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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좌와집(靜坐窩集) 심조(沈潮)생년1694년(숙종 20)몰년1756년(영조 32)자신부(信夫)호정좌와(靜坐窩)본관청송(靑松)특기사항권상하(權尙夏)의 문인. 한원진(韓元震), 이간(李柬), 윤봉구(尹鳳九) 등과 교유
경종 | 3 | 1723 | 계묘 | 雍正 | 1 | 30 | 봄, 「주자대전」을 읽다. ○ 겨울, 牛渚書院에서 「대학」을 읽다. 尹鳳陽과 「가례」를 강하다. |
영조 | 3 | 1727 | 정미 | 雍正 | 5 | 34 | 여름, 章陵 齋室에서 玄尙壁과 예를 강론하다. ○ 가을, 花田에서 李縡를 만나다. ○ 우저서원에서 향음주례를 시행하다. |
영조 | 38 | 1762 | 임오 | 乾隆 | 27 | - | 10월, 우저서원의 山仰壇에 제향되다. |
靜坐窩先生集卷之十二 / 記 / 牛渚書院春秋享祝文改撰事實記 壬申
牛渚書院春秋享祝文。故相李景奭述之。盖此相爲此院之最初院長。故院之章甫。因以此文屬之也。然殊不知其三田碑一事。大有愧於春秋之義。其於節義二字。便是越邊人。初不可擬議於此等事。况以我先生堂堂大節。而使此人作院長撰祝文乎。是時尤菴,同春兩先生皆無恙矣。捨此而取彼。不亦傎乎。大抵今之院長。卽古之山長洞主。而我朝之李景奭。卽宋朝之孫覿也。曾聞宋儒以孫覿爲山長洞主乎。撰祝文。亦賢者事也。覿可以當之乎。潮自省事來。已知其可駭而欲改之。及讀農巖遺稿。見淸陰撰月沙碑。而愼勿使三田碑書寫人書之一段語。未嘗不擊節感歎。益自信一得之不悖。且以私問寒泉,黎湖諸老。皆以爲可改。而第行之已久。竊恐士論携貳。囁嚅而不能發。然胷中之勃勃則尋常未已。每當春秋享。輒有如不祭之歎。辛未八月。籩豆厘正之事了當。奠菜禮畢。潮始發此論。時章甫大會。長老三四亦來。而有司則鄭友道潤也。道潤首肯之。長老亦皆可之。餘人無敢有立異者。於是議定。今年春。沈生濟聖以掌議。禀于院長。兪判府事拓基。 院長可之。尹友汝新以新有司。請文于屛溪丈。尹進善鳳九。 溪丈亦許之。其文曰
春秋之義。洛閩之學。知㫼賢邪。節幷山嶽。玆値春 或秋 丁。敬陳牲酌。庇牖顓蒙。百世無斁。
五月十五日。行告由祭。盖將捨舊用新。不宜昧然也。噫。百年未遑之事。而今乃行之。可謂有志竟成也。先生有靈。亦必莞爾而笑爾。此豈非斯文之幸。而可以有辭於後世者乎。尤翁先生每痛景奭氣節之疲軟。
己酉䟽。直以
孫從臣斥之。而其後與人書曰。近日因事得斥三田。如癢得搔。又曰
知我者從臣䟽。
罪我者從臣䟽。愚於此亦云。鄭道潤少時過田湖。有詩曰廣陵津下滔滔水。未洗軒翁字字羞。盖其慷慨如此。故今於此事。必要其成。可尙也已。壬申五月十九日。靑松沈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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㫼 《说文解字》
『說文解字』
昭晣,明也。从日折聲。《禮》曰:“晣明行事。”旨熱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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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坐窩集年譜 / 先考靜坐窩府君年譜
壬午八月。山仰壇成。己卯正月。本郡儒生沈君光漢。發建祠之論。一鄕及隣邑章甫會合。各出財力。營建祠宇。盖府君平日常與諸生。排日講會于牛渚書院。遺蹟尙存。故就院傍建祠。九月祠成。扁以山仰。實取屛翁題詠府君書室中語也。十月。奉安位版。以二籩二䇺。行祀於春秋兩丁。越三年辛巳。主倅閔百宗莅任之初。與道伯洪啓禧謂以祠宇之冐禁營建。迫令毁撤。鄕中多士。深痛斯道益窮。寓慕無所。始發䟽請配院之論。而又以事貴難愼。䟽擧則徐俟日後更議。姑就祠址。除地爲壇。以紙榜依前行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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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十三 / 疏箚 / 因留都大臣李景奭箚待罪疏 己酉四月
