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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성서역사연구 3 - 멸망후의 이스라엘.
이스라엘 민족은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시작되어 애굽의 포로생활에서 모세에 의해 인도되었으며 여호수아에 의해 가나안으로 인도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민족은 사사들의 통치하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하에서는 '번성했으며' 사악한 왕 르호보암의 통치 하에서 분열되었다.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포로 생활의 고통을 겪게 되었고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의 시대에는 하나님에 의해 포로에서 되 돌아와 본토에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예수 시대에는 강력한 로마 제국이 '거룩한 땅'을 지배했고, 예수님이 승천한 후 40년이 되는 기원후 70년에 이스라엘 민족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
거의 19세기 동안의 긴 방황을 거듭한 후에 이스라엘은 가장 사랑했던 그 땅에 다시 한번 세워졌다는 사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공백기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가? 본 연구에서는 1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간략하게 추적해 보려고 한다. 이것은 비극적이며, 혼란스럽고도 두려운 그리고 최후 승리의 이야기다!
바르 코크바(Bar Cochba), 벤 예후다(Ben Yehouda), 그리고 데오도르 허쯜(Theodor Herzl)과 같은 영웅들이 나타났다. 이 19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발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필의 곡물세 폐지법(Peel Commission), 그리고 저주스런 백서(White Parer)가 발표되었다. 마사다(Masada : 유대 요새의 하나)가 함락되고 하나가(Hagana : 유대 해방군)가 일어났다. 예루살렘은 몇몇 잔인한 십자군 전사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영국의 한 장군에 엄습을 받으며 비어마 통로(예루살렘 성내로 들어가는 비밀통로-역주)로 구출되었다.
기원후 70년부터 기원후 1973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
소개 ;
기원후 70년 9월 8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의 유대 성전은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 불타서 파괴되었다. 기원후 1973년 10월 6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스라엘의 유대 국가는 애굽인들과 시리아인들의 파멸에서 구출되었다.
아래는 이런 중요한 두 연대 사이에서 급변하고 종종 비통하며 늘 파란많았던 해들을 가장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것을 뿐이다. 이러한 19 세기는 그 기간을 역사적으로 주요한 10개의 시대로 나눌수 있다.
I. 로마시대(기원후 70-325)
Ⅱ. 비잔틴시대(기원후 325-614)
Ⅲ. 페르샤 시대(기원후 614-634)
Ⅳ. 아랍 시대(기원후 634-1072)
Ⅴ. 셀주크 시대(기원후 1072-1099)
Ⅵ. 십자군 시대(기원후 1099-1291)
Ⅶ. 노예 기병 시대(기원후 1291-1517)
Ⅷ. 터어키(오토만) 시대(기원후1517-1917)
Ⅸ. 대영제국 시대(기원후1917-1948)
Ⅹ. 독립시대(기원후1948-현재)
1. 로마 시대(기원후 70-325)
1) 기원후 36년 빌라도는 자신의 지배에 반대하여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기병과 보병 부대를 파견했다.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그 결과 사마리아인들은 로마 관리들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빌라도의 잔인성에 항의하고 빌라도를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빌라도는 관직을 박탈당하여 로마로 소환되었다. 그는 이후에 가울(Gaul)로 유배되었으며 그 후에 자살했다.
2) 빌라도가 제거된 다음 곧 이어, 빌라도와 헤롯 대왕이 이전에 통치했던 그의 지역들과 유대는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에게 통치가 맡겨졌다. 헤롯 아그립바는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참조, 행 12:20-23) 그래서 벨릭스(행 24장)와베스도(행25-26장)가아그립바의총독직을 계승하였다. 마침내 플로우스(Florus)라는 로마 관리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잔인하고 포악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 지배자들에 대항하여 기원전 6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유대인들은 사해 변방에 있는 튼튼한 마사다 요새를 점령하여 로마 수비군을 거기에서 무찔렀다.
예루살렘에서는 엘리아살이라는 성전 수비대장이 열심당(Zealot)이라는 혁명적인 집단을 조직했다. 열심당원들은 안토니아(Antonia)가 통치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로마 수비군을 몰아냈다. 이러한 반란은 급속도로 유대의 여러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3) 그래서 로마는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세스티우스(Cestius)라는 장군에게 팔레스틴으로 들어가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기원후 66년에 2만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팔레스틴을 침입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안으로 후퇴하였다. 여섯 달 동안의 포위 후,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세스티우스는 갑자기 후퇴하여 퇴각해버렸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돌격하여 퇴각하는 로마군 6천 명을 살해했으며, 적군이 남기고 간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노획했다. 유대인들은 이제 앞으로 로마군과의 어떤 회전에도 자신있게 싸울 수 있게 되었다.
4)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떤 이유 때문에(아마도 하나님에 의해 경고받았기 때문에) 이 당시에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건너편 페레아 지역에 정착했다. 세스티우스의 이상스런 퇴각 소식을 들은 로마 황제 네로는 자신의 가장 능력있는 장군들 중의 하나인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명령을 완수하도록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름난 자기 아들 디도와 연합하여 6만 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북부 갈릴리 지역을 침략했다. 많은 유대의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포로가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전투 중에서 였다.
5) 기원후 68년 겨울, 로마에는 네로를 자살로 이끈 사건이 발생했다. 소란스런 1년이 지난 다음 베스파시아느누는 새로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그때 디도를 보내 유대의 무질서의 온상인 예루살렘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디도는 기원후 70년 2월 8만 명의 로마군과 함께 수천개의 공성 망치와 공성포를 갖고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6) 예루살렘에서는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원수같이 여기는 셋 이나 되는 파벌들이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놓고서 실제로 서로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예루살렘 위쪽을 차지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아래쪽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은 성전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폭동과 암살이 빈번했다.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읍에 너무 사람이 많았다. 왜냐하면 수만의 피난민들이 진군하는 로마 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7) 항복하라는 디도의 호통을 조롱당했다. 포위공격은 공식적으로 유월절 절기 동안에 시작되었다. 이전투는 어느 편에서도 결코 용서하지 않는 역사상 아마도 가장 잔혹한 전투였음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적의 머리 위에다 육중한 돌을 떨어뜨리고 끓는 기름을 부었다. 이에 로마 군인들은 예루살렘 어느 성벽 위에서도 볼 수 있는 곳에서 매일 수백명의 유대인 포로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함으로 응수했다.
기근이 곧 예루살렘 성읍을 휩쓸었다. 7월 17일에는 동물이 희소했기 때문에 매일 드리는 희생 제사가 중단되었다. 여자들은 자기 자신의 죽은 자식을 먹기에 이르렀고, 성인 남자들은 식량으로 먹기 위해 새똥 몇 온스를 차지하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8) 로마군인들은 드디어 성벽의 한 부분을 무너뜨렸으나 필사적인 유대인들이 그 동안에 성 안쪽에다 벽을 쌓아 놓은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결국 9월 8일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강타하여 성전을 불태우고 성벽을 무너뜨렸다. 약 100만명의유대인들이칼에 찔리고 불에 타거나 십자가 형으로 살해되었다.
9) 그리스도께서 약 35년전에예언하셨던놀라운 예언이 이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주목하라 :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1-2).
세속 역사 자료에서 보면, 포위 공격을 하고 있었을 때 로마 군인들 사이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돌 사이에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숨겨 놓았다고 하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음(확증되지는 않았지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로마 군인들이 모든 돌을 제거한 이유가 이 금을 찾아내려고 했던 데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0) 디도는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 로마로 끌고 갔다. 로마에서 유대인 포로들은 위험한 광산에서 노역하거나 로마의 투기장에서 맹수의 먹이가 되어야 했다. 수만의 유대인들이 세계의 노예 시장으로 팔이어 갔다. 사실상 수많은 유대인 포로들은 노예 시장의 공급과잉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유대인 포로를 끌고 갔던 로마인들은 포로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낮은 가격에 팔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디도는 주화를 발행했는데 그 주화에는 이스라엘을 종려나무 아래 쇠사슬을 차고앉아 있는 비탄에 잠겨 있는 여인으로 묘사해 놓았다.
11)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기원후 65년에 유대인들은 마사다 성을 완강하게 고수했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다음 수백의 가족들이 저 불타는 도시 예루살렘을 어떻게든지 도망쳐 나와 마사다로 향했는데, 그 총 숫자는 최대로 잡아 남자, 여자, 소년과 소녀 967명 정도였다. 마사다는 위가 쟁반같이 평평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의 요새이다. 이 요새는 주변과 거의 수직으로 약 1,400피트융기한곳이다. 마사다 요새의 면적은 20에이커이며, 그 둘레는 거의 1마일이었다. 마사다는 헤롯 대왕에 의해 기원전 35년에 튼튼히 요새화 되었다.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이 두 가지 이유에서 마사다를 요새화했다고 말했다.
(1) 팔레스틴 지역의 로마령에 사는 유대인들이 헷롯왕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피난처로서.
(2)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즉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설복하여 헤롯을 죽이고 유대에 대한 지배권을 그녀에게 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12) 자신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헤롯을 마사다를 요새화하고 발전시키는데 비용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두 개의 장엄한 궁전, 커다란 창고들, 따뜻한 목욕을 하기 위한 욕실들 그리고 부유한 왕이 그 시절에 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것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700만 갤론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교묘한 급수 저장고가 만들어졌다. 이급수 저장고는 그 당시에 단 며칠 동안 내리는 비로 해마다 1월에 규칙적으로 채워졌다. 고원 주위를 둘러 쌓은 성벽은 18피트 폭 12피트였으며, 그 성벽 위에는 높이가 약 75피트인37개의탑들이세워져 있었다고 요세푸스는 전한다. 예루살렘에서 도망 온 유대인 가족들이 탑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헤롯에 의해 백년 전에 그곳에 저장되었던 포도주, 기름, 곡식들 그리고 대추야자 열매와 같은 막대한 양의 식료품을 발견했다. 건조한 기후 때문에 식량을 그곳에 저장 되었던 때와 마찬가지 상태였다. 그 외에도 유대인 가족들은 막대한 양의 철, 청동, 납, 그리고 1만 명의 병사가 무장하기에 충분한 무기들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마 군인들은 이러한 도망친 유대인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었다. 기원후 72년 봄에 로마의 장군 실바(Silva)는 제국의 체면을 잃지 않도록 1만 5천 명의 병사로서 마사다 요새를 포위하여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3) 유대인들은 2년 동안 버텼다. 이 2년 동안에, 실바는 서쪽 편까지 이르는 동쪽의 경산면을 건설했다(예루살렘에서 붙잡아 온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그런데 이 서쪽 편은 꼭대기에서 맨 밑바닥까지의 높이가 가장 낮은 지점이었다. 그런 다음 실바는 성벽을 돌파했지만(디도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또다른 성 내벽을 쌓았음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 내벽은 통나무들과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공성망치는 이성을 부수는데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어떤 타격도 진흙을 더 단단하게만 했다. 실바는 내벽에 있는 거대한 통나무를 불태워버리려고 했다. 요세푸스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불을 지르자마자 북쪽에서 불어온 한떼의 바람은 로마군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북풍은 위로부터 불꽃의 방향을 되돌려서 그들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의 공성포들이 불길 속에서 다 타버리려는 듯이 보였을 때 로마 군인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신의 섭리인양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반대방향으로 강하게 불어쳤고 불꽃을 성벽 쪽으로 흩날리면서 맹령하게 타오르는 한 덩어리의 불길로 바꾸어 놓았다(「유대전쟁」, p. 384).
