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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어제 제2권 / 단종대왕(端宗大王)○시(詩) / 영월군의 누각에서 지음〔寧越郡樓作〕
《노릉지(魯陵志)》에 나온다. 《노릉지》에 이르기를, “상왕(上王)이 객사(客舍)인 동헌(東軒)에 머물러 있을 때 매번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랐는데, 밤이면 그곳에 앉아서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으므로 그 소리가 멀리 있는 마을에까지 들렸다. 또한 누각에서 근심스럽고 적막하여 짧은 시구를 읊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우는데 / 月白夜蜀魄啾1)
시름겨워 누각에 기대었네 / 含愁情倚樓頭2)
네 울음소리 슬퍼 나 듣기 괴롭구나 / 爾啼悲我聞苦3)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전하니 / 寄語世上苦勞人4)
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 愼莫登春三月子䂓樓5)
1) 혹은 ‘달은 지려하고 두견새 우는데〔月欲低蜀魄啼〕’라고 되어 있다.
2) 혹은 ‘시름겨워〔含愁情〕’가 ‘슬픈 생각에〔相思憶〕’라고 되어 있다.
3) 혹은 ‘네 울음소리 괴로워 내 마음 슬프구나〔爾聲苦我心哀〕’라고 되어 있다.
4) 혹은 ‘이 세상에 말을 전하니〔寄語世上〕’가 ‘천하에 알리니〔爲報天下〕’라고 되어 있다. ‘로(勞)’ 자는 ‘뇌(惱)’ 자로 되어 있다.
5) ‘자규(子䂓)’ 아래에 혹은 ‘체명월(啼明月)’ 세 글자가 있다.
또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에서 나온 뒤로 /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외딴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 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없고 / 假眠夜夜眠無假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하나 끝없는 한이네 / 窮恨年年恨不窮
산봉우리에 울음소리 끊어지니 새벽달이 비추고 / 聲斷曉岑殘月白
봄 골짜기에 피 흐르니 붉은 꽃이 떨어진다 /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 먹어서 하소연 못 듣는데 / 天聾尙未聞哀訴
서러운 몸 어쩌다 귀만 홀로 밝은가 / 何奈愁人耳獨聰
경자년(庚子年, 1720, 경종 즉위년) 11월에 교정청(校正廳)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간행된 《열성어제(列聖御製)》를 상고해보니, 어제(御製) 시(詩)와 문(文)이 사가(私家)에 소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수합해서 기록해 넣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시 2편이 고(故) 장령(掌令) 신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志)》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위호(位號)가 이미 회복되었으므로 《열성어제》 가운데 일체 추가하여 넣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므로 원래의 시 2편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만, 아래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어서 이와 같이 여쭙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강진숙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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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規詞 端宗
月白夜蜀魂啾 (월백야촉혼추) 달 밝은 밤 자규새가 슬피 울면
含愁情倚樓頭 (함수정의루두) 시름겨워 자규루에 머리 기대노라.
爾啼悲我聞苦 (이제비아문고)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 (무이성무아수)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寄語世上苦勞人 (기어세상고로인) 이 세상 괴로운 사람에게 말하노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신막등춘삼월자규루) 부디 춘삼월에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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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纓先生文集續上 / 詞 / 追賡魯陵御製子規詞
