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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나주 순교자 기념성당
도로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박정길 3
설립과 발전 1872년 나주 무학당(武學堂)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안드레아) 등 세 사람의 순교로 나주와 천주교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순교는 이웃에의 전교로 이어지지 못했고, 그 후 나주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유학자였던 손정우(孫禎佑, 베드로)였다. 어느 날 친척집에서 한문으로 된 성서를 보게 된 손정우는 3-4년 동안 홀로 성서를 연구하다가 계량 본당(현 나주군 노안 본당)의 카닥스(Cadars, 姜達淳) 신부와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1927년 영세하였다. 그는 계량 본당의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계량 본당의 신자들과 교리 토론회를 갖기도 하였다.
나주 지역의 본격적인 전교는 1933년 5월 나주에 설립된 십팔은행(十八銀行)의 지점장 임태길(任太吉, 마태오)의 부인 이 루시아와 계량 본당의 복사 이응범(李應範,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였다. 이 루시아의 공소 설립 제안에 이응범이 계량 본당의 박재수 신부와 나주 공소 설립을 의논, 1933년 9월 임태길의 사택에 나주 공소를 개설하였다. 그 후 열심한 전교활동으로 공소 시작 당시 17명이었던 신자수가 2년 후 1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 1935년 골롬반 외방전교회에서 나주읍 박정리(현 성당 자리)에 3,00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50평 규모의 성당과 사제관, 35평의 교사를 신축하였다. 이로써 나주 성당은 골롬반 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건립한 첫 성당이 되었다. 1937년 신자수의 증가로 성당 부지 500여 평을 추가 매입하여 80평의 콘크리트 성당을 건립하였다. 또한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 340번지에 500평의 교회 부지를 마련, 1938년 함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다.
1953년 휴전 후 유치원을 설립하고, 이듬해 4월에는 영산포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다. 그리고 김창현(金昌鉉) 신부 재임 중 남평에 공소 건물과 부지 1,000평을 매입하고 전교사를 파견하였으며, 나주읍 대호리에 665평의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956년 까리따스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고, 1958년 2월 12일 산포면 덕례리에 공소 건물과 사제관을 마련하였으며, 이듬해 7월 13일 나주시 청동 81번지에 3,120평의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961년 3월 성당을 증축하였고, 1970년 5월 헨리 대주교의 후원으로 ‘현해 도서관’을 개관하였으며, 1971년 5월 강당을 신축하고 성당 조경 공사를 하였다. 또한 가톨릭 구제회의 원조로 공동 하수도 공사를 하고, 가난한 교우 12세대에 돈사(豚舍) 12동을 만들어 주었으며, 농수로 공사를 보조하였다. 그 해 12월 5일 남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고, 1974년 5월 사제관을 보수하고 성당 앞 보도 블록 공사를 하였으며, 1982년 12월 사제관을 신축하고, 1984년 12월 성당 이층의 칸막이 공사를 하였다. 이천수(李淺水) 신부 재임 중 무학당 성지 개발을 추진하였고, 1994년 말부터 계획된 교육관(무학관)을 건립하였다. [출처 : 윤선자,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에서 발췌]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지인 무학당 인근에 위치한 관계로 나주 본당은 설립 70주년을 맞아 성역화를 본격화해 2001년 나주 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무학당 순교 터에서 주춧돌로 추정되는 12개의 돌 중 10개의 돌을 성당으로 옮겨와 그 위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웠다. 이어 2004년 본당 내에 ‘빈무덤’ 형태의 순교자 기념경당을 건립하고, 1934년 7월 나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인 사제관을 수리해 현 대주교 기념관으로 개관했으며,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으로 쓰였던 한옥 기와집도 복원했다. 2011년 5월 17일에는 나주 순교자(이춘화 베드로,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들을 현양하기 위해 무학당 터의 흙을 취토하여 현 대주교 기념관 맞은편 쉼터 부지에 순교자 묘원을 조성하였다. [최종수정 2013년 5월 23일]
나주 성당 : 무덤 모양의 순교자 기념경당 '눈길’
전라남도 중심부에 자리잡은 천년의 고도 '나주'. 영산강을 젖줄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선사시대 때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한축을 이끌어 왔던 나주에 2004년 5월, 신앙의 명소가 탄생했다. 나주 본당이 본당설립 70주년(2005년 5월)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를 추진, 성당 내에 '나주 무학당 순교자 기념 경당'과 초대본당 주임 '헨리 하롤드(제5대 광주대교구장) 대주교 기념관' 그리고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을 조성 또는 복원해 놓은 것이다.
안뜰에 때 이른 코스모스가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한옥(수녀원)과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서양식 벽돌조 건물(기념관) 그리고 아름드리나무와 토담길 사이로 펼쳐져 있는 대나무밭, 넉넉한 잔디 정원이 잘 단장돼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성당으로 새단장을 한 나주 성당은 나주지역 신앙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주 무학당 순교터 인근에 있는 나주 성당은 1935년에 설립되었지만 첫 대규모 박해인 신유박해(1801년)부터 마지막 대박해인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신앙 선조들의 피와 신앙혼이 서려 있고, 일제 강점기 땐 사학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웠던 간단치 않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창해처럼 푸르른 나주 평야를 가로질러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파노라마처럼 시원스레 펼쳐진 3500여 평의 넓은 대지가 순례자의 지친 몸과 마음에 생기를 돋게 한다.
