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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홍충도(洪忠道) 1800
영동(永同)
초강서원(草江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박연(朴堧) 호는 난계(蘭溪)이며, 세종조의 명신이다. ㆍ박사종(朴嗣宗) 호는 읍청(挹淸)이며 참봉을 지냈다. ㆍ송방조(宋邦祚) 병조 좌랑을 지냈다. ㆍ송시영 위에 보라 ㆍ송시열ㆍ윤황(尹煌)
朴堧 1378 1458 密陽 坦父 蘭谿 文獻
朴季愚 14?? 1454 密陽
朴嗣宗 1513 1579 密陽 公繼 挹淸堂
宋時榮 1588 1637 恩津 茂先 野隱 忠顯
초강서원(草江書院)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충청도 영동(永同)에 세운 서원. 박연(朴堧)ㆍ박사종(朴嗣宗)ㆍ송방조(宋邦祚)ㆍ윤황(尹煌) 등을 배향함.
1611 한국/조선후기 , 충청도/영동 , 유적/건물/서원,향교
난계서원(蘭溪書院) 현 서쪽 12리에 있다. 사당을 세워 박연(朴堧)을 향사하고, 박사종(朴嗣宗)을 배향하였다.
박연(朴堧) 학문에 힘써 박식하였다. 처음에 과거 급제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세종(世宗)에게 인정을 받아서 마침내 발탁하여 중용되었고 관직이 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박연은 부모를 효성스럽게 모시고,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율려(律呂)에 정통하여 10년을 깊이 연구한 뒤에 터득하였다. 세종이 아악(雅樂)을 제정할 때에 박연이 실무를 관장하였으니, 이로부터 조정 제사의 음악이 비로소 완비되었다. 세종이 한번은 석경(石磬)을 만들고 박연을 불러 교정하게 하니, 박연이 아뢰기를 “모율(某律)은 1푼이 높고, 모율은 1푼이 낮습니다.” 하여, 다시 살펴보니 고율(高律)에 진흙 찌꺼기가 있었다. 세종이 명하여 진흙 찌꺼기를 떼 내게 하고 또 저율(低律)에는 진흙 찌꺼기 1푼을 붙이게 하였더니, 박연이 아뢰기를 “이제는 음률이 고릅니다.”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아들 박사종(朴嗣宗)은 효행으로 이름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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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 제3권 / 충청도(忠淸道) 좌도(左道)○청주진(淸州鎭) / 영동현〔永同縣〕
학교(學校)
향교(鄕校) 현 동쪽 2리에 있다.
난계서원(蘭溪書院) 현 서쪽 12리에 있다. 사당을 세워 박연(朴堧)을 향사하고, 박사종(朴嗣宗)을 배향하였다.
인물(人物)
본조
박연(朴堧) 학문에 힘써 박식하였다. 처음에 과거 급제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세종(世宗)에게 인정을 받아서 마침내 발탁하여 중용되었고 관직이 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박연은 부모를 효성스럽게 모시고,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율려(律呂)에 정통하여 10년을 깊이 연구한 뒤에 터득하였다. 세종이 아악(雅樂)을 제정할 때에 박연이 실무를 관장하였으니, 이로부터 조정 제사의 음악이 비로소 완비되었다. 세종이 한번은 석경(石磬)을 만들고 박연을 불러 교정하게 하니, 박연이 아뢰기를 “모율(某律)은 1푼이 높고, 모율은 1푼이 낮습니다.” 하여, 다시 살펴보니 고율(高律)에 진흙 찌꺼기가 있었다. 세종이 명하여 진흙 찌꺼기를 떼 내게 하고 또 저율(低律)에는 진흙 찌꺼기 1푼을 붙이게 하였더니, 박연이 아뢰기를 “이제는 음률이 고릅니다.”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아들 박사종(朴嗣宗)은 효행으로 이름이 났다.
김수온(金守溫) 문과에 급제하고, 세조(世祖)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성종조(成宗朝)에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고,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자호(自號)는 괴애(乖崖)이다. 성품이 자유분방하였고, 널리 관람하고 많이 기억하였으며, 경사(經史), 제자백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서적 등 탐색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문장은 웅장하고 기걸하였다. 《식우집(拭疣集)》이 세상에 전한다.
장필무(張弼武) 역학(易學)에 정밀하였다. 무과에 등제하여 관직이 절도사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하고 엄준하였으니,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는데도 죽을 때에는 집안에 저축된 재산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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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박사종(朴嗣宗)은 효행으로 이름이 났다. ->박연의 아들은 朴季愚이다.
*원문을 교감할 필요가 있다.
朴堧 1378 1458 密陽 坦父 蘭谿 文獻
朴季愚 14?? 1454 密陽
朴嗣宗 1513 1579 密陽 公繼 挹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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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집(丈巖集) 정호(鄭澔)생년1648년(인조 26)몰년1736년(영조 12)자중순(仲淳)호장암(丈巖)본관연일(延日)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정철(鄭澈)의 현손(玄孫)
丈巖先生集卷之二十四 / 記 / 草江書院講堂記 *蘭溪,挹淸,野隱三先生俎豆之祠
稽山在湖嶺間最爲窮僻。而其俗尙文敎。口說禮法。家傳忠孝。蔚然有鄒魯風。余意閩越曾是遐荒之陬。而自朱夫子倡明道學之後。一變爲禮義之邦。今此稽山之地。亦必有先輩倡導之力。而有以致之也。歲丙戌仲春。余往過稽山之縣齋。聞縣西高塘江上。有所謂草江書院。卽尋謁。乃蘭溪,挹淸,野隱三先生俎豆之祠。而又以尤庵老先生追享者也。余然後益知魯無君子。斯焉取斯之說。爲可徵也。嗚呼。蘭溪先生之博通精識。審音協律。出佐聖王。雅樂復古。善居親喪。喪禮反正。一洗陋俗。功存後學。挹淸先生之杜門好學。養德山林。野隱先生之孝友於家。節義於國。其事蹟之詳。備載院儒請額之疏。明白纖悉。固不待於後人疊床之說。而惟是老先生承潭沙之統。泝洛閩之源。其學問之精博。道德之崇深。進而倡明尊周之義。退而成就後學之實。眞所謂集群儒而大成者。非余一人之私言。當時諸老長者之論然也。此鄕乃三先生藏修之遺墟。而老先生杖屨往來之處也。流風餘韻。猶有存者。則其士習之美。文風之盛。豈無所自而然也。今者。院儒鄭上舍來昌。以書來徵記文曰。前此書院講堂之室。久未完新。幸賴今日縣宰之賢。出力相役。室宇無欠闕之嘆。章甫有講習之所。願吾子之惠以一言也。余曰。然。四先生道學之所造。雖各不同。而惟其孝於家。忠於君。以至於夫婦長幼朋友之道。禮樂節義講習之方。考之後前。無有異同。惟在諸君之誦其言而慕其風。有所感發興起於斯。則其成德之淺深。樹立之大小。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豈不休哉。且縣宰之追誦遺烈。克相斯役。以風勵其人而作興之。非其自信之篤。而不以世俗趣舍動其心者。其孰能與於此。而縣宰。卽吾弟名津字仲楫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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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공 시영(宋公時榮)과 이공 시직(李公時稷) : 송시영은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이자 송시열의 종형이다. 자는 공선(公先), 호는 야은(野隱),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화의(和議)가 이루어져 중지하였고, 병자호란 때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도에 건너갔다가 이듬해 성이 포위되자 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이시직은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조호익(曺好益), 김장생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송시영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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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 제2권 / 시(詩) / 숭현사(崇賢祠)를 배알하고 여러 현인들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여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싣다.
문익공은 나라의 기둥이시니 / 文翼國梁棟
어찌 한두 뼘 작은 재목이시랴 / 偉材豈把拱
만조백관 앞에서 옥홀을 꽂고 / 搢笏百僚前
우뚝할사 태산처럼 중후하셨네 / 屹若泰山重
눈물로 어진 이들 구원하시고 / 涕淚救羣賢
진동하는 질책은 크나큰 용기 / 噴薄見大勇
번쩍이는 그 눈빛 상상하면은 / 尙想巖下電
부릅뜬 그 눈동자 섬뜩하다오 / 怒目使人恐
위는 정 문익공(鄭文翼公)에 관하여 읊은 것이다.
