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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頓) 北漸) 第 七
(7. 남쪽돈종과 북쪽점종)
돈(頓)이란
중생을 몰록 깨쳐 들게 한다는 뜻이고,
점(漸)이란
학인으로 하여금 점차로 점점 깨달아 들게 한다
하는 뜻이다.
남쪽의
六조대사는평등문을 직시하여 돈법으로 설하시므로
남돈(南頓) 또는 남방돈종(南方頓宗)이라 했고,
북쪽의
신수대사(神秀)는 차별선문으로 교화하셨으므로
북점(北漸)이라고 하게 되었다.
중생의 분상으로 살피면 둘로 나누나
본분상(本分相)으로 보면
구경은 하나로 돌아가 둘 아닌(不二) 것이다.
법이 돈과 점이 없으나 중생의 근기 따라
방편을 다르게 쓰는 것이다>
時에 祖師께서 居曹溪寶林하시고 神秀大師께서
在荊南玉泉寺하시니 于時兩宗이 盛化하여 人皆稱南能北秀라
故로 有南北二宗-頓漸之分하여 而學者들이 莫知宗趣이므로
師謂衆曰하시되 法本日宗이로되 人有南北이고
法卽一種이로서 見有遲疾이니 何名頓漸인가 法無頓漸이건만
人有利鈍이니 故名頓漸이니라.
때에
六조대사께서 조계 보림에 계시고
신수대사께서는 형남 옥천사에 계셨으니
그 때 두 종이 모두 교화가 번성하여
사람들이 모두 "남능 북수"라 일컬었다.
그러므로
남북의 두 宗이 돈과 점으로 갈라져서
배우는 자들이 종문의 근본되는 뜻(宗趣)을
모르므로
조사께서 대중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법은 본래 한 宗이로되
사람이 남북에 있고 법은 곧 한 가지로되
보는 것에 더디고 빠름이 있는 것이니,
어찌하여 돈과 점이라 이름하는가?
법은 돈과 점이 없건만
사람에게 예리하고 무딤이 있으니
그러므로 돈과 점이라 이름하는 것이니라"
강설:
불법은 진리를 말한다.
진리의 실상은 空한 것이거늘
어찌 두가지 相이 있으며 두가지 뜻이 있으랴.
말과 글, 사람 사람, 시공 방향 등은 假設한 명칭이요
덧없는 나툼일 뿐이며
일러줌(방편)과 깨달아 듦이 서로 다를 뿐이다.
법(眞理)은
오직 한가지일 뿐이다.
따라서
남북의 사람도 하나요 돈과 점이란
말의 구경도 하나인 것이다.
다만 사람의 근기에 따라 몰록 깨쳐드는 상근기가 있고
점차 깨쳐드는 하근기가 있어
頓(몰록)과 漸(점차)의 깨달음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다.
然이나 秀之徒衆이 往往譏하되 南宗祖師께서 不識一字인데
有何所長하다 秀曰하시되 他得無師之智하여 深悟上乘하니
吾不如也이며 且吾師五祖께서 親傳衣法하셨으니
豈徒然哉인가 吾恨不能-遠去親近하고 虛受國恩이니
汝等諸人은 無滯於此하고 可往曹溪하여 參決하라시다
乃命門人志誠曰하시되 汝聰明多智하니 可爲吾하여
到曹溪聽法하여 汝若聞法을 盡心記取하여 還爲吾說하였다.
그러나
신수대사의 문도 대중들이 이따금 질책하기를
"남종의 조사께서 한글자도 모르는데
무엇이 대단한게 있겠는가?" 하였다.
신수대사께서 이르시기를
"그분은 스승없이 지혜를 얻어 깊은 상승을 깨달았으니
나는 그와 같지 못하며, 또 우리 스승 五조께서
친히 가사와 법을 전하셨으니
어찌 한갓 헛된 것이겠는가?
내가 능히 멀리 가서 그와 친근하지 못하고
또 헛되이 나라의 은혜만 받고 있음이 한이니라.
너희 모두들 여기에 머물지 말고
조계에 가 참예하여 결택
(의심을 끊고 도의 이치를 깨달아 앎) 하라"
하셨다.
