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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까지 낮아지는 의인들(1)
2023년 7월 30일, 8월 6일 / 빌 3:10, 사 6:5-8
서 론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 곧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적당히 세상과 어울려 세상과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르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제시하신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마 7:13-14 /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14)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골 3:1-4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여러분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예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2) 하늘나라의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3) 마치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참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4) 우리들의 참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참고 3:5-17)
요 13:12-15 /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예수께서는 겉옷을 다시 입고 식탁에 앉아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뜻을 알겠느냐? 13) 너희는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14) 그렇다면 주요,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옳지 않겠느냐? 15) 내가 너희에게 베푼 것같이 너희도 남에게 베풀도록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빌 2:5-8 /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7)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8)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런 글도 있다 / 바리새인의 기도를 아느냐.. / 너도 이사람보다는 당연히 낫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느냐 / 나는 이런 자니까 /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 저 믿음없는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느냐 / 착각하지 말거라 / 이 땅에 의인은 없느니라 / 모두 다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 나의 은혜로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니라 / 너와 네가 정죄하는 자와 다를 것은 없느니라 / 내가 그에게가 아니라 / 너에게 나의 은혜를 준 것 뿐이니 / 너의 공로는 없느니라 / 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거라 /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다 자기를 바닥까지 낮추었느니라 /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만 드러내는 자가 진정 아름다운 자니라. / 나는 네가 겸손과 섬김으로 네 자신을 낮추는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하노라.
재의 수요일 /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약 40일간 몸과 마음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하며 지내는 절기를 말한다. 즉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매일 성경을 읽고 참회, 금식 등을 병행하기도 한다. 내년 2024년에는 2월 14일(수)~3월 28일(목)이 사순절이다.
사순절(Lent)은 부활절 전 40일 동안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이 있는 절기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대체로 부활절과 성탄절을 지켜왔지만, 요즘은 다른 절기들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대부분 교회가 사순절을 지킨다. 하지만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지키는 교회는 드물다. ‘재의 수요일’은 성경에서 슬픔과 회개를 상징하는 재를 이마에 묻힘으로써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예전예배(Liturgical Service)를 드리는 날이다. 사순절에는 호화로움과 오락을 절제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경건하게 부활절을 기다리게 된다. 영광과 승리의 부활은 참회와 주님의 고난에 함께 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의 수요일 예배시간에 교인들은 한 사람씩 강단 앞으로 나아간다. 목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또는 ‘그대는 티끌에서 왔으니 티끌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손으로 재를 묻혀서 교인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 준다. 성도는 하나님을 잊고 세상적 욕심을 따라 살던 삶을 회개함으로 자신의 옛사람은 티끌로 돌아갔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음으로 새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설교를 듣기만 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자신의 발로 직접 강단 앞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이마에 거무칙칙한 재를 찝찝하게 묻힐 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고 하찮은 티끌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교인들은 자신이 그런 무가치한 티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귀한 생명을 버려 구해 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에 뜨겁게 감격하게 된다. 그동안 머리로만 알았던 말씀들이 가슴으로, 몸으로 경험되어진다. 지식에 그쳤던 신앙이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전례(典禮, Liturgy)의 유익이다.
재(Ash)를 만드는 과정 또한 매우 성경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재의 수요일에 쓰이는 재는 한 해 전 종려주일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종려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독특하다. 주일 예배시간이 되었는데도 교인들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기도하며 서성이고 있다. 예배당 문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들이 하나씩 들려 있다. 이윽고 목사님과 예배위원들이 등장하면 예배자들은 목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목사님은 오늘은 왕이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임을 선포하고, 성경 구절을 낭독한 후 문을 열고 앞장서서 예배당으로 입장한다. 교인들은 그 뒤를 따라 기쁨으로 종려가지를 흔들며 찬송을 부르고 입장하여 예배한다.