血吻紅竟夜啾。哀聲苦故垂頭。向風說落花怨。憑雨傳芳草愁。寄語老地荒天羈旅人。愼莫登三更月子規樓。
原韻 此魯陵御製也。今以庸作雲章附之於後。有所不敢。然以魯史隱元下分註周年之例推之。則顧其編輯之序。有不得不然者。讀者其原諒焉。
月白夜蜀魄啾。含愁情倚樓頭。爾啼悲我聞苦。無爾聲我無愁。寄語世上勞苦人。愼莫登春三月子規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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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纓先生文集續上 / 詞 / 次曹靜齋 尙治 子規詞 金東峯時習,朴遯叟渡和之。東峯爲余誦傳。因次其韻。◇庚戌
子規啼子規啼。永夜窮山空自訴。不如歸不如歸。蜀嶺連天那可度。花枝染着色殷紅。萬事傷心心血吐。啾啾百鳥共爭春。爾獨哀呼頻四顧。已而參橫月落聲轉悲。懷佳人兮目渺渺氣激激。孤臣寡婦哭無數。
原韻
子規啼子規啼。夜月空山何所訴。不如歸不如歸。望裏巴岑飛欲度。看他衆鳥摠安巢。獨向花枝血謾吐。形單影孤貌憔悴。不肯尊崇誰爾顧。嗚呼人間冤恨豈獨爾。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屈指難盡數。
附[和韻]
子規啼子規啼。月落天空聲似訴。不如歸不如歸。西望峨嵋胡不度。懸樹苦啼呼謝豹。點點花枝哀血吐。落羽蕭蕭無處歸。衆鳥不尊天不顧。故向中宵幽咽激不平。空使孤臣寂寞窮山殘更數。金時習
附[和韻]
子規啼子規啼。咽咽凄凄若有訴。不如歸不如歸。欲歸巴峽不能度。山空月落夜何其。灑血花間哀冤吐。跳枝竄葉聲聲苦。不西不東但北顧。悲來乎使人聽此淚不禁。楚魂嗚冬靑樹。一般恨千古數。朴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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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山先生文集卷之三十四 / 碑 / 白村金先生遺墟碑 丙午
嗚呼。此故忠臣大冢宰金先生諱文起遺墟也。沃川郡南二十里。有社壇洞白池里。卽先生外舅吏曹判書金公孝貞之鄕。而先生館焉。因號白村。白村介於湖嶺。擅泓崢之勝。且有穹巖如馬。先生嘗置亭於其巓。臨淸溪挹月岳。用寓眞樂。宣德丙午。闡小大科。由翰林歷敭淸顯。止吏曹判書。亦嘗按節關北。克壯鎖鑰。及世祖丙子五月。與成忠文公三問,朴忠正公彭年,李忠簡公塏,河忠烈公緯地,柳忠景公誠源,兪忠穆公應孚。謀復上王事覺。同六臣被禍。子縣監玄錫亦死。孫曾幷收孥。英宗辛亥。命復先生官。正宗戊戌。贈左贊成謚忠毅。辛亥命配食于莊陵忠臣壇。玄錫與享朝士壇。遣宗伯致侑。士林又俎豆於剡溪之上。上下之所崇報亦至矣。先生金海人。初諱孝起。祖諱順。考諱觀。俱大官。妣管城陸氏。觀察使埤之女也。生稟異質。篤於倫理。喪祭壹遵文公家禮。居瘠幾不全。而日展墓號絶。人名其所曰孝子洞。及被逮諸公。互相援引。而獨先生不服。人尤以爲烈。生而盡其職義也。死而得其正榮也。欲與親黨含笑而偕臧者。諸公之志。我自有定。何用言爲者。先生之志。是豈差殊觀哉。夫生者人之所甚欲。而捐百口之命。甘萬死而靡悔者。以君父决不可背。名敎决不可負。綱常决不可虧。意義攸激。不知刀鋸鼎鑊之可畏。不必以得生爲安也。今去先生之世。餘三百年。而忠剛之氣。凜然如生。薄日月震乾坤。當與三相六忠。彌遠而彌彰。於乎盛哉。先生田宅。俱沒入于官。而惟亭臺舊址。巋然獨存。鄕人士樹碑以識之。猶見遺風餘韻。披拂人間。得以憑吊景仰。有冒稱先生後屬者。如杜正倫之族城南。郭崇韜之哭汾陽。謀奪宗嫡。打訛閃姦。竟不能售。則至斷碑而極矣。先生殘
剩裔。不忍其荒廢。爰謀改竪。謁文于不佞。不佞作而曰吾東之丙子。卽皇明之壬午。先生與方鐵諸賢。曠世一致。何憂堙滅而不稱哉。且先生以身殉國。蹈死如歸者。天理之所當然。何有於身後之名哉。然則區區三尺之刻。亦何與於先生乎。要使億世之下。猶知有忠臣攸芋也。先生曾流絶海。有放鷴詩。辭氣悲壯。是爲端廟子規詞之賡歌歟。嗚呼欷矣。書此以歸之。俾鐫于碑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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頤齋遺藁卷之三 / 詩 / 子規詞 八絶○幷序
賤臣少讀列聖御製。至端廟寧越郡樓作二篇。輒低徊涔淫。不自識其何爲而肰也。今適來守陵下。感愴益激。噫民生秉彜。天所同賦。凡有血氣。孰不憐之。雖相後三百餘歲。尙令人太息。彼一時北面而二心者。亦獨何哉。記十年前嘗訪六臣祠墓。髮竪膽裂。歸語人曰使爲靖難元勳遺裔者。必不生心過此。况於本陵乎。秋風漸厲。秋夜漸永。獨處多病。
無寐。敢依二篇演之。仍名子規詞。庶來者有知云爾。
華山漢水舊城池。風雨驚飛短翮垂。說到東來安用悔。悠悠天意竟難知。
淸泠浦上鐵崖層。草綠花紅怨不勝。卻羡沿籬嗚咽水。猶能西去謁英陵。
啼時白日爲無輝。竹裂江空正憶妃。怊悵刀山還劒閣。夜來猶道不如歸。
梅竹蕭森月向低。數聲長笛亦悽悽。終宵血染無人見。遮莫山村叫一鷄。
錦城消息白雲空。膓斷初寒十月中。從此越江花落盡。年年再拜只村翁。
甑山高竝鉢山靑。樵徑依微晝亦冥。不待哀鳴應有淚。美人歌曲更堪聽。
秪今休復訴幽冤。淸廟喬陵盛事存。正是梨花寒食節。天家一騎遣開門。
寂寞秋齋病未眠。經行隨處尙餘憐。他時月白風淸夜。歷歷賡歌又幾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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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제2권
다시 자규루를 세우다〔子規樓〕
신해년(1791, 정조15) 1월 17일 상이 현륭원에 행차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에서 크게 느끼신 바가 있었다. 이에 제사를 올리게 하고, 내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단종조에 절개를 지킨 신하들을 널리 조사하게 하였으니 장차 제향하는 전례를 아울러 거행하고자 해서였다. 연신(筵臣) 가운데 “영월 부사 이동욱이 자규루의 옛터를 찾았다고 합니다.”라고 아뢰는 자가 있었다.