14) 유대인의 지도자 엘리아살 벤 야일(Eleazer ben Yair)은 로마 군인들이 그 다음날 성벽을 돌파하는데 성공할 것임을 실제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들의 아내들이 강간당하며 그들의 자식들이 노예가 되며 그리고 남자들은 살해될 것임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 최후의 밤에 야일은 모두에게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15) 야일의 연설은 너무도 감동적이었고 예기치 못했던 행동이었기 때문에 성인 남자들은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가슴 찢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야일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눈물 어린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 각각의 남자는 자신의 가족을 신속하게 죽였다! 다시 우리는 요세푸스의 말을 주목해보자.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공포를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었으며 그리고 그들이 죽은 자들보다 한 순간이라도 더 오래 산다면 죽은 자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한 곳에 재빨리 모아서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남은 성인 남자들을 죽이는 일을 맡을 열 사람을 제비 뽑아 선택하고 나머지 모든 남자들은 각기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이 누워 있는 곁에 누워서 자신의 양팔로 아내로 자식들을 껴안고 고통스런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을 맡겼다. 이 열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 모두를 단호하게 죽인 다음 서로에게도 꼭 같은 규칙에 동의하여 제비를 뽑힌 한 사람이 아홉 사람을 죽이고 최후의 자신은 자살했다. 그들 모두가 서로를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한 수행이나 고통에 있어서 서로 달라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후로 아홉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한 사람은 먼저 죽은 자들의 행렬을 둘러보아 그들 중에 아직도 자신의 손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조사하였다. 그런 다음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서 궁전을 맹렬히 불태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 자신의 몸을 칼로 바로 찔러서 자신의 가족 곁에 넘어져 죽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겨 놓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죽었다. 그러나 한 노파가 엘리아살과 친척이었던 다른 사람…그리고 다섯 명의 어린아이들과 함께 도망쳤다"(「유대 전쟁」, p. 391).
16) 기원후 130년에 로마 황제 하드리안(Hadrian)은 예루살렘을 재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 터에다 쥬피터 신전을 세웠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했다. 기원후 132년에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라는 한 용감한 젊은 유대인 전사가 일어나 발람의 예언에 대한 성취가 있을 것임을 외쳤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민 24:17-19).
그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 제사장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이스라엘의 참 메시야로 인정했다. 혁명에 가담하려면 누구나 충성의 서약으로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야만 했다.
17) 20만 이상이 가담했다. 곧 그들은 로마군으로부터 50개의 군사적 거점과 1천 개 이상의 마을을 빼앗았다. 바르 코크바는 마침내 기원후 135년에 로마의 장군 줄리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코크바는 살해되었고 랍비 아키바는 산채로 피부가 벗겨졌는데, 여전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다"(신 6:4).
18) 50만 이상의 유대백성들이 이 기간 동안에 살해되었는데, 유대인들은 그로부터 1948년 5월 그들의 고향 땅을 찾기까지 투쟁하였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로마 총독 하드리안이 예루살렘의 재건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을 일리아 카피돌리아(Aelia Capitolina)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부분의 "문명화된"세계가 이제 유대인을 싫어했다. 작은 무리가 티베라스(Tiberas)에 정착했는데, 티베라스는 유대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2. 비잔틴 시대(기원후 325-614)
1) 콘스탄티노풀 또는 이전의 비잔티움은 동로마제 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 이후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교회들이 세워졌고 팔레스틴은 번창했다.
2) 콘스탄틴 황제의 출현(기원후 325)으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라는 법령에 의해서 박해받기도 했다. 오직 간결한 집행유예장만이 배교자인 줄리안 황제에 의해 발행되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싫어했고 구세주의 예언(마 23:37-39;마24:1,2)이 그릇됨을 증명하기 위해 성전을 재건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성전을 지으려던 일꾼들은 지반에서 터져 나오는 이상한 불길에 의해 모리아 산에서 쫓겨 내려왔다. 이에 대한 있음직한 이유는 무수한 지하 통로들이 가연성 가스로 가득 차 있어서 일꾼들의 호롱등에서 거기에 불이 옮겨 붙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계획은 곧바로 취소되었다. 줄리안은 단 8개월동안통치한다음기원후 363년 한 전장에서 죽었다.
3) 비잔틴 시대의 무수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기념일인 9월 8일 이외에는 예루살렘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3. 페르샤 시대(기원후 614-634)
1) 기원후 614년 5월 20일, 예루살렘은 페르샤의 용사 코스로에스 2세에 의해 팔레스틴과 함께 정복당했다. 약 3만4천명이살해되고그리스도 교회가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페르샤 침입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거룩한 땅의 주인들이 바뀔 때 어떤 구원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들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다. 코스로에스는 그때 전해오는 소문에 의하면 헬레나 여왕(Queen Helena ;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이 팔레스틴 순례 중에 발견했다는 "참 십자가"를 빼앗아 갔다.
2) 기원후 629년에 헤라클리우스 황제 휘하에 비잔틴 군사들이 다시 모여서 페르샤 군사들을 몰아 내고 "참 십자가"를 되찾아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다 놓았다.
4. 아랍 시대(기원후 634-1072)
1) 회교 신앙의 위대한 창시자인 모하메트는 기원후 570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삼촌 아부-탑렙(Abu-Taleb)에 의해 출세하게 되었다. 모하메트는 이후에 카티자(Khadija)라고 하는 한 부유한 과부를 위해서 힘써 일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기원후 611년 나이 40세에 모하메트는 자신에게 자신의 소명 목적을 말해 주었던 유명한 환상을 꿈 속에서 받았다. "알라 이외에는 결코 신은 없으며, 모하메트는 알라 신의 예언자다."
그래서 당면한 그의 목표는 알라 신의 기치 밑에서 아랍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메카의 시민들은 이러한 일신론적 접근을 거부했다. 몇년 동안 회교도들은 360개의 우상들이 있었던 주변 가운데 하나의 커다란 검은 돌(운석인듯 함)을 숭배했다.
2) 생명을 보존하려는 모하메트는 메카에 필적하는 메디나 시로 도망쳤다. 이것은 헤지라(도망)로 알려져 있다. 헤지라는 기원후 622년에 있었다. 회교도들은 이 해를 회교력 원년으로 잡는다.
3) 메디나 시민들은 모하메트를 받아들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모하메트는 기원후 그에게 복종하였다. 모하메트의 계승자들은 그들의 적을 다르는 데 있어서 단순한 규율을 발전시켰다-코오란, 공물, 아니면 검. 이것은 코오란(회교의 성서)을 받아들이거나 공물을 바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검으로 살해당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회교도들은 기원후 637년 7월에 시리아를 점령했다. 기원후 637년 아랍의 장군 오말(Omar)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오말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옳은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건강과 행복이 있어라. 우리는 여러분이 신은 하나뿐이며 모하메트는 알라신의 사도임을 증언하도록 요구한다. 여러분이 이것을 거절한다면, 공물을 바치는데 동의하고 즉시 우리에게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포도주를 마시기보다는 죽음을 더 사랑하는 여러분에 대적하여 병사들을 보낼 것이다."
4) 승리를 거두던 회교도들은 기원후 732년 투르전투에서 샤를르 마르텔(Charles Martel)에 의해 마침내 서방 진출을 저지당했다.
5) 기원후 1009년 회교도들은 성묘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약 3만개의그리스도교회건물이 이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5. 셀주크 시대(기원후 1072-1099)
1) 셀주크 족은 약 25년동안중동지역을장악하고 있었던 터어키 제국의 일족이다. 셀주크 족은 십자군이 당도하기 직전 애굽인들에 의해 중동 지역에서 쫓겨났다. 셀주크 족은 기원전 1076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했었다.
2) 셀주크 족은 중국 국경선 근처에서 왔다. 회교도로 개종했던 그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둘다 박해했다.
6. 십자군 시대(기원후 1099-1291).
이 시대는 가장 소란한 시대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팔레스틴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속 갈보리 시대였다. 이 시대는 수십만의 유럽군대들이 그와 상응하는 대단위 아랍 군대들과 싸우기 위해 대륙을 횡단하여 진격했었기 때문에 소란했다. 이 시대는 수많은 학살과 유혈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전사라는 고백을 통해 자행되었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이교도인 아랍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하기 위하여 이 기간 동안에 여덟 차례의 주요한 십자가 운동이 있었다. 제 4차와 제 5차 십자군 운동사이에 지엽적인 두 차례의 소십자군 운동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 두 차례의 십자군 운동이 가장 비참했던 것 같다.
1) 제 1차 십자군 운동(기원후 1095년 11월 8일).
(1) 이 십자군 운동은 실제로 베드로라는 한 유럽인 수도사가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했던 기원후 1087년경에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외모는 볼 품이 없었지만 사자같이 용감한 마음과 하나님과 같은 근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주교를 방문했는데, 이 감독은 회교도인 셀주크 족들에 의해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주교는 베드로를 통해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예루살렘을 구출할 군대를 교황이 일으켜 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2) 이교도들로부터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구원이라는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거룩한 근거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약한 지배력을 강화할 기회를 그 편지에서 간파한 우르반 2세는 에루살렘 주교의 이러한 탄원을 환영했다.
(3) 기원후 1095년 11월 18일에 프랑스 클레몽에서 한 특별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교황 수도사 베드로, 13명의 대주교, 225명의 주교, 390명의 대수도원장, 수많은 사제들과 수사들, 수천명의 기사들 그리고 무수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교황은 베드로를 참석자에게 소개했고, 베드로는 그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격렬한 연설을 했다.