우리들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했던 이 종려가지는 거두어져서 곧이어 오는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면류관을 만드는데 사용된 후, 1년 동안 말려졌다가 재의 수요일에 불에 태워져 쓰는 것이다. 얼마나 극적인 행동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그토록 환영하며 따랐던 군중들이, 후에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자들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라고 고백했으면서도 삶 속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거절함으로써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되었음을 실물로,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여러분의 이마에 묻은 재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흔들었던 종려가지였습니다’ 하고 목사님이 알려줄 때, 교인들의 가슴에 다가오는 충격은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교인들은 ‘재’의 상징을 통해 자신들이 심판과 저주를 면치 못할 티끌만도 못한 무가치한 자신을 사랑하사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을 눈물로 찬양하게 된다. 2023년은 지나갔지만 2024년 사순절에는 재의 수요일 예배로 영적 각성과 은혜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성경에서 몇 사람을 보면서 2024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대비하였으면 한다. 왜 벌써부터 야단법석이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지금부터 준비해야 2024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거룩한 성찬에 참여하여 1년간의 죄뿐 아니라 오랫동안 씻지 못한 죄악을 다 벗겨내기 위함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여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참다운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1. 사도 바울의 실례
바울 사도가 쓴 서신이 신약성서 안에 13권이 있다. 바울은 이 책들 서론에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이 편지들 속에서 자기를 지칭할 때 잘 쓰는 용어가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이 말을 아주 자주 썼고, 또 이 용어를 매우 좋아했다. 종이란 말은 그리 유쾌한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종이란 노예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이 남의 수하에 있어 명령받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울은 하필이면 남들이 다 싫어하는 이 용어 쓰기를 왜 좋아했을까? 바울이 종이란 말을 쓸 때마다 자기를 만나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전에 예수 믿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한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몹시 싫어하고 박해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단지 인간으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사렛 무식한 촌사람으로 말이다. 민수기를 보면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가 부활했느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느니, 메시아’ 하며 믿고 따르는 것을 보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독버섯과 같은 무리를 단호하게 잘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교회를 몹시 박해했다. 멀리 다메섹까지 갈 정도로 말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울을 찾아 주셨다. 그때야 사울은 그분이 누구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벌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구원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일꾼으로 불러 주셨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 예수님을 생각할 때 자신의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바울은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다’라고 했다.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일꾼으로 삼아 주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의식을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
‘예수님이 살려주시면 살고,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하라고 하시면 하고, 힘주시면 감당하고, 힘주시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존재, 자기의 학문이나 자기의 가문이나 자기의 신분 이야기는 그분 앞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라고 하신 일만 할 수밖에 없고, 일의 결과도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자아가 죽은 사람이다. 자기는 죽고 대신 예수님은 자신 안에 사시고, 이제 자신은 주인의 종으로만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과 위엄에 굴복되어 그분의 종만 되어도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한편으로 바울 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고 말할 때,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결코 비굴하거나 절망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때 이 세상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직분으로 생각하면서 했다는 것이다. 그가 만난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그의 종으로 일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한때는 자기가 핍박한 분이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서 직접 뵌 후에는 ‘그분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요, 하늘과 땅 아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시는 주님, 그렇게도 갈망했던 메시야’이신 걸 알았다.
자기는 그분의 종이지만 시시한 세상 임금의 종, 돈 많은 어떤 사람의 종, 돈의 종, 명예의 종도 아니란 말이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의 종이란 말이다. 만왕의 왕의 종, 이런 분의 종이 된 것은 이 세상 무엇으로도 비교되거나 바꿀 수 없는 엄청난 직분이었다.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자만하거나 자랑하자는 것은 아니다. 자기 마음으로 이 직분을 그 무엇보다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자기 안으로는 무한히 영광스럽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그리스도만 나타내려 하였다. 이 모든 것은 바울 자신이 택한 것이지만 이렇게 된 것조차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이런 일은 그가 순교하기까지 그렇게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함께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존경하고 있다.
빌립보서 3:4-6에서 바울은 과거에 잘못 생각하고 그리워했던 세상 모든 것을 자기의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한 걸음 나아가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쓰레기만도 못한 모든 것들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 빌립보서 3:7에서 말한 것처럼,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을 뿐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었다.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빌 3:8-9 /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9) 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거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0-14에서는 자기의 머리와 마음에 뜻을 품고 그리고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천하려는 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다.
빌 3:10-14 /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내던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11)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분이 가지는 신선하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12)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께서 왜 나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내게 바라는 사람이 될 그 날을 향해서 계속 노력할 뿐입니다. 13)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아직 나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는 데 내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과거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14) 목적지까지 달려서 상을 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상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일을 바탕으로 하여 내리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상을 주시려고 나를 하늘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빌립보서 3:15-16에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함께 그 길을 가자고 호소하고 있다.
