고 싶어 합니까? 영광의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고통 받고 멸시 받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까?
요즈음 우리가 보고 있는 루카복음은 참된 신앙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것임을 줄기차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군중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살아나셨다고 말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이번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은 마귀들도 알았습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마귀의 고백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복음 바로 위로 올라가보면 헤로데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헤로데도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신앙고백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관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위에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가 나옵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봉헌으로 열두 광주리, 즉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 한 백성이 탄생하는 영광은 자기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십자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을 알아보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헤로데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내가 이웃을 살리는 양식이 되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게 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고백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교만하면 기쁨을 잃습니다. 성 빈센트 드뽈처럼 겸손해지고 가난해질 때 참 기쁨을 다시 찾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나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가난한 집 출신입니다. 여러 해 동안 남의 집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면서 가난을 점점 잊어버리더니 주교, 대주교, 추기경이 되면서 불행하게도 귀족이 되어버렸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은 겸손입니다. 이걸 먼저 깨달아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 마음이 편안하고, 어떤 때 기쁨이 솟아나는지 잘 기억해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더 가지고, 더 교만해질 때 평화와 기쁨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가난해지고 겸손해지는 길에서 평화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온전히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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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18-22 :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고,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보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혼란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대하신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임금으로 혹은 예언자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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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니스트는 자신의 동네에 있는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사람을 꼭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어니스트는 온화하고 사랑 가득한 얼굴을 가진 위대한 사람이 그 마을에서 나온다는 전설을 듣고 자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니스트는 그렇게도 바라던 큰 바위 얼굴을 닮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품을 지니게 된 어니스트를 보며 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임을 알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줄거리입니다.
바라보면 닮아 갑니다. 좋아하는 것만을 오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좋아해서 오래 바라보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썩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와 같은 맹수들의 얼굴은 매우 사납습니다.
그러나 초식 동물의 얼굴은 무섭지 않고 온화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이 변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군중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십니다.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군중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예수님의 상을 말해 줍니다. 오직 베드로만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보속하시려고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운명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운명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바라보려면 십자가를 가장 사랑하여 오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그리스도로 바라볼 때만 나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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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0-22)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겉으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이지만,
뜻으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또는 “너희는 왜 나를 믿느냐?”입니다.
<“너희는 나에게서 무엇을 찾느냐?” 라는 뜻일 수도 있고(요한 1,38),
“너희가 나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을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로,
즉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대답은,
“저희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라고 믿고 있습니다.”라는 뜻인데,
구세주로 믿는 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은 ‘구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은
세속의 부귀영화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닙니다.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종교는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고 선전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런 강의나 강론을 하는 사람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겉으로는 우리 교회에 속해 있지만,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사이비 신앙입니다.
정말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바란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아야만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던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날 설교 때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수난 전의 사도들의 믿음과
수난, 부활 후의 사도들의 믿음은 확실히 다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라고 수난 전부터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달아날 정도로(마르 14,50)
그 믿음은 허약한 믿음이었습니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이었고, 가슴으로, 또는 삶으로 믿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던 그때 사도들은 아마도,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들이었는데, 예수님 부활 후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은 뒤에는
완전히 변화되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그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그 단계는 ‘머리로만’ 믿는 단계입니다.
그랬다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면,
“내가 이런 일을 당하려고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중단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영영 안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그래도 계속 기도하고, 어떻게든 참고 견딘 사람은
힘든 그 시기가 지나가면 ‘온 삶으로’ 믿는 신앙인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과 시련을 일부러 겪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러 겪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특별한 고난과 시련이 없다면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고,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힘든 일을 한 번도 안 겪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사는 동안 아프고 슬픈 일을 몇 번씩 겪게 됩니다.