"예루살렘 변경으로부터…나쁜 소식이 왔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저주받은 한 종족이 그리스도인들의 땅들을 침입했다…그리고 그 저주받은 종족은 그리스도인인 예루살렘 주민들을 불, 칼, 파괴로 전멸시켰다. 그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으며, 그리스도 교회들을 파괴해버렸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그들 자신의 예배 의식을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교회를 그들의 말을 매어 두는 마굿간으로 쓰고 있으며, 그들의 육신에서 나온 더러움으로 제단을 더럽히고 있다.
지금도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놓고 과녁 삼아 무수한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한 다음 머리를 구부리게 하고 그들의 칼이 그리스도인들의 목을 단 한 칼에 벨 수 있는지 어떤 지를 시험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여자들을 능욕하고 있다. 우리들의 나라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은 성읍들의 성문들 앞에서 그리고 교회들의 입구에서 통행세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돈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소지품 조사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고, 그들의 낡아빠진 구두 뒷축에 박힌 못들조차 그 안에 돈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지 어떤지를 조사하기 위해 잘리어졌다. 그들이 구토할 때까지 그들에게 마실 독약을 주었다. 그러나 구토물에서 한닢의 동전도 발견되지 않을 경우 어떤 보물이 창자 속에 숨겨져 있으면 그 보물을 찾으려고 그들의 창자를 칼로 잘리어 속까지 드러났다. 마음에 깊은 슬픔없이 누가 이사실을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피로 맺어진 여러분의 형제, 즉 동일한 그리스도의 자녀들이며 동일한 교회의 아이드리익 때문이다!"
(4) 이때 연사는 연설을 중단해야만 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룩한 도시 회복에 자신들의 생명을 바치려고 쇄도했기 때문이다.
(5) 제 1차 십자군은 부용의 갓프리(Godfrey of Bouillin)가 지휘했다. 도중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난을 겪은 후, 제 1차 십자군은 팔레스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안디옥에서 강력한 요새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때 피터바돌로 뮤(Peter Bartholomea)라는 한 젊은 수사는 성 안드레가 그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꿈을 꾸었다고 외쳤다. "일어나라! 가서 내가 성베드로 교회에서 너에게 보여줄 지점을 파라. 그러면 너는 그곳에서 빌라도의 군인이 주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 하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 거룩한 무기를 갖고서 군대의 선두에 서서 가라. 그러면 이교도들은 그 창 앞에서 도망칠 것이다."
이 꿈은 이루어졌고 창은 발견되었다. 기원후 1098년 7월 1일, 성찬식에 이어, 안디옥 시는 십자군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기원후 1099년 5월 9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다시 십자군은 올리벳 산에 살고 있는 한 수도사의 권면에 따라 예루살렘 주위를 일곱 번행군할 때 까지는 예루살렘 성지 회복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6) 예루살렘 주위를 일곱 번 행군한 직후, 예루살렘은 점령되었고, 십자군들은 무자비하게 닥치는대로 그들의 적을 쳐부수었다. 기원후 1099년 7월 23일, 갓프리는 예루살렘의 총독 겸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제 1차 십자군 운동은 끝났다.
2) 제 2차 십자군 운동(기원후 1146).
(1) 제 2차 십자군은 교황 에우레니우스 3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끌레보의 성 베르나르(St. Bernard of clairvaux)의 감명깊은 연설에 의해 크게 촉진되었다.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가 제2차 십자군을 이끌었다. 제2차 십자군 운동은 25만 명의 영국인 병사외 독일 병사의 생명을 잃게 되었던 하나의 완전한 재난이었다.
(2) 한 가지 새롭고 무서운 위협이 생존한 동안 아랍의 가장 위대한 군사적 천재인 살라딘(Saladin)이라는 인물에게서 제2차와 제3차 십자군운동사이에 이제 생겼다. 기원후 1187년 7월 15일이 탁월한 회교도는 갈릴리 바다 근처이며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를 하신 유서 깊은 곳인 하틴만에서 십자군들을 완전히 패배시켰다. 살라딘은 정복을 계속하여 기원후 1187년 10월 12일 금요일 예루살렘 시를 바쳤다,
3) 제 3차 십자군 운동(기원후 1189-1192).
사자와 같이 용감한 영국의 왕 리차드가 이 십자군을 이끌었다. 그는 이전에 살라딘에 의해 빼앗겼던 그리스도인의 요새들 중의 몇 개 요새를 점령했다. 그러나 리차드 왕은 예루살렘을 되찾기는 못했다.
4) 제 4차 십자군 운동(기원후 12-2-1204).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제4차 십자군 운동을 선동했다. 이 십자군을 플란더즈의 발드윈 백작(Count Baldwin of Flanders)이 이끌었다. 이 제4차 십자군은 팔레스틴에 이르지도 못하고 콘스탄티노플 시에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제 4차와 제5차 십자군 운동 사이에 성지를 회복하려는 두 번의 시도가 어린아이들 편에서 있었다.
(1) 프랑스의 목동 스떼빵이 이끈 시도. 기원후 1212년 6월 12살난 프랑스의 한 목동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이전의 십자군 운동들은 불결한 마음과 손 때문에 실패했다고 하신 환상을 보았다고 외쳤다. 그러나 순결한 소년 소녀들은 아랍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원후 1212년 7월 8세부터 18세까지로 이루어진 3만 명 이상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팔레스틴을 향하여 행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느 도시든 그 도시의 성벽에 이르게 될 때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 도시가 거룩한 예루살렘인지 아닌지를 물었다. 한달 간의 여행 끝에 그들은 죽거나 떠나버림으로 1만 명을 잃었다. 해양이 시야에 들어 왔을때 그들은 먹을 수 있는 충분한 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달려 내려갔다. 그들의 기대가 어긋났을 때, 그들의 수는 곧 6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때 사악한 노예 상인들은 그들을 배로 팔레스틴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소년 소녀들은 아프리카와 애굽에 노예로 팔리었다.
(2) 독일 소년 니콜라스가 이끈 시도. 열살 난 이 소년의 지휘를 따른 무리도 유사한 운명을 겪었다.
5) 제 5차 십자군 운동(기원후 1218-1221).
이번 원정은 항가리의 왕 안드레와 독일의 황제프레드릭 2세의 지휘를 따랐다. 그들은 애굽에 상륙하여 애굽을 점령했다. 회교도들은 십자군이 만약 애굽에서 퇴각한다면 십자군에게 팔레스틴 전 지역을 넘겨주겠다고 제의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제의는 이전에 있었던 적도 없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다시는 주어질 수도 없는 제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십자군들은 애굽의 보물 창고들을 장악할 기대로 차 있었기 때문에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래서 십자군들은 십자군 운동 전 기간을 통해서 가장 좋은 기회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
6) 제6차 십자군 운동(기원후 1228-1229).
이 십자군 운동은 대부분의 십자군 운동과는 달리다. 첫째, 이 십자군 운동은 성공했다. 둘째, 이십자군 운동은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비난을 받았는데, 그레고리 9세는 이 십자군 운동의 지도자 프레드릭 2세를 증오했다. 프레드릭은 회교도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회교도들은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십자군들에게 넘겨주었다. 기원후 1229년 2월 18일 프레드릭은 거룩한 도시에 입성하여 자신을 왕으로 포고하였다.
7) 제7차 십자군 운동(기원후 1248).
기원후 1244년 예루살렘은 회교도들에게 함락되었고, 기로 인해 제7차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 이번의 십자군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이끌리었지만, 거의 성취하지 못했다. 루이 9세는 한 동안 사로 잡혀 있었으며 억류되어 몸값을 강요당했다.
8) 제 8차 십자군 운동(기원후 1267).
이 마지막 십자군 운동은 프랑스의 왕 루이와 영국의 왕자 에드워드의 공동 지휘를 따랐다. 이 십자군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프레드릭 오웬 박사(Dr. G. Frederick Owen)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팔레스틴에 세워진 십자군 왕국의 운명은 팔레스틴 지역의 최종적인 함락으로 정해졌다. 갈멜산 남쪽에 위치한 작지만 튼튼한 요새 아슬릿(Athlit)만이 아직 점령되지 않았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들이 거의 알지 못했던 바를 기다리면서, 모든 지역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알 때까지 최후의 보루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후 저 마지막 슬픈 밤에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 있는 커다란 회의실에 모여서 기도한 후 그들의 배로 나아가 돛을 올린 최후의 십자군들은 팔레스틴에서 방향을 되돌려 키프러스로 항해했다. 이와 같이 192년간 계속되었던 드라마는 끝이났다. 초승달(회교군)이 십자가(십자군)을 이겼다. 그리고 십자군들은 파괴된 그들의 피와 그들이 치루었던 전쟁들의 기억 그리고 그들이 찾았다가 잃었던 왕국만을 뒤에 남겨놓았다."(「아브라함 부터 중동전쟁까지」)
7. 노예 기병 시대(기원후 1291-1517).
1) 'mameluke'이란 말은 "노예"를 의미한다. 이들은 궁전 호위병으로 봉사했던 애굽의 터어키 족 노예들이었다. 그런데 이 용맹스런 기병들은 그들의 애굽인 주인들에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애굽의 왕권을 물려받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팔레스틴에 침입하여 기원후 1291년 십자군을 몰아냈다. 그들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몹시도 가혹한 제한을 가했다. 법에 의해 제 1계급의 회교도 시민들과 구별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노란색의 두건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푸른색 두건을 둘러야 했다.
2) 노예 기병 시대에 거룩한 땅은 기록에서 가장 심하고도 오래 계속되었던 가뭄들 중의 하나를 겪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식량은 동이나 버렸다. 사람들은 고양이, 개, 해충을 먹었고 때때로 어린아이들도 먹었다.
8. 오트만(터어키족) 시대(기원후 1517-1917).