김충암은 깊은 학문 자부하시고 / 冲菴負邃學
굽힘없이 지조 엄히 지키셨어라 / 高朗厲志操
임금 요순 이루고자 옛 도 여쭙고 / 致君動引古
입신 출세 그 또한 빠르셨는데 / 立身亦已早
화 당해 천길 못에 떨어지시니 / 奇禍甚墜淵
푸른 하늘 너 어이 믿는단 말가 / 何由信蒼昊
대궐이라 신무문 기운 험하니 / 沈沈神武門
귀양지라 한라도 캄캄하기만 / 冥冥漢挐島
위는 김충암(金冲菴)에 관하여 읊은 것이다.
송공은 인자다운 자질 지니어 / 宋公仁者姿
후덕하기 옛사람 다름없었네 / 肫肫古人如
탄식하며 요순을 흠모하시고 / 太息慕勛華
나라 경영 경전의 말씀 따랐네 / 經綸用詩書
애달파라 임진왜란 혹독한 재앙 / 哀哉龍蛇禍
천년토록 사람들 눈물 적시리 / 千載爲霑裾
훌륭한 인재 모두 산화했거니 / 崑玉旣共焚
빼어났던 이분이 무사할 수야 / 門蘭得無鋤
위는 송규암(宋圭菴)에 관하여 읊은 것이다.
사계는 순수하고 질박한 선비 / 沙翁古醇儒
일찍부터 석담의 가르침 받고 / 蚤服石潭敎
독서에 마음 쏟아 탐구하시니 / 下帷積潛玩
도가 쌓여 충만한 모습이셨네 / 道凝符睟貌
한마디 말로 예송을 판결하시자 / 片言折禮訟
분분한 논란 모두 잠잠해졌네 / 衆說息紛鬧
아, 저토록 훌륭한 제자들 보소 / 且看及門賢
가르침으로 인재를 성취시켰네 / 方知作人效
위는 김사계(金沙溪)에 관하여 읊은 것이다.
지난날 강화도가 격파될 적에 / 往者江都破
오랑캐 벼락같이 쳐들어오자 / 胡來如霹靂
두 분께서 한날에 자결하시며 / 二公死同日
담소하는 그 마음 태연하였네 / 談笑意自適
의젓한 모습 평소의 수양이거니 / 從容見素養
비분강개 한순간의 격분뿐이랴 / 慷慨豈徒激
높은 절의 지금까지 가슴 느꺼워 / 高義感至今
이내 눈물 방울져 떨어진다오 / 令人淚每滴
위는 송공 시영(宋公時榮)과 이공 시직(李公時稷)에 관하여 읊은 것이다.
[주-D001] 숭현사(崇賢祠) : 충청남도 대전시 중구 원천동에 있었던 숭현서원으로, 1580년(선조13)경에 지방 유림의 공론에 의해 정광필(鄭光弼), 김정(金淨), 송인수(宋麟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숭현(崇賢)’이라는 사액을 받았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1)에 중건하였다. 숙종 때 김장생(金長生), 이시직(李時稷), 송시영(宋時榮)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增補文獻備考 卷211 學校考》[주-D002] 정 문익공(鄭文翼公) : 좌참찬 정난종(鄭蘭宗)의 아들인 정광필이다.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천(守天),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기묘사화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조광조를 구하려다 파직된 뒤에 다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심정(沈貞)과 김안로(金安老) 등 권신의 반대 입장에 서서 선류(善類)를 적극 옹호하였다.[주-D003] 김충암(金冲菴) : 정랑(正郞) 김효정(金孝貞)의 아들인 김정(金淨)이다. 자는 원충(元冲),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07년(중종2) 증광 문과에 장원한 뒤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지내고 도승지, 이조 참판,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고 기묘사화 때 투옥되었다가 금산(錦山)에 장배(杖配), 다시 제주(濟州)에 안치된 뒤에 사사(賜死)되었다.[주-D004] 송규암(宋圭菴) :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송세량(宋世良)의 아들 송인수(宋麟壽)이다. 자는 미수(眉叟),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526년(중종21) 수찬(修撰)을 거쳐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제주 목사로 좌천된 뒤에 다시 사수(泗水)로 유배되었다. 1537년(중종32) 김안로 등이 제거되자 예조 참의,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대사성이 되어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으며, 뒤에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 등 권신들에게 시달림을 받다가 을사사화 때 화를 당해 사사되었다.[주-D005] 김사계(金沙溪) :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이다. 자는 희원(希元),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송익필(宋翼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고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 송시열과 송준길 등의 학자를 배출하여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하였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주-D006] 송공 시영(宋公時榮)과 이공 시직(李公時稷) : 송시영은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이자 송시열의 종형이다. 자는 공선(公先), 호는 야은(野隱),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화의(和議)가 이루어져 중지하였고, 병자호란 때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도에 건너갔다가 이듬해 성이 포위되자 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이시직은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조호익(曺好益), 김장생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송시영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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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1760년(영조 36)~1839년(헌종 5) 용여(龍汝) 난실(蘭室) 창녕(昌寧)
硏經齋全集外集卷三十七 / 傳記類 / 東學寺魂記釋
朴季愚。
密陽人。大提學堧子也。世宗朝文科。選入集賢殿。甲戌(1454,단종2)。與鄭孝康等同死。堧安置。今上辛亥(1791,정조15)。特贈季愚吏曹參判。
박연(朴堧, 1378~1458)
菊堂先生遺稿卷之三 / 附錄 / 請旌贈疏
退居永同登雲山下高塘里。築二樂,雙淸之室。以講道爲已任。
而從弟左贊成文獻公 臣 堧之禮樂。從侄翰林 臣 季愚之忠節。
석계(石溪) 민욱(閔昱)1559년(명종 14)~1625년(인조 3) 경엽(景曄), 회수(晦叟) 여흥(驪興)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1 2월 7일, 永同 黔峴里에서 태어나다.
~ ~ ~ ~ ~ ~ ~ ○ 朴嗣宗에게 수학하다. ○ 趙憲에게 수학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45 조헌이 순절한 錦山에 兩湖의 儒士들과 함께 殉義碑를 세우다.
~ ~ ~ ~ ~ ~ ~ ○ 晦谷에 書院을 세워 蘭溪 朴堧과 朴嗣宗을 享祀하다. ○ 沙溪 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朴嗣宗 1513 1579 密陽 公繼 挹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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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정(習靜) 송방조(宋邦祚)1567년(명종 22)~1618년(광해군 10) 영숙(永叔) 은진(恩津)