이에 문인 지성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해 조계에 가서 법을 청하여
네가 들은 법문을 마음을 다해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를 위해 말해다오" 하였다.
강설:
대선지식이신 六조대사나 신수대사께서야
분별심이나 아상을 여읜 분들 이시라
편견심을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신수대사께서는 오히려 문도들에게
"六조대사는 스승없이 깨달은 분이며
五조께서 의법을 전수하심이 공연한 것이
아닌 것 이라고 강조하시고,
내가 그 같지 않으니
너희는 그 분을 찾아 가서 참문하고
모든 의문을 깨달아 해결(決擇)하라"
까지 하실 정도로 아만심을 여읜 선지식의
경계이었던 분이셨음을 살펴야 한다.
스승없이 깨쳤다는 말씀의 뜻은
전생에 이미 道를 이루어 오신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소인배들이 파당을 짓고
相으로써 인정 받고자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심의 발로인 것이나, 깨달은 이는 그러한 것이
없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문인 지성스님을 시켜
六조 문하에 들어가 參請하여 자세히 듣고
기억해서 나를 위해 설명해 달라는
신수대사의 말씀도 법을 훔치자는 것이 아니라
下心의 발로며 자기 보임의 방편이였던 것임도
살펴야 하는것이다.
志誠 命하고 至曹溪하여 隨衆參請하며 不言來處하다
時에 祖師告衆曰하시되 今有盜法之人이 潛在此會로다
志誠이 卽出禮拜하고 具盡其事하니 師曰하시되
汝從玉泉來하면 應是細作이로다 對曰不是하니 師曰하시되 何得不是인가
對曰하되 未說卽是이오나 說了不是이니다
師曰하시되 汝師께서 若爲示衆인가 對曰하되 常指誨大衆하시되
住心觀靜하고 長坐不臥라시니다 師曰하시되 住心觀靜은 是病이요
非禪이며 長坐拘身이 於理何益이리오 聽吾偈하라 曰하시되
生來坐不臥하고 死去臥不坐하니
一具臭骨頭가 何爲立功課리오.
지성이 명을 받고 조계에 이르러
대중을 따라 참례하여 법문을 들으면서
온 곳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에 조사께서 대중에게 고해 이르시기를
"지금 법을 도적하는 사람이 있어
이 모임 가운데 숨어 있도다"
지성이
곧 나와서 예배(절)하고 그 일을 모두 말씀드리니,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옥천으로 부터 왔으면
응당 살피(영탐)려 함이로다" 하시니
대답해 이르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대답해 이르기를
"말씀 드리지 않았을 때엔 그러하였사오나
말씀 드리고 나서는 그렇지 않나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너의 스승이 어떻게 대중에게 보이시더냐?"
"항상 대중에게 지시해 가르치시기를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하고 길이 앉아서
눕지 말라 하셨습니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하는 것은
이것이 병이요 선이 아니며,
오래 앉기만하여 몸을 구속함이 이치(깨달음)에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내 게송을 들으라" 하시고
이르시기를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니
한덩이 냄새나는 뼈 덩어리가
어떻게 공과(成果)를 세우리오
강설:
예로 부터 문중에 처음 참여할 때는
조실스님을 찾아 뵙고 예(절)를 드리는 것이 관행이나
그렇게 하지 않고 대중 가운데 섞여 있던 지성스님을
알아 보시고 六조께서
"이 가운데 법을 훔치러 온 자가 있다" 하시자
지성스님이
곧 나와서 절을 하고 나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六조께서 짐짓
"북에서 왔으니 여기(남) 염탐하고자 함이지 않느냐?"
고 하시자,
지성스님이 답하기를
"그렇지 않으니 말씀드리지 않았을 때는
그 말씀이 타당하되
이제 말씀을 드린 후이니 그렇지 않다"고 하였음은
이제 공개적으로 법을 들음에 염탐이란 말씀에
해당되지 않음을 밝힌 것이라
법문을 들음에 분별이 있을수 없어
누구나 들을 수 있음이며 누구에게나 가려서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님을 이르는 것이다.