1) 기원후 1517년 터어키의 셀림 1세(냉혹한 자)는 매멀룩 족을 쳐부수고 팔레스틴을 장악했다. 이 이전에도 오토만 터어키 족들(술탄 오토만1세 이후에 불리워진 이름)은 기원후 1453년에 콘스탄틴노플을 정복하고 팔레스틴을 지배했다. 셀림1세의 아들은 셀리만(수베이만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이었는데 그는 훌륭한 왕이 되었다. 셀리만은 기원후 1520-1566년까지 통치했으며, 4백년 간 터어키 족이 팔레스틴을 지배하는 기간 중에 가장 위대한 군주였다. 많은 업적 가운데 특히 그는 예루살렘 성벽들을 재건했는데 그 당시 재건된 예루살렘 성벽들은 오늘날도 그의 위대함에 대한 하나의 기념비로 서 있다. 그가 죽은 직후 팔레스틴은 많은 파샤(터어키 태생의 지방장관)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파샤들은 중동의 특정한 지역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막대한 뇌물들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터어키 정부의 최고 술탄에게 바쳤다. 이로 인해 "진저리나는 터어키인"의 시대가 실제로 시작되었다. 어떤 예외도 없이 팔레스틴은 욕심 많고 곳곳에 산재해 있는 한 무리의 잔인한 세리들에 의해 이제 지배되었다. 이 세리들은 백성과 토지를 약탈했다. 유대인들, 아랍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치욕스러운 지배를 받으며 고통당했다.
2) 기원후 1798년 나폴레옹 보나빠르트가 중동에 들어왔다. 그해 동안에 나폴레옹은 3만 명의 군대와 대함대로써 유럽을 장악했다. 그런 다음 그는 팔레스틴을 정복하여 유대인들에게 그 고향 땅을 되찾아 줄 뜻을 밝혔다. 이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은 나폴레옹이 약 665년전바르코크바에게 마지막으로 부쳐 주었던 영광스런 칭호인 메시야라고 생각했다.
3) 그후 나폴레옹은 해안 평야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하여 가자, 자파 그리고 가이사랴를 정복했다. 이때 자파 전투에서 붙잡은 3천 명이 넘는 포로들을 해안에서 살해하는 잔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나폴레옹은 이들을 처리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터어키 군대가 이스르엘계곡에서 나폴레옹을 격퇴하려고 했지만 나폴레옹은 터어키 군대를 다볼 산 기슭에서 쳐부수었다.
4) 그러나 나폴레옹은 강력한 중심 도시 아크레를 점령할 수 없었다. 이 해안 도시는 터어키와 영국군에 의해 방어되었다. 나폴레옹이 아크레를 점령했더라면 역사는 분명히 바뀌었을 것이다. 그후 프랑스의 이름 높은 황제 나폴레옹은 고국으로 향했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했다.
5) 1838년에 영국의 영사관이 예루살렘에 세워졌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영사관이었다. 1843년 프랑스,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페인도 마찬가지로 이 일을 행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제 팔레스틴에 매우 관심을 두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카톨릭 그리고 유대인들이 또한 이기간 중에 선교단을 창설했다. 유대의 인구는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839년에 유대 인구는 1만 명, 1880년에 3만 5천명, 1900년에 7만명, 1914년에는 9만 명이었다.
6) 1853년의 크리미아 전쟁은 팔레스틴에 대한 권리를 놓고 일어났다. 이 전쟁은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거룩한 땅 예루살렘에 대한 어떤 통치권을 뺏기 위하여 터어키에 침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터어키는 프랑스와 영국에 도움을 청했다. 러시아는 그 전쟁에서 패했다.
같은 해에 장차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될 유럽에 있는 한 유대인이 거룩한 땅에 대한 그의 동경을 글로 썼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분이 내게 나의 소원을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국가의 존재다. 여러분이 내게 나의 소원을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약속의 땅이다. 여러분이 내게 나의 소원을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성전이요, 우리가 빼앗긴 모든 것,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 우리가 찾으려고 싸웠던 모든 것, 우리의 아름다운 나라, 우리의 거룩한 신조, 우리의 소박한 예절, 그리고 우리의 고대 관습이다." 이러한 진술은 1874-80년에 대영 제국의 수상이요 현재의 영국 보수당의 창립자인 쟈야민 디스렐리(Benjamin Disraeli)에 의해 1868년에 행해졌다.
7) 1878년에 파리 외곽의 어느 헛간에서 잠자고 있던 한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환상이라고 믿었던 바를 갖고 있었다. 그 환상의 출처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꿈은 이후에 이스라엘의 새로운 국가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유대인의 이름은 엘리에젤 벤 예후다(Eliezer Ben Yehouda)였다. 그의 환상은 팔레스틴에 히브리어를 다시 소개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가 꿈을 꾸었던 당시에 전 세계로 흩어져 있었던 약 2백만의유대인들은히브리어로 말하지 않고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벤 예후다는 러시아에서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드보라'라는 유대인 처녀와 결혼했다. 그 이듬해 그들은 팔레스틴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팔레스틴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벤 예후다는 이제부터는 그가 그의 신부에게 히브리어로만 말하겠다고 그녀에게 굳게 맹세했다. 그들은 자파에서 배를 내려 예루살렘으로 향해갔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그 부부는 2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돌연히 벤 예후다는 모든 군중을 향해 히브리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개한 유대인들에 의해 처음부터 거의 돌에 맞아 죽을뻔 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었던 어떤 몇 마디의 히브리어도 기도에 한해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 예후다는 변치 않았다. 그의 거룩한 소명 때문에 고국 사람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은 후, 그의 아내는 죽었다. 그의 아내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자기 여동생이 러시아에서 이곳으로 와 벤 예후다와 결혼하여 그녀를 대신해 달라는 것과 벤 예후다의 일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과 같이 기록하였다. "드보라, 벤 예후다는 그녀의 묘비에 다음 새롭게 거듭난 유대 백성의 첫번째 어머니."
벤 예후다의 동족들은 그를 계속해서 미워했으며 유대인의 잔인한 지배자였던 터어키 족에 의해 체포당하도록 실제로 계획했다. 그러나 갑자기 데오도르 허쯜이라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한 유대인이 예후다의 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곧 만사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유대 백성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들은 벤 예후다를 영웅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가 하려고 애쓰고 있는 일의 중요성에 뜻을 같이했다. 팔레스틴의 독일계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그들의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른 유대인 무리들도 뒤따랐다. 벤 예후다는 여덟권의 히브리어 사전을 편찬했다. 그 사전에서 그는 성서와 탈무드의 히브리 단어들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많은 단어들도 새로이 만들었다. 그래서 벤 예후다는 사어의 재생과 부활이라는 전에는 결코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던 일을 성취했다. 결코 세계사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8) 400년간의 터어키 지배하에서 그리고 바르 코크바가 132년에 일으킨 반란 이후 거룩한 땅의 역사에서 참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 1897년에 일어났다.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테오드로 허쯜이 시온주의(Zionism)로 알려진 한 정치적인 운동을 스위스의 바젤에서 시작했던 것은 바로 1897년 중에 있었던 일이다.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팔레스틴에서 파견된 204명의 대표들이 8월 29일에 시작된 이 중대한 회의에 참석했다. 이 날부터 세계 시온주의자 조직이 생겼다. 이 조직은 유대 민족을 위해 팔레스틴에 합법적으로 일반에게 인정된 조국 건설을 그 목표로 갖고 있었다.
허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 "백성이 없는 대지가 있다! 나라없는 백성이 있다! 나라없는 백성에게 백성없는 땅을 달라!" 이 회의는 세가지 원대한 것을 성취했다.
(1) 이 회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땅과 재결합하는 실재적이고 가시적인 희망을 주었다.
(2) 이 회의는 중앙에 다윗의 별이 있고 푸른색과 흰색의 넓은 줄무늬가 쳐 있는 유대인의 깃발을 탄생케 했다.
(3) 이 회는 유대인의 국가인 "희망"이란 뜻의 "하티크바"를 탄생시켰다. 그 가사에 주목해보자.
"우리 가슴 속에서 유대인의
정신이 참으로 여전히 고동치고 있는 한.
유대인이 동방, 시온을 향해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한.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의 희망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2천년동안 우리는 시온과 예루살렘,
그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희망을 간직해왔다!"
그 당시에 허쯜은 50년 이내에 목적한 유대인의 국가가 실제로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역사는 그의 예언이 단 9개월빗나갔음을보여주고 있다. 1897년 8월 29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렸던 회의에 참석했던 204명의 대표들 중 15명이 이 놀라운 예언이 1948년 5월에 실현된 것을 보려고 참석했다. 그러나, 이 회의의 열기 중에는 메시야 대망의 퇴색이라는 슬픈 기록이 있었다. 막스 노다우(Max Nordau)는 그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정치적으로 요청되었던 새로운 시온주의(New Zionism)는 모든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있는 점에서 여러 낡고 종교적이며 메시야적인 것과 다르며, 더 이상 메시야 사상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리고 새로운 시온주의는 기적에 의하여 팔레스틴으로 되돌아 가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길을 준비하고자 한다."
9) 그 회의 직후, 허쯜은 유럽과 서아시아 전역의 정부 지도자들과 끊임없는 외교적인 노력과 협상을 할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러시아, 대영제국, 이탈리아, 독일을 방문했으며, 교황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그는 팔레스틴을 지배하고 있었던 터어키 왕을 직접 만나러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프레드릭 오웬(Frederick Owen)은 터어키 왕과의 이 놀라운 회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몇 달 동안 그는 이 위대한 지배자와 개별적인 면담을 할 특전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날 허쯜이 바깥 사무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왕의 많은 노예들 중의 하나가 들어와서 품위 있게 보이는 이 사람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고개짓으로 불렀다. 그들은 길고 넓은 회랑들을 통과하여 마침내 왕실에 도달했다. 왕실은 값비싼 많은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왕의 옥좌는 순금이었다. 훤칠한 키에 품위있고 잘생긴 테오도르 허쯜은 겸손하게 절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말하기 시작했다.
허쯜은 유대인들이 유럽의 모든 곳에서 박해를 받았으며, 미국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거할 곳을 발견할 수 없었는데 그러한 미국도 유대인들 모두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왕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옛 고향땅 팔레스틴으로 되돌아 가도록 배려할 것인가? 키가 작고 얼굴이 둥글며, 화려하게 차려 입은 왕이 황금 옥좌 위에 놓여 있는 부드러운 베게에 기대어 앉아 있는 동안, 자신의 개인적인 무용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고 있었던 그 키 크고 미남의 말 잘하는 방문자에게 충분히 감명을 받아서 2천만 달라를 내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되돌아 가기를 허락하는 제안을 했다!"
10) 인간의 지혜가 미치는 한에서는, 이 제안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땅을 소유하고 통치했던 솔로몬 시대 이래로 3천 년을 지내오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그 제안은 그러한 기회가 될 수 없었다. 허쯜은 이 인간적인 구입 가격의 일부라도 책임지도록 부유한 유대인이나 이 방인 어느 한 사람도 설득시킬 수 없었다. 황금같은 기회는 곧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1904년 7월 3일, 테오도르 허쯜은 심장마비로 죽었다.
