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마가복음2:23-28)
23 Jesus was walking through some wheat fields on a Sabbath. As his disciples walked along with him, they began to pick the heads of wheat. 24 So the Pharisees said to Jesus, “Look, it is against our Law for your disciples to do that on the Sabbath!”
25 Jesus answered, “Have you never read what David did that time when he needed something to eat? He and his men were hungry, 26 so he went into the house of God and ate the bread offered to God. This happened when Abiathar was the High Priest. According to our Law only the priests may eat this bread—but David ate it and even gave it to his men.”
27 And Jesus concluded, “The Sabbath was made for the good of human beings; they were not made for the Sabbath. 28 So the Son of Man is Lord even of the Sabbath.”
사람들은 운전하기 전에 네비게이션부터 켭니다.
거기에 주소를 넣고 안전벨트를 맵니다.
말할 필요 없이 네비게이션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야 목적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을 켜두고 그것에 상관없이 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실은 그 지시를 한마디도 놓치면 안 됩니다.
언제인가 고속도로에서 지시 한 번 놓쳤다가 엄청 먼 길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라고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은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신앙의 네비게이션을 성경, 설교, 교회 전통, 간증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간해 내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가버나움에서 주님의 하셨던 일들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그 분 말씀 한마디에 여지없이 귀신이 달아났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신음하던 베드로의 장모가 병상에서 일어나 시중들었습니다.
이런 기적들이 일어났으니 가버나움 마을이 난리가 났습니다.
당장 그 날 저녁에 안식일이 끝나자 베드로 처가 앞마당 교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흥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 가버나움 교회라고 간판을 달아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교인들을 등지고 떠나신 것입니다.
다시 가버나움을 찾아오신 주님은 예수께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친일파 마태의 세관을 들어가서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 사람을 제자로 삼더니 세리와 죄인들의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 일이 엄청난 비난을 받을 일이라는 것을 주님이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들의 비난 앞에서 주님은 나는 의사다 죄인과 세리와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인과 죄인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죄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대셨습니다.
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2:16,17)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가시는 방향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대화하실수록 갈등이 더 커졌습니다.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3 Jesus was walking through some wheat fields on a Sabbath. As his disciples walked along with him, they began to pick the heads of wheat.
*다른 세상
이번에는 안식일을 맞아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못 한 일들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보는 장소에서 밀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예수님도 알곡을 잡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지 남의 집 밀밭을 가면서 그것을 헤치고 이삭을 잘라 먹어! 주인 허락도 없이!” 할지 모릅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의 생각대로라면 그것은 올바른 판단입니다.
하지만 유대는 대한민국 거창과는 다른 나라입니다.
우리에게는 대한민국 헌법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대한민국 헌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법 성경의 법이 통했습니다.
24. 너희가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된다.
25.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신23:24,25)
당시 유대 사회에서의 죄란 우리 생각과는 반대입니다.
밭 임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따먹도록 포도밭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내 포도밭에 있는 포도를 두고 그것이 오직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
자신의 밭에서 모르는 사람이 포도를 따 먹어도 또 이삭을 잘라 먹어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구니를 들고 가서 본격적으로 그것을 수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우리가 당장에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성경에 대해서도 무지한 목사들은 철저히 내 것은 내 것일 뿐이다라고 오직 소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장경제의 자본주의가 하나님주의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아니올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사람 생각에 그 땅의 부자만큼 억울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거름 주고 묘종 사다 심고 잡초 뽑아주고.......
그리고 포도밭 문을 걸어 잠그지 말라!
외국인이든 가난하든 혹은 노예라도 그것을 따 먹을 수 있도록!
미쳤다고 그 수고를 다 해!
미쳤어!
이 모든 밭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며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에는 소유가 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생명이 생존을 위한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셔야 할 것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이 그 다른 세상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법이 적용되는 나라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24. 너희가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된다.
25.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신23:24,25)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하나님의 나라로 동일시 하지 마세요!
우리가 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첨단 자본주의 사회입니까?
착각도 유분수지.......