유지(有旨)를 내려서 강원도 관찰사에게 묻자,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장계하였다.
“작년 가을 영월을 순시할 때 자규루의 옛 자취가 없음을 한탄하였습니다. 영월 부사가 노인들을 찾아 물어보니 ‘객사 남쪽 담장 밖에 있었다’라고 하는데 민가가 빼곡히 뒤섞여 자세히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장인들을 이끌고 공터에 나아가 측량하고 있으니 소나기가 갑자기 내려 그만두고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중에 불이 나 객사 남쪽의 가옥 몇 채가 타고 더 번지지는 않았는데, 이어서 폭풍이 재를 날리자 문양이 새겨진 주춧돌이 덩그러니 드러났습니다. 땅을 파 보니 모두 부서진 기와와 깨진 자갈인 것이 바로 자규루 옛터였습니다. 현재 공사를 독려하여 중건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기둥을 세울 것입니다.”
상이 괴이하게 여겨 중건하는 비용은 공곡(公穀)으로 회계 처리하게 하고, 대신과 문임(文任)에게 상량문과 기문을 나누어 짓도록 명하였다. 강원도 관찰사의 장계에 답하는 회유(回諭)를 관각(館閣)에 보내 절개를 지킨 신하들을 널리 찾으니 모두 230인이었다. 장릉(莊陵) 홍살문 밖에 제단을 쌓고 매년 한식날 제사를 올렸다.
[주-D001] 다시 자규루를 세우다 : 《정조실록》 15년 2월 6일 기사에 자규루와 관련된 윤사국의 보고가 실려 있다.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 권4 〈성언(醒言)〉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당시 자규루 유지가 발견된 상황이 매우 극적이었고 또 단종조 인물의 원통함을 풀어 주어 절의를 표창한다는 의의가 있어 인구에 많이 회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주-D002] 이동욱(李東郁) : 1739~? 자는 유문(幼文), 호는 소암(蘇巖)이다. 저작으로 〈자규루 상량문(子規樓上樑文)〉이 있다.[주-D003] 자규루(子規樓) : 단종은 1456년(세조2) 노산군으로 낮추어져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국지산 아래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자 관풍헌으로 옮겨 가 생활하며 동쪽의 자규루에 자주 올랐는데, 소쩍새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자신의 처지를 견준 〈자규사(子規詞)〉를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원래 매죽루(梅竹樓)였던 누각 이름이 자규루가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윤조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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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3권 / 시(詩)
능침 배알을 위하여 영월로 가는 참의 채이숙을 송별하며[送別蔡邇叔參議寧越謁陵之行]
차가운 날 역정의 새벽빛이 희멀건데 / 驛亭寒日曉光分
노로가 부르면서 그대 보내지 말고 싶네 / 莫唱勞勞歌送君
영월은 예부터 산수 좋기로 이름난 곳 / 越郡舊稱山水窟
노릉이 지금은 왕릉으로 되었지 / 魯陵今作帝王墳
선지에 비친 달을 성초가 밟고 가리 / 星軺夜蹋仙池月
석마도 가을이면 고국 그리워 울 것이네 / 石馬秋嘶故國雲
자규루 가에 있는 나무 속에 앉은 자규 / 唯有子規樓畔樹
오밤중의 애원성을 어이 들어 낼 것인가 / 五更哀怨不堪聞
[주-D001] 노로가 : 이별의 노래. 중국 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 남쪽에 노로정(勞勞亭)이 있는데, 옛날 그곳은 송별하던 장소로서 떠나는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부르며 전별하였다. 《事文類聚》[주-D002] 노릉(魯陵) :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의 능(陵).[주-D003] 성초(星軺) : 사신(使臣)이 타는 수레.[주-D004] 석마(石馬) : 돌을 조각하여 만든 말. 무덤 앞에다 세워둠.[주-D005] 자규루 …… 것인가 : 단종(端宗)의 애절한 사연을 말한 것.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영월(寧越)에 유배된 단종은 왕실을 떠나온 설움을 달랠 길이 없어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신세를 두견새에 비유하면서 피맺힌 절규를 하였음.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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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 제46권 / 축문(祝文)