11). 그러나, 그는 노도와 같은 유대주의의 바다 위에 힘찬 결의의 파도를 만들었다. 그 파도는 장차 맹렬하게 강해져 약속의 땅 해안에 힘차게 부딪칠 때까지 멈춰지지 않을 것이다.
45년 후 감동적이고도 뜻 깊은 의식이 이스라엘에서 있었다. 프라이스(Walter K. Price)는 이 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49년 8월 16일 오후 2시 무렵, 한 미국인 비행사에 의해 날아 온 한 대의 비행기가 이스라엘의 지중해 해안 위에 나타났다. 곧 바로 그 비행기는 네 대의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에 의해 한 편대를 이루었다. 그날 이 비행기는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왔었다. 이 비행기는 45년 전에 죽었던 한 유대인의 유해를 운구해왔다. 그 동안 내내 비엔나의 한 공동묘지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던 그 유대인의 시신은 시온의 푸르고 흰 국기에 싸여져 있었다. 그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었던 무덤은 그 공동묘지에 있는 많은 다른 무덤들과 같은 하나의 평범한 무덤이었다. 키 큰 비석은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철망 위로 담쟁이가 지난 세월 동안 기어올라와 있었으므로 주의해서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 비석이 누구의 비석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비석과 철망의 위, 아래, 그리고 모든 측면에, 히브리어, 러시아어, 독일어로 쓴 필적이 있었다. 이러한 필적들이 신성한 무덤을 욕되게 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글들은 1904년이래 그 무덤을 찾아왔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느꼈던 존경심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그 글들에는 소원 희망, 기도, 격언, 그리고 축복의 내용이 깃들어 있었다. 그 무덤을 찾은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왔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한 민족적 국가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그들의 동경과 이 거룩하게 심어진 열망을 끝까지 성취하려는 그의 지도력에 대해 그곳에 시신을 누인 그 사람에게 그들의 감상을 서로 다른 많은 언어로 표현해 놓았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국가가 형성된 지 겨우 일년이 되는 1949년 지금, 그 사람의 시신은 이스라엘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후 그 사람의 시신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외고가 기바트 허쯜(Givat Herzl)의 거룩한 흙 속에 안장될 것이다. 시신을 실은 비행기가 라잇다(Lydda) 공항에 착륙하자, 이스라엘의 육해공군으로 구성된 의장대는 비행기를 둘러싸고 칼집에서 군도를 뽑아 높이 쳐들었다. 관보(prayer shawl)로 덮어진 나무 상자에 들어 있는 금속관은 비행기에서 정중하게 들어올리어 검은 영구차에 놓였다. 몇 분 후 금속관은 지중해 연안 텔 아비브의 프로메나드(Mediteranean Promenade of Tel Aviv)에서 정식으로 영구대 위에 놓였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행열을 이루고 관앞을 조용히 지나갔다. 행렬의 새벽에 차들이 굉장히 긴 행렬이 예루살렘 외곽 작은 산봉우리에 그 관을 안장하기 위하여 유대의 언덕 마을길을 완전히 메웠다. 열명씩 무리를 지어 농부들, 사업자들, 노동자들, 옛 정착자들과 새로운 이민들이 성지에 있는 300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흙을 날라다가 그 관을 덮기 위해 그 무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랍비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인 카디쉬(Kaddish)를 읽었다. 북이 울렸다. 1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거대한 군중이 시온주의자의 국가인 '하티크바'를 노래했다. 그때 다윗 벤-구리온(David Ben-Gurion)수상은 '이것은 유대 역사에서 죽은 영웅이 이스라엘로 돌아온 두번째 가장 중요한 귀환이다. 첫번째 귀환은 요셉의 시신이 이집트로부터 관에 넣어진 채 돌아왔던 3천 3백년 이상 전에 일어났다'고 말했다.
근대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인 테오도르 허쯜은 그가 사랑했고 고국 땅의 흙 속에 잠들었다"(Next Year in Jerusalem, pp. 11,12).
12) 스위스에서 개최되었던 유대인 회의 후 꼭 일년이 되는 1898년에, 역사적이며, 예언적인 의미를 가진 또 다른 사건이 팔레스틴 지역 내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독일 황제 카이젤 빌헬름 Ⅱ)가 하얀 군마를 타고 지파 성문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일어났다. 그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으며 금관을 쓰고 있었다. 이 호화로운 행차는 중동에서 요새를 차지하려는 독일의 시도였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시도는 성서학자들이 당나귀 새끼를 타고 온 이전의 점잖은 정복자(마 21:1-9; 요 12:12-15)와 백마를 타고 올 미래의 승리의 독재자(계 6:1,2;계13:1-18)를 연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3) 19세기 말엽에 진저리나는 터어키에 대한 적대감이 팔레스틴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아랍인들이 터어키족을 싫어했다. 1912년 불만을 품은 한 터어키군 분대가 청년 터어키인 혁명(Young Turk revolution)이라는 한 반란을 일으켰다. 아랍인들은 더 훌륭한 통치를 희망하면서 이 반란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그들의 새로운 정복자들도 옛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패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14) 1914년 여름에 중동에서의 정치적 그리고 지리적 상황을 영원히 바꾸어 놓을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세르비아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오스트리아 황제의 조카이며 후계자)이 총탄에 맞아 살해되었던 7월 28일에 발생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거의 동시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가 대영제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세르비아를 도우러 왔다.
15) 터어키는 1914년 11월 5일 독일에 가담했다. 그러나 1916년 6월 9일, 아랍인들은 터어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랍인들은 로렌스(Thomas E. Lawrence)라는 이전에 고고학자였던 한 영국인의 도움을 받았다. 이 영국인은 이후에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로렌스는 대영제국의 편에서 싸울 20만 명의 아랍인 군대 소집을 도왔다.
1. 영국 시대(기원후 1917-1948).
1) 1917년 4월 6일, 미국은 세계 제1차 대전에 참가했다. 그해 7월에 영국의 장군 에드문드 알렌비(Edmund Allenby)경은 팔레스틴지역 동맹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1월 16일, 강력한 해안 도시인 자파가 점령되어 예루살렘 공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2월 8일에 영국 군대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이 날은 유대인의 하눅카(Hanukkah) 축제일이었는데, 이 하눅카 축제는 기원전 165년 마비카족에 의한 예루살렘의 해방을 기념했다. 12월 9일, 일요일 아침 일찍, 터어키군들은 한발의 총도 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2) 12월 11일, 알렌비 장군은 자파 관문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공식적인 입장을 했다. 칼리프인 오마르(the Caliph Omar)가 서방(로마)세계로부터 자파 관문을 탈취한 다음 예루살렘성에 입성했던 기원후 637년에도 이와 동일한 길을 통해서였다. 이제 서방 세계의 한 후손이 예루살렘 백성에게 그 길을 되찾아 주고 있었다. 프레드릭 오웬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알렌비라는 이름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귀에 이상한 힘을 갖고 들리었다. 그들에게 알렌비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알라'(신)와 '네비'(예언자)을 묶어 놓은 것처럼 들렸다. 즉,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그는 터어키의 속박에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20세기의 예언자였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Jerusalem, p. 118).
3) 해방된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가? 이미 영국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만사를 결정할 것이다. 폭발에 필요한 아세톤이 전쟁 중에 포탄에 쓰여짐으로써 그 양이 극도로 부족했다. 영국 해군성의 제 1 상원의원(윈스톤 처어칠)은 한 뛰어난 유대인 화학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카임 바이즈만 박사(Dr. Chaim Weizmann)라는 이 사람은 얼마되지 않아 옥수수 열매의 발효를 통해 실험실헤서 아세톤을 제조해 내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것이 대영제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생명이 되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감사해 하는 정부는 그때 바이즈만에게 보상하고자 하였다. 바이즈만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고, 단지 팔레스틴을 유대 백성의 고국으로 만들어 줄 것만을 요청했다. 그 이후, 감사하는 유대 백성들은 이 조용한 성품의 화학자를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그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다 주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된 지 꼭 사흘 후인 1948년 5월 17일에 뉴욕에서 이 소식을 받았다.
4) 많은 토론을 한 다음, 1917년 11월 2일 영국 정부는 외무장관 아서 발포어(Arthur Balfour)가 영국의 유대인 지도자 로드 로드스차일드(Lord Rothschild) 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유명한 '발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보내 선포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틴에 유대 백성을 위한 국가 건설을 지지하며, 이 목적의 달성을 촉진하기 위하여 최선의 유대 백성의 노력을 이용할 것이다. 이 목적이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들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 권리, 또는 어떤 다를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향유하는 권리나 정치적인 지위를 손상할 일은 어떤 것도 행해지지 않을 것으로 분명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5) 이것은 미국의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을 포함하여 동맹국의 여러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6) 1920년 6월 30일, 최초의 영국 고등 판무관이며 유대인인 허버트 사무엘 경(Sir Herbest Samuel)이 그의 임무를 맡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을 입고 있었으며, 모자도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원전 587년 시드기야 왕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2천 5백년 이상을 지나오는 동안에 성지에 대해 어떤 실재적인 정치적 권한을 행사한 첫번째 유대인이 되었다.
7) 처음에는 영국인, 아랍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어떤 실재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사실상 1919년 3월 3일 자의 한 편지에서, 그 당시의 아랍 대변인이었던 에밀 파이잘(Emir Feisal)은 미국의 시온주의자의 지도자인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아랍인들, 특히 우리들 중에서 교육받은 자들은 시온주의 운동에 대단히 공감하고 있다. 이곳 파리에 있는 우리 대표단은 시온주의 기구가 평화회담에 당시 제출했던 제안들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 제안들은 온건하고도 적절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제안들이 채택되는 것에 기여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또 우리는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진정으로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도움이 없을 때에는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성취될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8) 그러나 곧 시끄러운 일이 터졌다. 영국은 그들이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유대인과 아랍인 두 모두에게 했다. 1929년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서쪽의) 통곡의 벽에서 살해되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바위 도움'(Dome of Rock)과 '아크사의 회교 사원'(the Mosque of Aksa)을 파괴하려고 꾀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종교적인 문제들 이외에도 경제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들이 존재했다. 아랍 국가의 지배자들과 토지소유자들은 유대인 농장주들이 팔레스틴의 아랍 노동자들에게 중동 어느 곳에서 지불되고 있었던 액수보다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하는 것 때문에 곤란을 받았다.