신수대사께서 교화하심에
"마음의 번뇌 망상을 거두고 고요히 머물러(定)
본성을 관하고 장좌불와하여 나태하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하라" 하신다 하셨다, 했음은
신수대사의 점수교화 방편인 차별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六조께서는
평등문으로 살펴 허물을 지적하셨다.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한다는 것은 병이요
선이 아니며 장좌불와를 하라는 것은
몸(色身)만 구속할 뿐
이치(도)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신 것은
도는 깨달음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몸을 구속함에 있음이 아니요,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한다는 것은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이
둘로 갈라져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니,
선의 목적은 不二를 증오함이며
수단에 있지 않으며,
볼 것과 보는 것이 갈라진 것을 전제하는 것은
차별분상이라,
고요함을 관하는것이 병(허물)이요
禪이 아니라 力說하신 것이다.
다시 게송으로 이르신
"살아서는 앉아 눕지 못하고(몸을 구속하는 것)
죽어서는 누워 앉지 못한다" 하는 것은
수행의 수단에 국집하는 것을 질타하신 말씀이며,
"한 덩이 냄새 나는(덧없는) 뼈덩이(몸뚱이)가
어떻게 수행의 불과를 이루리오" 하신 것은
몸이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처임을 깨닫는데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여기서 좀더 살펴보자.
장좌불와하여 수행하는 그 자체가 허물이 아니며
수행수단으로써 권장할 만한 것임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만 장좌불와는 수단인 방편으로 가는 길이요,
목적은 깨달음에 있으므로 깨닫지 못하면
이것을 애석해 할지언정 오래 앉고 눕지 않았음을
자랑할 것이 절대로 못됨을 알아야 한다.
요즘 세간에서
'몇년을 장좌불와 했다' 하며
오도의 목적은 뒷전으로 하고
수단을 자랑 삼고, 화려한 이력으로써
높이 내세워 자랑 삼아 선전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있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고 있음에 개탄스러울 뿐이다.
깨닫지 못했음을 한탄할 지언정
수단을 자랑 삼거나 국집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본성을 밝혀 일체가 둘 없음을 깨달아
일체종지를 증득함이 대오견성인 것이다.
따라서
일상 일행 화두삼매의 사유를 수단으로하여
의단을 타파하여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며, 장좌불와 또한 그 수단 가운데
좋은 참선방편임을 알고 참선운운 해야 할 것이다.
志誠再拜曰하되 弟子가 在秀大師處하며 學道九年에 不得契悟이나
今聞-和尙一說하니 便契本心이니다 弟子에게 生死事大하니
和尙大慈로 更爲敎示하소서 師曰하시되 吾聞汝師께서
敎示學人-戒定慧法인데 未審汝師의 說戒定慧를
行相如何인지 與吾說看하라.
지성이 듣고 다시 절을 드리고 이르기를
"제자가 신수대사 처소에 있으면서 배운지가
九년에 계합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사오나
이제 화상의 한 말씀을 들으니
문득 본 마음에 들어 맞나이다.
제자에게 나고 죽는 일이 크오(一大事)니
화상께서
대자비로 다시 가르침을 보여 주시옵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들으니
너의 스승께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계, 정, 혜 법을 보여 가르치신다 하는데
알 수 없으니 너의 스승이 말씀하는
계, 정, 혜를 행함이 어떠한 것인지
내게 한번 말해 보아라"
강설:
여기서 지성스님이 六조대사의 법문을 듣고
본심에 들어 맞았다 하는 것은
六조대사의 법문이 계합되어
깨달아 들게 마음이 열렸음을 뜻하며
확철대오의 경계가 아직 아니었으므로
생사대사가 큰일이니 이 생사를 여의는
확철대오를 지시해 달라고 청법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삶에
나고 죽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겠는가?
무생법인을 증득하는
일대사인 생사에 매이지 않게 만 된다면
만사가 보잘것없는 허깨비 놀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六조대사께서 법문의 소재를 들고자
신수대사께서 설하시는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법문을
일러 보라 하신 것이다.