習靜先生文集卷之三 / 墓文 / 挹淸堂朴先生墓表銘 幷序
先生姓朴。諱嗣宗。字公繼。其先密陽人也。有冊端明翊祚功臣重大匡門下右文舘大提學時庸。娶永山大姓典客令金令貽女。因家於永焉。於先生爲六代祖也。曾祖贈兵曹參判仁碩。祖兵馬節度使巖。考司憲府監察有林。妣淑人開城金氏。生員湖之女。以正德癸酉。生先生。生而靜重若成人。未甞與羣兒戱。微有知。已自好學。旣冠學益進行益勵。以親故爲擧子文。或占解元。而終不以科業自累。專用力於實踐。及乙巳士禍作。每仰屋而歎。尤無意進取。歲壬申。以學行純正。薦授英陵參奉。赴謝而辭疾告歸。於所居高唐。臨流築堂。扁以挹淸。名公如成大谷運,宋礪城寅。多詠潛德。而遊從相數焉。遠近士子。踵門而請益者甚衆。乃選宅南一洞。創書齋。粗備庠塾之制。以處來學者。日講說不倦。作成之效。庶幾可觀。而不幸中途以疾終。實萬曆己卯正月也。春秋六十有七。粤三月。葬于縣西先塋之麓。先生儀容雄偉。氣度嚴俊。疾惡如讎。好善若己。常儼然端坐。家人莫敢近。而其與人接。和氣春溫。性儉素。不喜外餙。而制行甚高。處事甚正。人一見輒敬而慕之。有李敬來宰縣。亦欽景德義。每造門請敎。先生雖撝挹不居。凡李之䂓畫治法。大都出於先生之意。故至今有去思碑者。先生之力也。常淨掃一室。對越聖賢。非有疾病。必晨起冠帶。雖當夏。不一脫巾卧。子弟未甞見其有惰容。夜則明燭靜坐。披閱書史。或引門人。論古人心跡歷代治亂。尤眷眷於君子小人之辨。義利之分。吉凶之幾。靡不詳究。至夜分乃寢。誠孝出天。克盡生養。前後喪祭。悉遵古禮。終始居廬。一不到家。兄弟五人。和樂一堂。家有餘財。不長尺寸。而周恤竆族。歲卛爲常。收養諸姪孤者。使皆成立。且儲義糓。以爲婚喪之助。其於鄕人飮。不娛聲色。使小子揖讓進退。知事長之義。雖 缺 輩。爲之肅穆。先是永人專尙武秇。因無善俗。至喪祭雜用佛事。先生慨然先倡。丕變舊習。至今爲鄒魯鄕。甞語人曰。善不在大。一事之微。苟善則必行。惡不在小。一念之間。纔過則必改。其誘掖糾卛。出於誠心。故爲惡不畏刑戮。而畏先生知。雖處江湖。亦未忍忘世。聞朝廷有不便。顰蹙終日。甞上封事十條。語皆切實。識者韙之。先生有先事之見。若燭照數計。有鯨過漢。漁人得之。先生聞之曰。自海而江。是行魚也。行魚誅。尹其不免乎。翌年元衡敗。甞曰。數十歲後。國必多難。乃涉獵兵法。若將勘亂。雖先溘然。語則驗矣。及歿之日。朝野嗟悼。道路至有涕洟者。及葬。遠近畢至。後卄許年。諸儒爲立鄕贒祠。春秋享祀云。配孫氏。密陽望族。進士晊之女。賢有範。奉舅姑。事夫子無違。治家御下。得婦道甚。後先生十歲而終。享年八十一。與先生同兆異壙。生一女。適士人鄭谷。有操行。好古禮。以故先生後事。亦皆得以無憾。側室有子。名大靑。奉先生祀。谷子曰以震,以觀。女長卽宋邦祚。次金善生。次趙廷鸞。大靑子曰春雨,春澤。銘曰。
蘭溪去後。鄕曲貿貿。謂文何事。彎弧挾矢。先生乃出。敎雨旣溢。後人慕之。翼然有祠。其道雖窮。百世之功。萬曆四十五年丁巳五月日。外孫女婿通訓大夫前行兵曹佐郞宋邦祚。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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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永同) 초강서원(草江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박연(朴堧) 호는 난계(蘭溪)이며, 세종조의 명신이다. ㆍ
박사종(朴嗣宗) 호는 읍청(挹淸)이며 참봉을 지냈다. ㆍ
송방조(宋邦祚) 병조 좌랑을 지냈다. ㆍ
송시영 위에 보라 ㆍ
송시열ㆍ
윤황(尹煌)
화암사우(花巖祠宇)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장항(張沆) 호는 눌재(訥齋)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현공(文顯公)이다. ㆍ
박흥생(朴興生) 호는 국당(菊堂)이며 현령(縣令)을 지냈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ㆍ
장필무(張弼武) 호는 백야(栢冶)이며, 자는 무부(武夫)요, 시호는 양정공(襄貞公)이다. 청렴결백한 장군으로서 절도사를 지냈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ㆍ
박인(朴忍) 만호(萬戶)를 지냈다. ㆍ
장지현(張知賢)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며 감찰을 지냈다. 임진왜란에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필무(弼武)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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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정집(習靜集) 송방조(宋邦祚)생년1567년(명종 22)몰년1618년(광해군 10)자영숙(永叔)호습정(習靜)본관은진(恩津)특기사항조헌(趙憲)의 문인.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37 동지들과 함께 趙憲의 殉義碑를 錦山에 세우고, 沃川에 表忠祠를 세우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52 5월, 平安道 評事가 되다. 마침 명나라 사신이 와서 御史를 겸하다. 25일, 龍川郡 良策館에서 병으로 졸하다. ○ 10월, 永同縣 耆藏里에 장사 지내다.
〈老孝子賦〉는 임진왜란 때 아비를 살리기 위해 왜적의 칼을 몸으로 막다가 아비와 함께 죽은 효자 朴忍에 대한 것이다.
習靜先生文集卷之一 / 賦 / 老孝子賦 並叙○朴公。名忍。字彦容。
萬曆壬辰歲。余轉避冦亂。自洛城走關東。杪秋始歸于永山。客有迎謂余者曰。子其聞朴萬戶忍之死於父乎。余應之曰。此何足異乎。客艴然曰。當今風敎之不漸。而流俗之已汚。在平日而遺其親者。尙比有之。况當此瘼矣。而斯人也。獨能負父逃難。死而不去。非斯人之爲異其誰。余曰。客可謂見其少而忘其大者乎。余將盡言之。孟子曰。人少則慕父母。知好色則慕少艾。有妻子則慕妻子。仕則慕君。是人情之所必至。而終身慕之者。所以爲大孝也。今斯人也。年將耳順。鬚眉皓白。而其孝益篤。未甞少衰。此古君子之所甚難也。斯人也。旣爲其難於五十餘年之久。則其能爲其易於一朝之倉卒者。不足異也。若擧其一朝之異。而遺諸五十年之難。則非所以知斯人者。而亦非君子權衡之論也。仍作老孝子賦以遺之。其程夫子老而孝子爲盡之意歟。詞曰。
背冠雙蛾秀翠微兮。面帶長鏡繞淸漪兮。中有一屋孝子攸宅。五十慕舜猶病諸。獨何老而益篤。吾知其出於天性兮。故終身而不衰。豁乎其中。軒然爾儀。書釰不成。志空懷奇。德旣賦於仁全兮。敎且承於義方。知所重之有在兮。矢維則之無忘。一心素期百年。萱堂愛敬惟知。功業不遑封萬戶之浮雲兮。事二人之短日。時大人投簪兮。尋某丘而卜築。于以乃老于臺之下。歸來速貧鼎石多暇。憫滫瀡之不充。勤甘旨之以躬。恒仰事以壹念。敢俯育而貳衷。臂蒼牽黃兮。且風雨而馳逐。手綱荷竿兮。罔寒暑以漁獵。山珍水鮮極滋。備色誠求渴。副體便口適。入厨饔飧。上堂昏省。遑寧我私。不有其身。積年歲之愈久兮。忍晷刻之或怠。每親年之喜懼兮。忘余生之衰改。兒趨鯉庭。老服萊綵。堂上鶴髮。膝下鮐背。一室兩翁惟父子兮。霜髩雪鬚 缺 相似兮。養惟日而不足兮。敬彌老其若初。婉容色而周旋兮。怡語聲而起居。慶無咎於眉梨兮。樂有恃於陪奉。噫叔世天常之斁盡兮。顧安有子職之能供。隨所慕而志移兮。鑠降衷之良知。紛紛走作。爰暇孝思。人誰遠獸。俗幾爲夜。養或不敬。色且少可。夫孰兼之。斯人獨也。長孩提之初心兮。迄其耋而不舍。非人理之所到兮。諒天道之丕顯。縱董黃稱美於今古。若使其至老則或變。能若是克盡其始終。泝千載久矣民鮮兮。無懷時之或有兮。有虞後之未見。嗚呼少好試釰兮。學非古獲。從盡事親。行與道合兮。苟非天質之粹美兮。安得仁本之卓爾。詎至孝之無報兮。宜上帝之錫祉。何福善之理泯兮。竟値兇之禍慘。身蔽父而當刃兮。同被鏖於一釰。固犬羊不足誅也。彼蒼蒼胡然漠漠兮。末俗生此兮。似天意之矜式。春府享百兮。若孝感之攸格。忍忍使其殲良兮。又奚由而徵惡。天難諶之若玆兮。余一叫而欲諗。降監世之遺親兮。當急難而尤甚。欲令人而取斯。法其死之如歸兮。生雖殞而名芳。豈眞宰之無爲兮。然所懼者泯滅兮。如不揚則棄天。儻表閭而振之。願觀風者得焉。於爲國乎何有。必可移之油然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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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정집(習靜集) 송방조(宋邦祚)생년1567년(명종 22)몰년1618년(광해군 10)자영숙(永叔)호습정(習靜)본관은진(恩津)특기사항조헌(趙憲)의 문인.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37 동지들과 함께 趙憲의 殉義碑를 錦山에 세우고, 沃川에 表忠祠를 세우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52 5월, 平安道 評事가 되다. 마침 명나라 사신이 와서 御史를 겸하다. 25일, 龍川郡 良策館에서 병으로 졸하다. ○ 10월, 永同縣 耆藏里에 장사 지내다.