*다른 해석
유대인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과 그 면에서 같았습니다.
소망의 장소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가기 위해 성경 말씀을 그들의 기준으로 삼은 것까지 같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같은 네비게이션을 켜두고 예수님은 오른쪽으로 가라고 읽으시는데 사람들은 왼쪽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해석과 적용의 차이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3 Jesus was walking through some wheat fields on a Sabbath. As his disciples walked along with him, they began to pick the heads of wheat.
*안식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칠 일째 되는 날 쉬셨습니다.
1.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2.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2:1-3)
하나님은 사람들에게만 특별한 요구를 하셨습니다.
칠 일에는 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보다 탁월한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에게 일하는 것보다 쉬는 일이 더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봄에 씨를 뿌리면서 가을의 수확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봄에 씨를 뿌리는 노동행위가 그에게 안정감을 줄 것입니다.
가을의 소망을 봄에 그의 땀으로 확인한 셈입니다.
봄에 그 노동행위가 없는 농부는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요구는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뢰에서 안정감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요구가 그것입니다.
농사하지 않고 창고를 짓지 않아도 노래하면서 먹고 사는 새에게 그 신뢰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노동이 중요하지만 이제는 노동하지 않은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일이 어렵고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의 백성에게 이 일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29. 내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으니, 엿샛날에는 내가 너희에게 양식 이틀치를 준다. 그러니 이렛날에는 아무도 집을 떠나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이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30. 그리하여 백성이 이렛날에는 안식하였다.(출16:29,30)
사람들 먹을 양식보다 두세 배 더 모아서 소금에 절이고 말리고 그 일하는 것이 차라리 보람 있고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돈 되는 일을 눈으로 보고도 그것을 참고 있자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장사가 곱빼기로 잘 되는데.......’
혹은 ‘이 메마른 사막에서 음식이 없으면 우리는 죽고 만다.
남들 드러누워서 잠자는데 그 시간에 내가 일하는 것이 죄냐?
오늘은 보장 받았지만 내일은 하나님이 음식을 안 주시면 꼼짝없이 굶을 것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 경건하다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기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그들은 일을 안 하는 종교적인 일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무조건 일 안 하는 일!
그 일로 인해서 안식일 밀밭에서 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맞으면 장애의 고역이라도 참고 인내심을 발휘해서 의를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하루 유보하는 것이 의를 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정한 종교적인 일을 하지 않는 불경한 사람들을 주목했습니다.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 보고 있었다.(막3:1,2)
그들의 주장하는 신앙이란 자비를 잃은 종교 이데올로기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걸려든 것입니다.
24.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4 So the Pharisees said to Jesus, “Look, it is against our Law for your disciples to do that on the Sabbath!”
*영향력
실제로 제자들이 당한 일은 사람 죽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두 끼니 굶어서 단순히 배가 고팠을 뿐입니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그들은 전혀 의외의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과 한 달 혹은 두 달 전에 예수님을 몰랐던 베드로와 그 무리는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동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안식일을 노골적으로 범하다니!
그러다가 맞아 죽으려고.......
하지만 이제 그들은 예측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 일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더니 일어난 일입니다.
여기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런 제자들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바리새인이라는 사람들이 폭력을 일삼는 악당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못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건에 힘쓰는 자들입니다.
실은 그들은 바리새인으로써 그들이 소속하고 있는 바리새파를 대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한 영향을 받고 그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집단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두개인이었다면 사두개인 식으로 예수님을 저항했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역할
이 자리에서 목회자는 교인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의 영향을 받게 하는 소명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영향을 받은 어부들이 안 하던 일을 했습니다.
할 수 없었던 일을 한 것입니다.
안식일 밀밭 길을 걸으며 밀이삭을 잘라 비벼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고
영적인 권위를 빌미로 강압하고
교인들을 목사인 제 영향력 아래에 두려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교주입니다.
목사들이란 비교하자면 교인들을 예수님이라는 신랑께 중매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중매만 하고 사라져야 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잘 사라지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큰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신랑으로써 살림을 차리시는데 중매인이 어디 그 살림집에 들어가서 살려고 합니까!