9) 1936년에 예루살렘의 아랍인 지도자가 이끄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그 해 중에 대영제국은 필(Peel)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왕립 위원회(Royal Commission)를 보내어 성지 문제를 연구하도록 했다. 그래서 이 위원회는 유대와 아랍 사이에 팔레스틴을 분할할 것을 권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그 제안을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1939년 5월 17일에 대영제국은 아랍인들(그들은 중동 민족들의 절대 다수를 대표했다)을 달래기 위한 백서(White Paper)를 발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먹구름이 유럽의 하늘 위에 급속하게 모여들고 있었으며, 영국은 나치스와 회교국들 모두와 싸우기를 원치 않았다.
10) 그 백서는 팔레스틴이 전 인구의 30%센트로 제한된 소수의 유대인을 가진 하나의 아랍 국가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유대인 이민은 줄어들게 될 것이고 팔레스틴에서 유대인들이 땅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몇몇 지역에 제한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 백서는 발포어 선언의 쓰디쓴 배반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통치하고 있는 독일에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이민 제한 조치를 반대했다.
11) 이 기간 중에 유명한 하가나(유대 민족 방위군)가 조직되었다. 1939년 9월에 독일이 폴라드에 침입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2)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영국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일본·독일·이탈리아의 3개국에 대적하여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다윈 벤합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다윗 벤-구리온은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백서와 싸울 것이며, 우리는 백서가 발표되지 않았던 것처럼 전쟁에 나가 싸울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싸웠다. 13만명의 이스라엘인이 군대에 입대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대영제국을 위해 적의 이면에서 스파이로 복무했다. 1967년 7월 6일 전쟁 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던 모세 다얀은 1940년대에 시리아와 맞서 영국이 싸웠던 전쟁 중에 그의 눈을 잃었다. 그러나 백서로 유리해졌던 아랍 지도자들은 잠시 동안 히틀러 편에 가담했다. 예루살렘의 아립인 지도자들은 실제로 나치스와 협력하기 위해 독일군에 입대했다.
13) 전쟁이 끝난 후, 벤-구리온은 아우슈비츠와 벨센에 있는 나치의 죽음의 포로 수용소를 방문했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어느 때보다도 더 굳은 결의를 갖고서 팔레스틴으로 돌아왔다.
14) 아랍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열국 간의 긴장이 전후에 고조되었다. 1946년에 영국으로 하여금 팔레스틴을 떠날 결정을 공식화하게 했던 국제적인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출애굽 사건(the Exodus Event)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사들인 후, '출애굽 1947'(Exodus 1947)로 새로 이름 붙여진 한 피난선이 7월중에 유럽을 향하여 나아갔을 때 이 사건은 시작되었다. 4천톤의 이목재선은 프랑스 해안에 도착하여 4,554명의 유대인 피난민을 싣고 팔레스틴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영국선이 이것을 곧 알아채고 백서의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 배를 파선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 배는 하이파항에 정박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4,554명의 피난민은 영국인들에게 체포되고 세 척의 감옥선에 실린채 바다로 밀려나 프랑스의 한 항구에 다시 정박했다. 그러나 이때 유대인들은 배에서 떠나기를 거부하고 단식투쟁을 계속했다. 이러한 비극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자포자기하여 대영제국은 그들의 백서 정책을 폐기하고 국제연합이 팔레스틴을 아랍인과 유대인사이에 분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건은 또한 여섯번째요 마지막 '알리야'(aliyah) 귀환을 나타냈다. 이 모든 '알리야' 귀환은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히브리어 '알리야'는 '오르다'라는 뜻이다. '알리야'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토라(Torah)를 읽기 위해서 앞으로 나오게 된 사람을 말하거나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졌을 수도 있다.
여섯번의 팔레스틴 귀환 기간들은 다음과 같다.
1. 1882-1903
2. 1903-1914
3. 1919-1925
4. 1925-1932
5. 1933-1939
6. 1940-1948
15) 그런데 국제 연합 팔레스틴 특별 위원회(U. 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는 제네바에 머물며 영국 칙령의 종식을 충고했다. 그 위원회는 팔레스틴의 분할과 이스라엘을 위한 독립 국가의 창설을 옹호했다. 1947년 11월 29일 33대 30으로(기원 10표) 국제 연합 총회는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다음날 유대인에 대한 아랍의 적개심이 폭발했다.
1948년 초, 영국은 칙령을 폐기할 뜻을 밝혔고 5월 14일 한밤에 팔레스틴에서 철수했다. 즉시 아랍과 유대인의 지하 전쟁 활동이 표면화되었다.
5월 14일 해뜰 무렵에 대영제국의 국기 유니온 잭(Union Jack)은 예루살렘에 있는 정부 청사 위의 깃대로부터 내려갔다. 팔레스틴을 통할하고 있었던 영국의 고등판무관 알렌 골든 커닝함경(Sir Allen Gorden Cunningham)은 열 일곱발의 예포가 쏘아지는 가운데 이것을 끝으로 성지를 떠났다.
16) 같은 날 오후 4시가 되기 직전, 다윗 벤-구리온은 텔 아비브에서 로드스차일드 볼레발드 (Rothschild Bovlevard)로 차를 타고 가서 현대식으로 지은 이층까지 하얀색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이 모임에는 약 400명이참석했다.이400 명에는 유대의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지도자들 이외에도 많은 국내외 언론계 대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각 4시에 벤-구리온은 개회를 선언했다. 모임의 참석자들은 일어서서 옆방에서 팔레스틴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가운데 유대인의 국가를 불렀다.
17) 예루살렘에는 아랍 적들에 의해 참석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포위된 채 있었던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텔 아비브에서 열리고 있는 의식을 지켜보기 위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자마자 벤-구리온은 일어나서 단호하고 확실하며 힘찬 목소리로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선언을 히브리어로 읽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은 데오도로 허쯜의 초상화 아래 서서 17분 동안에 걸쳐 697개 단어로 된 역사적인 문서를 읽었다. 이러한 자유 선언 가운데 몇 가지 주요 귀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의 땅에서 유대 백성은 태어났다. 이 땅에서 유대 백성의 영적이고, 종교적이며, 민족적인 특성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독립국가로 살았다. 여기서 그들은 민족적이고도 세계적인 의미의 문화를 창조했으며, 책 가운데 영원한 책을 세상에 주었다.
강제로 추방당했을 때에도, 여전히 유대 백성들은 흩어진 모든 나라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정치적 자유를 다시 찾으려는 기도와 희망으로 유대인의 땅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잃지 않았다.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러한 애착으로 인해 자극을 받게 되었을 때, 모든 시대의 유대인들은 옛 고향땅에서 그들의 뿌리를 되찾고자 애썼으며 근세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에 왔다.…
유대 백성의 독립 국가에서 유대 백성의 운명을 정하는 것은 어떤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유대 백성의 당연한 권리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국토와 시온주의 운동에서 유대 백성을 대표하고 있는 국민회의의 성원들인 우리는 팔레스틴에 대한 영국 칙령이 종료되는 날에 회의를 개최했으며, 우리의 당연하고도 역사적인 권리와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안에 의해 이스라엘의 땅에서 유대인의 국가, 즉 이스라엘의 국가 창설을 선포한다.…
이스라엘 국가는 유대인의 이민과 망명자들의 입국을 쾌히 허락할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는 모든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전념할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된 바처럼 자유, 정의와 평화의 터전 위에 세워질 것이다.…
우리는 바벨론 포로 이후 흩어진 유대 백성들에게 이민과 건설로써 우리와 힘을 합치기를 청하며, 이스라엘을 되찾으려는 오랜 동안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에서 우리의 우방이 되어 주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바위'(역주 : 삼하 23:3에 나오는 말로 '하나님'을 가리킴)를 믿으며, 고국의 땅 텔 아비브시에서, 히브리 역년 5708년 제 2월 5일이요, 서시 1948년 5월 14일, 이 안식일 저녁 국가 임시 회의 이번 회기중에 증인들로서 이 선언에 서명한다."
18) 같은 날 오후 5시 뉴욕에서는 국제연합 총회의 특별 긴급 회의가 뉴욕 시간 오후 6시(팔레스틴에서는 한밤)에 틀림없이 맹렬하게 터질 전운을 숙고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긴급회의가 중동의 전운을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뿐이었다. 갑자기,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만이 새로운 유대 국가를 막 인정했다는 놀랍고도 전혀 예기치 못했던 뉴스 보고가 와싱튼으로부터 국제연합에 접수되었다. 그때 뉴욕 시간으로 오후 6시 11분, 그러나 예루살렘 시간으로는 6시간 늦은 밤 12시 11분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국가로 독립된지 꼭 11분 후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트루만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 정부는 유대인의 국가가 팔레스틴에 창설되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으며, 유대의 임시 정부로부터 인정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임시 정부에게 신생국 이스라엘의 '사실상의' 권한을 인정했다."
사흘 후인 5월 18일에 러시아는 이스라엘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기원후 70년 9월 8일 이래 처음으로 성지는 이방인의 공식적인 조처에 의해 유대인들의 것이 되었다.
10. 독립시대(기원후 1948-현재).
1948년 5월 14일에서 1973년 10월 6일 사이에, 넷 이상의 주요한 전쟁이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 중동에서 행해졌다.
1) 독립 전쟁은 1947년 11월 29일에 시작되어 1949년 2월 24일까지 계속되었다(잠시 중단되었었지만).
(1) 1948년 5월 15일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그리고 레바논의 침공을 받았다. 이 침공으로 약 4천5백만아랍인들과6만 4천 유대인들이 싸우게 되었다. 아랍국가들은 북쪽, 남쪽, 그리고 동쪽에서 포위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배후인 서쪽으로 지중해가 있었다.
(2) 아랍인들은 군사수에서 40대 1, 인구수에서 100대 1, 장비면에서 1,000대 1, 그리고 국토 면적에서 5,000대 1로 유대인들보다 우세하였다. 전쟁 바로 직전, 영국의 육군 원수 몽고메리(Montgomery)가 팔레스틴을 방문하여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을 지중해로 몰아 넣는 데는 단 8일밖에걸리지않을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스라엘 땅은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과 모두 인접해있는, 600마일에 걸친 국경선을 가진 길고 좁다란 땅이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곤란하고 어려웠다.