창주별묘 봉안문 본손을 대신해 짓다. 〔滄洲別廟奉安文 代本孫作〕
타고난 자질은 영민하고 / 才資敏穎
효성과 우애가 지순했네 / 孝友純至
거기에 학문을 겸하여서 / 濟以問學
성리에 침잠해 연구했네 / 沈潛性理
어버이 위해 잠시 뜻 굽혀 / 爲親暫屈
과거에 고제로 발탁되었네 / 遂擢高第
옥당에서 나래를 펼치어 / 翺翔玉署
태평 성세 지우(知遇)받았네 / 際會盛世
성공ㆍ박공 이름을 떨칠 제 / 成朴蜚英
공이 학사 중 으뜸이었지 / 公爲其首
선위를 받아 새 임금 오르니 / 國有禪受
선비가 떠날 뜻을 품었네 / 士懷去就
자취는 소부에 의탁하고 / 跡託疏傅
그 뜻은 도연명을 본받았네 / 志效彭澤
살신성인과 상지 두 가지는 / 殺身尙志
일은 다르나 마음은 한가지라 / 事異心一
자규사의 은미한 뜻은 / 子規有詞
자나 깨나 옛 주군 그림이요 / 寤懷舊君
덩그런 묘석에 자필한 제명은 / 頑石有題
신하 노릇 않으려는 은밀한 뜻이라 / 陰寓不臣
문을 닫고 고상하게 은둔하여 / 杜門高臥
정결하게 스스로 지조 지키니 / 潔身自靖
영천에 이는 맑은 풍도여 / 永水淸風
기산, 영수 못지아니하네 / 伯仲箕潁
광택을 남기고 향기를 더하여 / 遺光賸馥
백대가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네 / 百代未沫
정성스레 제물 갖춰 배설하여 / 俎豆有設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었네 / 用薦芬苾
나라의 제도에 구애되어 / 邦制有拘
이미 거행했다 금세 폐하니 / 旣擧旋廢
사문의 운이 떠나가는 듯하여 / 斯文運去
많은 선비 기상이 꺾이었네 / 多士色沮
자손들이 이에 머리를 모으고 / 雲仍聚首
별묘를 세우기로 의논하였네 / 議立別廟
진씨 서씨의 전례가 있어 / 維陳徐氏
고사를 상고할 수 있다네 / 故事可考
여러 해 동안 계획하고 경영해 / 積歲經度
대강 소박한 사당을 이루었네 / 粗成板楹
날을 잡아 몸을 깨끗이 하고 / 剋日蠲躬
정성을 다해 영령을 모시네 / 揭虔妥靈
신령한 기운 가득 넘치고 / 左右洋洋
사당의 뜰을 오르내리는 듯 / 陟降在庭
보답하는 제사 이에 시작하여 / 報事伊始
공경히 제물을 올리나이다 / 祇薦腥馨
상향 축문(常享祝文)
출처는 화락하고 / 雍容出處
절의는 굳건하네 / 堅苦節義
은택이 길이 흘러 / 澤厚流長
후손을 밝혀 주네 / 光啓後嗣
[주-D001] 창주별묘(滄洲別廟) : 단종조의 문신 조상치(曺尙治)를 제향한 별사이다. 여기서 창주는 영천(永川) 창수(滄水)의 마을을 가리키는데, 조상치가 은퇴하여 지내던 곳이다. 조상치는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경(子景), 호는 정재(靜齋)ㆍ단고(丹臯),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강계 병마사 조신충(曺信忠)의 아들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으로, 1424년(세종6) 좌정언에 임명되고, 세종ㆍ문종ㆍ단종 3대를 섬겨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다. 합천과 함양의 수령으로 재임하여 선생안에 실려 있다. 1455년(단종3)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 예조 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사직하고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791년(정조15) 단종의 장릉(莊陵)에 배향되었다.[주-D002] 어버이 …… 발탁되었네 : 조상치의 부친인 조신충(曺信忠)은, 고려 재상 조익청(曺益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절의를 지켜 조선에 벼슬하지 않았지만 아들에게는 과거를 보라고 권하였다. 이에 조상치가 1419년(세종1)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주-D003] 성공(成公) …… 으뜸이었지 : 성공과 박공(朴公)은 성삼문과 박팽년을 말한다. 당시 이들이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을 때 조상치는 집현전 부제학을 맡아 수장이 되었다.[주-D004] 소부(疏傅)에 의탁하고 : 소부는 한(漢)나라 원제가 태자 때 태부를 지낸 소광(疏廣)을 말한다. 관직과 명성이 높아졌는데도 떠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고 하면서 소부(少傅)로 있던 조카 소수(疏受)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漢書 卷71 疏廣傳》 조상치는 세조가 즉위한 뒤 병을 핑계 대고 하례하지 않고, 세 아들이 조정에 있으니 복이 너무 지나쳐 물러가야 한다며 소부의 일을 핑계 대어 은퇴하였다.[주-D005] 살신성인과 …… 한가지라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선비는 무엇을 일삼느냐는 물음에, 맹자가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라고 답하며 이는 곧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이 살신성인한 것이나 조상치가 뜻을 고상히 하여 은둔한 것이나 모두 인을 이룬 측면에서는 같다고 본 것이다.
