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인을 보내심
누가복음 10장 1-7절『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
일꾼이 적다는 것은 임마누엘의 믿음이 된 자가 적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믿음이 된 자가 바로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인 것이다. 추수는 바로 부활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더 많은 참된 성도가 이 땅에 나타나서 추수를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양이 이리 가운데 가면 그 결과는 죽음이다. 제자들이 양의 모습으로 이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다. 이리는 예수를 배척한다기 보다, 교회 안에서 현재적 부활을 외치는 성도를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신도들이 바로 이리들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부활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권능의 말씀을 가지고 이리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는 제자들이 이리가운데 전도를 할 때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혜롭게 되라고 말씀하셨다. 현재적 십자가의 복음과 현재적 부활은 권능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당시의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그 집을 위하여 축복을 했다. 평안은 헬라어로 에이레네(하나님과 화평)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면 샬롬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온갖 재앙이 다 일어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샬롬 곧 평안은 이들에게 복음의 소식이다. 그런데 이 평안을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전하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평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관계가 깨어졌기에 하나님과 평안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기 백성사이에 평안을 주시는 화목제물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 평안을 미리 전하는 것이다. 이 평안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집에 평안이 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합당한 대가로 먹을 정도의 것 외에는 돈을 챙기려고 하지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11절에서는 아무나 찾아가지 말고 합당한 자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진주와 같은 말씀을 구걸하듯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합당한 자는 복음을 전했을 때, 씨뿌리는 비유처럼 마음의 밭을 갈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마음밭이 굳어진 자는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된다.
누가복음 10장 8-11절『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그런데 이 평안을 들고 오는 자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로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성에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했다.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거나 옷자락을 털어 버리는 행위는 심판을 보여주는 행위다. 예수님의 거저 받은 평안을 받지 않으면 그것이 심판인데, 이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한다. 이러한 평안의 소식을 거절한 1차 도시가 예루살렘이였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향하여 탄식하신 이유는 평화의 소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거절한 예루살렘이 소돔과 고모라가 된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12-16절『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고라신과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도시들이며 갈릴리 바다 북쪽에 위치한다. 특히 벳새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안드레와 베드로, 빌립이 살던 곳이다. 이 도시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은 것이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로서 두로는 예수님께서 방문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이 두 도시는 한때 교역과 어업으로 매우 번성하였으나 유대인 입장에서는 아스다롯 신을 섬겼던 이방 지역에 불과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그같은 기적을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회개를 하였을 것이고, 천국에 대하여 알았을 것인데 두 도시들이 회개치 않음으로 책망하신 것이다. 또한 소돔은 성적 문란과 도덕적 타락이 극심하여 하나님께 유황불로 심판을 받았던 사해 부근에 있던 도시이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면서 본가처럼 주로 머무른 곳이다. 그 가버나움이 자신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높이는 교만함으로 받아들이셨다. 만일 소돔 땅에 그러한 일을 하였으면 그 땅의 백성이 회개하고 멸망을 면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을 먼저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권능을 행하였는데, 그들이 회개치 않음을 한탄하시고 나무라신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17-20절『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병고치는 능력,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주셔서 두사람 두사람씩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70명을 보냈다. 자기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능력이 나타나고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쫒겨나고 희한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돌아와서 그 성과를 놓고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다고 서로 자랑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면서『그거 별로 기뻐할거 아니라 참으로 기뻐할 것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 외에는 그리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칠십인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모두 다 기쁨에 넘쳐 있었다. 그것은 "주의 이름" 앞에서 귀신들도 꼼짝 못하고 "항복"하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만 보였던 귀신들이 자기네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만 하면 당장 도망쳐 버리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그들이 그처럼 신이 났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쁜 보고를 들으셨을 때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나도 보았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칠십인들의 전도활동에 의하여 사탄이 곳곳에서 패배당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보고 계셨다는 의미다. 이 말의 의미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었던 죄인들을 구해서 자유를 준다는 것이다.
칠십인의 전도활동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시골 동네들을 돌아다니며 몇 마디 말을 전하고 몇 사람 병 고쳐 주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 그들의 전도는 사탄을 곳곳에서 격퇴시키는 엄청난 승리였다고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해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번개가 땅에 떨어지는』것처럼 사단이 급속도로 추락하게 되는, 실로 압도적이고도 명백한 승리였던 것을 말해주신다.
그 제자들의 기쁨에 그렇게 공감해 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도록 상기시켜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여기『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말은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얻게 된다.』는 말과 비유적으로 이어진다. 즉 귀신을 쫓아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원수의 힘을 압도할 권세를 주는 것이다. 그런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결코 제자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던 것이다.
사탄의 지배에서 죄인들을 이끌어내는 힘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이것이 열매이고, 성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현재적 부활을 이룬 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