宋必恒이 지은 〈永同草江祠奉安祝〉
習靜先生文集卷之四 / 附錄 / 永同草江祠奉安祝[宋必恒]
恭惟先生。學有淵源。惟昔圭庵。行高德尊。西阜聯棣。號曰難兄。有卓先生。克紹家聲。天資近道。至行絶人。因性而學。其理益親。潛心聖訓。立脚實地。操履堅確。儀度弘毅。忠期移孝。志專習靜。治家莅官。應事制行。造次存省。不越於此。是以其終。所立卓爾。我褐初釋。時運方亂。師成何人。敢罩鐵漢。義辭斬截。聞者代怖。羣兇䫴齘。潛彀蜮弩。旣北而西。竟殞於路。文武全才。完平鑑衡。豪傑才量。澤風朝評。天若假壽。其進何量。百身莫贖。九原難作。猶有餘矩。承家之烈。猗歟忠顯。爲國耿光。魯无焉取。源深則長。惟玆稽山。舊有明宮。享以蘭挹。曁尹八松。一體嚴奉。野老尤翁。其後議者。曰惟先生。杖屨幾年。來往吾鄕。晉鄙多薰。河飮滿腹。風聲不沫。草樹含馥。始議廟享。隣士左袒。是豈阿好。公議可見。尙今闕然。吾黨所致。縟儀之擧。不容但已。咸曰唯唯。无有異辭。玆涓吉辰。載薦籩豆。腏彼三賢。位以時序。忠顯配侑。文正特祀。儼若家庭。彜倫有紀。吟諷攸趨。絃誦之林。想像風範。精爽怳臨。神其垂佑。是顧是歆。
春秋享祝
豪傑才量。淸直志節。百代遺韻。一堂同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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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포(高唐浦)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있는 포구이다.
朴嗣宗 1513 1579 密陽 公繼 挹淸堂
박사종(朴嗣宗)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영동(永同)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배향됨.
한국/조선전기 , 경상도/밀양 , 인명/문사/학자ㅣ인명/관인/문신
호호정(浩浩亭) 조선 전기에 읍청(挹淸) 박사종(朴嗣宗)이 충청도 영동(永同)에 건립한 누정(樓亭).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으나 1959년 복원하고서 호서루(湖西樓)로 개명함.
한국/조선전기 , 충청도/영동 , 유적/건물/누정
제월당집 제1권 / 시(詩) / 고당포에서 달밤에 배를 띄우다〔高唐浦月夜泛舟〕
해 떨어져 어촌에 날 저물고 / 日落漁村暮
서리 차갑고 물가에 가을 깊어 가는데 / 霜寒水國秋
강 위에 피리 소리 흐르고 / 一聲江上笛
달빛 가운데 외로운 배 저어 가네 / 孤棹月中舟
당시에는 운우의 꿈 꾸었을 것이고 / 雲雨當年夢
오늘밤에는 거문고와 술로 노니는데 / 琴樽此夕遊
당시와 오늘밤을 비교한다면 / 相將較今昔
언제가 더 즐거울까 / 樂事果誰優
[주-D001] 고당포(高唐浦)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있는 포구이다.
[주-D002] 당시에는 …… 것이고 : 춘추 시대 초(楚)나라 회왕(懷王)이 고당(高唐)에서 노닐다가 꿈속에 신녀(神女)를 만나 동침한 고사가 있는데, 송규렴이 배를 띄운 포구의 이름도 고당이기에 이렇게 읊은 것이다.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堂賦)〉 서문에 양왕과 송옥이 유람하다가 회왕의 일을 회고한 내용이 보인다. 그 글에 의하면 회왕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이 들어 꿈속에서 무산(巫山)의 여신과 동침하였는데, 그 여신이 떠나면서 “첩은 무산 남쪽 높은 봉우리에 사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매일 아침저녁 양대 아래에 있습니다.[妾在巫山之陽高丘之阻, 旦為朝雲, 莫為行雨, 朝朝莫莫陽臺之下.]”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양왕이 송옥에게 부탁하여 〈고당부〉를 짓게 하였다. 《文選 卷19 高唐賦》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김문갑 이규춘 (공역) | 2018
전국 시대 초(楚)나라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양왕(襄王)이 운몽택에서 사냥을 하다가 그 주위에 있는 고당(高唐)이란 누관(樓觀)을 바라보니, 그 위에 이상한 모양의 구름이 있었다. 이에 송옥(宋玉)에게 물어보니, 송옥이 답하기를 “옛날에 선왕이신 회왕(懷王)께서 일찍이 고당에서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저는 무산(巫山)의 여자로 고당의 나그네가 되었는데, 임금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원컨대 침석(枕席)을 같이하소서.’ 하므로, 회왕이 하룻밤을 같이 잤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여인이 떠나면서 ‘저는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는데, 아침마다 양대(陽臺) 아래로 내려옵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는 조운묘(朝雲廟)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이 고사는 흔히 남녀 간의 정사에 관한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성현이 강원도 양양(襄陽)의 산중에서 비를 맞으며 길을 가는 광경을 무산의 비에 빗대서 한 말이다.
제월당집 제1권 / 시(詩) / 호호정에서〔浩浩亭〕
호호정에 올라보니 / 浩浩亭上客初到
그 앞에 흐르는 강물 어여쁘다 / 浩浩亭前江可憐
아득한 백사장에 가을 기러기 모였고 / 平沙渺渺集秋雁
어슴푸레한 먼 산에 저녁연기 피어나네 / 遠岫蒼蒼生暮煙
강가에 집 짓는 것은 이 지역 풍속인데 / 臨流爲屋此地俗
해질녘 지나는 배는 뉘 집 배인가 / 落日過帆誰家船
허공 향해 홀로 서자 신선 되고프니 / 憑虛獨立欲羽化
오색구름 어디에서 신선들 따를까 / 五雲何處追群仙
[주-D001] 호호정(浩浩亭)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에 있는 호서루(湖西樓)이다. 원래 읍청(挹淸) 박사종(朴嗣宗)이 심천면 약목리 장승산(長承山)에 호호정을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밀양 박씨 종중에서 1959년 이곳에 다시 짓고 호서루로 이름을 바꾸었다.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김문갑 이규춘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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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堂先生遺稿卷之三 / 附錄 / 墓表
永同治西高塘里。有墓曰故昌平縣令朴公諱興生衣履之藏也。子孫多在其傍側。歲修祀事。
至于挹淸公諱嗣宗。則以學行聞於朝。敎於宗族鄕黨者。無非文行之實。
故子孫變蹶張爲詩書之藪。由俊升遊於太學者。項背相望。豈公遺澤之所洎歟。按狀曰。公字敬夫。號菊堂。早以文爲業。十三中進士。十七中生員。蓋國初科擧。與今異制也。屢占大科解額。竟未能第。所與遊金議政訓,徐舍人皥及從弟蘭溪朴先生堧。來往切磋。又嘗摳衣於金桑村自粹之門。桑村稱之以英敏。牧隱李先生亦甚許之。始爲驪興,春川二敎授。訓誨詳明。議論醇正。遠近章甫。多聞風而至。永樂癸卯。除昌平縣令。寬簡以莅民。淸嚴以律已。又明愼獄訟。監司成公抑,趙公啓生。咸以道內難斷者歸之。公隣倅若權公踐,閔公審言。皆服其明信。以爲不可及。翌年遭喪。解歸于永。與弟監察興居。居喪盡禮。又築室於山水間。相與湛樂焉。徐舍人扁以二樂,雙淸。年七十三而終。配忠州梁氏。知州事肅之女。後繼以載寧康氏。其考三司左尹煕也。三子。察訪仁蕃。梁出也。仁挺,仁碩。康出也。仁挺縣監。仁碩贈參判。仁蕃無嗣。今永朴之繁衍。皆其二弟之裔。公。密陽人。始出新羅王赫居世。考檢漢城尹天貴。祖成均直講贈贊成時庸。永同之朴。蓋遠有其緖矣。叔父習靜宋公邦祚之配鄭氏。卽挹淸之外孫。
其子贈參贊忠顯公。與挹淸,蘭溪。幷享于鄕祠焉。
余亦娶于公之外裔。仍與諸朴相厚。今公七代孫生員承禧,八代孫生員萬亨,及第益茂,九代孫生員濬哲托余爲銘云。
崇禎紀元後癸亥十月十五日恩津宋時烈謹撰
資憲大夫兵曺判書,弘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同知經筵事南九萬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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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4권 / 신도비(神道碑) / 이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 난계 박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 〔吏曹判書兼藝文館大提學蘭溪朴公神道碑銘 幷序〕
외복(外服)의 나라에 악기가 있었던 것은 우리 조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명나라가 흥기할 때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와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가 모두 악기를 내렸으나 종경(鐘磬)이 음율(音律)에 맞지 않고 제악(祭樂) 팔음(八音)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헌왕(莊憲王 세종) 7년에 거서(秬黍)가 해주(海州)에서 나고, 8년에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산생되자 왕이 이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吏曹判書兼藝文館大提學)이었던 박 선생에게 명하여 황조에서 내린 악기를 고찰하여 율려(律呂)를 만들라고 하였다. 10년 여름에 아악(雅樂)이 이루어졌다고 보고하니 종묘(宗廟) 헌가악(軒架樂)에 사용되는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이 모두 228개였다.