伏以賤疾彌留。久阻行朝起居之班。方自踧踖俟罪矣。乃蒙聖慈特加愍恤。太醫齎藥遠來診視。是不翅枯楊華稊。朽骨生肌。感激涕零。不知攸措也。臣旣服珍劑。又施艾灸。數日之內。若有其效。臣以爲 回鑾之日已迫。如不忍死趨朝。永辭天顏。則犬馬之情。無路得伸。故強疾作行。僅到數十里地。則頓撼搖戛。疾勢復作。痛楚之氣。有加於前。臣自悔妄動。不可復追矣。臣不得已投入路傍深谷。祇伏調治。幸而少愈。則復欲寸寸前進。雖不能遂達行朝。或及於路左瞻送之列矣。茲者。偶因邸狀。得見留都大臣箚本。則其所論斥。至峻且深。雖不直擧臣名。而其所指摘。豈在他人哉。臣惶恐震越。尤不知所出也。臣義當泥首仗外。以請罪譴。而疾病如許。進退路窮。但切 危迫之私而已。臣竊自惟念。乖義理紊朝綱。自是人臣之極罪。此論雖出於他人之口。猶不勝其惶惑。況於大臣之言乎。臣又竊念古昔如孫從臣之壽而康者。雖大爲一時之所尊重。然不甚以知義理振紀綱見稱。則或反有哀之者。而時有庸陋之甚者。行身無狀。乃反爲其人所非。則其爲衆人之鄙笑何如哉。今臣所遭不幸近是矣。臣竊自愍焉。伏乞聖明。特加矜察。亟除臣西樞及兼帶。仍治違傲逋慢之罪。以爲明義理肅朝綱之助。不勝幸甚。臣無任兢惶戰灼之至。
[주-D001] 激 : 激一作極
송자대전 제13권 / 소차(疏箚)
유도 대신 이경석의 차자로 인하여 대죄하는 상소 기유년(1669, 현종10) 4월〔因留都大臣李景奭箚待罪疏 己酉四月〕
삼가 아룁니다. 미천한 신의 질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아 행조(行朝)의 반열에 끼지 못한 지가 오래므로 스스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성상께서 특별히 걱정해 주시어 태의(太醫)가 약을 싸 가지고 먼 길을 와서 신의 병을 진료하니, 이는 마른 나무에 꽃이 피고 썩은 뼈에 새살이 돋아나는 정도일 뿐이 아니므로 감격의 눈물이 흘러 몸 둘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이미 태의가 지어 주는 약을 먹었고 또 뜸을 뜨고 침을 맞고 있으니 수일 내로 차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에 어가가 궁으로 돌아갈 날이 박두하였으므로 차마 죽을 수 없어 행조로 달려가 천안(天顔)을 영원히 하직하지 않는다면 견마(犬馬)의 정을 펼 길이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는데 겨우 수십 리를 걷자 몸이 흔들리고 뒤틀리며 병이 다시 발작하여 통증이 전보다 더했습니다. 신은 망동(妄動)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다시 어찌할 수 없어 부득이 길옆 산골짜기로 들어가 조심하여 병을 치료하며, 다행히 병이 조금 나은 뒤 다시 길을 떠나면 비록 행조까지 가지는 못하더라도 혹 중로에서 우러러보며 전송하는 대열에 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집에서 보내온 편지로 인하여 유도 대신의 차자를 보니, 그 논척한 바가 지극히 준엄하고 심각하였습니다. 비록 신의 이름을 바로 지적하여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그 지적한 바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더욱 황공하고 두려워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신하의 의리로 보아 마땅히 어가의 의장 밖에서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해야 하나 병이 이와 같아 나아갈 수도 물러갈 수도 없으니 위태롭고 절박한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건대, 의리를 거스르고 조정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이니, 이런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황공함을 이길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대신의 말이겠습니까. 