아무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빠스카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 끝에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게 되는 일,
그런 일들도 ‘빠스카의 신비’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고통을 잊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을 때까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죽은 다음에 내세에서 그 일들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가 안 되어도 받아들여서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고,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과 생명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신앙은 고난과 시련을 만나지 않도록 그것들을 막아주는 힘이 아니라, 그것들을 만나더라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아무 일도 안 겪는 것이, 즉 ‘무사태평’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어떤 일을 겪든지 간에 잘 극복해서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만일에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바라고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쪽 세상에서나 저쪽 세상에서나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후회만 하는 불쌍한 인생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19) (바라는 대로 잘 먹고 잘 살다가 생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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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포항모원 한창현 요셉 신부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살아가다 보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좋게 말할 때가 있는가하면 나쁘게 말할 때도 있고, 정확하게 알고 말하는가하면 전혀 다른 것을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려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요.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말을 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하나...
예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씩을 했지만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나 신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가장 정확하게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아마 우리들은 많은 말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할 수도 있고,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말을 해서 상처를 주거나 신자답지 않게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엉터리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다른 이들의 말에 너무 힘겨워할수도 있습니다. 또 남을 힘들게 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합니다. 제대로 알고 말해야하겠습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면서 교회 공동체의 부르심에 화답하여, 본당활동과 소공동체운동 안에서 믿음의 씨앗을 전파하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매진한다면 우리 신앙의 기쁨은 거기서 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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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병환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 이는 신앙고백과 수난은 서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해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 당신 신원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마지막 과월절, 그러니까 예수께서 당신 수난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필리피의 카이사리아 지방을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처음에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물으시자 제자들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생각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란 말은 구약에서 예언된 왕,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 예수께서도 베드로의 대답에 깜짝 놀라신다.
베드로의 대답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었던 신앙이었다.
그런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언급하시면서 처음으로 당신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 수난의 엄청난 사건이 믿음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고 자신도 수난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믿고 또한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이해하고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예언자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이며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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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한 알베르토 신부님]
<고백>
언젠가 사제서품식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젊은 사내들이 서툰 몸짓과 함께 일생을 두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이 담긴 그 모습을 보며 저의 고백도 떠올려보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살지 않고 주님으로 인해 살겠다고 맹세한 제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은 저의 모든 것입니다’라고 그때처럼 우렁차게 고백할 수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주님은 과연 누구신가요? 베드로의 저 가슴 가득한 고백을, 또한 그것을 일생을 두고 살아내는 그의 삶을 우리도 깊이 고백하고 살아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 때 이전의 내가 죽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인이신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또 삶 안에서 주님을 형식적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우리의 첫 고백처럼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임을 삶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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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물으시거든>
루카 9,18-22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당신이 물으시거든>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벗들을 위해 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당신은 사랑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빼앗음과 빼앗김 없는 세상 일굼으로써
당신은 정의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갈라져 싸우는 세상 이음으로써
당신은 화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사랑과 정의와 화해를 삶으로써
당신은 평화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착한 벗들에게 밝은 웃음 지음으로써
당신은 기쁨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슬픔에 젖은 벗들의 눈물 닦아줌으로써
당신은 위로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억눌린 벗들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당신은 해방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갇힌 벗들의 사슬을 끊음으로써
당신은 자유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외로움에 지친 벗을 품음으로써
당신은 연대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어둠을 사르는 작은 불쏘시개 됨으로써
당신은 빛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죽어가는 작은 벗들을 돌봄으로써
당신은 생명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벗을 살리기 위해 나를 내어놓음으로써
당신은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죽음의 세력에 당당히 맞섬으로써
당신은 죽음을 이긴 부활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줌으로써
당신은 하느님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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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주님의 햇살로….>
구약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서 모세를 잃고, 슬픔에 잠긴 여호수아에게 이런 용기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한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 고운님들에게도 용기의 말씀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한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는 대답을 전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신했던 베드로에게 용서와 자비의 은총을 베푸시고자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 사랑합니다.”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세 번 들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맡긴 양들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내 양들을 기른다.”라는 말씀입니다. 그 양들 안에는 베드로와 우리 자신도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내 양들을 기른다.”라는 목소리를 듣고 따라나서는 은혜로운 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주일학교 어린이 미사 강론 중에 “사과 하나를 들고 하느님의 은총은 이 사과 한 개에 다 담겨 있어요. 사과를 가질 친구는 한 사람씩 나와서 가져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차례로 나와서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사과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키가 작은 아이들의 손은 사과에 닿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더 높이 뛰고, 또 뛰고, 그러나 아이들은 사과를 얻지 못하고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 손을 벌리면서 “사과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 사과를 주었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손을 가지런히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은총은 나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주 예수님께 손을 쭉 내밀면서….