요한은 그리스도 앞에서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28.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3:28-30)
자신은 그리스도 앞에서 철저히 사라져야 할 존재입니다.
목회자의 대전제입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 일에 요한이 탁월했습니다.
35. 다음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요1:35-37)
즉 요한의 말을 듣더니 요한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을 갈아치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주체성
말세의 현상은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24:4,5)
성경은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이 말세의 첫 번째 징조라고 말씀하시는데 말세를 사시는 여러분은 이 가짜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실 것입니까?
자신의 영혼을 그들에게 맡기실 참입니까?
신앙인들이 유의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는 신앙의 주체적인 선택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때에 할 일이 있습니다.
거절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면서 거짓 위세를 떠는 그들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시1:1)
또 상황이 혼란해서 길을 잃게 되는 경우 더욱 힘써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2.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1:2)
그래야 엉뚱한 파멸의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말세에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 부르짖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목사다!”
주님조차 여러분을 신앙으로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의하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을 떠나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불리우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65.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요6:65)
하나님의 허락과 인도 없이 우리는 주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도 많은 사람이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요6:66)
66 Because of this, many of Jesus' followers turned back and would not go with him any more.
그럼에도 주님께서 안타까운 그 제자들에게 일절 강요가 없으셨습니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하시니,
67 So he asked the twelve disciples, “And you—would you also like to leave?”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6:66-68)
68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would we go? You have the words that give eternal life. 69 And now we believe and know that you are the Holy One who has come from God.”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many of Jesus' followers) 예수님을 떠났지만 주님께서는 다만 이 말씀을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반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은 자 중에 유다를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도 강요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7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다."
71. 이것은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데,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예수를 넘겨 줄 사람이었다.(요6:70,71)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여러분의 결정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의지적인 결정을 존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결정을 내렸으며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목자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본 것입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요10:14)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여러분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마귀들은 전혀 다른 방식을 택합니다.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여러분의 영혼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결단을 내리세요!
*해서는 안 되는 일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되는 많은 규칙을 정했습니다.
특별히 종교적으로 경건했던 바리새인들이 그 일을 잘 했습니다.
그리고 간단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정한 이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 의라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그 기준으로 배척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법의 의미를 살피는 일을 등한시했습니다.
그들은 그 규율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확실한 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규칙을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 되다 보니 주님은 이렇게 고발하신 것입니다.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23:23,24)
그들은 막상 보석을 빼고 보석 상자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시간 안에 주기도문을 암송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일생이 걸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껍데기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에 합당한 그 존재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로 내는 돈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십일조를 내는 존재의 동기를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보다는 그 십일조의 정신인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5 Jesus answered, “Have you never read what David did that time when he needed something to eat? He and his men were hungry,
* 굶주렸을 때
지금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날 제자들이 밀밭에서 했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다윗을 예로 들었습니다.
특별히 당시 다윗의 상황이 중요합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는 이 미친 왕으로 인해서 밥 얻어먹다가 죽게 생긴 상황을 만났던 것입니다.
주님께 사람이 굶는다는 것은 중요한 네비게이션이었습니다.
다윗의 상황은 정말 심각했습니다.
미친 독재자가 비행기를 몰고 공중에서 사격하며 총검으로 양민을 찔러대는 것입니다.
이 때에 어떻게 마실 물을 챙기며 먹을 음식을 챙길 수 있겠습니까!
그 다윗의 상황에 비교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황은 그런 다윗의 상황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젯밤 한 끼 굶은 정도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두 끼!
그래서 배가 고파 안식일의 법을 어기고 남의 밭에서 곡식을 비벼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배고픔조차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셨다는 것입니다.
그 배고픔이 안식일 법을 어겨도 되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배고픔은 중요합니다.
사람이 절대적인 잣대입니다.
율법으로 사람을 재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을 율법을 재야 하는 것입니다.
고차원적 기준 혹은 저차원적 기준 그런 것들로 헷갈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배고프다는 것은 절대적인 잣대입니다.
