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선천군 남면 삼성동에서 다소 여유 있는 집안의 3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수원 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농사개량에 힘쓰던 아버지의 권유로 삼봉공립보통학교, 영성학교,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배재고보에 입학했다. 영성학교 시절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배재고보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김진호 교목의 권유로 무악재 너머 홍제동의 기와집 마루(현 홍제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3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고, 여름방학 중 속초에서 울산까지 걸으며 한달 반 동안 동해안 전도여행을 하기도 했다.
한편 배재고보 기독학생회장을 맡은 그는 순종 임금의 인산일 며칠 뒤인 1926년 6월 15일 정오에 종로에서 서울지역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 준비하던 중, 밀고에 의해 사전 발각돼 도피생활을 하게 됐다. 배재고보 김성호 선생의 반강제적 권유로 자수를 한 그는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혀 이질로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석방되었다. 무기정학을 받아 고향에 내려갔던 그는 몇몇 교사의 노력으로 다시 복학, 1927년 배재고보를 졸업했다. 이후 세브란스의전에 기적적으로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해주구세병원 의사로 일하면서 홀 박사(Sherwood Hall, M.D.)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후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3년간 근무하였으며, 1935년 황해도 옹진 용호도에 공의로 발령을 받았다. 이름도 생소한 곳에 가자니 마음이 착잡했는데 막상 가보니 주민들의 텃세 또한 심했다. 하지만 차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고 헌신적인 의료봉사와 더불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손수 교회를 짓자, 그의 본심을 알게 된 주민들은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신의주에서 잠시 일하다가, 1937년 해주에서 장인의 도움으로 첫 개인병원 "안이비인후과 전문 평화의원"을 열었는데 하루 2백 명이 넘는 환자가 찾아올 정도로 이름난 병원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만 목사가 찾아와 구세병원장이 쫓겨나 문을 닫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명령이니 가서 맡으라 했다. 고민하던 그는 부친과 장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병원을 판 후 1940년 홀 박사의 뒤를 이어 해주구세병원 의사로 부임했으나 6개월 후 일제에 의해 병원문을 닫았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그는 이후 이강산 목사와 장인의 도움으로 다시 개인병원을 열게 되었다.
해방 후 해주 건국준비위원회장 겸 해주시장이 되어 1개월 가량 일하던 중, 그의 지시를 받은 부하가 공산당원 6명을 죽인 일로 인해 가까스로 공산당을 피해 서울로 내려왔다. 이후 세브란스병원의 야간감독을 하던 그는, 1946년 정월부터 인천도립병원장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마산국립결핵요양소로 발령받았다. 당시 이곳은 직원들 간에 크게 다툼이 일고 있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인천에서처럼 직원 기도회를 시작했고 솔선수범하여 환자들을 돌보는 등 헌신적인 노력으로 전 직원의 마음을 모았다.
1948년 10월 정부 수립 후 요양소를 나온 그는, 1949년 4월 세브란스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일하는 한편,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 실 재발행 사업을 추진, 발행했으나 시기가 늦고 관심이 적어 거의 버려지고 말았다.
이듬해 6.25가 터진 지 사흘 후, 동생이 찾아와 피난을 강권했지만 환자를 두고 떠날 순 없다고 고집하던 그는, 문득 인민군이 내려오면 환자들을 죽일 거라고 예측하여 밤새 환자들을 내보내기도 했다. 1ㆍ4후퇴 이후 거제도와 청도 등지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던 그는 청도병원에서 죽어 가는 송장을 발견하고 한달 정도 치료하여 살려준 일이 있었는데, 10년 후쯤 강원도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갔다가 그를 다시 만나기도 하였다.
1952년 기독의사회를 조직하고 실을 발행하였으나 전쟁중에 관심이 적어 또다시 실패했다가, 이듬해 결핵협회를 조직하고 총무가 되어 실을 발행한 것이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실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전쟁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56년 인디아나감리교병원 레지던트를 수료한 후 귀국하였고, 1957년 국제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원주에 정착하여 이듬해 원주연합기독병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 학성동에 진료실과 자택을 겸한 문이비인후과를 개원한 뒤 2001년 4월 의사가운을 벗기까지, 원주에서만 43년을 진료와 의료봉사에 헌신했다. "나는 천리마에 붙은 쉬파리다. 파리가 말꼬리에 붙어 천리를 간 것처럼 원주가 크게 발전하면서 나는 저절로 큰 사람으로 인정받게 됐다"고 말했던 그의 원주사랑은 남달랐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병"의원이 폐업하는 사태를 겪을 때도, "환자를 떠난 의사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니다"라며 매일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진료를 했다.
한때 4대(1958)와 6대(1963)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 후 정치의 꿈을 접었으나, 1985년 연세대 100주년 기념식에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며 가까워진 인연으로 1992년 통일국민당의 전국구 1번 후보로 지명,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86세 최고령 국회의원으로서 공직자윤리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의원 시절 내내 새벽 4시에 일어나 병원과 국회를 오가며 일했다.
한편 1938년 31세에 동대문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된 그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사무국 위원장(1945)ㆍ유지재단 이사(1952) 등을 역임하였고, 원주YMCA 초대 회장(1972)"대한의학협회 총회회장(1976)ㆍ인천기독병원 이사장(1979)ㆍ여주 여광육아원 이사장(1996)ㆍ원주 학림원 이사장(1996)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등의 저서를 남겼고,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 건국포장, 대한결핵협회 대상, 세계평화복지인물 대상, 적십자사 광무장 등을 수상했으며, 2000년에는 인간상록수에 추대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의사로 만들어 준 이후 눈감는 순간까지 진료를 멈추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손놀림이 둔해져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고 눈물을 글썽이던 그는, 2001년 3월 31일 폐업예배를 드리고 70년 의료인생을 접었으며, 2002년 3월 13일 노환으로 소천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고 이희주 여사와의 사이에 희원과 인숙(전 이대 교수) 씨 등 1남 1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