(3) 동방 아랍의 공격 계획을 단순했다. 이집트가 '남쪽'에서, 5천명 규모의 2개 여단을 보내 네게브를 휩쓸고, 1개 여단은 텔 아비브로 향하며 또 다른 1개 여단은 예루살렘을 향하기로 되어 있었다. '북쪽'에서,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군대들이 갈리리를 격파하고 하이파로 들어가, 텔 아브브로 향할 것이다. '동쪽'에서, 요르단이 1만명의 병사를 보내어 서안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구 도시를 차지하고, 신도시를 포위 공격할 것이다.
(4) 이 광범위하고도 잘 무장된 침공에 대적하여, 이스라엘은 1만정의 소총, 소총 1정당 탄알 50발, 4문의 구식 대포, 그리고 3천 6백정의 기관단총 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5) 상황은 이스라엘에서 전혀 희망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양 적군들의 태도는 서로 달랐고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군대의 규모나 무기가 아닐 것이다. 아랍인들에게는 그 전쟁의 목적이 영토의 확장과 복수였으나, 절망적인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오직 생존의 문제였다. 인간은 자신의 땅을 확장하기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싸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것만이 예상을 뒤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오웬즈 박사(Dr. G. F. Owen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네 가지 목표가 유대의 군사 지도자들 앞에 놓여 있었다. '첫째', 침공하는 군대의 통로에 있는 모든 유대인 마을을 끝까지 방어하는 것, '둘째', 해군을 창설하여 봉쇄선을 제거하고 해상로로 병사, 군수품, 이민들을 데려오는 것. '세째', 예루사렘의 포위망을 제거하는 것. '넷째', 공세를 취하여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 (Abraham to the Middle East Crisis, p. 325).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유대의 군사 지도자들은 네 가지의 모든 목표를 완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① 그들은 그들의 농장과 작은 부락들을 방어했다.
② 그들은 보잘것없는 해군을 창설했다. 이전에 피난선이었던 다섯 척의 퇴역 배들이 동원되었다. 이 배들에다 쇄빙선 한 척과 트롤어선 한 척이 덧붙여졌다. 이 일곱 척의 배들이 이스라엘 해군을 구성하고 있었다. 5월 27일에 네 척의 이집트 군함이 텔 아비브 해안 앞바다에 나타났다. 전쟁에 쓸 수 있는 이스라엘의 선박은 엘라드호 뿐이었는데, 엘라드호에는 실전에 쓸 수 있는 20미리 기관포 2문과 적을 속이기 위해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진 6인치 포 모조품 2문이 장치되어 있었다. 이 엘라드호는 적 군함들을 속여 위협함으로써 황급히 후퇴시켰다. 그 이후, 10월 21일에 있었던 한 해전 중에 이집트 해군의 기함인 '패룩'(The King Farouk)호가 이스라엘 해군에 의해 침몰되었다.
③ 유대의 군사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포위망을 제거했다.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주요 도로들은 아랍군에 의해 통제되었다. 놀라운 독창성과 힘을 발휘하여, 몇 천명의 이스라엘 시민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었던 석회암으로 된 유대 언덕을 뚫어서 비밀스런 "버어마 통로"(Burma Road)를 만들었다. 일방 통로를 가로질러 예루살렘 안에 있는 10만 명의 유대인들을 위해 절실히 필요했던 식량과 무기들이 운반되었다. 시편 137편 5절의 말씀,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어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슬로건들이 구출에 사용된 지이프 차들 위에 붙여 있었다.
④ 군사 지도자들은 그 이후에 반격을 시작했다.
(6) 5월 15일부터 6월 11일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른 다음, 국제연합에 의해 4주 간의 휴전에 들어갔다. 이 휴전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은 체코슬포바키아로부터 막대한 양의 전쟁 무기를 비밀리에 사들였다. 전투가 7월 9일에 다시 터졌을 때, 이스라엘은 아랍군대와 정면으로 맞섰다. 7월 18일에 교전 상태는 다시 중단되었다. 9월 17일, 국제연합의 중재자 베르나도뜨 백작은 과격파(the Stern Gang)로 알려져 있었던 유대인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이미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벤-구리온은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2만 달러의 보상금을 걸었다.
(7) 10월 15일, 마지막 국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 전쟁은 시나이 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전처럼, 새로 보충된 이스라엘 군대는 이집트 군대를 신속히 무찔렀다. 1949년 2월 24일, 독립 전쟁은 끝났다.
(8) 이 작은 나라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국력이 많이 강화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승리에는 희생에 뒤따랐다. 이스라엘은 전 인구의 약 1%에해당되는유대인6천 명의 생명이 승리의 댓가로 희생되었다(그러한 손실을 미국에 적용해 본다면 미국은 8개월간에 걸친 한 전투에서 2백만 이상의 군인을 잃은 셈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독립 전쟁의 결과로서 1947년 분할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할당되었던 것보다 23% 더 많은 영토를 획득했다. 돌이켜 보건대 아랍인들은 그 분할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9) 존스 홉킨스 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 의 셈어 교수인 올리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그러한 승리에 대해 그의 놀라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알려진 진기한 사건만큼 그토록 유별난 사건은 역사에 결코 없다.…우리가 알고 있는 한, 세계사에서 한 민족이 멸망된 후 세월이 흐른 뒤에 돌아와 민족을 스스로 다시 세웠던적은 어떤 때에도 없었다. 2천 5백년 후 이스라엘 이전 역사의 회복을 재현했다고 할 만한 것을 찾은 것이 확실하다"(Israel : Its Role in Civilization, p. 31).
첫번째와 두번째의 중동 전쟁 사이에 수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1949년 5월 11일에 국제연합 회원국으로 인정되었다. 1950년 7월 5일에 세계의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천명하는 귀환법(the Law of Return)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은 계속되었다. 1949-1956년 동안에 이스라엘은 거의 1천 2백 명의 군인을 잃었다. 1952년까지 이스라엘의 인구수는 유대인 이민들에 의해 두배가 되었다. 마침내 유대인 이민들이 80가지의 서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110개국에서 왔다.
가장 낭만적인 이민의 하나는 "요술 담요 작전"(Operation Magic Carpet)으로 알려진 이민이다.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에 예멘이라는 회교도 땅이 있었다. 이 땅에는 5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 공동체는 성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들은 가난했고 특정 지역에 한하여 거주했다. 아랍인들은 그들이 낙타나 말을 타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들은 회교도가 옆으로 지나가면 당나귀에서도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의 신앙에 진실했고, 언젠가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 라고 믿고 있었다. 모든 소년들은 계속 히브리어로 어떤 종교적인 교육을 받았다. 한 반에 성경사본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소년들은 위쪽에서 아래로 또는 비스듬히 옆에서 보아도 손쉽게 올바로 그 사본을 읽을 수 있도록 배웠다. 그러나 그때 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대한 사건들에 관한 소식이 예멘에 거주하고 있는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망명자 주둔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서서히 뜨겁게 불타는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폭격기를 개조한 비행기들이 파견되어 그들을 도중에서 태웠다. 비행 승무원들 몇몇은 근심이 되었다. 자동차도 본적이 없는 문명과 거리가 먼 이들 대부분은 한 사람씩 비행기에 태워졌다. 만약 그들이 비행 도중에 갑자가 공포에 걸리게 되면 어찌할까? 그러나 그런 염려나 사라졌다. 예멘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은 곧 바로 미소를 띄우며 하나님은 이사야 40장 31절에 있는 그의 약속을 글자 그대로 성취하고 계신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성서 귀절을 기억으로부터 쉽게 인용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예멘에 있는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공수되었다.
또 다른 장관을 이루는 공수는 "알리 바바 작전"(Operation Ali Baba)으로 이름 붙쳐졌는데, 이 작전으로 12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바그다드에서 이스라엘로 데려왔다. 이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잡혀 간 유대인들의 후손들이었다. 1948년 전쟁 후 잠시 동안 이스라엘은 번영했다. 그러나 중동에서 발판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점증하는 시도와 압델 낫셀 장군(General Abdel Nasser)이라는 한 이집트 대령의 야망 때문에 분쟁이 곧 시작되었다. 1952년에 낫세르는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우둔하고도 어리석은 파룩 왕을 왕좌에서 쫓아냈다. 낫세르의 첫번째 업적은 대영제국을 설득하여 수에즈운하 지대에서 철수시킨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애스원(Aswan)에 10억 달라 규모의 댐 건설을 시작했다. 이제 낫세르는 자신을 아랍 세계의 대변인으로 생각했다. 낫세르는 자신의 입장을 고양하기 위해서 아랍 라디오 방송국의 강력한 선전 방송으로 이스라엘을 파멸하도록 호소했고, 그의 불타는 욕망을 모든 아랍인들도 공유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자기편에게 자금을 조달하고 또한 소련으로부터 공급된 약 2억달라값어치의제트기, 탱크, 소총, 군수품 그리고 기타 전쟁 무기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앞으로 낫세르는 5년 동안 이집트의 목화 수확의 50%를 내놓겠다고 공약했다. 1955년 9월 27일에 낫세르는 러시아로부터 이러한 무기 구입에 대한 그의 정책을 발표했다.
낫세르는 러시아와 거래했기 때문에, 미국은 애스원 댐 건설을 돕기 위해 이전에 제의했던 6천 4백만 달라 차관을 철회했다. 이에 분개한 낫세르는 1956년 7월 26일 수에즈 운하 회사 를 국유화했다. 약소국인 이스라엘은 또 다시 절망적인 상황에 있음을 알았다. 수에즈 운하와 홍해에 있는 에일랏 만(the Gulf of Eilat)으로 이스라엘 배들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국경 지역에 있는 시나이 반도에 군사 기지를 개발하고 있었다. 5월 14일에 낫세르는 국제 연합군에게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2) 시나이 전쟁은 1956년 10월 29일 월요일에 시작되어 1956년 11월 5일에 끝났다.
(1) 1948년의 전쟁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아랍의 맹공을 기다리지 않고 10월 29일 오후 5시에 급습을 개시했다. 오웬(G.F.Owen)은 이스라엘이 취한 급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일 주일 이내에 신속한 행동으로 맹공을 가한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 전 지역을 침략하여 황폐케했고, 이집트군의 약 4분의1혹은3분의1을격파하거나 패주시켰으며, 거대한 보급 창고들과 러시아에 의해 세워진 군사 장비를 점령했다. 이스라엘군은 사망 171명, 부상 600명, 포로 4명의 댓가를 치르고 아랍군 5,600명을 포로로 잡았고 2,000-3,000명의 병사를 사살했다. 뉴욕 타임즈가 이 작전은 세계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전들의 하나라고 일컬었던 아주 비범한 전투였다!"(Abraham to the Middle East Crisis, p. 386).
