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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서양사 1
제 1장 인류의 출현과 최초의 문명
1. 인류의 조상은 누구인가
인류에 조상에 대한 연구는 1859년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책의 내용은, ‘모든 생물은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었다. 또한 1871년에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는 인류의 조상이 영장류일 확률이 높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당시 크리스트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던 유럽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인간의 출현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인류의 조상으로 보이는 원시 인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1. 초기의 원시 인류들
약 4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출현했다고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침팬지와 오랑우탄과 닮아 유인원의 후손으로 볼 수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다른 동물들과 2족 보행을 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학자들은 이때부터 문화와 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962년, 아프리카에서 2족 보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도구를 만들어 쓴 유인원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약 230만 년 전에 살았다고 밝혀졌으며, 인간의 조상으로 분류한다는 뜻에서 호모 하빌리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호모 하빌리스는 현 인류와 가장 관련 깊고 가장 오래전에 살았던 원시 인류로 여겨지고 있다.
이 외에도 현 인류의 조상으로 볼 수 없지만 타 동물과 구별된 인간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원시 인류들이 있었다.
약 180만 년 전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는 1890년대부터 지구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은 더 발달된 도구를 사용했으며,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약 13만 년 전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1856년 독일 네안데르탈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의 뇌는 현 인류의 뇌보다 더 컸고 죽은 자를 땅에 묻는 풍습이 있었을 정도로 문화가 발달했었다.
1868년, 프랑스 크로마뇽이라는 동굴에서 4만 5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진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 유골들은 현 인류의 것과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크로마뇽인들을 현 인류와 같은 종으로 지정하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학자들은 이들이 약 12만 5000년 전부터 지구에서 살기 시작했으며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진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인류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1-2. 선사 시대
인류의 역사에서 문자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시대를 선사 시대라고 한다.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쐐기 문자가 나온 것은 기원전 5000년 무렵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선사 시대였다. 이 선사 시대는 인류가 어떤 도구를 썼느냐에 따라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눠지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약 1만 년 전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구석기 시대
구석기인들은 돌덩이로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것들을 뗀석기라고 한다. 구석기인들은 뗀석기로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 먹었으며, 주로 동굴에서 지냈고 그곳에 벽화를 그려 넣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
오랫동안 뗀석기를 사용한 인류는 점차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 시점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인들은 동굴에서 나와 물가에서 살기 시작했으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또한 토기를 구워 식량을 보관하였으며 한 곳에 머물러 촌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인구가 많아졌고, 이들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등장했으며, 직업이 정해지는 사회 분화 현상이 일어났다. 이렇듯 인류는 공동체 안에서 직업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면서 문명의 길로 들어서는데, 신석기 시대가 끝날 무렵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에서 고대 문명이 생긴다.
2. 두 강 사이의 땅, 메소포타미아
4대 문명 중 한 곳인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부터 인류의 조상들이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은 오래 전부터 그저 허상이라고 믿어져 왔지만,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됨에 따라 역사적 사실로 밝혀지게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은 번영을 누리게 된 바빌로니아 인들이 신에게 까지 닿기 위해 거대한 탑을 쌓기 시작했고, 신은 이들의 언어를 섞어 놓아 그들을 흩어지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전설로만 믿어져 왔던 바벨탑은 1899년 독일의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에 의해 발굴된다. 콜데바이는 바빌론이 있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기초만 남아 있는 성과 탑을 발견한다. 비록 무너져 있었지만 그 크기는 거대했다. 성의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으며 두께가 7미터에 달할 정도로 두꺼웠다. 이 탑은 기원전 1700년 무렵 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함부라비 왕 전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탑은 바벨탑이라고 추측되었다. 바벨탑과 같은 탑을 마치 산봉우리 같다고 해서 지구라트라고 불리는데, 지구라트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건설되었으며, 또한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의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자리 잡았던 수메르 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일찍 문화를 발달시켰던 나라였다. 수메르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도시를 건설했고, 3000년경부터 쐐기 문자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후 바빌로니아에게 점령당하면서 앞선 문화를 전해주었다.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왕은 수메르를 정복하고 바빌로니아를 세운다. 바빌로니아는 백내장 수술을 할 정도로 의술이 발달했으며, 태음력이라는 달력을 사용했다.
