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지 서남 모서리에서 다량의 기와편,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북위시대의 도용과 관련을 보이는 도용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5층석탑
정림사지5층석탑(백제), 국보 제9호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의 5층석탑. 국보 제9호. 높이 833㎝.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석탑의 구조는 기단 위에 탑신부가 있고 상륜부는 복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 기단은 단층으로 얕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개의 우주를 별석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2매의 면석을 끼웠는데, 우주는 목조건축의 기둥에서처럼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표현되어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새겨놓아 당시의 수난을 엿볼 수 있다. 2층의 옥신 높이가 현격히 줄어들었지만 3층부터는 체감률이 완만하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면서 끝이 약간 반전되어 있고, 층급받침은 2단으로 얕게 표현되어 있다. 이로 인해 정림사지 탑은 큰 규모의 석조물이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일본에 현존하는 호류 사[法隆寺] 5층탑과도 비교된다. 이 석탑은 목조를 석조로 변형해 만든 것으로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석탑 연구의 매우 귀중한 예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
정림사지의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 보물 제108호. 높이 562㎝. 거불로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또한 머리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인 양식고찰이 어려우며,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3단의 팔각연화대좌이다. 상대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의 간석에는 큼직한 안상이 표현되어 있다. 하대의 윗부분에는 복련이 있고, 아래의 기단석에는 각 면에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남원 만복사지에 전하는 고려 전기의 석불대좌 등과 비교되므로 정림사 중건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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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 / 낙화암 / 고란사 ↓
하동정씨 정려각(河東鄭氏旌閭閣)↓
이 정려각은 조선초 하자며 명신인 정인지(1396-1478) 선생의 5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사천현감으로 있으면 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득일(1565-1592) 과 그의 아들인 택뢰(1587-1623), 손자 천세와 택뢰의 부인 동래 정씨 등 네 분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때 건립하였다. 택뢰의 부인은 남편이 나라에서 광해군의 어머니를 폐모하는데 항소하다 세상을 떠나자 머리를 자르고 3년상을 치른 후 죽었으며, 아들 천세는 11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지내다 열흘이 못되어 죽었다 한다. 원래 부여읍 동남리 마천 뒷편에 세웠으나 1960년 4월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충령사(忠靈祠)
충령사는 부여군 부소산성내에 건립된 사당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으로 희생한 전몰 장교, 사병 및 경찰등 총 895명(장교 7, 사병 869, 경찰 12)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300여평의 부지위해 1956년에 설립되었다. 11.6평의 목조와가 형식의 건물이며 또한 충령사 내에는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25명의 군인을 추모하기위해 1974년 부여읍 해외참전동지회에서 폭 82cm, 높이 347cm의 보국 충령비를 건립하였다.
부여 삼충사(扶餘 三忠祠)
백제의 충신인 성충, 홍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영일루(迎日樓)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군창지
문화재자료 제109호조성시기 고려말에서 조선초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내
이 군창지는 부소산성 동쪽 정상부에 위치한다. 1915년 이곳 지하에서 쌀.보리.콩등이 발견되었다.
불에 탄 곡식들인데 이런것이 발견되므로 해서 이곳이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곳으로 확인 되었다.
건물은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는데 길이 70M 넓이 7M 땅속깊이가 47cm이다.
지금도 이곳에서 불에 탄 곡식들이 나온다고 한다.
반월루(半月樓)
사자루(泗泚樓)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임천군 군사리에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자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자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받는 장소이다.
백화정(百花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속해 있는 낙화암 위에 건립된 정자로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29년 세워진 정자이다. 근처에는 고란사가 있다. 부여군에서 소유 밑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낙화암(落花巖)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하자 백제의 3,000 궁녀가 백마강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백제 멸망 이후 타사암을 미화하여 낙화암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을 임하였는데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하여 타사암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항복한 후, 당에 압송된 후 병으로 죽었다. 3,000 궁녀도 부여성이 함락된 후 당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치던 아녀자들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위면에 '落花岩'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고란사(皐蘭寺/高蘭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란사는 그 절 이름의 유래가 사찰 후면 암벽에서 자라고 있는 고란초로부터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고란초는 양치류에 속하는 은화식물(隱花植物)로서 포자로 번식되는 이끼 종류의 일종이라 하며 제주도에서는 불로초로 불리고 있다 한다.현재의 사원은 은산 숭각사(崇角寺)에서 옮겨 온 것으로 중수 3창하였으며, 1959년 고쳐 지을 때 대들보 밑에서 고란사 상량문이 나왔는데, 이에 의하면 정조 21년 정사(1797)에도 고쳐지은 적이 한번 있었던 건물이다.
또한 그 이상 올라가는 연대의 상량문도 있었다 하나 종이가 삭아서 판독할 수 없었다 한다. 현재는 이 대웅전 좌측에는 요사채가 있고 우측으로는 범종각이 위치하고 있다.
부여 부소산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에는 갓난아기가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옛적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슬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늘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한 번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日山:금성산)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 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 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가 없고 웬 간난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 있어 깜짝 놀랐다.
할머닌 "아차!" 했다. 도사가 한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