일단 사람을 먹이고 다음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굶고 죽는 문제를 가지고 계급 빈부 이데올로기 더욱이 종교 운운하는 것은 사탄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북의 굶어 죽어가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농사를 더 많이 해서 그들에게 쌀을 가져다 퍼 주어야 합니다.
김정은이가 그것을 핵무기 수소폭탄보다 더 무서워할 것입니다.
나는 미쳐있는 김일성이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똑같이 미친 남쪽의 독재자들도 추종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왜 싸웁니까?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6 so he went into the house of God and ate the bread offered to God. This happened when Abiathar was the High Priest. According to our Law only the priests may eat this bread—but David ate it and even gave it to his men.”
*제단 빵
대제사장이 그 율법 말씀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 떡은 오직 제사장들만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굶주렸다는 것은 특별한 상황입니다.
사람이 굶주렸다는 것은 성경의 법 적용에 있어서 예외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는 것이 더 합법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문자대로 그 떡을 오직 제사장만 먹는 것이 불법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법의 근본 동기를 위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굶주렸다!
한두 끼니 굶어서 배고픈 것조차 하나님의 법이 특별히 적용되어야 하는 경우였던 것입니다.
27.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7 And Jesus concluded, “The Sabbath was made for the good of human beings; they were not made for the Sabbath.
* 사람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한 지적을 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법의 중심에는 사람의 생명이 있습니다.
개의 생명이 아닙니다.
소의 껍데기는 벗기는 자들이 개사랑 운운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유로든지 사람의 생명을 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 생명이야말로 절대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법도 사람의 생명을 위해 봉사할 뿐입니다.
그 말씀은 당신의 생명이 이처럼 귀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것이 법의 동기였습니다.
그 무엇도 사람의 생명 위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근원적인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것이 만들어질 때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가혹하게 인간을 구속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이르지만 사람들은 그 법의 근본 동기를 잊고 그에 부합되는 규정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실천하면서 자신이 의인이라고 간단히 생각했던 것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의 이혼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어떤 부류에서는 부인이 밥만 태워도 그것이 이혼 사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남자가 이혼장을 써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일도 합법화되는 일이 간단했습니다.
2.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막10:2)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율법을 역행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말한 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면, 간음하는 것이다."(막10:6-12)
주님은 더 근원적으로 살피라는 것입니다.
인간 창조의 시간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가?
28.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
28 So the Son of Man is Lord even of the Sabbath.”
*안식일의 주인
모든 사람이 동의하겠지만 안식일의 주인은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 사건의 결론을 주님은 이렇게 내리신 것입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수소폭탄이 터진 것입니다.
그 말씀은 목수의 아들이 자신을 두고 하나님이고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하게 느껴졌겠습니까?
하지만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그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도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그 분이 해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이해한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의 논리적 해석을 뛰어넘은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입증이 불가능한 공리에 해당됩니다.
금식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도 그것입니다.
금식은 모세의 법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신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금식을 결정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실 때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금식의 혹은 모든 말씀은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신앙의 무게중심을 모세에서 예수님을 옮기신 것입니다.
주님은 금식을 통해 은유적으로 그가 주인 되심을 표현하셨는데 이제는 대놓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
28 So the Son of Man is Lord even of the Sabbath.”
사람의 생명이 절대 기준이다.
* 방식
그리고 그 분은 그 분이 그리스도 되심을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할 방식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제의를 폐하신 것입니다.
12. 오직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룩하여 주셨습니다.
13.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해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14.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히9:12-14)
25.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26. 그것은, 그가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고 하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애시려고 시대의 종말에 오직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히9:25,26)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계시의 방식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약함으로 강한 것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식을 누구도 의지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 일은 자발적인 고난의 수용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그 일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의 신앙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순간 사람을 구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밥 먹을 때를 놓쳐서 안식일 법을 어기고 그것을 잘라서 비벼 먹는 순간 그 법의 본질이 회복되었습니다.
사람 배고픈 것을 법 결정의 요인으로 삼으시는 예수님이 놀랍니다.
주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해석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안식일 밀밭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