[주-D006] 자규사(子規詞) : 조상치가 단종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사로 전문이 한국문집총간 17집에 수록된 《탁영집(濯纓集)》 속집에 실려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접동접동 접동새 우는 소리, 달밤에 공산에서 그 무엇을 호소하나. 돌아가리 돌아가리, 파촉 땅 바라보며 날아서 건너고저. 뭇 새는 둥지 찾아 고요히 잠드는데, 너만 홀로 피 토하여 꽃잎을 물들이니. 그 얼굴 외롭고 그 모습 초췌하다, 존숭도 안 하거늘 그 누가 널 돌보리. 아아, 세상의 원한이 어찌 너뿐이랴. 의사 충신의 강개 불평을 더하는 일, 손꼽아 다 헤아리기 어려우리.〔子規啼子規啼 夜月空山何所訴 不如歸不如歸 望裏巴岑飛欲度 看他衆鳥摠安巢 獨向花枝血謾吐 形單影孤貌憔悴 不肯尊崇誰爾顧 嗚呼人間冤恨豈獨爾 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屈指難盡數〕”[주-D007] 덩그런 …… 제명 : 조상치가 영천에 은거한 뒤에 커다란 돌 하나를 얻어서 다듬지 않은 채로 ‘노산조(魯山朝) 부제학 포인(逋人) 조모(曺某)의 묘’라 쓰고, 자서(自序)하기를 “노산조라고 한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 이 묘석을 세우라고 하였는데, 후에 아들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 돌을 묻어 버렸다. 《국역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주-D008] 기산(箕山), 영수(潁水) : 요 임금 때 은자인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살던 곳이다. 여기서는 소부, 허유처럼 세상의 권세를 떠나 은둔하는 지조를 말한다.[주-D009] 나라의 제도에 구애되어 : 1714년(숙종40)에 서원의 남설(濫設)과 그 폐단을 염려하여 중복하여 설립한 것은 훼철(毁撤)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영남 지방에는 정식 서원 외에 개별 가문에서 현조(顯祖)를 모시는 사당을 설립하고 여기에 서당이나 학사를 같이 세워 친족의 자제들을 교육하며 운영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당시 영남 방백이 이것까지 아울러 금하였다. 이에 대해 자손들이 조상을 위해 세운 별사(別祠)는 훼철에서 제외시켜 주도록 청한 이재(李栽)의 글이 있는데, 여기서 중국의 사례를 근거로 하여 청하였다. 대산이 외조부인 이재의 글에서 근거를 찾아 당시 별사의 창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많이 사용하였다. 《密菴集瓿餘 冊2 爲聞韶金門呈巡營文, 韓國文集叢刊 173輯》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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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9권 / 서(序) / 《양단세적》에 대한 서문〔良丹世蹟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범선자(范宣子)가 말하기를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진다.[死而不朽]’라는 말은 무엇을 이른 것입니까? 옛적 나의 선조는 우순(虞舜) 이전에는 도당씨(陶唐氏)였고 하(夏)나라 때는 어룡씨(御龍氏)였고 상(商)나라 때는 시위씨(豕韋氏)였고 주(周)나라 때는 당씨(唐氏)와 두씨(杜氏)였고 진(晉)나라가 중원의 회맹을 주재할 때는 범씨(范氏)였으니, 불후(不朽)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하자, 목숙(穆叔 숙손표(叔孫豹))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세록(世祿)이라고 하지 불후는 아닙니다. 노(魯)나라에 장문중(臧文仲)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죽은 뒤에도 그 말이 세상에 전해지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제가 듣건대 가장 좋은 것은 덕행을 수립하는 것[立德]이고 그다음은 공업을 세우는 것[立功]이고 그다음은 후세에 전할 만한 말을 남기는 것[立言]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으니, 이를 불후라고 합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불후와 세록은 다른 것이니 범선자와 같은 자는 세록만 있지 불후한 말은 없는 자였도다. 장문중은 어질지 못한 일을 세 가지 하였고 지혜롭지 못한 일을 세 가지 하였는데, 그 말이 사라지지 않고 세상에 전해진 것은 또 어째서인가.