때마침 천자가 보낸 사자가 와서 선생이 제작한 아악을 듣고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아악이 바른 소리〔正聲〕을 얻었으니 동방에 이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은 율려로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장헌대왕의 성스러움이 있지 않았다면 선생이 비록 율려에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금석의 음악을 이룰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예기》에서 “성인이 음악을 만들어 하늘에 응하였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순 임금 때에 벼슬자리에 있던 자들은 한낱 봉황이 와서 춤추고 모든 새와 짐승들이 너울너울 춤추는 것만을 보고 악관인 기(夔) 한 사람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상에서 명구를 두드리고 금슬을 타는 것과, 당하에서 도고를 펼쳐놓고 생황과 큰 종을 번갈아가며 쓰려한 것은 본래 순 임금의 생각이었다. 지금 거서가 해주에서 나오고 경석이 남양에서 생산됨에 장헌왕께서 처음 선생에게 명하여 오음을 바로잡고 12율을 화합하게 하여 종묘ㆍ사직ㆍ백신을 밝게 이르시게 한 것은 순 임금이 기에게 명하여 음악을 흥기시킨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장헌왕이 일찍이 선생에게 효유하기를
“자고로 음악을 제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위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아래에서 혹 따르지 않기도 하고, 아래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에서 혹 들어주지 않기도 하며 비록 위아래가 모두 이루고자 하더라고 천시(天時)가 이롭지 못한 경우가 있다. 지금 나라가 태평하여 일이 없어 내 뜻이 먼저 정해졌으니 경은 마음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마라.”
라고 하였다. 선생이 명을 받은 지 3년 만에 아악(雅樂)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선생의 휘는 연(堧)이고 자는 탄보(坦父)이며 성은 박씨(朴氏)이고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고려 때에 휘 문빈(文彬)이라는 분이 있어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냈는데 강헌왕(康獻王 태조)이 개국을 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초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으니 시호가 문절(文節)이고 선생에게는 조고부가 된다. 증조 휘 신열(臣悅)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조부인 휘 시용(時庸)은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천석(天錫)은 삼사 좌윤(三司左尹)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경주 김씨로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 오(珸)의 딸이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덕기(德器)가 침착하고 진중하여 부모를 섬기며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글을 엮으면 찬란히 문장을 이루었다. 개연히 전례(典禮)에 뜻을 두어 문헌을 널리 궁구하였으며, 악률에 더욱 정진하여,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격부(擊拊)의 형상을 가슴에 그리고 율려의 소리를 입으로 내어가면서 퍼뜩 스스로 깨닫는 묘리가 있었다.
영락(永樂) 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드디어 동진사(同進士) 1등으로 뽑혔다. 공정왕(恭定王 태종)이 불러서 보고 칭찬하고는 집현전 교리로 뽑아서 불러 들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유악(帷幄)을 출입하였는데, 매번 세자를 모시고 글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먼저 숙재(宿齋)하였고 반복하여 개진(開陳)하니, 장헌왕(莊憲王 세종)이 그 학술을 칭찬하고 매우 융숭하게 예우하면서 특별히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제수하고 음악 관련된 일을 맡겼다. 이에 선생이 거서를 취하여 분촌(分寸)을 쌓아서 황종관(黃鐘管) 하나를 만들어 불어 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의 음보다 높았다. 그래서 거서 한 알을 다시 취하여 분(分)을 쌓아서 관(管)을 만들었는데, 대개 그 법은 거서 한 알로 분을 삼고 열 알로 촌을 삼아 구촌으로 황종의 길이를 하고 삼분손익하여 12율을 돕는 것이었다.왕은 선생이 음률에 정교하고 능통하다고 하여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두고 의정부 영의정 황공(黃公) 휘 희(喜)와 우의정 맹공(孟公) 사성(思誠)ㆍ좌찬성 허공(許公) 조(稠)ㆍ총제 정초(鄭招)ㆍ신상(申商)ㆍ권진(權軫)에게 명하여 제조(提調)로 삼아 악률을 의정(議定)하게 하고는 선생도 거기에 참여시켰다.
이때는 조정이 청명하고 사방이 잘 다스려져 음악을 논하는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었다.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에서 태사(太師)가 육률(六律)과 육동(六同)을 관장하여 음양의 소리를 조화하였으니 황종(黃鍾)ㆍ태주(太簇)ㆍ고선(姑洗)ㆍ유빈(蕤賓)ㆍ이칙(夷則)ㆍ무역(無射)은 양성(陽聲)이고, 대려(大呂)ㆍ응종(應鐘)ㆍ남려(南呂)ㆍ함종(函鐘)ㆍ소려(小呂)ㆍ협종(夾鐘)은 음성(陰聲)입니다. 대개 두병(斗柄)은 12진(辰)을 운행하되 왼쪽으로 도는데 성인이 이를 본떠서 육률을 제정하였습니다. 해와 달은 12차(次) 모이되 오른쪽으로 도는데 성인이 이를 본떠서 육동(六同)을 제정하였습니다. 육률은 양(陽)이어서 왼쪽으로 돌아 음과 합해지고 육동은 음이어서 오른쪽으로 돌아 양과 합해집니다. 그러므로 대사악(大司樂)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황종(黃鐘)을 연주하고 대려(大呂)를 노래하여 조화시켰으며, 지지(地祗)에 제사 지낼 때는 태주(太蔟)를 연주하고 응종(應鐘)을 노래하여 조화시켰습니다. 사망(四望)에 제사 지낼 때는 고선(姑洗)을 연주하고 남려(南呂)를 노래하여 조화시켰고 산천(山川)에 제사 지낼 때는 유빈(蕤賓)을 연주하고 함종(函鐘)을 노래하여 조화시켰습니다. 선비(先妃)께 제사 지낼 때는 이칙(夷則)을 연주하고 소려(小呂)를 노래하여 조화시켰고 선조(先祖)께 제사 지낼 때는 무역(無射)을 연주하고 협종(夾鐘)을 노래하여 조화시켰습니다. 양률(陽律)은 당 아래에서 연주하고 음려(陰呂)는 당 위에서 노래하여 음양이 서로 화합하면서 번갈아 가며 창화하였으니 그런 연후라야 중성(中聲 중화(中和)의 소리)이 갖추어지고 화기(和氣)가 응하였습니다.
한(漢)나라의 악률은 모두 합성(合聲)을 사용하였고 당(唐)나라 제도에 와서 더욱 상세해졌는데, 오직 사직에 제사 지내는 경우에 한해서만 아래에서 태주(太蔟)을 연주하고 위에서 황종(黃鐘)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신언(趙愼言)이 황종(黃鐘)을 고쳐 응종(應鐘)으로 하자고 청한 것은 합성을 사용하자는 의미였습니다. 대개 태주는 양이어서 인방(寅方)에 위치하고, 응종는 음이어서 해방(亥方)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寅)과 해(亥)가 화합하게 되는 것은 두병(斗柄)이 해방(亥方)을 가리키는 달에는 해와 달이 인방(寅方)에 모이고 두병이 인방을 가리키는 달에는 해와 달이 해방에 모여, 좌우로 돌면서 짝이 되어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이 음양이 합하는 원리를 취하여 당상 당하의 음악에도 역시 반드시 합성을 사용한 것이니 음과 양을 조화시키고 신과 사람을 조화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직에 제사 지내는 당나라의 제도는 노래하고 연주하는 곡이 모두 양성인지라, 성인이 음악을 나눈 뜻에 맞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종묘악은, 당하에서 무역을 연주하고도 당상에서도 무역을 연주합니다. 단지 무역이 선조에게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음악이라는 것만 알고 협종이 양성이 된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종묘의 음악이 완전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사직의 음악은 당하에서 태주를 연주하고 당상에서 또 태주를 연주하니 이는 사직의 음악이 완전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석전(釋奠)의 음악은 지금 중국의 《대성악보(大成樂譜)》에는 아래에서 고선(姑洗)을 연주하고 위에서 남려(南呂)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관세(盥洗)를 할 때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전(殿)에 올라갈 때에는 남려를 사용하며, 조두를 올릴 때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초헌에는 남려를 사용하고, 종헌에 이르면 고선을 사용하고 변두를 철거할 때에는 남려를 사용하니, 음양의 소리를 화합하여 서로 번갈아 쓰는 것입니다. 오직 고선만은 본래 사망(四望)에 속해있지만 태학(太學)의 석전(釋奠)음악에도 역시 남려(南呂)와 함께 사용합니다. 그러나 관세를 할 때나 전에 올라갈 때의 음악이 없어 이미 잘못되었는데 변두를 철거할 때만 남려를 사용하니, 절차가 갖추어지지 않고 상하가 질서를 잃은 것이라, 이는 석전의 음악이 완전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산천단(山川壇) 제사의 제도는 유빈(蕤賓)을 연주하고 함종(函鐘)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폐(奠幣)부터 변두를 철거하는 절차에 이르기까지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려를 사용하니 대려라는 것은 황종과 화합하는 것입니다. 천신을 산천신과 같은 자리에서 제사 지낼 수 없는 법인데 지금 같은 단에서 제악을 함께 연주하니 이는 산천단 제사의 음악 역시 완전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옛날에 사광(師曠)이 거문고를 탈 때에 봄이 되어 상현(商絃)을 타면 서늘한 바람이 따라서 이르렀고, 여름이 되어 우현(羽絃)을 타면 서리와 눈이 번갈아 내렸습니다. 가을이 되어 각현(角絃)을 타면 따뜻한 바람이 천천히 돌았고, 겨울이 되어 치현(徵絃)을 타면 햇빛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 악공 가운데 일찍이 사광 같은 이가 없으니 감응의 묘리를 의의(擬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관(周官)》의 제도가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근본을 상고하여 닦아서 밝히는 것이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부(禮部)에 자문하여 고쳐 바로잡아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왕이 가납(嘉納)하고 자세히 살펴 의논하여 시행토록 하니 총우(寵遇)가 더욱 두터워졌다.