“저는 모릅니다. 그저 내 심령 안에 햇살 담은 사랑으로 충만해져 따르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모릅니다.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당신 뜻대로 따라가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살아있음의 가치로 전체를 보시는 주 예수님을 소망하고 따름으로써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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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67)
♧♧ 시편 51편 9절….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
*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우슬초’는 박하과의 식물로서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은 다음과 같은 정결 예식에 피를 찍어 뿌리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첫째, 나병환자가 나음을 입었을 때, 제사장이 새의 피를 찍어 7번 뿌림으로 정결하게 된 것을 확정하는 경우(레위기 14장 2-7절. 참조)
둘째, 부정한 물건이나 시체와 접촉한 사람을 깨끗하게 할 때(민수기 19장 18절. 참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몸을 썩어 들어가게 하는 나병처럼 자기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무서운 것임을 깨달았기에 부정한 자가 우슬초로 피를 뿌려 깨끗함을 받은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다고 인정해 주시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죄를 용서받은 은총의 상태를 눈에 비유하고 있는데, 여기서 ‘눈(내리는 하얀 눈)’은 ‘순결’과 ‘정결’의 상징입니다.(이사야서 1장 18절. 참조) 따라서 이 구절은...하느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면 그토록 정결함을 회복하여 다시금 하느님과 친교 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51편 10절….
"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부수셨던 뼈들이 기뻐 뛰리이다."
* 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
‘기쁨과 즐거움...’이란 죄를 용서하신다는 하느님의 선포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범죄로 인하여 하느님과의 친교가 단절된 다윗에게 있어서 죄를 용서함으로 인한 하느님의 친교 회복만큼 기쁘고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소극적인 측면에서 죄의 용서만을 간구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측면에서 하느님과 친교 회복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 당신께서 부수셨던 뼈들이 기뻐 뛰리이다...
‘당신(주님)께서 부수셨던 뼈...’란 말은 죄책감으로 짓눌려 고통으로 극심한 상처를 받은 다윗의 마음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부수셨던 뼈들로 기쁘게 해달라는 것은 죄의 용서를 통한 심적 고통의 치유를 간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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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가본 친구 집인데 글쎄 중국집입니다. 더군다나 어머니께서는 친구가 놀러 왔다고 자장면까지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자장면이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장면 먹은 티를 내려고 일부러 입가에 묻은 자장을 지우지 않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장면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이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는 왜 중국집 사장님이 아니라 선생님이신 거야?’라면서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자장면을 시켜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배탈이 난 것입니다. 배가 계속 아파 왔고 수없이 화장실을 다녀와야만 했습니다.
한동안 자장면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장면을 먹으면 또 배가 아프고 고생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중국집 아들 친구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으면 부러움을 갖게 됩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불행한 사람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부러움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취향이 바뀌는 것처럼 부러움의 대상도 계속 바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지고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변하고 없어질 수 있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더불어 없는 것에도 의연하게 넘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지요. 군중의 생각이 아닌 제자들의 생각을 물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군중들은 그 누구도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보여 주신 놀라운 기적을 보면 충분히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그런 고백은 하나도 없었을까요? 군중들은 진짜 주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만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뛰어넘은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단지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명으로 예수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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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 공간에서 나만의 공간을 얻으려면 이름(ID)과 비밀번호(Password)가 있어야 합니다.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고, 방도 많기에 따로 적어놓습니다. 적어놓고 기억해도 깜빡거릴 때가 있습니다. 다시금 내 방을 찾아가려면 인터넷은 내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나의 인격, 나의 직장, 나의 취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스마트폰이나, 메일로 인증번호가 옵니다. 인증번호는 숫자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나를 알 수 있는 건 인증번호라는 숫자입니다. 숫자를 나의 자리에 넣고, 다시금 비밀번호를 설정하면 비로소 나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번호를 잊어버려서 30분은 씨름했습니다. 차분하게 하면 10분도 걸리지 않는 일입니다. 급한 성격이 일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생각도 달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 영광의 자리에 오를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도 예수님 곁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예수님 주변에 모인 군중을 보면 그렇게 보였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해 주리라 믿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로마로부터 독립된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전쟁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는 초대교회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참하게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고,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새로운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시어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하느님의 백성을 따로 선별하실 겁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가르쳤던 하느님의 그리스도였습니다.