화상(和尙)이라는 것은
덕이높은 스님을 존칭하는 말이다.
때로
"이 화상아!"하고 비하해서 쓰기도 하나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는 것이다.
誠曰하되 秀大師께서 說諸惡不作이 名爲戒이며 諸善奉行이
名爲慧이며 自淨其意함이 名爲定하오니 彼說如此거니와 未審和尙께서는
以何法誨人이니까 師曰하시되 吾若言有法與人하면 卽爲 汝이니
但且隨方解縛을 假名三昧니라 如汝師所說하시는 戒定慧는
實不可思議거니와 吾所見戒定慧는 又別이니라.
지성이 이르기를
"신수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이 이름하여 계이며,
모든 착함을 받들어 행함이 이름하여 혜이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함이 이름하여 정이라 하였사오니,
그분이 말씀하심은
이와 같거니와 알지 못하오니
화상께서는 어떠한 법으로써
사람을 가르치시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만일 법이 있어서 사람에게 준다고 말 한다면
곧 너를 속이는 것이니 다만 형편 따라서 얽힌 것을
풀어 주는 것을 거짓 이름하여 삼매라 하느니라,
너의 스승이 말씀하는 바와 같은
계, 정, 혜는
실로 헤아릴 수 없거니와
내가 보는 계, 정, 혜는 또한 다르니라"
강설:
신수대사께서 교시하시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이 이름하여 계요,
모든 선행을 하는 것이 이름하여 혜요,
스스로 생각을 깨끗이(망념없이 고요하게) 하는 것이
이름하여 정이라"하셨다고 했다
이 말씀이 틀린것은 아니다.
다만 본성을 깨달아 듦에는 차별문은 방편이므로
말 그대로 배움인 學이 되므로
평등본성으로 살핌에는 같지 않음을
六조께서 내가 만일 법이 있어 너에게 준다 하면
너를 속이는 것이니
다만 네가 스스로 얽혀서 묶인 의심을 풀어 줌으로써
스스로 본래 계, 정, 혜의 본성을 계합하게 하는 것이라
깨달은 이에게는 일체가 삼매 아님이 본래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六조대사의 평등문(진여문)과
신수대사의 차별문이 같지 않다 하신 것이다.
志誠曰하되 戒定慧는 只合一種이거늘 如何更別이니까 師曰하시되
汝師戒定慧는 接大乘人이요 吾戒定慧는 接最上乘人이니
悟解不同하여 見有遲疾이니라 汝聽吾說-與彼同否하라
吾所說法은 不離自性이니 離體說法은 名爲相說이라
自性常迷이니 須知一切萬法이 皆從自性起用이 是眞戒定慧法이니라
聽吾偈하라 曰하시되
心地無非自性戒이며 心地無癡自性慧요
心地無亂自性定이며 不增不減自金剛이요
身去身來本三昧니라.
지성이 이르기를
"계, 정, 혜는
다만 합당히 한가지 이옵거늘
어떻게 다시 다를 수 있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 스승의 계정혜는
대승인을 응대(應接: 提接)하는 것이요,
나의 계정혜는 최상승인을 응대하는 것이니
깨달아 앎이 같지 않아서
보는 것이 또한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너는 내가 말하는 것이
그와 같은가 아닌가 들어보라.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을 여의지 않나니,
바탕(體)을 여의고 설하는 법은 상
(俗諦: 事)으로 설하는 것이라
자성이 항상 미혹한 것이 (둘로 갈라 살피게)되니
마땅히 알라.
일체 만법이 모두 자성으로부터 작용을 일으키는
이것이 참된 계, 정, 혜의 진리(眞諦: 理)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으라"
이르시기를
마음 바탕에 그릇됨이 없음이 자성의 계이며
마음 바탕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 혜요
마음 바탕에 어지러움 없음이 자성 정이며
더하고 덜하지 않음이 자성인 금강(體)이요
몸소 가고 몸소 옴이 본래의 삼매니라.