신이 또 생각건대, 옛날에 손 종신(孫從臣)이 장수하고 강녕을 누린 것이 비록 한때 존중받기는 하였으나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하였다는 칭찬을 크게 받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행동이 무상(無狀)하고 용렬 비루한 자가 도리어 그의 비난을 받았으니,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지금 신의 경우가 불행하게도 이에 가까우므로 신은 적이 걱정됩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긍휼히 여겨 살피셔서 신이 맡은 서추(西樞)의 직임과 겸직을 속히 삭제하시고, 명을 거스르고 회피한 죄를 다스려 의리를 밝히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황공하여 몸 둘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주-D001] 이경석(李景奭)의 차자(箚子) : 현종(顯宗)이 온양(溫陽)에 거둥하였을 적에 우암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입조(入朝)하지 않았다 하여 이경석이 넌지시 우암을 꼬집은 차자를 올린 것을 말한다. 이경석은 평소 우암을 중히 여겨 그의 귀향을 만류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이 상소로 둘 사이에 틈이 생겼다.[주-D002] 손 …… 있었습니다 : 송 흠종(宋欽宗)이 정강(靖康)의 난 때 금(金)나라에 잡혀 있을 적에 금인(金人)이 항복하는 글을 받으려 하므로 흠종은 부득이 종신(從臣) 손적(孫覿)에게 짓게 하였는데 손적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송나라의 위신을 깎아내려 오랑캐에게 아첨하는 글을 지었다. 그가 항상 사람들에게 “천명(天命)을 따르는 자는 보전하고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는 말을 하므로 어떤 이가 조롱하기를 “그대가 오랑캐 진영에 있을 적에 천명을 따른 것이 매우 심하였으니, 수(壽)하고 강녕(康寧)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하니, 손적은 부끄러워 응답하지 못했다 한다. 《朱子大全 卷71 雜著 記孫覿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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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六板○留都 止 論斥 溫幸時。李景奭陳箚以爲帳殿近臨。而無人入朝。此係國綱義理。不當如此云云。 孫從臣 止 而康 宋欽宗之陷虜也。虜人欲得禁文字。欽宗詔從臣孫覿爲之。覿過爲貶損以媚虜。每語人曰。順天者存。逆天者亡。或戲之曰。子在虜營。順天已甚。其壽而康也宜哉。○李景奭撰三田碑。極意媚虜。先生嘗欲因事斥之。前歲李以年老得賜几杖。請先生作序。乃引朱子記孫覿事壽而康之語而諷之。李初不識。後乃覺而深呵之。遂與俗輩合謀。凡先生所建白。無不沮敗。及先生退歸。貽書其友。至有麻姑爪搔背之語。