이 바빌로니아를 누르고 제국이라고 불렸던 나라, 아시리아가 있었다. 아시리아는 약 기원전 2000년 전부터 번성했으며, 현저 시리아 지역에 위치해 있다. 근대에 들어서 아시리아의 궁전이 발견되었으며, 이 궁전은 약 3만 권의 점토판으로 가득 차있던 도서관을 포함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3. 피라미드의 왕국, 이집트
1798년 5월 19일, 프랑스의 장교 나폴레옹은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 원정을 떠난다. 이는 1년 동안 계속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함께 온 175명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유물과 유적을 수집하고, 모두 유럽으로 가져갔고, 이로 인해 유럽에 이집트가 알려진다.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유물인 로제타스톤도 이때 옮겨졌는데, 여러 상형문자가 적혀있던 이 돌을 프랑스 학자 샹폴리옹이 해독해내면서 이집트 문명은 알려져 나갔다.
이집트는 건조한 사막 지역으로 척박한 땅이지만 세계 4대 문명에 들 정도로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나일 강 덕분인데, 나일 강은 적도 근처에서 시작해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아주 긴 강이다. 이 강은 해마다 여름이면 범람하여 땅을 뒤엎었고, 이는 농사가 잘되는 토지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이에 따라 문명이 발달한 것이다.
-거대한 왕의 무덤, 피라미드
이집트에는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있는데, 피라미드는 모두 어마어마한 규모였는데, 고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했으며 거대했다. 나일 강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파라오의 통치를 받게 되는데, 피라미드는 바로 이들의 무덤이자 사원이었다. 파라오 쿠푸는 일꾼들을 불러 20년 동안 피라미드를 짓게 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신앙 때문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몸은 죽어도 영혼은 남아 있다고 생각했고, 그중 파라오의 혼은 신으로 부활해 나일 강을 지배해서 파라오가 죽어서 풍요로운 수확을 해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죽은 파라오는 피라미드와 재물, 그리고 영혼이 다시 깃들 몸이 있어야 신에게 허락을 받아 부활할 수 있었는데, 때문에 파라오는 피라미드를 지었고, 파라오의 죽은 몸은 썩지 않는 미라가 되었다. 그러나 피라미드를 짓느라 국고는 탕진되어갔고, 가난해진 백성들은 피라미드에서 보물을 훔쳐 내기 시작했다. 파라오들은 이를 막기 위해 보물과 미라를 가장 안쪽에 숨겨두었고, 피라미드를 포기하고 돌산 절벽에 무덤을 만들기도 했지만 도둑들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파라오의 신하들은 도둑을 피해 미라를 수시로 옮기기도 했다.
-문명이 발전한 나라
피라미드는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이집트 왕국이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이집트의 건축 기술이 발달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측량과 기하학과 산술이 발달했고, 자세한 설계도가 만들어졌다. 또한 톱과 도끼 등 다양한 도구를 제작해 사용하였고, 직업이 분화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1년=365일을 처음 계산해 냈으며 나일 강의 범람 주기를 계산하기 위해 천문학 또한 발달했다.
죽음에 대한 신앙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많은 신들을 섬겼는데, 이런 신들은 각각 동물이나 식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신이 황소의 신 ‘아피스’다. 이집트 성직자들은 황소를 신처럼 받들었고 황소가 죽으면 미라로 만들어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매장해 주었다. 무덤 또한 왕과 다름없이 웅장하게 만들어졌다.
제 2장 고대 지중해 세계
전설이 현실로, 에게 문명
고대 그리스 인들에게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일리아드>와 같은 신화가 있었으며, 이는 후대까지 전해져왔지만 사람들은 사실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인 트로이 유적이 발굴되면서 이는 역사가 되었다. 작품에서 소개되었던 트로이 전쟁은 실제로 존재했던 전쟁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에게 해 지역에 문명이 아주 발달한 나라들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에게 해 주변의 고대 문명을 에게 문명이라고 한다.
-트로이 전쟁
트로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처음 소개되었다.
에게 해 동쪽 소아시아 지역에 트로이라는 국가가 있었고,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에게는 파리스라는 왕자가 있었다.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해 트로이로 데려왔고, 이 사실을 안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그 외 그리스 국가들과 연합하여 트로이를 공격한다. 10년 째 전쟁이 계속되던 도중, 그리스 군의 장수 오디세우스는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겨두는 작전을 세운다. 그러고는 목마를 트로이 성 앞에 세워두고, 그리스 군들은 후퇴하는 척 하며 배를 타고 떠난다. 트로이 병사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목마를 성 안으로 들였고, 그날 밤 목마 안의 병사들은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고, 되돌아온 그리스 군에 의해 트로이는 멸망한다.
근세까지 단지 이야기로만 취급되었던 트로이는 1870년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에 의해 역사로 밝혀진다. 트로이의 발굴은 기원전 3000년경에 그리스 반도와 에게 해 주변에 매우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으며 트로이 발굴을 시작으로 에게 문명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트로이의 발굴은 큰 의미가 있다.