2019년 9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시겠는지요?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인간이며 참 하느님이셨던 예수님,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먹고,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셨던 역사의 예수님을 체험하고 느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곁에서 함께 숨 쉬고, 내가 그 곁에서 함께 울고 웃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믿고 물 위를 걸어보면 좋겠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예수님, 교리의 예수님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삶의 예수님, 함께 고난받는 예수님, 우리 때문에 애통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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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함께의 여정>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말이 평범하지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 하느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시며 예수님 친히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평생 우리와 함께 하시는 평생 도반道伴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은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참으로 경이驚異로운 분이셨습니다. 하여 ‘이웃사랑의 사도’이자 ‘자비의 성인’이라 일컬으며 레오 13세 교황은 성인을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만79세 비교적 장수를 누린 성인입니다. 산 햇수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죽는 그날까지 시종일관始終一貫, 하루하루 치열히 살았느냐가 성덕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수녀님들과 함께 한 10일간의 피정지도 기간도 행복했고 수도원에 귀가歸家했을 때도 수도형제들이 함께 환대歡待해 주니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인생 마치고 아버지의 집에 귀가인 죽음이라면 참 행복한 죽음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피정지도를 마치며 수녀님들의 감사 인사는 물론 전달해 준 편지 글이 저에겐 참 큰 선물이었습니다. 위로와 더불어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전문을 인용합니다.
-“사랑하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께
신부님과 ‘함께’ 한 열흘의 피정이 참으로 행복! 하였습니다. 연륜과 존재의 깊이로 수도자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깨달음을 주시고, 수도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신부님께 진심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기도와 성독聖讀과 일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형제로, 학인으로, 형제로 일일일생, 하루하루 살아가겠습니다. 수도 고승高僧의 모습을 보여 주신 신부님께 깊은 존경의 인사를 드립니다.
2019.9월 가을 문턱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피정자들 올림”-
함께의 행복, 함께의 기쁨, 함께의 아름다움임을 깨닫습니다. ‘무아無我의 집’ 사제관 언덕 청초한 하얀 구절초꽃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함께 하니 얼마나 환상적 아름다움을 선사하든지요!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수녀님들과의 피정 마지막날 하루의 소원이 이루어져 아침 미사시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되는 402장 입당성가와,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퇴장성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를 수녀님들이 사랑을 가득 담아 함께 청아淸雅한 음성으로 불러 주니 얼마나 감미로운 행복이었던지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보이든 보이지 않든 주님은 물론 수많은 좋은 이웃들과 함께 연대하여 살아갑니다. 비단 사람뿐 아니라 무수한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하여 주님은 함께 하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고, 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서로 함께 사랑할 때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함께 하시는 이들을 격려하십니다.