至是。又上疏侵斥。先生因自列。而復引孫覿事。斥言之。此疏之將上。無不更諫。而先生以爲不可顧小嫌。蓋要以此明大義。存大防也。彼以鄕愿之類。爲世尊信。及見先生此疏。擧世譁然。而先生不以爲悔。嘗曰。彼於當時。雖迫於不得已。而豈無稱停之道乎。其所媚虜猶恐不及。少無不欲言而強言之意。苟有人心胡忍爲此。此先生所以痛疾者也。若谿谷之作。果不無斟酌。而先生猶以爲不滿。嘗不許。牛溪之碑。此可見先生之素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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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力扶三田。指李景奭之徒。時以先生疏孫從臣語擧世譁然。故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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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八十七 / 書 / 答尹復元 己酉七月
春秋大義數十。有因事而見之凡例矣。三田事。雖傾漢水。不足以洗其汚。自惟年數不足。朝夕入地。則此事恐遂因循晻昧。故因其人義理之說而遂言之。人之以相較爲言。則當初已知之矣。然何可拘小嫌。亦何暇顧一己利害也。此義苟明於世。則身雖滅死。萬萬無恨矣。愚竊不遜。每自誦以爲知我者其惟從臣疏乎。罪我者其惟從臣疏乎。未知尊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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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卿大夫章甫之徒。下至都下庶民。出而相弔。入而哭甚哀。門人及甥孫疏戚加麻者十餘人。方鎭守宰。無論知不知。賻襚之儀極厚。所領書院諸生。皆操文致哀。諸生請爲院長者道峯,紫雲,坡山,景賢,崇陽,牛渚,文會,宣德,遼山,石室凡十書院。又有所請。而今不能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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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운유집(陶雲遺集) 이진망(李眞望)생년1672년(현종 13)몰년1737년(영조 13)자구숙(久叔)호도운(陶雲), 퇴운(退雲)본관전주(全州)특기사항이경석(李景奭)의 증손(曾孫).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陶雲遺集冊二 / [䟽] / 辨誣䟽 癸未年。郡守公爲黨議所蔽。陳䟽未徹。而癸巳秋。陶雲公上䟽承聖批。
伏以臣等。至疎遠也。至卑微也。平日未敢自達於君父。今遽相率叫閽。仰暴私悃。極知僭妄猥越。萬殞難贖。而竊念臣等有跼高蹐厚之寃。叩心腐膓之痛。而趑趄含忍。不一陳於黈纊之聽。使祖先長受黮黯 a186_080c之誣。則是臣等自外於天地之大而遺親棄孝。其罪益大。臣等玆不避鈇鉞之誅。敢陳崩廹之私。庶冀日月之明。或垂容光之照。伏乞聖明少賜省察焉。臣等竊惟先祖臣故領議政景奭。歷相仁孝顯三朝。事君行己。具有本末。忠孝之行。純粹之德。卓立之節。淸修之操。著於事業。載在簡策。列聖之礼遇。士林之尊信。當世无其比。後來无異辭。此非臣等之私言。乃國人之公誦也。非特國人之公誦。抑亦聖聦之所當稔熟者也。不意近者館學伩生洪啓廸等投進一䟽。其言專以朴世堂所撰臣祖碑文中。論及故相 a186_080d臣宋時烈大加懟怒。移鋒於臣祖。而其所以醜誣詆辱。罔有紀極。噫嘻痛哉。此何言也。啓廸等旣以兩欵事。爲誣辱臣祖之欛柄。則臣等請又各就其事而明辨之。嗚呼。丁丑之事。尙忍言哉。惟我仁祖大王屈己忍辱。爲宗社爲生靈。爲不得已計也。而旣而彼虜之疑怒轉深。先設機關。以觀我人之俯仰。廼令竪碑。徵文甚急。卽是年十二月也。仁庙初命新豊府院君張維,前府使趙希逸及臣祖。並於一夜撰出。時文衡見闕。臣祖方帶藝文提學。陳疏力辭。而事機急廹。