지금 단구 박씨(丹丘朴氏)의 세적(世蹟)을 살펴보니, 세록이 있는 데다가 또 불후한 말까지 있다. 그런데 우리 부자(夫子 공자(孔子)) 같은 분이 있어 《춘추》의 책에 기록해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그것은 무엇인가?
박씨는 신라의 혁거세(赫居世)를 그 시조로 삼으니 이분이 실로 도당씨와 같고, 충렬공(忠烈公)은 파사왕(婆娑王)의 5세손으로 삽량주 간(歃良州干)이었고, 그 아들 중에 또 백결선생(百結先生)이 있었으니 이분들이 실로 어룡씨, 시위씨와 같다. 고려 때에는 세 분 시중(侍中)이 있었으니 이분들이 실로 당씨, 두씨와 같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돈옹(遯翁)과 칠의사(七義士)가 있었으니 이분들이 실로 진나라의 범씨이다. 그러니 이것이 이른바 세록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충렬공이 국가를 위하여 일본에서 순절하자, 부인 김씨와 두 딸이 산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절의를 지켜 죽었는데, 충렬공이 처음 일본으로 건너갈 때 징심헌(澄心軒)에서 읊은 시 한 수는 지금까지도 민간에 전해진다. 백결선생은 세모(歲暮)에 절굿공이 소리를 금곡(琴曲)으로 연주하여 안빈낙도의 뜻을 드러내었다. 시중공은 사직을 보위한 공으로 덕원(德原)에 봉해졌고 영귀(靈龜)가 3세에 걸쳐 그 음덕을 갚았다. 돈옹은 운봉 감무(雲峯監務)로 있다가,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명을 받았을 적에 망복(罔僕)하고서 봉송정(鳳松亭)의 한 그루 소나무처럼 기사촌(棄仕村)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하였다. 칠의사는 모두 임금 곁에서 밤낮으로 보필하던 신하들로, 장릉(莊陵 단종(端宗))께서 양위하시던 날에 벼슬을 버리고 멀리 김화(金化)의 초막동(草幕洞)으로 들어가 김매월당(金梅月堂), 조정재(曺靜齋)와 함께 〈자규사(子規詞)〉를 화답하였는데, 이 사(詞)는 차마 읽을 수가 없다.
세록이 있는 집안에 처사(處士)도 있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박응천(朴應天), 박응렬(朴應烈)이란 분은 임진왜란을 당해서 각자 기거하는 곳에 있던 거룩한 성좌(聖座)를 지켰으며, 또 그들이 세운 강학(講學)의 규례가 전해져 후세의 모범이 된 것을 읍지(邑志)와 야사(野史)에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탁월한 충절(忠節)과 성대한 공렬(功烈)은 ‘덕행을 수립했다[立德]’고 할 수도 있고 ‘공업을 세웠다[立功]’고 할 수도 있어서, 그 말이 후세에 전해져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立言]에서 그치지 않으니 장문중의 불후한 말이라는 것과 견주어 본다면 또한 어떠한가. 이러한 세록이 있는 데다 이러한 불후함까지 있으니,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 한 부의 세적(世蹟)으로 만드는 일은 그 계획이 진실로 기(杞)나라와 송(宋)나라의 문헌(文獻)의 증거가 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겠는가.