강설:
"계정혜는 마땅히 한 가지이지 둘 일수 없거늘
어떻게 조사께서는 다르다" 하는가를 물은
지성스님의 의문은 당연하다 할 것이니,
중생의 차별 경계의 알음알이로서야
어찌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六조께서
"신수대사의 계, 정, 혜는 차별문으로
대승근기를 위한 방편문이라
곧 글자 그대로 三학(배워 닦음)이요,
六조께서 지시(드러보임)하시는
평등문으로는 學이 아니라 계합이므로
최상승 근기를 맞아 깨달아(계합하여 증오)들게
하는 것이기에 다르다 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구경이 다름은 아닌 것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차별문과
평등문
(門: 깨달음에 드는 문)은
깨달음에 더디고 빠름이 있는 것이어서
근기가 이에 계합할수 있어 합일하여
증오하여야 하는 것이다.
六조대사께서 드러 보이신 법
(일체 실상의 진리)은 평등문으로
본성(일체가 眞空妙有하여 평등한 성품)을
여의지 않는 구경인 것이니,
신수대사의 설하는 법은 차별문(事: 속제)으로써
구경을 설하는 것으로 자칫 迷한 근기가
말에 떨어 지면 상대를 세우게 되어
진여자성을 가리게 된다 하는 것이다.
평등문으로 살피면
필경 일체만법(모든것: 萬有)이
모두 진공묘유한 본성으로부터
작용을 일으켜 나툰 것인 까닭에
참으로 실다운 본성의 계, 정, 혜는이것이니
마음이란 근원 바탕 (心地라 하는
글을 쫓아 마음자리라 하여
자리 자리하는 말은 좀 문제가 있으니
마치 그러한 자리가 따로 있음으로
오인될수 있는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에 삿됨(번뇌, 망집)이 없음이
자성의 계(청정)요,
마음 바탕에 어리석음 없음이
곧 본성반야가 자성 혜이며,
마음 바탕에 어지러움(산란심) 없음이
자성정(고요함)이라.
따라서
불구부정한 일체 진공반야가 자성인
금강체(몸인 바탕)라서 이 반야 작용으로
스스로 밝게 쓰고 나툼이
본래의 삼매라 하신 것이다.
따라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가운데
삼매 아님이 없으니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음이 계요,
번뇌심이 없음이 정이요,
어리석은 생각 없음이 혜인 것으로
이것이 본성의 계정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三學은 지킬 것을 지키고
닦을 것을 닦음을 배움(修行)의 근본으로 하여
계율 지킴을 기초로 하여 정과 혜를 닦아 증득하라"
는 것은 차별법문의 교시요,
곧 일체 공적영지한 본성의 진공묘유(정혜)에
계합하여 증오하게 하는 것은
직지의 평등법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의 방편을 치우쳐 국집할 것이 아니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적절이 드러 보여
구경의 覺을 성취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산승(淸峯)의 보편의 지견이요 勸이니,
이 시대 현상계를 살펴 보면
최상근기는 드물고
하근기들이 더욱 치성한 실정이므로
어쩌면 차별문으로 깨쳐들게 하는 방편이
더 쓰일 법 함을 실감하는 바이다.
誠이 聞偈悔謝하여 乃呈一偈하되
五蘊幻身이여 幻何究竟이리오
廻趣眞如하면 法還不淨하리라
師-然之하시고 復語誠曰하시되 汝師戒定慧는 勸小根智人이요
吾戒定慧는 勸大根智人이니 若悟自性하면 亦不立菩提涅槃이며
亦不立解脫知見하여 無一法可得하여 方能建立萬法이니
若解此意하면 亦名佛身하며 亦名菩提涅槃하며 亦名解脫知見하니라
見性之人은 立亦得不立亦得이며 去來自由로워 無滯無 하여
應用隨作하며 應語隨答하되 普見化身하나 不離自性하여
卽得-自在神通-遊戱三昧를 是名見性이니라.