不獲已製進矣。及入送。彼中適有中朝學士投 a186_081a虜者。以爲新豊文所引鄭伯牽羊語。本出諸侯相侵事。又謂臣祖所撰。亦甚踈略。全不鋪張。於是虜人益加疑怒。督令改撰。咆哱益甚。朝廷憂怖。不知所出。時新豊已沒。上獨召臣祖面諭之曰。彼以此文。欲驗向背。此政國家存亡所判。句踐臣妾會稽。終致沼吳之績。他日自强。唯在於予。今日之事。但當於文字。務中其意。毋致事機轉激。臣祖亦自念主辱至此。不暇顧惜一身。隱忍承命。此乃臣祖丁丑撰文事狀也。及臣祖進提銓衡。每以引拔巖穴爲務。時烈以前參奉。方有學行名。故首加尉薦。致之顯路。自後奏章登筵。 a186_081b輒請君致眷眷以禮待之意。逮至寧陵嗣服。臣祖進位元輔。則又擧時烈等一時名士。俾贊新化。時烈亦因以爲宗。每入都下。輒以布衣草屨。造請門屛。臣祖亦必待以均敵。以盡下士之禮。臣祖雖以隣嘖去位。不獲同朝。契誼之厚。久而靡替。如聞其辭退。則輒陳䟽請挽。又必貽書勉留。責以追報之義。時烈名位旣崇。而其敬重尊礼。每見於辭氣書牘之間。至引周公九罭之語以美之。至己亥論礼時。臣祖主時王之制。時烈主四種之說。意見始少歧矣。辛丑夏審理之時。先正臣宋浚吉請寬尹善道栫棘。臣祖以爲春天 a186_081c雨露。不擇草木之美惡。宜納伩臣之言。使年廹者免作窮荒之鬼。遂有成命。時烈聞而恚之。後又遣其子。求托姻好事。適不諧。時烈疑其不滿於己。至形於書尺。又移書所親。顯示憾恨之意。而臣祖之所以待之者。初不有異焉。戊申。先王謂臣祖元老。命賜几杖。臣祖要侈恩之文於一時名勝。亦及於時烈。時烈不辨而爲之。有曰公之立朝始終。聖上敎書已備。而惟庚寅二月事。微而不著。盖是時宗社存亡。决於呼吸。而其喩於利害者。皆袖手却立。不翅若秦瘠之越視。唯公獨以一身死生以之。不攝不撓。邦國卒以 a186_081d无事。自是主知益隆。士心益附。其下乃復繼之以受天之祐。壽而康而。終受我聖上恩礼有以也。嗚呼。此可以觀君臣矣。盖庚寅事。卽指臣祖抗辭虜人。刑禍且及。而賴孝庙周旋全護。得止栫棘於西塞者也。今其頌美忠節。可謂至矣。而篇末一語。引擬黮黯。殊不可測。己酉春。先王有溫泉之幸。臣祖受命留都。上箚行朝。首陳遇灾修省之道。仍言平昔朝端。納履之色相繼。今日帳殿。未聞有奔問之人。君父不幸有疾。遠臨草次。如非老病有事故者。其在分義。不當如此。此係國綱義理。臣甚憂焉。抑又思之。古所謂 a186_082a訑訑之色。拒人千里者。今亦近之耶。此殿下所當惕念處也。當是時。時烈適病在鄕廬。未及奔問。得此箚。誤認指己而發。乃進一䟽。先爲遜謝之語。遂曰。如古昔孫從臣之壽而康者。雖大爲一時之所尊崇。然不甚以知義理振紀綱見稱。則或有哀之者。而時有庸陋之甚者。其或行身無狀。反爲其人所非。則其爲衆人之所鄙笑。當復如何哉。今臣所遭。不幸近是。臣祖復陳小箚。略曰。時烈以臣妄陳之箚。認爲論斥。臣之本心。斷無他意。可質神明。无所愧也。所恨者。從前相識。非泛然相與之比。不料臣不能取信以致如此。 a186_082b臣甚愧怍。又曰。設有可作之事。君子之交。交相勖而責之以義。何忍背前日之相好。有所峻斥乎。臣心不然而不幸甚矣。噫。以時烈攻臣祖者。觀臣祖待時烈者。則其忿𢜀之氣。雍容之辭。一見可辨矣。此乃臣祖與時烈交際始終也。嗚呼。啓廸等謂時烈之於臣祖。初无恩怨。而其爲恩爲㤪。臣旣歷陳之矣。啓廸祖迷時烈之論。謂臣祖三田文字。與孫覿之作某文相類。夫宋欽之被拘虜中也。雖應金人之求文。實冀孫覿之不奉詔。則其敢擬議於仁庙之爲宗社。屈己忍辱。面命諄切。辭旨痛廹。至引勾踐而諭之者耶。孫覿之 a186_082c不体其君之本意。徒貪彼虜之厚餉。可辭而不辭者。又何得比論於臣祖當危機益激之際。遵聖祖懇惻之旨。廹於不得已而爲之者耶。當其時也。臣祖獨在文苑。終必䂓免。則朝廷其將坐受醜虜之廹辱。竟不得借一詞臣之手。以抒危機耶。抑虜人將爲無人肯撰。遂輟不索耶。使臣祖汚世絶俗。早已長往則已。致位高華。許國以身。險阻艱難。亦旣備甞。死生榮辱。理無獨殊。而乃於一文字之役。遽欲自潔其名。坐視君父之逼辱。終不承命。則其取譽於一時亢議之士。固有之矣。其於事君致身之道。果何如也。然則臣祖 a186_082d之捨彼取此者。其果爲國計耶。爲身計耶。寸心較然。可質百世。則噫嘻。啓廸之言。胡至斯也。啓廸等謂時烈引覿事以諷䂓之者。非出於時烈之私意。而實遵朱子之遺旨也。夫時烈於臣祖撰文之初。已加評議。不與交驩。則雖未得爲確論。猶可謂處士之高談。乃於數年之後。受其甄拔。亟相慕悅。况其所自重者。又如何。而躬攝韋布。屑屑往來於宰執之門者。豈非所謂樂道而忘人之勢。自附於先達之士者耶。