병조와 형조 판서에 차례로 임명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고쳐 임명되었고,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총제(摠制) 신상(申商)은 일찍이 박연의 악기가 미비한 점이 많기 때문에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왕이 말하길
“악기는 반드시 박 아무개에게 맡긴 연후라야 성음(聲音)과 절주(節奏)가 조화롭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 달이 넘어 선생이 새 경(磬) 2가(架)를 올리며 말하기를
“중국의 경(磬)은 유빈(蕤賓)의 소리가 임종(林鐘)보다 높고, 이칙(夷則)은 남려(南呂)와 같으며, 응종(應鐘)은 무역(無射)보다 낮아서 당연히 높아야 할 것은 도리어 낮고 당연히 낮아야 할 것은 도리어 높습니다. 옛날 황종(黃鐘)의 법에 따라 12율을 만들고 그것을 기준으로 더하고 빼어 완성을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새 경〔新磬〕 2가를 가져오게 하여 명나라에서 하사한 경(磬)과 협주해 보게 하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하교하기를
“중국 경은 과연 음이 맞지 않았는데 지금 새로 만든 경이 그 바른 소리를 제대로 얻었구나. 율을 제정하고 음을 바로잡은 것이 옛 음악보다 뛰어나니 내가 매우 기쁘다. 그런데 이칙 하나만이 음이 맞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선생이 자세히 살피고 아뢰기를
“금을 그어놓은 먹줄을 아직 다 갈아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라고 하고는 이에 먹줄을 다 갈아내니, 소리가 제대로 조화되었다.
아악이 이미 이루어지자 선생이 말하기를
“태묘의 종경(鐘磬)이 이미 구비되었으니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라고 하고는 드디어 물러나 다시는 정사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전원 속에 난초가 많았다고 하여 학자들은 난계 선생(蘭谿先生)이라고 불렀다.
혜장왕(惠莊王 세조) 때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등 여섯 신하들이 공의왕(恭懿王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일이 발각되어 같은 날 저자거리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선생의 아들 계우(季愚)도 그 때 함께 죽었는데 혜장왕은 선생이 삼조(三朝)의 원로라고 하여 특명을 내려 연좌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천수를 다하고 천순(天順) 2년 무인년 모월 모일에 병으로 작고하니 향년 81세였다. 영동현(永同縣) 고당(高塘)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몇 년 뒤에 문헌(文獻)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을 좋아하고 백가(百家)에 두루 통하였다. 제자를 가르칠 때는 먼저 《소학(小學)》을 강하되 명륜(明倫)과 경신(敬身)의 도에 더욱 뜻을 기울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 3년을 하였고, 복을 벗고도 여전히 여막에서 또 3년을 살면서 예를 다하여 제사를 모셨다. 일찍이 부도의 가르침을 따른 적이 없었고, 정로(正路)를 부식(扶植)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천하 국가에 보탬이 되었던 적이 진실로 많았다. 저술 가운데 〈가훈십칠칙(家訓十七則)〉과 같은 것은 그 덕의(德意)가 신명과 통할만하고 옛날의 명유(名儒)들의 글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배필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여산(礪山) 송씨(宋氏)로 판서(判書) 윤(贇)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맹우(孟愚)로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은 중우(仲愚)로 지군사(知郡事)를 지냈으며, 막내아들은 계우(季愚)로 사육신과 더불어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큰 딸은 목사(牧使) 조(趙) 아무개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사직(司直) 권치경(權致敬)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감찰(監察) 방순손(房順孫)에게, 그 다음은 최(崔)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기자(箕子)가 동방으로 온 이후부터 오기(五紀)가 바로잡히고 팔정(八政)이 닦아졌으나 율려(律呂)만은 고악(古樂)에 맞지 않았다. 송종(頌鐘)이 있으나 특경(特磬)이 혹 달려있지 않기도 하고, 특경이 있으나 화생(和笙)이 혹 갖추어지지 않기도 하였으며, 화생이 있으나 아금(雅琴)이 혹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춘추 시대 전쟁을 하던 때에 이르러 음악은 더욱 무너져, 고수인 방숙(方叔)은 하(河)로 들어가고, 소고잡이인 무(武)는 한(漢)으로 들어가고, 소사(少師)인 양(陽)과 경쇠 치던 양(襄)은 바다로 들어갔으니 중국의 정성(正聲)이 아마도 이미 끊어졌을 것이다. 하물며 바다 밖 황복(荒服)의 나라에서 12율을 누가 능히 화합할 수 있었을 것인가? 오직 선생만이 본조에서 태어나 인의를 닦고 도덕을 밝혀 우뚝이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고, 장헌왕을 보익하여 건명(建明)한 바가 많았다. 그리하여 패옥(佩玉)과 관면(冠冕)의 의례가 새로워지지 않음이 없었고, 음악에 있어서는 깊이 생각하고 홀로 깨우쳐 천 년 동안 전하지 못한 음을 터득하여 종경(鐘磬)ㆍ소관(簫管)ㆍ생황(笙簧)ㆍ훈지(壎篪)ㆍ간척(干戚)ㆍ우약(羽籥)을 만들어 신명(神明)의 덕에 이르도록 하였다. 옛날에 도가 있고 덕이 있는 자를 악조(樂祖)로 삼아 고종(瞽宗)에서 제사 지냈으니. 선생과 같은 분이 어찌 악조(樂祖)가 아니겠는가? 금년 2월에 선생의 후손 아무개가 우리 집으로 와서 선생의 비문에 명을 지어달라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거서를 내리시어 / 天降秬黍
아악을 열어주셨네 / 以開雅樂
진실로 지극한 사람이 없다면 / 苟無至人
누가 그 학문을 전하리오 / 孰傳其學
훌륭하신 선생께서 / 顯允先生
후복에서 나시어 / 起於侯服
가슴속에 경의 형상을 그리니 / 胸畫磬形
대장이 이에 회복되고 / 大章是復
입으로 생황의 소리를 익히니 / 口習笙聲
함지가 이에 이어졌네 / 咸池是續
장헌왕 때 / 維時莊憲
율관을 맡기니 / 律管以屬
소인이 질투하고 / 宵人嫉之
헐뜯는 말이 오갔네 / 毁言交積
장헌왕 의심치 않으시고 / 莊憲不疑
총명을 더하셨으니 / 寵命有奕
이에 전형을 내리시어 / 乃予銓衡
천직을 다스리게 하시고 / 俾治天職
이에 문병을 내리시어 / 乃授文柄
나라를 빛나게 하시었네 / 以光王國
선생이 머리를 조아리고 / 先生稽首
더욱 감격해 하며 / 愈自感激
밤낮으로 애써 / 夙夜兢兢
드디어 그 업적을 고하였네 / 遂告厥績
종걸이가 완성되니 / 鐘簴旣成
질서가 어긋나지 않았고 / 倫理不錯
생황과 거문고가 조화되니 / 笙瑟旣和
제멋대로 치우침이 없었네 / 敖辟不作
청묘에 제사를 드릴 제 / 享于淸廟
열조께서 이르러 흠향하시고 / 烈祖來格
대사에 제사를 드릴 제 / 祀于大社
구룡이 기쁘게 맞이하며 / 句龍歡逆
밖으로 산천신까지 미치니 / 外曁山川
백신이 기뻐하네 / 百神踊躍
곡조가 비로소 바로잡히니 / 宮商始正
이 누구의 힘인가 / 是誰之力
명나라 사신(使臣)이 음을 살피고는 / 天使審音
감탄을 하는구나 / 爲之歎息
사신이 명을 지어 / 史臣作銘
그 업적 영원히 드리우리 / 永垂無極
[주-D001] 이조판서 …… 박공 : 박연(朴堧, 1378~1458)으로,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이다. 집현전 교리ㆍ사간원 정언ㆍ사헌부 지평ㆍ세자시강원 문학ㆍ봉상판관 겸 악학별좌(奉常判官兼樂學別坐)ㆍ관습 도감사(慣習都監使)ㆍ공조 참의(工曹參議)ㆍ중추원사(中樞院使)ㆍ보문각 제조(寶文閣提調)ㆍ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율관 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 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주-D002] 외복(外服) : 복(服)이란 천자의 일에 복무한다는 의미로써, 사방 천리의 왕기(王畿) 이내의 지역을 내복이라 하고, 왕기 이외의 지역을 외복(外服)이라 하였다. 흔히 중원(中原)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을 외복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해서 겸사로 자주 사용하였다.[주-D003] 팔음(八音) : 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ㆍ토(土)ㆍ목(木)ㆍ혁(革)ㆍ포(匏) 등 여덟 종의 악기에서 나는 소리를 말한다.[주-D004] 헌가악(軒架樂) : 조선 시대 제례(祭禮)나 대례(大禮) 등의 궁중의식 때 섬돌 아래인 당하(堂下)에서 연주하던 궁중음악이다. 