지성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감사하여
이에 한 게송을 바치기를
五蘊의 허깨비 몸이여
허깨비가 어찌 구경이리요
진여를 돌이켜 향한다면
법이 도리어 깨끗치 못하리라
조사께서 그렇게 여기(인정)시고
다시 지성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스승이 (설하시는)계, 정, 혜는
작은 근기의 지혜를 지닌 이를 이끄시는 것이요,
내가 말하는 계, 정. 혜는 큰 근기의 지혜를 지닌 이를
이끄는 것이니,
만약 자성을 깨달으면
또한 보리도 열반도 세우지 않으며
또한 해탈지견도 세우지 않아서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야 바야흐로
만법을 세우느니,
만약 이 뜻을 알면
또한 불신이라 이름하며
또한 보리며 열반이라 이름하며
또한 해탈지견이라 이름 하니라.
견성한 사람은 또한 세워도 되고
또한 세우지 않아도 되며,
가고 옴이 자유로워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경우에 따라서 작용하며 말에 응하여 대답하며,
널리 화신을 나투나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여
곧 자재한 신통과 벗하여
노니는 삼매를 얻은 것을 견성이라 이름하니라.
강설:
지성스님이 六조대사의 설법을 듣고
본성 계, 정, 혜를 계합하고
스스로 둘 아님을 모르고
잘못 알아 다르다고 말씀 드린 것을
뉘우쳐 바친 게송을 살펴 보면
'색수상행식이 환과 같은 허깨비 몸 이거늘
허깨비 몸이 구경각을 이룸이 아님을 깨달았으며,
본성 진여를 달리 구하고자 하는 것
(계정혜)은 차별상으로 둘로 본 것이라
실상 진리를 장애하게 되는 것임을
이제야 계합하게 되었다' 하는 것이다.
지성스님의 게송마지막 두 구에
"진여를... 깨끗지 못하리라"한 것은
진여를 돌이켜 관한다는 생각이
진여(본성)와 돌이켜 보는 것이
둘로 갈라짐을 전제하기 때문에
허물이 된다는 뜻이니
이것이 곧 평등문의 直示인 것이다.
차별문의 敎示로는
마땅히 회광반조하라고 일러 줌이
마땅함인 것도 살펴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게송을 보신 六조께서
법문에 계합하였음을 인정하시고
신수대사의 법문은
하근기를 제도하시고자 하는 차별문이요,
자신이 설한 법문은 대근기를 제도하고자
하는 평등문임을 설파하시고자,
자성을 깨달은 이라면
일체가 평등(空) 원융하며
일체를 구족 함유한 것임을 증오한 것이므로
한 법도 얻어 가질 것(相)이 없(眞空)으며,
달리 얻고자 할 것도 없으며,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것도 거짓 이름한(假設)것이니
달리 세우지 않되 만법(萬有: 일체 있다고 하는 것들)이
이(자성)에서 나툰 것이며 작용하게 되는 것이니,
이 도리를 깨우친(覺)것을 이름하여
불신(법신)이며
보리(불지견)며
열반이라하며
해탈지견이라 하는 것이라,
깨달은 사람(佛祖)은
임의자재(평등, 차별 법문을)하여 세워도
세우지 않아도 (어긋나지 않아)옳으며
가고 옴에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어
인연의 경계 따라 작용하고
말(물음)에 따라 응하여 답하고
널리 나투나 본성 반야를 여의지않아
일체가 삼매 아님이 없음이라 하신 말씀이다.
깨달은 다음에는
부처님의 행을 실천 실행하는 것이니,
본래 마음(자성)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견성이라 하는 것이다.
志誠이 再啓師曰하되 如何是不立義니까 師曰하시되
自性無非하고 無癡無亂하여 念念般若觀照하며 常離法相하여
自由自在하며 縱橫盡得이니 有何可立이리오 自性自悟하여
頓悟頓修하면 亦無漸次한 所以로 不立一切法이니 諸法寂滅이거늘
有何次第리오 志誠이 禮拜하고 願爲執侍하여 朝夕不懈했다.
지성이 다시 조사께 여쭙기를
"어떤 것이 세우지 않는 뜻이옵니까?"
"자성은
그릇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어서
생각 생각에 반야로 비춰 보며
항상 법상(법이라는 것과
모든 나툰 것)을 여의어서 자유자재하며
가로 세로 모두를 얻나니
무엇을 가히 세울 것이 있으리오?