且其尊礼之意引重之辭又如彼。則其心固已翕然傾嚮之矣。及夫名位相垺。氣勢益盛。則憾生於違覆之際。釁 a186_083a起於軋逼之地。漸滋疑貳。遂成媢嫉。而顧臣祖平生名節。无一點汚。莫可得以指議。廼欲索瘢於三十年之前。始則陰引古語。闖見於頌美之文。末乃顯加醜詆。至發於章奏之間。夫時烈之醜詆臣祖。亦非創聞其事之日也。一人之身。而前則尊慕敬服。至擬於周公。後則侵侮詆罵。乃比於孫覿。噫嘻。此何心哉。此何心哉。若謂時烈果遵朱子之旨。則朱子之與人交也。敬慕之詆罵之。前後相戾者。亦有是耶。且新豊之撰其文也。方持憂服。勉遵聖旨。而其紀述之句語。流播當世者。亦甞有先正之所傳誦。希逸起廢應命而 a186_083b文旣成。睿裁不用矣。且故判書李植從難南漢。屢撰請成之書。而其遣辭措意。可見於先輩之所錄。至其甲申敎文中。又有幸逢寰區混合之會。聿被覆載生成之恩及宜遵綸綍之寵等語。則彼三臣亦豈樂爲之哉。秪爲存亡之際危疑之日。徇國家之大計。躰 君父之苦心而不暇他顧。則其淸名雅望。固未甞由此而加損矣。若臣祖則所處之難。尤有倍於三臣者。而其文之用不用。顧幸不幸存焉耳。其撰之則一也。令若諉之以時烈自托朱子之遺旨。則彼三臣。當先受時烈之貶議。而時烈之撰新豊碑文。有曰尊周大義。 a186_083c炳若日星。又曰。盖公於此。自以爲罪我知我。其論文章。至稱義理主於程朱。其序李植之文稿曰。義理之精。論議之正。羽翼斯文。裨補世道。及甲子自祭植墓之文。則首穪悟道。又曰。論議文章。終始不違朱門。又曰。爲此文。以寓平生景慕之誠。至其撰希逸碑文。則直稱極選撰述人而公以病辭免。又曰。其辭某文字。又見其所守之確。可以有辭。噫。文字之涉於虜人。則初无彼此之殊。而或崇奬其大義。闡明其心事。或待之以醇伩。景慕之不暇。甚至變幻實迹。反以爲揚人之張本。凡此陰陽其說。異同其議者。皆非常情之 a186_083d所到。則時烈之獨加詆毁於臣祖者。果不出於私意耶。果可謂之初无恩怨耶。且夫丁丑之與靖康時勢旣異。聖諭之勤懇與冀不奉詔事狀相反。則已不足論。而設令有一毫彷彿者。其據事直書。明示貶議者。朱子所以立言垂後而爲世道慮也。作文頌美。陰加詆譏者。時烈所以因事逞憾而不白直者也。然則時烈之於朱子。適見其處心行事之背而馳也。啓廸所謂實遵朱子之遺旨者。其果成說乎。當時烈之醜辱臣祖也。時烈方領袖於伩林。其言議是非。一代士流莫敢難之。而其䟽一出。擧世譁然。雖出入其門。尊 a186_084a慕親密者。莫不非之。先正臣宋浚吉對臣祖駭歎曰。吾輩初出林下。寔公之故。今無主人矣。又抵書於故副提學李端相曰。尤翁攻斥軒相。不遺餘力。慨然甚矣。端相亦抵書於先正臣朴世采曰。尤丈以洛下諸議。右軒相而謗當身。於春丈亦生大疑。不幸甚矣。又曰。徐欲貽書於尤翁。問其陳䟽之本意云。而端相未幾而沒。且故監司趙世煥甞訪時烈於長鬐謫所。時烈自言其事曰。至今悔之云。尤翁尤丈。以時烈之号尤庵也。軒相。以臣祖之號白軒也。春丈者。以浚吉之号同春堂故也。浚吉時烈之友。而其時契許。情若兄弟。 a186_084b端相事時烈如師。而此二人之致疑於時烈者。不止於爲之慨惜。而若乃自言於世煥者。則又可見顚頓困厄之際。理自內生也。夫以浚吉之公心端相之精識。其言如此。而其他一時街談巷議。又莫不然。數十年來尊奉時烈者。不可勝計。而至此終不得出一異辭。雖時烈。亦不敢自以爲是。故其愛時烈之深者。又莫不以知非善悔歸之。今雖時移世變。長老凋盡。當日定論。猶末泯焉。而啓廸輩渺然後生。初不識其爲何事。乃反揜其修郄之迹。謂之初無恩怨。諱其逞私之計。謂之自有公案。噫。果使啓廸輩眞知尊時烈而 a186_084c愛時烈。則固當周遮其隱語詆人之本習。表揚其知非悟過之微意。以自解於百年之後。而今乃擬之於不當擬之地。援之以不敢援之時。譸張變幻。徒欲眩惑於天聽。其誣朱子而誤時烈也。可謂甚矣。夫諷䂓云者。人有過失。從容警責。使得自反也。而時烈則不然。釁隙初生。暗擬陰詆。一言忤意。醜辱狼藉。則啓廸所謂諷䂓云者。亦可見求其說而不得也。至若 陵誌一欵。尤其繆盭之甚者。盖玄宮誌銘。不專以納諸隧側。爲日後計也。亦將以盛德懿行。刻之金石。頒示遠邇者也。當時烈之承命撰誌也。一篇命意。專 a186_084d在於大行平日密勿綢繆之策。其於先實後聲之道。已不免爲太呈露矣。惟我孝宗大王。十年憂勤。奮發大志。將以伸大義於天下。皇天不佑。中途遺弓。雖聖謨神筭。未及設施。睿志炳炳。可與日月爭光。一域之內。忠臣義士。莫不血泣而心識。則不待一轉語之添入。始可以表章於來後。况國有大喪。憂危方深。而西土扇訛。有不可聞。言語文字。輒戒煩泄。