대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는 천지간의 큰 법도로,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똑같이 지니며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데, 지금 진(晉)나라가 중국의 회맹을 주재한다고 해도 과연 춘추 시대와 같으리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신하 된 자라면 마땅히 충렬공이 자신은 계림(鷄林)의 신하임을 세 번 부르짖은 것과 같은 마음을 먹어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 충렬공의 처지에 미치면 충신이 되는 것이요 미치지 못하면 의사(義士)나 처사가 되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또한 그렇다고 말하노라.
[주-D001] 양단세적(良丹世蹟) : 박기태(朴基泰) 등이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을 비롯하여 백결선생(百結先生), 박구(朴球), 칠의사(七義士) 등 단구 박씨(丹丘朴氏) 중 훌륭한 선조들의 사적을 모아서 편집하여 1910년 활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주-D002]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 하였다 : 노나라 양공(襄公) 24년에 목숙(穆叔)이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대의 실권자인 범선자(范宣子)가 마중을 나와 목숙과 문답한 내용 중에 나오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襄公24年》[주-D003] 장문중은 …… 하였는데 : 공자가 “장문중에게는 어질지 못한 일 세 가지가 있고 지혜롭지 못한 일 세 가지가 있으니, 전금(展禽)을 낮은 벼슬에 있게 하고 육관(六關)을 설치하고 아내에게 부들자리를 짜게 한 것이 세 가지 어질지 못한 일이고, 쓸데없는 기물(器物)을 만들고 위아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제사를 지내고 원거(爰居)에게 제사 지낸 것이 지혜롭지 못한 세 가지 일이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2年》[주-D004] 충렬공(忠烈公) :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을 가리킨다.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가서 구해 내고는 왜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三國遺事 卷1 紀異 奈勿王 金堤上》 《三國史記 卷45 朴堤上列傳》[주-D005] 백결선생(百結先生) : 신라 시대의 음악가 박문량(朴文良, 414~?)으로 박제상(朴堤上)의 아들이다. 〈인재이상서(因災異上書)〉를 올려 왕을 경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아내가 가난을 상심하자 가야금으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하였으며 이것이 후세에 대악(碓樂) 즉 방아악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三國史記 卷48 百結先生列傳》 《良丹世蹟 卷1 百結先生事蹟》[주-D006] 세 분 시중(侍中) : 박세통(朴世通), 박홍무(朴洪茂), 박함(朴瑊)을 가리킨다.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척암집》 권30 〈돈옹박공묘갈명(遯翁朴公墓碣銘)〉에 “고려조에 와서 휘 세통(世通), 휘 홍무(洪茂), 휘 함(瑊)이 3대를 이어 시중 벼슬에 올라 공적이 크게 드러났다.”라고 하였다. 《良丹世蹟 卷2 侍中公事蹟》[주-D007] 돈옹(遯翁) : 박구(朴球, 1357~1396)이다. 운봉 감무(雲峯監務)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복주(福州) 즉 안동(安東) 기산(岐山) 아래에 소나무를 심고 봉송정(鳳松亭)을 짓고서 평생 벼슬하지 않고 살았다. 박구가 귀향한 곳을 기사리(棄仕里)라고 불렀다고 한다. 《拓菴集 卷30 遯翁朴公墓碣銘》[주-D008] 칠의사(七義士) : 벼슬을 버리고 김화(金化) 초막동(草幕洞)에 숨어 살면서 단종 복위에 힘쓴 박도(朴渡)ㆍ박제(朴濟) 형제, 이들의 조카 박규손(朴奎孫)ㆍ박효손(朴孝孫)ㆍ박천손(朴千孫)ㆍ박인손(朴璘孫)ㆍ박계손(朴季孫)을 가리킨다.[주-D009] 징심헌(澄心軒)에서 읊은 시 : 징심헌은 박제상이 양산 태수(梁山太守)로 있을 때 건립했다는 누대이다. 《양단세적》에 수록된 박제상의 〈제징심헌(題澄心軒)〉에는 “봄 경치 아득하여 시야가 끝이 없는데, 나그네 정은 쓸쓸해라 도리어 가을 같구려. 세간의 분분한 시비는 부질없는 일이거니, 맑은 강 마주해 앉아 시름을 말하지 말아야지.[烟景迢迢望欲流 客心搖落却如秋 世間堅白悠悠事 坐對澄江莫說愁]” 하였다.[주-D010] 영귀(靈龜)가 …… 갚았다 : 《양단세적》 권2 〈시중공사적(侍中公事蹟)〉과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 등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박세통이 통해 현령(通海縣令)이 되었을 때 큰 거북이 조수(潮水)를 타고 나타났는데 백성들이 죽이려고 하자 박세통이 말리고는 굵은 새끼로 배에 매어 바다에 끌어다가 놓아주었다. 그러자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절하면서 “우리 아이가 놀다가 잘못하여 죽게 되었는데, 다행히 공께서 살려 주셨으니 음덕이 매우 큽니다. 공과 자손까지 3세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박세통은 오랑캐의 난리에 대장군으로서 공을 세워 공신당(功臣堂)에 화상이 그려졌으며, 그가 살던 마을은 부역을 면하게 되었다. 박세통의 아들 박홍무는 관직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으며, 손자 박함은 좌복야(左僕射)가 되었다.