-“즈루빠벨아, 용기를 내어라. 예수아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함께 참여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정말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넘어지면 용기를 내어 두려움 없이 벌떡 일어나 주님과 함께, 형제들과 함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무른다.”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고백할 때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생생히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고립단절의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속의 혼자임을 깨닫습니다. 기도중에 아버지와 깊은 친교를 나누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군중의 당신께 대한 견해들이 신통치 않자 예수님은 곧장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대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물음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맙게도 베드로가 모두를 대표하여 주님의 신원을 정확히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결정적 열쇠임을, 하느님의 신비는 그대로 그리스도의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이신 당신의 신원을 분명히 밝혀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어 끊임없이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주님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여 신망애信望愛의 마음 가득 담아 정성껏 끊임없이 바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고백의 기도를 호흡에 맞춰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을 고백할 때 주님 사랑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허무의 어둠을,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당신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기도 첫 연의 주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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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에 대한 생각>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정하신 분"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주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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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충격을 덜어주고 싶으셨는지 반복된 질문으로 본론에 접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루카 9,18).
스승과 제자들이 중요한 순간을 침묵으로 준비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요. 제자들이 분명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셨다고 하네요. 모두 함께 기도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건데, 그러면 기도하는 스승 곁에서 제자들이 무얼 하며 "함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스승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이후에 나오는 걸 보면(루카 11,1-13 참조) 아직 그들은 준비가 덜 되었던 것일 수도 있지요.
그래도, 설령 적극적으로 함께 기도하지 않았더라도 기도하는 스승의 침묵에 함께하며 그간 스승님이 보여 주신 기적들과 그분에 대한 칭송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루카 9,10-17) 바로 다음에 오늘의 대목이 나오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18)
먼저 예수님은 군중의 생각과 반응을 물으십니다. 불현듯 나타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는 존재에 대해 형성된 보편적 인식에서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 나라 도래를 알린 세례자 요한(마태 3,1-2 참조)이나, 빵을 많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린 엘리야 예언자(1열왕 17,8-8-24),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박해받고 죽은 옛 예언자 중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꼭 맞는 정답은 아니나 그렇다고 틀린 답도 아니지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이제 예수님의 질문이 한 걸음 더 들어가십니다. "나와 함께 지내는 너희는 (그런 보편적 인식을 바탕으로 깔고) 나를 누구라고 하겠느냐?" 물으시는 겁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이렇듯 교의적이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론을 토대로, 각자 맺은 인격적, 주관적, 실존적 관계성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베드로의 입에서 메시아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안드레아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뒤 형 시몬(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어쩌면 이미 제자들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심을 (아직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메시아가 아니시라면 민족적 열망이 좌절될 뿐 아니라, 모든 걸 버리고 따른 자기들의 삶도 무의미해질 테니 꼭 그래야 했겠지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루카와 달리 베드로의 고백이 살과 피에서 나온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기술했지요.(마태 16,13-20 참조) 과연 오늘 제1독서에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하까 2,5) 것이라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제자들이 (우리는) 드디어 정수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예언서 갈피마다 등장하는 메시아의 모습이고 모든 참 예언자가 받아들인 운명이었건만, 제자들도 우리도 그다지 직면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속적 힘과 영광으로 덧칠된 구원자의 모습을 고대하는 사이 잃어버린 진리기도 할 겁니다.
제1독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워로와 격려, 축복이 쏟아집니다.
"용기를 내어라."(하까 2,4)
"두려워하지 마라."(하까 2,5)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하까 2,9)
공사가 진행되기 어려운 현실에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주신 이 말씀들은 유배의 상흔을 지닌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군만마보다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하까 2,9)
유다 역사의 황금기인 솔로몬 임금 시절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의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될 약속이지요. 그런데 이 약속이 새 성전 완공이라는 가까운 미래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신비이고 깊이이며 영원성입니다.
수 세기가 지난 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 한 가운데로 육화하시어 성전이신 당신의 현존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시고요.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고에는 수난,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도 포커스가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과 배척과 죽음을 거쳐 재건된 성전의 영광은 옛 것에 비길 바 없이 온전하고 아름다울 테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성령의 성전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물리적 장소와 건물을 초월하는 성전이 끊임없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잘것없는 죄인에 불과하고 부족함 넘치는 우리 (성전)의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는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보다 우리를 더 크게 고무시키는 약속이 될 겁니다.