則筆端漫語。坐招實禍。殆非深識遠見所可爲也。時臣祖方在散地。而顯庙使近侍持時烈所撰之本。就臣祖點竄。臣祖旣一一訂正。而至匪風下泉等語。 a186_085a以雖無亦可之意附達。而領議政鄭太和等請從其言。上深然之。卽命刪改。於是時烈不悅。請全棄其文而別製之。上復命勿刪。今啓迪等以爲臣祖恐觸忤彼虜。欲刪紀實之語。噫嘻。此何言也。若如啓迪等之言。則時烈宜若不怵於觸忤彼虜。而時烈撰進之箚。首以畏約怕忘。務爲宛轉爲言。至引魏挺之墓銘。又曰。不敢付諸外人。以益煩言。使不解事賤息。隱屛而寫之云者何也。請用許積之言。勿使印出。而 御覽一本。亦不得塌進者何也。以此觀之。時烈觸忤之憂。固已深矣。特其言出於己。惡人之議之也。卽此 a186_085b亦可以窺其所存矣。若臣祖身處局外。文字又出他手。則設令生釁於異日。禍福利害。初不關我。而必欲劑量而得宜者。實出於老臣憂國之至誠。不忍自外於嗣王勤屬之旨者。而今謂之恐其觸忤。噫。亦見其求過於无過而終不得也。若曰春秋之義。時烈獨知而臣祖不知。則臣祖决不可穪淸之啓。奚發於丙子之前。寬釋尹煌等。培植金尙憲,鄭蘊之請。奚發於丁丑之後。通問中朝之䟽。奚進於庚辰之春。况庚寅之變。朝野鼎沸。國危如髮。而臣祖奮不顧身。抗辭自當。趍鼎鑊如樂地。則何乃不畏於此而畏時烈數 a186_085c句閑語耶。時勢不同。所處之義各異者。固不待辨明而知之矣。啓廸等謂孝庙之志業。幾乎䵝昧。不白於後。噫嘻。是何言也。時烈之文旣成。只刻之貞珉。秘之窒皇而已。固未甞播諸國中。昭示衆目。而宏志大業。輿儓婦孺人得以口誦而心藏。則其果藉力於時烈數句語耶。向使此語終至刪去。則其將䵝昧而終莫之白耶。啓廸等謂時烈引覿事諷臣祖。欲使其慚悔警惕者。盖亦体當日之餘敎也。噫嘻。此何言也。惟此陵誌之事。若謂之時烈積憾於臣祖之一端可也。謂之因此而諷䂓者。尤不近似。夫時烈因憾覔疵。乘 a186_085d憤肆罵。亦何所不至。而至於陵誌一事。初未甞一言攙及。則可想其意之亦不敢以此爲咎。而况臣祖於此本自內省不疚。尙何慚悔之有哉。今時烈沒已久矣。而啓廸等乃欲逆探時烈不萌之意。以爲攻人之資斧。亦可謂重誤時烈之甚矣。况當日餘敎等語。豈今日臣子所敢傅會湊合。以濟其護黨之說者哉。噫嘻。其亦无嚴矣。尤可痛心者。啓廸等謂南漢行成之後。一世之氣節索然。全昧大一統之義。時烈惓惓於春秋之義。以酬孝庙之志。故於臣祖。氣味不合。其言之悖妄无倫。胡至於此。夫仁庙之不得已而姑 a186_086a與羈縻者。將以啚自强也。孝庙之慨然奮發。將伸大義者。卽所以善繼也。前聖後聖。其揆一也。則春秋大一統之義。何甞前晦而後明。而爲人臣子者。乃敢發此言耶。况臣祖之於孝庙。心期暗親。已徵於瀋舘龍潛之日。契合昭融。益著於擧國敢政之初。雖廹於强隣。旋釋䌤綸之責。十年之間。禮遇日隆。他相莫望。若其忠誠貫日。予方爲恃之諭。忠正之心。可質神明之褒。尤可見見知之特達也。嗚呼。大明初升。万目方拭。而開廣聖德。贊襄新化。使四方草莽之士。彈冠結綬。思補大有爲之志者。是誰之力歟。由是論之。 a186_086b時烈非臣祖。亦安得以春秋之說。進於孝庙。而 孝庙之明春秋講大義。繼先志述先事者。實臣祖有以贊其始也。然則臣祖之於孝庙。際會之已居時烈之先。而歷贊乎文謨武烈。隨遇盡力者。獨臣祖耳。若其談論於安閑之日。與夫盡悴於顚沛之際。出處旣異。心跡亦殊。則氣味之不合。誠亦有之矣。噫。春秋之說。固時烈所自在者也。春秋之義。貴在攘夷。則扶抑之道。宜若謹嚴。而庚寅之變。李㬅怯於虜威。自陷於忘君負國之罪。王法之討。所宜先加。特虜人褒以正直。使之收用。故朝廷不加嚴誅。姑令偃息。而 a186_086c時烈旣欲齮齕於臣祖。則乃更通㬅顯職。又從而左右周旋。噫。時烈之奉承於正直之褒者。其亦至矣。未知春秋大義固有是耶。啓迪等動引春秋以詆臣祖者。尤未滿一哂也。啓迪等又拈出世堂所撰碑文中語。以爲訟時烈誣臣祖之計。而其中行僞順非四字。初非世堂之文。未知啓廸等何處得來而告君之辭。至穪試按其文耶。其爲眞爲是等語。雖甚絶悖。曰僞曰非。旣係杜撰。則可笑而不足辨也。至其孰梟孰鳳。孰不善孰君子等語。反攻橫詆。無復餘地。噫嘻痛哉。夫陰鷙悍猛。搏物不厭。梟之性也。雍容祥和。見嚇不 a186_086d顧。鳳之德也。引物喩人。隨性題品。則梟鳳之分。各有所歸。所謂孰不善孰君子者。亦可推類而見之矣。此則唯俟百世之公議。非臣等所可力辨也。始時烈早親有道。驟得重名。則臣祖之薦拔汲引。誠出於愛士進賢之誠。而卒至遭人反覆。受侮不少。餘憾所及。遺禍尙熾。當時烈之位勢方盛。率一世而從己。兼且傍視睨察。積其疑怒。