(2) 이때 대영제국과 프랑스는 낫세르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방지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집트는 유럽 두 강대국의 침공을 무산시키기 위해 운하를 따라 운항하는 선박들과 모든 거룻배들을 침몰시킴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러시아가 낫세르는 도우러 올 듯했다. 미국은 재빨리 소련이 낫세르를 돕게 된다면 영국을 후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국제적인 대결전이 막바지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해 11월까지 국제 연합군이 운하를 통제했고, 중동의 위기는 당분간 끝났다. 4개월 이상 동안 시나이 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미국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둘스(John Foster Dulles)의 압력을 받아, 이스라엘이 후에 깊이 후회하게 될 하나의 결정을 했다. 시나이 반도 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 군대를 철수하게 되었다.
(3) 1957-1966년 사이의 기간은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이었다. 국경 충돌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국방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그러나 소련이 중동에서 소련의 활동력을 촉진시켰을 때 사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1966년 2월에 친소적인 한 정권이 시리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국경 침입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낫세르는 한번 더 이스라엘을 파멸할 위협을 가함으로써 그의 약해진 위세를 높이라는 러시아의 설득을 따랐다. 1967년 5월 14일에 낫세르는 이 집트군을 시나이 반도 국경선으로 이동하여 운집하도록 명령했다. 국제 연합은 그때 그 지역으로부터 철수하도록 명령받았다.
5월 30일에 낫세르는 요르단 왕 후세인과 함께 몇몇 깨어진 방어벽을 구축했다. 요르단 군대는 이스라엘 공격에 대해 이집트의 명령에 따른 다는 한 협정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제 제3차 중동전의 사건들을 요약해보도록 하겠다.
3) 6일 전쟁은 1967년 6월 5일에 시작되어 1967년 6월 10일에 끝났다. 월터 프라이스(Walter Price)는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상황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국외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으로 분주하고 국내적으로는 학생과 흑백 차별 문제로 인한 사회적 무질서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미국은 그 상황을 구하기 위하여 힘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1967년 6월 5일, 전쟁사에서 가장 뛰어난 전쟁의 하나로 이스라엘은 적들을 공격하여, 일주일이 채 못되는 기간 안에 적들을 완전히 쳐부수었다. 전쟁 첫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의 전공군을 사실상 쳐부수므로써 공중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런 다음, 급습을 가하는 중에 이스라엘은 샴 알-셰이크(sham al-Sheikh)를 포함한 시나이 반도 전체를 초토화시키고, 수에즈운하 동쪽 제방으로 진격했다. 요르단이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과 함께 가자(Gaza) 또한 점령하였다. 주요 도시인 베들레헴, 헤브론, 여리고, 나블루스, 라말라, 그리고 예닌을 포함하여 요단강 서안에 있는 요르단의 나머지 모든 점유지들을 차지하였다. 갈릴리에서부터 이스라엘 군대는 아군의 기갑부대가 다마스커스의 관문 앞에 설 때까지 시리아로 진격했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확보하였는데, 그곳으로부터 갈릴리 해에 있는 이스라엘 어민들과 국경 마을들은 이스라엘이 건설된 거의 20년 동안 시리아군의 폭격을 받아왔었다. 이집트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총 군사 수가 8만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7개 사단이 완전히 패주하거나 섬멸당했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 주둔시켜 놓았던 소련에서 공급된 탱크 600대에서 700대로 구성된 전 기갑부대가 섬멸당했다. 100대 이상의 손상되지 않은 탱크가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갔다. 소련에서 공급된 막대한 양의 장비를 이스라엘군은 이집트로부터 노획했는데 그 노획품에는 400문의 야포, 50문의 자주포, 그리고 문자 그대로 수천 대의 운송 장비, 그 외에도 커다란 보급창고와 온갖 종류의 설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444대의 아랍 비행기가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에 있는 비행장들을 공격했을 때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주요한 공습은 이집트에 대하여 이루어졌다. 텔 아비브 근처의 비행장로들로부터 이륙하여 레이다망을 피하기 위해서 지중해 상공 150피트로 날아간 이스라엘 비행기들은 바다로부터 이집트로 들어가 카이로에서부터 수에즈와 홍해 해안선까지의 이집트 공군 기지들을 초토화시켰다. 소련에서 공급된 미그 21기들과 미그 19기들은 여러 줄로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비행기 모두가 이스라엘의 제트기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집트의 16개 비행장이 전쟁 초반 중에 못 쓰게 되었다. 26개 이집트 레이다망이 파괴되었다. 공습 중에 미그 21기단 두 대만이 이륙하여 겨우 이스라엘 비행기 두대를 격추시켯으나, 곧 격추당했다. 이집트350명의 비행사들 중 100명이 이 첫번째 이스라엘 공습 중에 지상에서 사망했다. 러시아는 1955년 이래 몇 10억 달라에 해당되는 군사 장비를 이집트에 공급했는데, 그 군사 장비의 대부분을 겨우 몇 시간 이내에 이스라엘에게 잃었다. 휴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가자 지역, 시나이 반도 전체, 요르단 서안 지역 전부를 장악했다. 이스라엘 점령 지역에는 예루살렘 구 도시와 골란고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랍 국가들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러시아는 중동에서 주요한 방해를 받았다"(Next Year in Jerusalem, pp. 92, 93).
이스라엘은 이제 영토가 8천 평방 마일에서 26,500평방 마일로 늘었다. 이에 대한 희생으로 이스라엘군 679명이 사망했고, 2,563명이 부상했다.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거의 거만에 가까운 자신있는 태도를 보였다. 다윗과 같이 조그만 이스라엘 (적어도 현재로서는)이 골리앗 같은 이스라엘의 모든 적들을 죽였다. 평화가 이때는 꼭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랍인의 마음속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계속해서 끓었다. 이때는 승리가 아니라 복수를 위한 분노였다. 그런 다음, 1973년 6월에 시리아와 이집트에서의 군사적 움직임에 관해 서로 엇갈리는 보고들이 예루살렘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몇 가지 이유에서 그 보고들을 신중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째,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새로운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uwar Sadat)를 연약한 누이처럼 생각했다. 둘째, 6월의 경고는 지난 2년 동안에 실제로 다섯 차례나 접수되었다. 예를 들면 4월 28일에 골다 메이어(Golda Meir)는 이스라엘이 하루에 960만 달라의 비용과 경제 인력 3분의 1이상을 각출했던 일반 동원령을 발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메이어 및 이스라엘의 각료와 더불어 모세 다얀 장군은 이러한 군사적인 움직임들이 바로 신경전의 하나이며, 한번 더 일반 동원령을 발하게 하여 경제의 침체와 막대한 재정적 낭비를 이스라엘에 대해 조장하려는 하나의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9월 마지막 주 중에,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경고를 했지만, 이것 또한 소홀히 생각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부주의에 대한 무서운 댓가를 지불하게 되었다.
4) 욤 키푸르 전쟁(The Yom Kippurwar)은 10월 6일 토요일에 시작되어 10월 25일에 끝났다.
(1) 저 운명의 토요일 오후 정각 2시에 이스라엘은 남쪽에서는 이집트와 북쪽에서는 시리아에 의해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10월 6일은 그해 중에 가장 거룩한 때인 속죄의 날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전날 24시간 동안 금식하고 있었다.
(2) 공격은 원래 오후 6시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러시아의 궤도를 도는 두 인공 위성은 이스라엘이 마침내 침공 위협을 심하게 받아 군사 행동을 시작하였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3) 기초 전력과 거대한 군사적 움직임은 무너지고만 있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로 사실상 끝장을 보기도 전에 이 싸움은 기갑부대의 용어로 가장 판에 박힌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사용했던 것과 1973년에 영국과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던 총 댓수보다 더 많은 약 5천대의탱크만이사용되었을 것이다. 백만 이상의 병사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는데, 그 가운데 83만 8천 명의 아랍군이 27만 5천 명의 이스라엘군과 대적하여 싸웠다. 이스라엘의 외무상인 아바 에반(Abba Eban)은 1973년 10월 8일에 국제연합에서 한 그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집트는 3천 대의 탱크, 2천 문의 중포, 1천 대의 항공기, 그리고 60만 명의 군사로써 우리를 공격했다."
(4) 관례적인 추정에 따른다면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방심하여 급습을 당했고 희망이 없을 정도로 병사와 무기 면에서 숫적으로 열세였다. 참으로 얼마동안은 꼭 그렇게 보였다. 골다 메이어는 이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팔레스틴에 이스라엘 국가가 다시 세워진 25년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언젠가 부숴진 일곱 대의 탱크만이 북쪽에 있는 시리아군 편에 서 있었고, 90명이 채 못되는 이스라엘군 병사들이 남쪽에 있는 이집트군에게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양 적군들은 갑자기 만 48시간 동안 진격을 하지 않았다. 이 만 48시간은 절박한 상황에 몰린 민족에게 군사 동원을 완수하는 데 지극히 필요한 더 없이 값진 시간을 주었다.
10월 19일, 금요일에 세계사에서 가장 큰 탱크전이 시나이 사막에서 있었다. 수천 대의 이 장갑차들은 난타전을 벌였다. 전쟁의 연기가 사라졌을 때,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5) 욤 키푸르 전쟁의 또 다른 기적은 후세인 왕이 전투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전대미문의 결정이었다. 요르단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전의 세 차례 공격에 참가했었다. 후세인이 이스라엘 공격을 도왔으면 아랍의 승리가 확실했을 것은 분명하다. 월터 프라이스(Walter Price)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수에즈운하 동쪽 지역의 러시아 무기로 무장한 이집트 군대로부터 어떤 최초의 패배를 맛보았다. 그러나, 북쪽에서 이스라엘은 다마스커스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곧 이스라엘 군대는 이집트를 또 침공할 수 있었다. 국제연합이 마침내 휴전을 실시할 수 있었을 때 이스라엘 군대는 다마스커스에서 20마일 이내에 있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또한 이집트로 들어가 하나의 교두보를 구축했는데, 그들은 수에즈운하 서안 지역을 점령했다.…"(Next Year in Jerusalem, p. 94).
(6) 1973년 10월 25일에 제 4차(그리고 단연 최대의 전쟁인) 중동전이 끝났다. 아랍의 사상자 수는 1만 5천 명을 넘었다. 이스라엘의 사상자수는 4천 명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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