자성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니
몰록 깨닫게 되면 몰록 닦은(수행) 것이니
또한 점차(계급: 차례)가 없는 까닭으로
일체법을 세우지 않나니
모든 법이 적멸(空)하거늘 어찌 차례가 있으리오?"
지성이 예배(절)하고 모시기를 원하여
조석으로 항상 게을리하지 않았다.
강설:
세우지 않는다는 뜻은
자성인 본성의 성품은 본래 진공묘유하여
어리석고 산란한 번뇌 망상이 없기 때문에
본성인 반야지혜가 그대로 발현하여
일체를 밝게 실상 그대로 보아
모든 것들의 상(만유)에 끄달리거나
집착함을 여읜 것이며,
임의자재하여 모든 것을 구족한 것이며
본래 이름도 없는 실상은
없이 있는 것(진공묘유)이라
달리 방편을 세울 것이 없다 하신 말씀이며,
계정혜가
본래 없으니 해탈이 따로 없고
해탈이라는 소견도 없으며,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일체의 법상이 있음을 삼게 되므로
따라서 3학을 세우게 되는 것이나
본래
항상 고요하되 항상 비춰 보며 항상 작용하는 것이니
이러한 자성을 누가 대신 깨달아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스스로 닦아 몰록 깨닫게 되면
점차(차례: 계급: 순서 등)가 없음을 증오하게 되므로
일체법을 세우는 것은 차별방편문이니
달리 세우지 않아도 옳다 하여 적멸의 공적한 도리를
일깨워 주신 것이다.
따라서
반야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法의 相을 여의었으니
무엇을 세울 것이 있겠는가?
자기의 자성을 단박 깨닫게 되면
닦음도 단박 마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돈오돈수인 것이다.
이러한 진의를 모르고 이즈음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여 異見이 분분하나 글만 쫓아
글의 굴림을 받지 않고
이 뜻을 알아 법을 굴릴 줄 알면
이 말을 쫓아 각기 자기 소견을 세워
옳음을 주장하여 시시비비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누구나 "점차 닦아 오다가 몰록 깨닫는 순간
닦음도 몰록 마치게 되는 것이다"
"돈오돈수,
돈오점수"라는 문구(文句)의 순서를 따라
"몰록 깨닫고 나서 몰록 닦는다"거나
"몰록 깨닫고 나서 점차 닦는다"라 하면,
둘다 모두 보리에 어긋나게 되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니,
"몰록 깨닫게 되면 닦음도 몰록 마침"
"점차 닦아 옴이 몰록 깨닫게 됨"으로
그 뜻을 살펴 알면 무슨 허물을 밝혀
異論을 세워 시비를 할것인가?
문자의 순서(차례)에 따라 眞意를 세운다면
누구나 "漸修頓悟로 점차 닦아옴이
문득 깨달아 마치게 되는것"이다.
역대佛祖가 또한 그러하였으니
석가세존을 보라!
돈법이란 直指人心하여 문득 깨달아 들게 하는
평등법문이요,
점법이란 차별교시로 깨달아 들게 하는
차별문인 것이다.
법이 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근기가 예리하고 둔함이 있는 것이니
돈오법문을 들어도 선근이 우둔한 자는
몰록 깨쳐 닦음을 마칠 수 없음인 것이며,
선근이 예리한자는 차별교시 가운데서도
몰록 깨쳐 들 수 있어 점차 닦아옴을
몰록 마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六조께서 돈오돈수라 하신 말씀의 뜻은
사께서 설하는 법문은 문득 깨달아 들게 하는
평등문(진여문)을 기초하신 것이라
상근기라면 이 말 아래(言下) 몰록 닦음으로
문득 깨달아 드신 것임을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대오하고 더 닦아야 할것이 추호라도 있고,
다시 또 깨달아야 할것이 있다 하면
돈오가 아닌 邪道인 것이다.
지성스님이 절을 했다는것은
확철대오하신 계합의 표행이며
감사의 뜻을 보이 셨음이다.
신수대사로부터 六조대사를 찾은 기연으로
대오견성 함으로써
六조대사를 신심으로 신수봉행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