而臣祖虛襟曠懷。不自早覺。爲國忠言。不免屢犯其鋒。則今之議臣祖者。謂之失於知人。疎於處世。則猶或成說。啓廸輩滿紙凌侮之語。一何與其實相背之遠也。嗚呼。生平慕之。後棄之者。古 a186_087a人所深恥也。卋之致疑於時烈本原之地者。多爲此等事。而己酉一䟽。實居其一。則凡有是非之天者。孰不知之。而今啓迪等。躋時烈於粹然無疵之地。而誣辱臣祖。乃至於此。聖明其可欺。公論其可遏耶。噫。昔與時烈交驩而能保其終者幾人。今日士大夫鮮不被其噴薄。而特諱焉而不發耳。雖或事關先故。猶且汲汲敀趨。不自知怒者。只爲急於黨附。便忘其輕重之倒置也。噫嘻。多見其愚且病也。世堂撰文。實在今春。而猶未脫藁矣。士大夫之間。稍稍傳說。右時烈者。聞而憾恨。至有爲疏議者。而其稍有知識者。多以 a186_087b爲不可。故寢以消熄矣。不意前主薄金昌翕者作爲長札。寄世堂之門人。其言悖慢凶譎。詬辱臣祖者。有不忍聞。而一通謄本。先入太學。浮薄之輩。承望其風旨。更鼓垂寢之說。終至於誣罔天聽。而其䟽之脉絡機關。罔非畫葫於昌翕之書。則啓廸之於昌翕。其爲一串貫來者。灼然可見矣。然臣等不欲以一昌翕私書。費辭相辨。請只以昌翕一家之論證之。文正公金尙憲於臣祖。年輩邈然居先。而奬與特厚。姑以章奏中所稱道者言之。至推之以斯文鴻匠。若故相臣金壽恒。事臣祖甚敬。而及誄臣祖。首稱先生。而其辭 a186_087c則有曰受天間氣。爲國宗臣。心全赤子。行盡人倫。根於孝友。發爲忠純。羽儀明廷。如鳳如麟。一節三朝。靡有緇磷。臨危抗辭。國耳忘身。巋然喬嶽。鎭我邦人。其輓詩。亦曰身名出處兩無愆。忠孝文章德業全。噫。吾東方。樹大節扶淸議者。莫尙於尙憲。明鑑識鮮許可。亦莫過尙憲。而斯文鴻匠之稱。乃在於丁丑十年之後。則其不曾以碑文一事爲疵而終始輕重之者。此可見矣。壽恒亦豈何好者。而尊尙德行。贊揚名節又如此。則昌翕私書中所謂氣節疲軟。意見汚下。有似乎鄕原䂓模等語。何其一一相背耶。尙憲。昌翕之祖 a186_087d也。壽恒。昌翕之父也。昌翕乃傲然自高。視前人若無。創生邪論。唯以尊奉時烈爲急。其悖倫无狀。一至於此。則彼啓廸輩。受其頤指。仰其口沫者。又何足數哉。况壽恒之文。旣曰如鳳如麟。而先朝賜祭之詞。亦曰百僚儀刑。瑞鳳祥麟云。則當時上下之所以形容臣祖德美者。可謂自有定論。非特今日碑文中所稱。則此輩發怒於鳳之一字。至於惡言反詈者。抑又何耶。昌翕初謂臣祖崖異於貞陵祔庙之論。指爲一大疵纇。及其一世紛然。斥其爽實。則啓廸䟽中。遂不敢復擧。乃以陵誌一欵。捏造爲說。其捃摭之迹。至此 a186_088a而尤无所逃矣。嗚呼。今日之事。聖明以爲公耶。太學。公論所在。䟽自太學上。宜其以爲公也。第臣等竊聞昌翕旣皷其說。一二巨室之相比好者。從以和之。於是玆數家者。悉出其子弟勝冠以上。誘引其隣黨姻親。驅脅鄕伩之依庇於館學者。以張其軍。而文字又出於其家。則此實數家之父子兄弟私自主張者。尙可謂太學之公論耶。嗚呼。人之於祖先。雖眞有過諾。若有指摘訾毁者。則其痛切之私。固不可勝言。况臣祖前後所處。亶出於赤心憂國。初无一毫可疵者。而昌翕,啓廸等。乃敢敷演於時烈逞憾之言。而其所 a186_088b醜辱。反有加於時烈。則爲人子姓。一朝遭此。其崩心刺骨。當復如何。第念聖明在上。如日方中。匹夫匹婦之寃。莫不矜察而快伸。則以臣祖兩朝師傅之重。一代喬嶽之望。身逝三十年之後。至於今日。遽被小竪輩無限醜詆而莫之白焉。則伏想睿念及此。亦必惕然傷惑矣。伏况殿下玉質方沖之日。聞臣祖名德。思欲一見。而先王特命進謁。其問答從容。已成都兪之契。則在今日眷然長懷。亦可以得其人於言容之間。不獨爲三聖礼遇之盛而已。臣等到此地頭。所恃唯聖明耳。安得不沬血飮泣以干於 a186_088c盖高之聽也。抑臣等又念臣祖平日。以寬柔以敎。不報无道自居。雅量厚德。尤爲人所服。而臣等尙記臣祖遭己酉事也。只以一疏。明其本意而已。卽坦然若未始有聞者然。對子弟。亦未甞一擧其人長短。則臣等於此。固已藏諸心而不敢忘矣。到今倘有一毫過實之語刻人之意。是下負臣祖而上欺聖明也。臣等雖甚無狀。决不敢爲此矣。伏乞殿下察臣等危廹之至懇。念累朝契遇之盛際。將臣祖所受誣辱。特加昭雪。明示好惡。以定是非。則不唯臣等之攢祝聖德。不知死所。臣祖不昧之靈。亦必盛泣於冥冥之 a186_088d中。而其於聖朝追念故臣。攘斥讆言之道。益有先焉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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