1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점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이 생각을 달리하는 점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16)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됐든지 간에 이제는 같은 원칙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아! 바울은 극에서 극으로 간 본이 되고 있다. ‘180도 바뀌어서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고, 핍박자에서 순교자가 되었다는 말은 바울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위의 말씀에 이 찬송을 함께 하며 금상첨화(錦上添花) 같을 것이다.
♬ 134장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❶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 때에 확실히 맹인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 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참 사랑과 은혜 넘쳐 나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
❷ 그 사랑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신 이 그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 자국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신 말 네 지은 죄 사했다 하실 때 나의 죄짐이 풀렸네
❸ 그 사나운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했네 그 파도가 주 말씀 따라서 아주 잔잔케 되었네 그 잔잔한 바다의 평온함 나의 맘 속에 남아서 그 갈릴리 오신 이 의지할 참된 믿음이 되었네
❹ 이 세상의 무거운 짐진 자 모두 주 앞에 나오라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맘의 평안을 얻으라 나 주께서 명하신 복음을 힘써 전하며 살 동안 그 갈릴리 오신 이 내 맘에 항상 계시기 원하네
2. 하나님을 뵈옵고 난 후에 더 큰 선지자가 된 이사야(사 6:1-13)
♬ 이사야의 입술에
❶ 이사야의 입술에 제단 숯불 임하듯 성령의 불 임하여 내 입술에 닿았네
<후렴> 내 영혼의 찬양이 내 마음속에 기도가 내 입술의 전도가 열매맺기를 원하네
❷ 예레미아 입술에 주의 말씀 주시듯 내 입에도 말씀이 넘쳐나게 하소서
❸ 내 입술과 나의 말 할례 받게 하시고 할 일 많은 세상에 나를 보내 주소서
입술이 정결해야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사 6:1 /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나는 주님을 보았다. 주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고, 성전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BC 736년).
이사야 6장은 유다의 위대한 왕이었던 웃시야가 죽었다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웃시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너무도 유명한 왕이었고, 명군(名君)이었으며, 위대한 왕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52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다. 웃시야 왕이 치리하던 기간에 이스라엘은 국위가 왕성했다. 온 나라는 평안하였고 백성들은 근심•걱정이 없었다. 국력도 튼튼하여 외세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경제는 부강했으며, 사회는 안정되어 왕과 백성은 태평세월을 누렸다.
그런데 왕이 병들어 죽은 것이었다.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하였다. 나라 안이 술렁이기 시작하였고 이제 인접 국가들의 위협이 서서히 유다를 향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유다의 온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완전히 좌절과 실망 가운데 빠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야웨이시다. 이 어려울 때 예언자 이사야를 세워주셨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 중에 유독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방백 중에 하나요, 웃시야 왕의 친척이었으며, 아하스 왕과 히스기야 왕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의 장차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국가의 난제를 짊어지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 깊숙이 들어가 기도하였다. 성전에 들어가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이사야에게 이상이 나타났다. 높이 들린 보좌에 주께서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때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였고 연기가 집에 충만하였다.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던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유대인들이 믿고 의지하던 왕인 웃시야는 죽었다 할지라도 야웨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들을 통치하고 계시니 걱정할 것 없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도 하나님이다.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이 사실을 깨닫고 위로를 받았으며 새로운 소망과 비전을 보게 되었다.
인간이 영광의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각기 심령 속에는 언제나 먼저 통회와 자복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상을 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분 앞에 엎드러졌다. 그발 강가의 에스겔, 힛데겔 강가의 다니엘, 밧모섬의 요한도 그랬고, 디베랴 바닷가의 베드로도 그랬다. 만왕의 왕이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군 다윗, 사도 바울도 죄인임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외쳤다. 죄인의 고백이요, 통회하는 기도이다.
