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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그곳은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향연을 펼치는 공간이다. 산이 도시를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그 사이를 네카어강이 정겹게 흐르고 있다. 이 강의 양쪽으로는 낭만적인 풍경이 연출되는데, 이 두 세계는 고풍스러운 다리에 의해 연결됨으로써 분리되면서 결합하고 있다. 또한 폐허가 된 고성이 하이델베르크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폐허는 퇴락이 아니라 인간의 창작물이 온전히 자연의 산물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미학적 매력이 있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이 ‘하이델베르크’라는 송가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을까? “오래전부터 난 너(하이델베르크)를 사랑하고 있노라/ 기꺼이 그대를 어머니라 부르며 끊임없이 노래를 바치고 싶노라/ 그대, 내가 아는 한/ 조국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여”
그러나 하이델베르크는 외면적으로만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다. 그에 더해 정신이라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자연, 역사, 문화, 정신이 앙상블을 이루는 도시이다. 이 하이델베르크의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 막스 베버(1864~1920)다. 당시 ‘세계촌락’이라 불리며 독일, 아니 전세계의 지적 중심지로 군림하던 하이델베르크의 배후에는 베버라는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정신적 지도자가 버티고 있었다.
베버는 1897년에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1386년에 개교한 독일 최초의 대학인데 베버가 부임할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각 분야에 수많은 거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버는 이미 1898년 초부터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인해 제대로 강의를 할 수 없게 됐으며, 결국 1903년 10월에 교수직에서 물러나 대학에서 아무런 발언권이나 결정권도 없고 학생을 지도할 수도 없는 명예교수가 되었다. 이처럼 갓 30세의 나이에 정교수가 되었지만 곧바로 날개가 꺾이고 만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베버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하이델베르크에 살면서 연구에 몰두했으며, 그 결과 기존의 다양한 지적 유산을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종합함으로써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먼저 베버의 묘지를 찾기로 했다. 그는 도시 남쪽에 자리한 ‘산상 공동묘지’에 부인 마리아네 베버(1870~1954)와 합장돼 있다.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서 트램으로 다섯 정거장 가니까 나왔다. 이 공동묘지는 1848년에 개장한 유서 깊은 공간이며 총면적이 18헥타르에 달하고 그 안에 난 길을 모두 합치면 약 30㎞나 된다고 한다. 흔히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묘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공동묘지라고 하기보다는 온갖 수목이 우거지고 다양한 양식과 형태의 묘지와 기념물이 어우러진 거대한 산상 공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동묘지는 그 아름다움은 물론 유명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1871~1925)가 그곳에 잠들어 있다.
베버의 묘석에는 “그만큼 큰 그릇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베버가 인류의 정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압축적이고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큰 그릇’ 막스 베버의 궁극적인 인식관심은 근대 서구의 역사적 형성조건과 발전과정 및 그 구조적 특징 그리고 병리적 현상에 있었다. 그리고 근대 서구의 독특성을 밝혀내기 위해 그 문화권을 다양한 문화권과 비교했다. 이러한 비교연구는 ‘합리화’라는 개념적·이론적 축에 입각해 추진되었으며, 또한 국가, 관료제, 봉건주의, 시민사회, 법, 자본주의, 시장, 도시, 종교, 예술, 과학, 에로스 등 실로 다양한 인간 삶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연유로 베버는 서구중심주의자로 낙인찍히곤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소치이다. 왜냐하면 베버는 근대 서구 문화권이 여타 문화권보다 우월하다는 관점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베버에 따르면 비단 서구 문화권에만 합리화 과정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권은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성취한다. 그는 인류역사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합리주의를 서구적 합리주의를 중심으로 비교함으로써 후자의 역사적·구조적 특수성을 좀더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베버의 거대한 지적 세계는 합리주의의 유형학으로 수렴했다.
베버의 묘지와 다른 여러 유명인사들의 묘지를 둘러보고 난 다음 버스를 타고 하이델베르크의 교통 중심지인 ‘비스마르크 광장’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도보로 시내 구경을 하면서 베버가 살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이것저것 사진을 찍느라고 자꾸 시간이 지연되었다. 이렇듯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는 가까운 듯했지만 멀었다. 하이델베르크 같이 아름다운 도시에서는 카메라를 조심해야 한다. 날치기당할 염려 때문이 아니라 마구 셔터를 눌러대다가는 배터리가 다 닳아 없어져서 정작 중요한 것을 못 찍을 수가 있기 때문에!