[주-D011] 망복(罔僕) :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하려 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微子》[주-D012] 보필하던 신하들 : 《양단세적》에 수록된 박경덕(朴景德)의 〈구은사창건기(九隱祠刱建記)〉와 이가순(李家淳)의 〈서돈옹유적후(書遯翁遺蹟後)〉 등에 따르면 당시 박도(朴渡)는 판중추사, 박제(朴濟)는 부사직, 조카인 박규손(朴奎孫)은 예빈경(禮賓卿), 박효손(朴孝孫)은 형조 참판, 박천손(朴千孫)은 사직, 박인손(朴璘孫)은 병조 정랑, 박계손(朴季孫)은 병조 판서였다고 한다.[주-D013] 김매월당(金梅月堂) : 김시습(金時習, 1435~1493)으로 호가 매월당이다. 21세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는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그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하였다고 전한다. 저서로 《금오신화(金鰲新話)》, 《매월당집》 등이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주-D014] 조정재(曺靜齋) : 조상치(曺尙治, ?~?)로 호가 정재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으로, 세종ㆍ문종ㆍ단종 3대를 섬겼다. 세조의 찬탈 뒤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큰 돌에 ‘노산조(魯山朝) 부제학 포인(逋人) 조모(曺某)의 묘’라 새기고, 서문에 “노산조라고 한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요,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자기가 죽으면 그 돌을 묘 앞에 세우라고 했는데 공이 죽자 아들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땅에 묻었다고 한다.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故事本末》[주-D015] 자규사(子規詞) : 조상치가 단종을 생각하며 지은 사(詞)로 《양단세적》 별집에 수록되어 있다.[주-D016] 박응천(朴應天) …… 지켰으며 : 박응천(1556~1603)은 조선 중기 처사(處士)로, 임진왜란 때 왜적이 영해로 침입해 오자 영해 향교(寧海鄕校)에 봉안된 오성(五聖)의 위판(位版)을 등운산(騰雲山) 깊은 골짜기에 모셔다 놓고 보호하였으며,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에 위판을 옛 향교에 다시 봉안하였다고 한다. 박응렬(朴應烈)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양단세적》에 수록된 동계공(東溪公) 사적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간성 향교(杆城鄕校)를 불태우려 하자, 향교의 재임(齋任)이던 박응렬, 김자발(金自潑) 등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성인(聖人)의 위패를 거두어 땅속에 보관하고는, 적이 물러간 뒤에 재산을 기울여 다시 사당을 중건하였으며, 도신(道臣)이 이를 아뢰어 표창하였다고 한다. 《良丹世蹟 別集 處士公事蹟, 東溪公事蹟》[주-D017] 기(杞)나라와 …… 것이겠는가 : 공자(孔子)가 “하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지만 하나라의 후예인 기나라가 내 말을 증명할 만하지 못하고, 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은나라의 후예인 송나라가 내 말을 증명할 만하지 못하다. 그것은 문헌이 부족한 때문이니, 문헌이 넉넉하다면 내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八佾》 《양단세적》이 증거의 역할만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게 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책이 된다는 말이다.[주-D018] 충렬공이 …… 것 : 박제상이 미사흔을 신라로 도망치게 한 뒤 왜왕이 박제상을 신하로 삼고자 하였으나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倭國)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상은 받지 않겠다.”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박제상의 다리 살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낸 다음 그 위를 걷게 하면서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라고 물으니, 박제상은 “계림국의 신하이다.”라고 대답하였고, 뜨거운 철판 위에 박제상을 세우고서 또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라고 물으니, 박제상은 “계림국의 신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왜왕은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목도(木島)에서 그를 불태워 죽였다. 《三國遺事 卷1 紀異 奈勿王 金堤上》[주-D019] 옛사람이 …… 하였는데 : 〈출사표(出師表)〉는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위(魏)나라를 치려고 출병할 때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리면서 자신의 지극한 충성을 토로한 글이다. 〈출사표〉에 대한 평론에 “이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이다.[讀此表 不隕淚者 是眞無人心]”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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