입술로 지은 죄 / 우리는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를 수제자라는 단어를 쓴다. 베드로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다른 제자들을 무시하면서 자신은 예수님 앞에 인정을 받으려고 자기를 내세웠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안 그러겠습니다. 나는 주님이 죽는 데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십시오.’ 이런 의도에서 예수님 앞에서 다른 제자들을 낮추고 자기가 높아지려고 했다. 철저하게 자기 긍정을 했던 베드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보낸 많은 무리와 함께 왔다. 그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들이 달려들어 예수를 붙잡았다. 이때 베드로가 용감하게 칼을 빼 대제사장 종의 귀를 칼로 내려쳤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더 넘는 천사들을 보내어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 이미 이 일이 일어나리라고 한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향해 말씀하셨다. ‘내가 마치 위험한 강도라도 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전에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를 가르칠 때는 가만히 있지 않았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먼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베드로가 가야바 법정 뜰에서 모닥불을 쬐면서 드러난 자기 정체를 보게 되었다(눅 22:54-62). 그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가자 베드로도 멀찍이 따랐다. 그리고 군인들이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쬐고 있는 것을 보자 그들 가운데 끼여 앉았다. 한 여종이 불빛을 받고 앉은 베드로를 자세히 뜯어보다가 ‘이 사람도 예수와 한패예요.’하고 하자, 베드로는 펄쩍 뛰며 ‘이봐, 나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해.’ 하고 하였다. 잠시 후에 어떤 사람이 그를 보고 ‘당신도 그들과 한패 아니오?’ 하자 베드로는 ‘아니오, 나는 아니오.’ 하고 부인하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어떤 사람이 강경하게 ‘나는 이 사람이 예수의 제자라는 걸 다 알고 있소. 둘 다 갈릴리 사람이란 말이오.’ 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네.’ 하고 하였다.
베드로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닭이 울었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이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내일 아침 닭이 울기 전까지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베드로는 뜰 밖으로 나가서 큰 소리로 울었다.
‘내가 어쩌면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 되었을까?’ 자기 앞에 나타나는 교만하고 추악한 자기 자신을 봤기 때문에 ‘아! 이것이 나로구나! 이것이 인간이요 이것이 베드로구나. 죽음의 현장을 혼자만이라도 끝까지 따라가겠다던 베드로는 간 곳이 없고 철저하게 부정한 입술을 매끄럽게 놀리는 나 베드로요 화로다 나여!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실의에 빠져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갔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기진맥진해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그곳을 찾아오셨다. 아침 식사가 끝났을 때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저의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돌보라.’ 예수께서는 한 번 더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자 근심이 되어 ‘주님, 주님은 제 진심이 어떤지를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먹이라.’
만일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던 베드로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후회의 눈물을 밥 먹듯 하면서 평생을 낙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회개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위로의 말씀과 더불어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 제자에서 사도의 단계로 들어가게 하셨다.
왜 입술을 정결케 하는 역사가 필요한가? 민수기 20장이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는 신 광야로 옮겨 오랫동안 가데스에 머물렀다. 그들이 진을 친 곳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자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대들면서 ‘우리 이스라엘 형제들이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죽을 때 차라리 우리도 함께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소! 당신들은 어째서 여호와를 모시고 사는 이 무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어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게 하는 거요?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렇게 험악한 광야까지 끌고 나왔단 말이오? 이 거친 광야에서는 농사지을 곳도 없고, 무화과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못하오. 더구나 마실 물마저 없지 않소!’라고 원망했다. 모세와 아론이 무리를 떠나 만남의 장막문 앞에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계약궤 앞에 둔 지팡이를 들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온 백성을 불러 모아라. 그런 다음 그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 바위를 향하여 물이 터지라고 명령하여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물을 너희 온 무리와 가축까지도 마시도록 하여라.’ 모세와 아론은 바위 앞에 온 공동체를 모아 놓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반항하는 무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내가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지팡이를 든 손을 쳐들어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콸콸 솟구쳐 나와 온 무리와 가축들이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나를 굳건히 믿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 무리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광야에서 40년 동안 모세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 목전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쉬운 것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 이것은 거울이 되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의 부정한 입술을 태워서 깨끗게 해주신다. 입술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요, 일생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나의 잘못, 나의 실수, 나의 고집, 나의 정욕, 나의 부정을 성령의 불로 태워달라고 기도하자. 우리의 더럽고, 때 묻고, 냄새나고, 추한 죄악을 성령의 뜨거운 불로 태워주신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격자, 완전히 변화된 거룩한 성도가 되자.