이제 눈을 돌려 천상 예루살렘을 바라봅니다. 지상 순례를 거쳐 그리운 주님과의 해후와 사랑의 심판을 지나 찬란히 빛나는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더이상 성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용기를 냅시다. 성전을 지을 "은도 주님의 것, 금도 주님의 것"(하까 2,8 참조)입니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따르기로 작정하고 나선 주님의 길, 예언자의 길 안에 머물러 걷고 기도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성전이신 분이 성전인 우리를 성전이 필요없는 곳으로 친히 데려가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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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날마다 놀라운 날
모든 날은 그날의 놀라움을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거나 듣거나 느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때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이 우리에게 슬픔으로 오든 기쁨으로 오든 그날그날의 놀라움을 겁내지 말고 받아들이자. 그것이 우리 가슴에 새로운 자리를 열게 해, 거기서 새 친구들을 환영하고 더불어 나누는
인간관계를 즐기게 할 것이다. - 「영혼의 양식」에서
♣우리는 하루에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을 보여 줍니다. 위에서 논했던 것처럼 그날 주어진 시간을 그냥 물리적 시계시간으로 흘려보내느냐 아니면 그날그날 자신의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 주어진 사건들에 어떤 의미와 뜻을 두고 관계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부여 된다고 봅니다.
그날그날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과 사건의 연결고리를 하느님의 말씀의 빛에 조명하여 사건들에 임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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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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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9,20)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신앙고백이다>
다른 사도들도 일고 있었지만,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처럼 그분의 본성과 이름을 함께 고백한 그는 모든 덕을 두루 갖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라는 시실만을 고백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나심에 대해 따져 묻지 않습니까?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언제 어떻게 태어나 셨으며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인간의 사고(思考)라는 부실한 도구로 자세히 알아내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물음은 믿음을 북돋기보다는 걸림돌임을 알았기에,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님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드님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 안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요한 3죄 참조)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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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9,20)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이 물음에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 말 '메시아'를 그리스 말로 번역한 것인데, '기름부음받은이'라는 뜻입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이 대답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큰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파견되신 '하느님의 메시아!' '하느님의 구세주!' 라는 큰 신앙고백입니다.
오늘은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신 성 빈첸시오 드 뽈 사제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빈첸시오 드 뽈 사제는 가난한 이들과의 만남 체험을 통해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에 헌신하신 분입니다.
성 빈첸시오 드 뽈 신부님께서 깨달으신 것처럼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러오신 분이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주러오신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시고, 말구유의 먹이통에서 태어나신 이유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입니다.
가난한 곳을 바라봅시다! 나의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봅시다!
우리도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 주는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됩시다!
"주님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쳐주게 하셨다."(입당송/루카4,18 참조)
"토착화된 복음의 열매인 대중 신심 안에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적극적인 복음화의 힘이 있습니다. 이를 과소평가한다면 성령의 활동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2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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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면역>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자식이 제대로 성장하게 하려면
부모가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서게 하는게 잘 키우는 것입니다
고통에도 면역이 필요하죠
자식이 설거지, 밥 짓기, 청소 하는 것을
몸에 익히게 하는 부모가 잘하는 겁니다
공부만 잘해라 ~ 노노!
고생을 허용해라 ~ 굿굿!
골고루 경험하고 체득할때
고통앞에서 버텨낼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 고난의 길이 내게도 있다는 것이
복이요 그 고난을 겪으며 사는것이
인간답게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고생하면 고난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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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 20)
고난은 삶을
일깨워주고
하느님을
가르쳐줍니다.
비껴갈 수 없는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받아들여 할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새롭게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판단과 단죄가 아닌
화해와 용서를
가져다 줍니다.
십자가는
살아있음의
선물입니다.
사랑하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과 십자가는
함께 존재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으로
다시 사랑을
찾아주십니다.
되찾아주신 사랑은
절망과 끝이 아닌
십자가를 지고가는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끌어올리십니다.
사람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낮아집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십자가의 고난으로
소중하고 소중한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 사랑을
향하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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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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