당상(堂上)에 위치하는 등가(登歌)와 짝을 이루는 음악으로 종(鐘)ㆍ경(磬)ㆍ고(鼓) 등 아악기를 가(架)에 걸어 놓고 사죽(絲竹)과 함께 연주했다.[주-D005] 거서(秬黍)가 …… 228개였다 : 거서(秬黍)는 검은빛 기장인데, 옛날에 중간 크기의 것을 골라 척도의 표준으로 삼았다. 경석(磬石)은 안산암(安山岩)의 하나로 옥돌이라고도 한다. 세종 때 해주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에서 경석(磬石)이 나자 세종은 박연(朴堧)에게 거서를 가지고 적분(積分)해서 황종(黃鍾)이란 관(管)을 만들고, 경석으로 편경(編磬)을 만들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9년 5월 15일》 《세종실록 9년 9월4일》 《세종실록 15년 1월 1일》[주-D006] 성인이 …… 응하였다 : 《예기》 〈악기(樂記)〉에 “성인이 악을 만들어 하늘에 응하고, 예를 제정해서 땅에 짝지으니, 예악이 밝게 갖추어져 천지가 마땅함을 얻게 되었다.〔聖人作樂以應天, 制禮以配地, 禮樂明備, 天地官矣.〕”라는 말이 나온다.[주-D007] 순 임금 …… 것 :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악관(樂官)인 기(夔)가 “명구를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노래하니, 조고가 와서 이르시며 우빈이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제후들과 덕으로 사양합니다. 당(堂) 아래는 관악기와 도고를 진열하고 음악을 합하고 멈추되 축과 오로써 하며 생과 용을 번갈아 연주하니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추고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춥니다.〔戛擊鳴球, 搏拊琴瑟, 以詠, 祖考來格, 虞賓在位, 群后德讓. 下管鼗鼓, 合止柷敔, 笙鏞以間, 鳥獸蹌蹌, 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주-D008] 격부(擊拊) : 석경(石磬)을 치고 어루만진다는 격석부석(擊石拊石)의 준말이다. 《서경》 〈익직(益稷)〉에 “아, 제가 석경을 치고 어루만지자, 온갖 짐승들이 모두 따라서 춤을 추며 서윤(庶尹)이 진실로 화합합니다.〔於予擊石拊石, 百獸率舞, 庶尹允諧.〕”라는 말이 있는데 주에 의하면 ‘격(擊)’은 무겁게 치는 것이고, ‘부(拊)’는 가볍게 치는 것을 말한다. 팔음 중에서 석경 치는 것을 말한 것은 석경의 소리는 화합하기 어렵고, 석경의 소리가 조화로우면 다른 악기의 소리도 조화로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소리의 조화를 연구한다는 의미로 썼다.[주-D009] 동진사(同進士) : 문과(文科)에서 갑(甲)ㆍ을(乙)ㆍ병(丙)의 등급에 속하지 못한 등외(等外)의 급제자를 말한다.[주-D010] 숙재(宿齋) : 의식(儀式) 등의 기일에 앞서서 목욕재계하는 것을 이른다.[주-D011] 삼분손익 : 중국계 아악의 12율을 산출하는 방법이다. 기본음(基本音)인 황종(黃鍾)의 음높이를 먼저 정한 다음, 한 번은 삼분손일(三分損一)하여 완전 5도 위의 음인 임종(林鐘)을 얻고, 이 임종을 삼분익일(三分益一)하여 전회 5도(轉回五度), 즉 완전 4도 아래의 태주(太簇)를 얻는 방법을 차례로 거듭하여 12율을 모두 얻게 된다.[주-D012] 선생이 …… 것이었다 : 《국조보감》 6권 1433년(세종15)의 기록에 의하면 박연이 해주의 검은 기장을 가져다가 그 분촌을 쌓아가지고 고설(古說)대로 황종(黃鐘) 1관(管)을 만들어 불어보니 중국의 황종보다도 조금 높은 소리가 났다. 토질에 비옥하고 척박한 차이가 있고 기장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소리의 높낮이가 시대마다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연은 우리나라의 풍토가 중국과 다르다는 것에 착안하여 해주의 검은 기장알 모양으로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서 분을 쌓아 관(管)을 만들었다. 한 알을 1푼으로 하고 열 알을 쌓아 1촌으로 하는 것을 법으로 삼고 9치를 황종(黃鐘)의 길이로 삼은 다음, 3푼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12율(律)을 완성하였다.[주-D013] 왕은 …… 참여시켰다 : 이 내용은 《연려실기술》 권3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에서 볼 수 있다.[주-D014] 육률(六律)과 육동(六同) : 육률(六律)은 십이율(十二律) 중 양성(陽聲)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音)이고, 육동(六同)은 십이율(十二律) 중 음성(陰聲)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音), 즉 육려(六呂)를 말한다.[주-D015] 대사악(大司樂) : 중국 주(周)나라 때 악관(樂官)의 장이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주나라의 통치조직은 육관(六官)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춘관(春官)은 그 장관이 대종백(大宗伯)으로 제사와 조빙 및 회합 등의 예의를 관장했고, 대사악은 이 춘관에 소속되어 있었다.[주-D016] 사망(四望) : 해〔日〕ㆍ달〔月〕ㆍ별〔星〕ㆍ바다〔海〕를 말한다.[주-D017] 조신언(趙愼言) : 대사헌 조박(趙璞)의 아들이자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의 사위이다.[주-D018] 단지 …… 것입니다 : 이 부분은 황경원이 박연의 논의를 요약하여 정리하였으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상소의 내용을 중심으로 수정 보완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협종은 ‘음성’으로 고쳐 이해해야 한다. 박연의 주장에 의하면 주나라 제도에서는 종묘의 음악은 무역(無射)을 연주하고 협종(夾鍾)을 노래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종묘의 제사를 보면 당하에서 양성인 무역을 연주하는 것은 맞지만 당상에서는 마땅히 음성인 협종을 노래해야 될 것인데도 도리어 무역을 연주하고 있다. 이것은 무역만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음악인 줄만 알고 협종이 무역과 합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여, 당상과 당하에 모두 양성인 무역을 사용한 셈이니 잘못이라는 것이다.[주-D019] 대성악보(大成樂譜) : 원(元)나라 때 임우(林宇)가 찬한 석전악보(釋奠樂譜)이다. 세종 때 《대성악보》 16곡(曲) 중에서 12곡만을 채택하여 제사(祭祀)의 아악보(雅樂譜)로 사용했다.[주-D020] 관세(盥洗) : 제사 의식을 거행하면서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주-D021] 석전의 …… 것입니다 : 이 부분은 박연이 올린 상서의 내용을 통해 좀 더 내용을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연은 《대성악보》의 내용이 《주례》에서 추구하는 합성(合聲)의 제도에 대체로 부합하지만 석전의 음악의 경우에는 좀 특이하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고선과 남려는 본래 사망(四望)에 속한 것인데 석전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성(先聖)의 사묘(祠廟)가 대대로 노(魯)나라에 있어, 자손들이 계승하여 제사 지내어 끊어지지 않았다면 먼 곳의 제사는 마땅히 사망의 예와 같이 해야 되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박연의 추측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석전 음악은 잘못된 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우선 관세(盥洗)ㆍ승전(升殿)의 음악은 없고, 다만 초헌ㆍ종헌과 변두를 철거하는 때만 음악이 있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또 초헌을 할 때와 변두를 철거할 때 당상에서 남려의 율(律)을 사용하여 노래하는 것은 맞지만, 아헌과 종헌의 경우에는 모두 당하에서 고선의 율을 사용해야 마땅한데, 아헌에서는 아래에서 남려를 연주하고, 종헌에도 당상에서 남려를 노래하니, 노래와 주악이 순전히 남려만 사용하고 합성을 사용하지 않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박연은 우리의 석전 음악이 절차도 갖추지 못하고, 상하가 차례를 잃어 심히 미안한 일이라고 하면서 일찍이 공성(孔聖)의 사당에 이러한 근거 없는 음악을 설치했겠느냐고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주-D022] 전폐(奠幣) : 제사 때 헌관(獻官)이 집사자에게 폐백을 받아서 신위(神位) 앞에 드리는 일을 말한다.[주-D023] 사광(師曠)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야(子野)이고, 진평공(晉平公) 때 악사(樂師)를 지냈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는데, 음률(音律)을 잘 판별했고 소리로 길흉(吉凶)까지 점쳤다고 한다. 제(齊)나라가 진나라를 침공했는데, 새소리를 듣고 제나라 군대가 이미 후퇴한 것을 알아냈다. 