부정한 입술을 깨끗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함을 보자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의 부정함을 즉각 인식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 다시 말하면 ‘부정한 입술을 제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다. 입술은 인격의 표현이다. 입술이 부정한 사람은 그 인품 전체가 부정한 사람이다. 일생동안 쉬지 아니하고 사용하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세상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자기의 생각에서 느끼거나 지어낸 말로 남을 괴롭힌다. 그뿐 아니라 모함하고 헐뜯고 거짓된 말로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위장한다. 남을 비난하고 근거 없는 말, 확인되지 않은 말을 한다.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즐기며, 모이기만 하면 남을 비하하고, 흉을 보고, 허물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것처럼 갖가지 일들에 참여하고 있다.
거짓말은 입술의 부정일 뿐 아니라 심령의 무서운 질병이다. 마음의 거짓 생각이 입으로 나올 때 거짓말이 된다. 거짓은 회칠한 무덤과 같고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회를 발라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에서 송장 냄새가 난다. 꽹과리가 아무리 잘 울려도 뜻을 전할 수가 없다. 진실이 될 수 없다. 사랑이 될 수가 없다(마 15:17-18).
성령의 불로 태웠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책망을 했던 선지자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상과 상도덕 및 정치가들의 타락에 분노에 차서 외치며 하나님 앞에 이사야 1-5장까지의 내용을 고발하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책망하며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다. 6장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있었다면 이사야는 그동안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 적용되었기에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6장 4-5절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야웨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게 되었다. 참으로 회개해야 할 사람은 타인에 앞서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처럼 성전 혹은 골방에 깊숙이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 빛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고 추한가를 금방 알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뵙기 전에는 제아무리 눈이 밝고 똑똑하고 사리가 밝다 해도, 자기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정신적, 영적 맹인에 불과하다. 이에 이사야는 숙연히 자기의 죄를 탄식하였다. 그러자 스랍 천사가 화저(火箸)로 단에서 피운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는 ‘네 죄악이 사해졌다’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겸손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던 이사야는 하나님의 단에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불로 부정한 입술을 새롭게 만드신 것이다.
▶ 입술 즉 마음이 정결케 되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소서.’, ‘그래, 그럼 네가 가서 이 백성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아무리 많이 듣더라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가 보기는 끊임없이 보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그들의 뿌리 깊은 반역에 대해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참지 않으신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 버려라. 눈을 아예 감겨 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받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때 이사야가 여쭈었다. ‘주님,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대답하셨다. ‘그들의 도성이 모조리 파괴되고 집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고 온 토지는 완전히 황무지로 변하고 들은 모두 노예가 되어 먼 다른 나라로 끌려가 결국 이스라엘 온 나라가 허허벌판으로 바뀔 때까지는 그들이 내 말을 들으려고 작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주민 가운데 10분의 1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들마저 타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참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베어 넘어뜨려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같이 비록 이스라엘이 거듭거듭 침략을 당해 멸망하여도 그 뿌리는 살아남는 나무와 같을 것이다. 그 나무의 그루터기는 항상 다시 살아서 자라날 것이다.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인 까닭이다.’
■ 유명한 부흥사 D. L. Moody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러나 그의 과거는 구두 고치는 사람이었다. 무식하고 공부한 바가 별로 없었다. 정열적으로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어느 마을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더니 그 마을 신문에다가 무디에 대해서 그 무식한 것과 그의 허물들을 줄줄이 나열해 험담을 늘어놓았다. 이 신문을 보는 동안 그 지방의 목사님들 그리고 무디를 사랑하는 분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이 나쁜 놈들, 이런 이런…….’
