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하는 발전된 한국 이전의 모습을 갖고 있던 시기이다. 아직은 미국의 원조물품으로 생활하고 궁핍한 삶을 벗어나지 못햇던 때이다. 이글을 읽는 젊은 세대는 이게 우리나라의 모습인가 싶을 수도 있다.
이해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만들어진 해이다. 같은 해 개봉된 끌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처럼 영상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려는 스타일이 외화를 모방했다는 악평도 있었지만 이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볼 길은 없다. 국내에 단 한 편의 프린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상옥 감독은 북한의 영화보관소 목록에서 봤다고 하니 통일되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 이만희 감독은 <물레방아>, <군번 없는 용사>도 만들어 전성기를 보여주었는데, <군번 없는 용사>에서 북한군을 미화시켰다고 반공법 위반으로 남산 중정에 끌려가 곤욕을 치루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다. 영화인들의 탄원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의 억울함이야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술로써 한을 풀다가 술이 원인이되어 편집실에서 쓰러져 고인이 되었다.
<만추>의 주인공인 신성일 배우는 정진우 감독의 <초우> 등 이 해에만 46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대단한 편수이지만 이 기록은 다음 해 51편 출연으로 깨진다.
한국영화는 <오늘은 왕>, <청춘교실>, <전쟁과 여교사>, <나운규의 일생>, <민검사와 여선생>, 임원직 감독, 남궁원, 김석훈 주연의 <최후전선 백팔십리>, 이한욱 감독, 남궁원, 엄앵란 주연의 <대탈출> 등이 개봉되었다.
이 해에 관객 수는 19,703,208명이었고 2차 영화법 개정을 계기로 구체적 진흥의 방향을 명시되는데 이때 스크린 쿼터제의 시행이 밝혀진다.
외화로는 끌로드 를르슈 감독의 프랑스 영화 <남과 여>가 개봉되어 영상시같은 유려한 화면과 감미로운 주제음악이 관객들을 홀렸다. 유사한 느낌의 <연인의 창문>도 개봉되었다. 이들영화들이 한국영화에 끼친 영향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병폐인 대사로 스토리를 전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영상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려는 연출이 이 해에 시작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당시 나온 영화가 이만희 감독의 <만추>, 정진우 감독의 <초우> 등이다.
또한 크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황야의 무법자>가 흥행에 성공하며 유사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가 범람한다. 이들 영화는 일본의 찬바라영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를 서부극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찬바라영화나 마카로니 웨스턴 역시 홍콩무협영화의 원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전통 서부극에 염증을 느낀 관객들이 몰려들며 밥 로버트슨 즉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을 감독의 왕으로 추켜 세워졌다. 그러나 그 역시 당시에는 밥 로버트슨 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속>홍야의 무법자>는 셀지오 콜부치라는 이태리 식의 다소 거친 이름의 감독이 소개되었다.
영화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관객이 몰리는 취향과 흥행이 맞아 들어가며 유사 장르가 만들어지며 동반 발전하기 때문이다.
홍콩에서는 호금전 감독, 정패패, 악화 주연의 <대취협>, 장철 감독, 왕우, 나렬 주연의 <3인의 협객(변성삼협)>이 만들어진다. 홍콩 쇼브라더스는 사세가 확장되며 미 주간지 '라이프'에 대서특필된다.
이소룡은 미드 <그린호넷>에 출연했다.
http://cafe.daum.net/musicgoeson/LojA/2829?q=%EB%82%A8%EA%B3%BC%EC%97%AC+%EC%98%81%ED%99%94&re=1
https://blog.naver.com/merenguero/110149582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