평공이 큰 종을 주조했는데 모든 악공(樂工)들이 음률이 정확하다고 했지만 그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사연(師涓)이 이 사실을 확인했다. 《금경(禽經)》을 지었다고 전해진다.[주-D024] 의의(擬議) : 말하기 전에 의논하는 것을 의(擬)라 하고, 실행하기 전에 의논하고 평가하는 것을 의(議)라 하니, 의의(擬議)는 어떤 일의 계획이나 실행에 앞서서 토의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주-D025] 신상(申商) : 1372~1435. 본관은 은풍(殷豊), 자는 득지(得止),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생원ㆍ진사를 거쳐 1390년(공양왕2)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정랑ㆍ경력(經歷)ㆍ연안(延安) 부사를 역임하고, 1405년(태종5) 상호군이 되어 동북면의 국경경비를 맡았다. 1419년(세종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후 대사헌ㆍ이조 참판ㆍ형조 판서ㆍ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추서되었다.[주-D026]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 : 악학(樂學)은 조선 초기에 음악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던 기관이고, 그곳의 으뜸벼슬을 영악학(領樂學)이라고 하였다. 연주활동의 행정적 지원과 음악 관련의 학문적 연구를 담당한 음악기관으로 재랑(齋郞)ㆍ무공(武工)ㆍ악공(樂工)의 취재와 습악(習樂)을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이외에도 악서와 악보의 편찬, 음악이론과 역사연구 또는 악복(樂服)과 의례(儀禮)의 고증, 그리고 율관제작과 악기제조의 감독 등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ㆍ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ㆍ고불(古佛)이다. 세종 때 이조 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올라 관습도감(慣習都監)과 악학(樂學)에 관여하여 음악지도자의 능력을 발휘했으며, 1427(세종9) 악학의 책임자 직무를 수행하면서 악학별좌(樂學別坐) 박연(朴堧)을 거느리고 12율관(律管) 제작과 악기개량, 신정아악(新定雅樂)의 창제를 지도하였다.[주-D027] 총제(摠制) …… 생각하였다 : 당시 세종이 “거서(秬黍)로 율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 만든 황종(黃鐘)을 박연이 만든 율관을 가지고 그 소리를 살펴보면 맞고 아니 맞는 것을 누구든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신상(申商)은 “이는 다만 박연이 혼자 알아낸 것이 아니요,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의 도움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세종실록 9년 9월 4일》 《練藜室記述 卷3 世宗祖故事本末》[주-D028] 혜장왕(惠莊王) …… 당하였다 :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복위를 시도했던 거사, 즉 단종 복위운동을 말한다.
[주-D029] 계우(季愚) : 박계우(朴季愚, 1414~1454)로, 박연의 셋째 아들이다. 14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한림학사를 역임하였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육신인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유성원ㆍ이개ㆍ유응부 및 안평대군 이용ㆍ김종단ㆍ정분 등과 41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1791년 정조 15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吏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總管)에 추증되었다.
[주-D030] 소학(小學)을 …… 기울였다 : 어린 아이들이 배우던 수신서(修身書)인 《소학(小學)》은 총 6편으로, 내편은 〈입교(入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ㆍ〈계고(稽古)〉로 이루어져 있고, 외편은 〈가언(嘉言)〉ㆍ〈선행(善行)〉으로 구성되었다.[주-D031] 가훈십칠칙(家訓十七則) : 박연의 문집 《난계유고》의 〈잡저〉편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계유정난에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연루되어 박연 역시 유배를 가게 되어 있을 때 후손들에게 모범이 될 생활을 당부하기 위해 썼다고 알려져 있다.[주-D032] 오기(五紀)가 …… 닦아졌으나 : 오기와 팔정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이륜(彛倫)을 펴는 이치에 대해 물었을 때 기자(箕子)가 내린 가르침인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이다. 오기는 세월과 자연의 흐름인 세(歲)ㆍ월(月)ㆍ일(日)ㆍ성진(星辰)ㆍ역수(曆數)이고 팔정은 나라 정사(政事)의 8가지 일, 곧 식(食 식생활)ㆍ화(貨 재화)ㆍ사(祠 제사)ㆍ사공(司空 농지개간)ㆍ사도(司徒 교육)ㆍ사구(司寇 치안)ㆍ빈(賓 외교)ㆍ사(師 국방)를 가리킨다. 《書經 洪範》[주-D033] 고수인 …… 들어갔으니 : 방숙(方叔)ㆍ무(武)ㆍ양(陽)ㆍ양(襄) 모두 주나라 때의 악공(樂工)으로, 주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세상을 피해 숨었던 사람들이다. 《論語 微子》[주-D034] 황복(荒服) : 옛날 중국 오복(五服) 가운데 가장 먼 변두리에 있는 구역으로, 왕기(王畿)에서 멀리 떨어진 2000리에서 2500리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제왕의 감화가 미치지 못하는 먼 나라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이자,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겸칭으로 쓰였다.[주-D035] 건명(建明) : 정사(政事)를 밝게 일으켜 세우거나 의견을 제시하여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말한다.[주-D036] 종경(鐘磬) …… 우약(羽籥) : 종경(鐘磬)ㆍ소관(簫管)ㆍ생황(笙簧)ㆍ훈지(壎篪)는 악기 이름이다. 간척(干戚)은 방패와 도끼를 손에 들고 추는 무무(武舞)이고, 우약(羽籥)은 깃털을 잡고 약(籥)이라는 피리를 불면서 추는 문무(文舞)이다.[주-D037] 고종(瞽宗) : 중국 은(殷)나라 때 학교(學校) 이름이다. ‘고(瞽)’는 아는 것이 없이 무지몽매하다는 것을 이르며, ‘종(宗)’은 높인다는 뜻이다. 《廣雅 釋宮》[주-D038] 후복 :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를 매복(每服) 500리씩 나눈 다섯 구역을 오복(五服)이라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에는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이라 했고, 주대(周代)에는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이라 했다.[주-D039] 대장(大章) : 요(堯) 임금 때 만든 악명(樂名)이다. 천(天)ㆍ지(地)ㆍ인(人)의 도리를 크게 밝힌 것으로서, 순 임금의 대소(大韶)와 함께 유명하다.[주-D040] 함지(咸池) : 요 임금 때의 음악 이름으로, 황제(黃帝)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주-D041] 천직(天職) : 타고난 임무나 직분, 또는 하늘이 부여해 준 직분으로 정치를 하는 것을 이른다.[주-D042] 대사(大社) : 고려, 조선 시대에 임금이 토지신(土地神)인 후토씨(后土氏)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주-D043] 구룡(句龍) : 토지신을 말한다. 원래 공공씨(共工氏)의 아들이었는데, 수토(水土)를 잘 다스려서 뒤에 후토지신(后土之神)이 되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 29年》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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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우(朴季愚, 1414~1454)로, 박연의 셋째 아들이다. 14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한림학사를 역임하였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육신인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유성원ㆍ이개ㆍ유응부 및 안평대군 이용ㆍ김종단ㆍ정분 등과 41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41세때 처형당했으면 1414년생인데 그해 문과급제했다는 건 말이 안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