그런데 무디는 그 신문을 보면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버려 두라고. 신문에 나지 않은 허물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럴 것 없네.’하며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저들이 말하고 있는 그것보다 나는 훨씬 더 부족한 사람이다. 그들이 지적하는 죄인보다 더 큰 죄인이다.’ 그 겸손이 부드러운 대답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겸손하고 더욱더 겸손했기에 또한 자비로운 마음이 있었기에 부드러운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차면 우리의 말은 전혀 달라진다. 그런가 하면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항상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고 깨끗하므로, 입술이 깨끗해질 수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거듭나야 한다. 삶과 전 인격이 아울러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 주님이 말씀하시게 하라 / ❶ 나이가 들어가면서 비로소 깨닫는 것이 어떤 문제이든 말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말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❷ 살다 보면 말하고 싶은 때가 많다. 교회에서 교역자들에게나 교인들에게, 가정에서 가족들, 하고 싶은 말이 목에까지 올라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❸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로 인한 시험처럼 괴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말이란 마치 입속의 침과 같아서 입안에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입 밖으로 뱉어 놓으면 순간 더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❹ 하고 싶은 말이 목에까지 올라오고, 꼭 해야 할 말이라 여겨져도, 말을 하고 나면 의도와 다르게 역효과와 부작용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된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게 된다. ❺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말을 할 때, 감정에 치우치면 반드시 시험에 빠진다. ❻ 시험이 되고 상처가 되는 말이 아니더라도 아무 유익함이 없는 말을 할 때도 많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한 말을 다시 듣게 된다면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말이 달라진 것이다. 사람을 만나 말을 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이 말 저 말이 막 나오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면 말문이 막혀 버린다. 하고 싶은 말이 쑥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마음에 강권하시거나, 그런 강권함이 없어도 예수님 앞이라 생각하니 입이 막혀 버린다. 쓸데없는 한담이나 우스갯소리, 잘 알지도 못하는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
설교를 마치면서
놀라운 환상을 목격한 이사야는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었다.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더러운 죄악을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천사 하나를 보내어 제단 숯불을 가지고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이사야의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음을 선언하셨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보이신, 당신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매우 의미심장한 방법을 택하셨다.
사 6:8 / 그때에 내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그래서 내가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소서.'
하나님께서는 분명 누군가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보냄 받을 사람을 애타게 찾고 계셨다. 그러자 이사야는 그 말씀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지목하여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사야에게 강요하거나 몰아붙이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사야는 자신을 따스하게 휘감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을 드렸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신비로운 체험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뜻을 분명히 깨닫고, 자신이 속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 예언자의 삶을 살아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셨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이 시대의 이사야를 애타게 찾고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결코 많은 힘과 지식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넓혀가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온 마음으로 고백하는 그 작은 자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외에도 많은 예언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하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입술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핍박했고,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낼 것을 결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고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그렇게 부름을 받은 신앙공동체는 역사의 파도를 헤치며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전하여 오늘 우리에게 이르렀다.
오늘날, 이 세상도 여러 가지로 불안과 공허가 사람들 마음을 뒤덮고 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이사야가 환상을 통해 목격하고 고백한 그대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에 있다. 그 믿음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자. 우리를 이 시대의 이사야로 일으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 탈무드와 이사야의 승천기에 기록된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사야는 이렇게 순교했다. 히스기야가 나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아들 므낫세가 벨리알에게 사로잡혀 결코 아버지와 같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 반역할 것인데 나도 그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벨리알(Belial)은 무법의 천사(Antinomianism)이며 또한 사마엘과 사탄으로도 분류된다. 19세에 소명을 받은 후 예루살렘에서 50년을 사역한 이사야는 이때 백발의 노인이었다. 히스기야가 죽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므낫세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악한 왕이 되었다. 당시 이사야와 몇몇 선지자들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거짓 선지자 벨키라는 이사야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다. 벨키라의 조상 중에는 엘리야에 의해 죽은 바알의 선지자 400명 중에 하나였다. 거짓 선지자는 항상 시대의 대세에 편승한다. 므낫세는 부하들에게 그를 잡아오라고 했다. 므낫세의 부하들로부터 도주하던 이사야는 길가에 거목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거목의 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선지자는 나무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거목의 껍질이 순식간에 자라나 이사야를 숨겨 준 것이다. 부하들은 왕에게 돌아가서 이사야가 거목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므낫세는 그 나무를 통째로 잘라오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이 그 나무를 잘라왔고 므낫세는 이사야가 들어있는 부분을 찾아 가운데를 자르라고 했고, 이사야는 그렇게 죽었다(히 11:37).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 이사야는 부모가 물려준 육신적 풍요로움과 행복을 스스로 버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순교자이다. 부모로부터 전수한 높은 사회적 위치와 유산을 자신을 위해 즐길 수는 없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자신만 행복할 수는 없었다. 사악한 백성들에 의해서 온몸이 톱으로 켜질 때까지, 그들에게 회개를 외치며 가슴으로 사랑을 말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도 묵묵히 우리에게 많은 교훈으로 함께 하고 있다. 이사야의 발자취를 따라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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