-미케네 문명
미케네는 트로이 전쟁에서 메넬라오스를 도와 트로이를 공격한 아가멤논의 나라다. 미케네 는 기원전 2000년경 그리스 반도와 에게 해 주변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를 미케네 문명이라고 부른다. 미케네 문명은 아카이아인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기원전 13세기 중엽 미케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국가들이 트로이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을 정복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미케네는 기원전 12세기에 도리아인들에게 정복당하며 막을 내린다.
-미노스 문명
그리스 앞바다에 크레타 섬에는 크노소스 궁전과 99개의 도시가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매우 아름다웠고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또한 미케네 문명과는 차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크노소스 궁전의 왕이었던 미노스의 이름을 따 미노스 문명이라고 부른다. 미노스 문명은 미케네 문명보다 앞서 기원전 3000년경~1450년경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미노스 문명은 1900년에 발굴되었다. 미노스 인들은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색을 입힌 그림인 프레스코 화를 즐겨 그렸으며, 화려함을 좋아했기 때문에 보석과 도자기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특산물이었던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외국으로 수출해 많은 이윤을 얻었으며 무역이 활발했다.
이러한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1450년경 갑자기 흔적이 사라지는데, 학자들 사이에서 대지진에 의한 파괴 혹은 미케네 인들에 의한 정복으로 의견이 나뉜다.
2. 민주주의의 뿌리, 고대 그리스
기원전 8세기 무렵, 왕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고대 왕국들과는 달리, 그리스 인들은 왕이 없으며 국가의 업무를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형성해 나갔다. 비록 현대와 같은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제도와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서양 문명으로 이어졌고, 크게 보면 오늘날 우리의 삶에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미케네 왕국이 도리아 인들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에게 해와 그리스 지역은 쇠퇴해 갔으며, 지중해를 통한 교역도 사라졌다. 이 시기를 학자들은 그리스의 암흑기라고 부르지만, 이는 오히려 그리스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절대왕권이 없어짐으로 인해 모든 시민이 평등한 민주주의 제도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의 암흑기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지나가고, 그리스 반도 곳곳에서는 ‘폴리스’라고 불리는 도시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산과 섬이 많아 거대한 국가를 형성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지형에 따라 자립적인 소규모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기원전 8~7세기에는 폴리스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면서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연안의 다른 지역을 정복해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지중해를 오가는 무역상들에 의해 상업과 수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들은 각각의 폴리스에서 생활했지만 모두 그리스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헬레네스라고 부르며 기원전 776년부터 올림피아에서 4년에 한 번씩 운동 경기를 열었다. 이러한 동족의식 때문에 당시 엄청난 규모의 대군을 이끌고 온 페르시아의 침입에도 폴리스들은 단결하여 자유를 지켜냈다.
-아테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아테네였는데, 아테네는 승리 이후 페리클레스라는 지도자에 의해 황금기를 맞았다. 아테네인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고라 광장에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이러한 회의 기구를 민회라고 부른다. 아테네 민회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했지만, 10명의 장군이 살림을 맡고 군대를 지휘했다. 이 직책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누구든 선출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이렇게 아테네의 민주 정치는 다소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외국인과 여자, 노예, 20세 미만의 사람들은 민회에 참석할 수 없었으며, 식민지를 건설해 다른 민족을 노예로 부리고, 독재를 막기 위해 도편 추방제를 채택하는 등 오늘날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한 사람에 의해 지배를 받고 그의 말이 곧 법이었던 당시 시대의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으며, 여러 단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더 나아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민주 정치 체제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암흑기로 인해 절대 권력자가 사라지고, 이로 인해 암흑기가 지나간 후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나는 절대 권력자가, 특히 고대에 사라지고 일반 시민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점은 부정적으로 본다. 다른 세력의 침입으로 권력자가 사라졌다면, 더욱 더 강력한 권력자가 생겨서 자국을 보호해야 하는데 주도권이 일반 시민들에게 넘어가서 더 분열되기 쉬운 원인을 제공했다. 이는 그리스가 도시 국가로 분열된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왕권이 사라져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의 민주주의는 현대의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당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독재’에 맞서기 위해 생긴 차선책이었다. 독재란 뛰어난 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라를 점령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 중 뛰어난 사람을 추방해서 독재를 방지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방법은 결코 옳다고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권력자가 사라진 그리스의 암흑기는 그 이름대로 암흑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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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민님의 색다른 시각으로 역사적 암흑기에 대해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