1897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한 베버는 시내에 살다가 1906년 네카어 강변의 저택으로 이사했다가 1910년에 바로 옆에 있는 웅장한 저택으로 이사했다. 베버 부부가 2층에 살았고 저명한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1865~1923) 부부가 3층에 살았다. 이 저택은 베버의 외할아버지가 1840년대에 지은 것으로서 그의 이름을 따서 ‘팔렌슈타인 빌라’로 불렸다. 네카어 강변의 풍만한 자연에 둘러싸인 그 빌라는 매우 아름다웠다. 현재는 ‘막스 베버 하우스’로 이름이 바뀌어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국제 학생교류 센터와 어학코스로 사용되고 있다. 그곳에서는 네카어강과 그 건너편의 시가지와 고성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베버는 비록 대학에서 물러났지만 대학 저편에 위치하는 이 아름다운 저택에서 연구하고 저술하고 가르치면서 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막스 베버 하우스의 밖을 둘러보고 난 다음 그곳에 근무하는 여직원에게 안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오후 한시에 ‘하우스마이스터’(주택관리인)가 오니까 그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순간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합리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거절하는 독일인들 특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독일인들 말마따나 물어보는 데 돈 드는 것이 아니니까, 일단 하이델베르크 고성을 구경한 다음 점심을 먹고 다시 와서 하우스마이스터를 찾았다. 아, 그랬더니 너무너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고 이것저것 설명도 해주고 자료도 챙겨주는 것이 아닌가? 그는 스페인계 독일인이었던 것이다. 그날 그 사람은 한국 친구 한 사람을 얻었고 나는 스페인 친구 한 사람을 얻었다. 막스 베버가 맺어준 이 우정은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내가 막스 베버 하우스의 내부를 꼭 보려고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 저택은 베버가 살았을 뿐만 아니라 친교의 장소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베버 당시의 하이델베르크에는 지식인들의 친교가 매우 활발했는데, 그 중심에는 ‘베버 서클’과 ‘게오르게 서클’이 있었다. 베버 서클은 자연발생적인 지식인들의 친교였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베버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베버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만 방문객을 받게 되었다.
막스 베버 하우스의 내부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막스 베버와 마리아네 베버의 침실 및 서재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 살롱이 하나 있었다. 막스 베버와 마리아네 베버가 쓰던 공간들에는 살롱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씩 나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베버의 손때가 묻은 유품을 볼 수는 없었다. 바로 이 살롱에서 친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친교의 장소라고 보기에는 좁아 보였다. 그래서 그 주택관리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옛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니까 베버 당시에는 집 뒤로 정원이 나 있었는데,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정원이라기보다 차라리 작은 동산이었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친교를 나누었던 것이다.
베버 서클은 민주적이고 자유로웠다. 아주 다양한 국적과 연령의 사람들이 베버 서클을 찾았으며 방문객들의 활동분야도 학문(과학), 정치, 예술, 문학 등 아주 다채로웠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리고 여성들도 중요한 멤버였다. 베버 서클에서는 모임마다 주제가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그림도 감상하고, 음악도 연주하며 연극도 감상했다. 요컨대 베버 서클은 온갖 종류의 인간이 승선한 ‘작은 노아의 방주’였다. 이 방주에는 그 ‘사공’인 베버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승선하는 것도 환영했다. 그리하여 심미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도 베버 서클에서 조우하고 소통했다. 이 가운데 특히 언급할 만한 인물은 슈테판 게오르게(1868~1933)다. 게오르게는 베버와 대척점에 있었다. 베버가 합리주의적 근대주의자였다면, 게오르게는 심미주의적 반근대주의자였다. 그럼에도 게오르게는 베버 서클에 참여했다.
이러한 게오르게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게오르게 서클’이라고 한다. 게오르게 서클은 베버 서클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것은 선별된 소수의 시인과 작가 및 지식인들로 구성된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그 성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배척했다. 이 서클의 구성원들은 일상적 삶을 벗어난 아름다운 삶, 즉 심미적인 삶을 추구했다. 이처럼 네카어 강변의 작은 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다채로운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다채로운 삶의 양식이 만개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신의 공화국이었으며 정신의 소우주였다.
베버를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하이델베르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철학자의 길’이다. 이 길은 베버를 비롯해 괴테(1749~1832), 헤겔(1770~1831), 카를 야스퍼스(1883~1969),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 등 수많은 문인과 철학자 또는 사상가가 산책하며 사색에 잠기거나 지인들과 토론을 하며 정신적 교류를 나누었던 길이다. 철학자의 길은 막스 베버 하우스 바로 뒤에 있다. 해발 200m쯤에 위치하는 이 길에 오르니 하이델베르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자연과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신이 앙상블을 이루는 이 아름다운 도시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길이가 약 2㎞에 달하는 철학자의 길을 천천히 걸으면 누구나 시인이 되거나, 철학자가 되거나, 화가가 되거나, 사진작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의 길을 끝까지 걷고 난 다음 네카어강의 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길에 강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찍는데 기어이 카메라가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덧 붙이는 영상]
아래 독일 10년 차 가이드가 들려주는 유튜브 영상은 위 글에서 볼 수 없는 내용과 영상을 보여준다. 특히 다리건너 '철학자의 길 ' 모습과 '철학자의 길'에서 보는 네카어 강 모습, 강건너 하이델베르크 성을 포함한 풍경은 무척 볼 만한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대한 소개와 구내 식당에 대한 내용도 좋다.
독일 10년 차 가이드가 들려주는 "하이델베르크 여행 이것 만큼은 꼭!" - YouTube
이병호ㅣ남북교육연구소장·교육학 박사
한국통일교육학회 부회장, 겨레하나 파주지회 고문.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 및 공영, 민주주의와 노동의 가치를 위한 연구· 집필· 활동에 힘쓰고 있으며, 논문 "학교 통일교육과정 개선방안 탐색", "통일 교과목 개설의 필요성 - 범교과학습주제로서 한계"와 공저 "학교혁신의 지름길 교장제도 혁명" , "교육과정학 용어 대사전" 등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 및 공영을 바라는 분이시라면, 누구라도 본 연구소 Daum 카페 가입을 적극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