나주 성당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하롤드 대주교가 본당 초대주임 시절(1935~1942)인 1937년에 지은 성당은 일자형 콘크리트 건물로, 제단과 성당 벽면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 14처 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어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제단도 중앙에 십자고상과 제대 왼편에 성모자상을 둔 것 외에는 어떤 꾸밈도 없다. 감실조차 성당 오른쪽 벽면을 터서 만들어놓은 성체조배실에 옮겨놓았다.
지나칠 만큼 단순 소박한 것이 나주 성당의 매력이다. 눈을 현혹시키는 분심거리가 없어 전례에 집중할 수 있다. 또 성당 바닥은 아직 마루여서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어 더 정감있다.
성당 왼쪽 언덕 위에는 고풍스런 단층 적벽돌 건물 하나가 서 있다. 바로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이다. 1934년 나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로 원래 사제관이었으나 2002년부터 대대적으로 수리해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으로 탈바꿈했다.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는 본당은 전국에서 서울 중림동약현 본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 성당, 원주 용소막 성당 등 몇 안 된다. 이처럼 나주 본당이 초대 주임신부 기념관을 운영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곳에 전시된 수십 점의 하롤드 대주교 유품들 또한 예사롭게 보고 지나쳐서는 안 될 것들이다.
일제 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1935년, 나주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미국인 하롤드 대주교는 이곳에서 7년간 사목하면서 선교는 물론 성당 안에 해성학교를 설립,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우리말,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에는 대주교가 본당 초대주임 시절에 쓰던 타자기를 비롯해 기도서, 십자가, 성합, 제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 쏟았던 하롤드 대주교의 땀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유품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흐트러진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게 한다.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을 둘러본 후 맞은편을 보면 2011년 나주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한 순교자 묘원이 나온다. 이어 십자가의 길을 따라 언덕 아래로 내려오면 나주 무학당 순교자 기념 경당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기해박해(1839년)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베드로)와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 유치성(안드레아) · 유문보(바오로)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경당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무덤' 형태로 꾸며져 있다.
경당 입구에 서 있는 60톤의 거석은 '석침사'(石針死)를 당한 무학당 순교자들의 용맹을, 사방이 막혀 캄캄한 경당 내부는 순교자들의 고난을, 관 모양의 제대는 순교자들의 장엄한 죽음을, 경당 안쪽 천장이 없는 회랑은 순교자들의 부활과 영광을 상징한다. 또 나주 초등학교에서 무학당 주춧돌로 추정되는 12개 중 10개의 돌을 2001년 성당으로 옮겨와 그 위에다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세워놓았다.
경당을 나와 대나무밭과 토담길을 따라 내려오면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이었던 한옥 기와집이 복원돼 있다. 1934년에 건립돼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까리따스 수녀회 본원이었던 이 한옥은 안채와 행랑채로 구분돼 있으며, 2004년 5월에 완전 복원돼 당시 수녀들이 사용했던 각종 유품들을 전시했다.
또 수녀원 안뜰에는 초창기 지원자들이 직접 만든 성모동굴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나주 본당은 순교자현양회를 조직, 순례자들을 위해 안내 봉사를 하고 있다. [출처 : 평화신문, 2004년 8월 15일, 리길재 기자,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최종수정 2013년 5월 23일)]
나주의 천주교 박해와 순교자
신유박해(1801) 이전에 이미 나주에서 가까운 무안, 영광, 함평, 강진 등지에까지 천주교가 전파되어 있었고, 나주 진영의 관할 구역인 나주, 정읍, 무장, 장성 등 지역에 박해 시기 동안에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주에서도 상당한 수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나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이 총 4명만 확인되고 있다.
우선 기해박해(1839) 때 李춘화(베드로)가 나주에서 순교하였다. 이춘화에 관한 자료는 달레의 책에 수록되어 있는 짤막한 기사가 전부인데, 그것에 의하면, 이춘화는 공주 고을 태생으로 나주에 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 나주 고을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 읍내 감옥에서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다음으로는 1871년 신미양요로 촉발된 박해로 강영원(바오로), 柳치성(안드레아), 柳문보(바오로) 세 사람이 나주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치명일기",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병인치명사적" 등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 자료를 살펴보면, 1871년 박해 때 체포되어 나주 읍내 감옥에 갇혔던 신자들은 이들 순교자 세 명 외에도 林군명(니고나오), 최성화(崔聖和, 안드레아), 서윤경(徐潤敬, 안드레아) 등 세 명이 더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선 최성화는 순창 가마실 살다가 1871년 11월 26일 나주 포교 이성오와 정읍 포교 이치성에게 붙잡혀 정읍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여기서 먼저 잡혀 들어와 갇혀 있던 강영원과 임군명을 만났다. 그 다음날 그는 그 두 사람과 함께 나주로 이송되어 12월 초에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여기서 다시 먼저 잡혀 들어와 갇혀 있던 유치성과 유문보 등을 만나 함께 옥살이를 하다가 1872년 2월 10일 석방되어 나왔다. 순창 묵산리(墨山里)에 살고 있던 그는 1898년 11월 16일 자신이 감옥에서 보고들은 것을 토대로 세 순교자들에 관해 증언하였다.
서윤경은 장성 수도(修島)에 살다가 1871년 11월 13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여기서 먼저 잡혀 들어와 갇혀 있던 강영원, 유치성, 유문보 등을 만나 함께 옥살이를 하다가 뒤에 석방되어 나왔다. 진안 기도에 살고 있던 그는 1898년 11월 20일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토대로 세 순교자들에 관해 증언하였다.
임군명은 정읍 남면 이문동에 살던 사람으로 순교자 강영원이 머슴을 살고 있던 집 주인이었으며, 그의 집에서 강영원 등 교우 여러 명과 전도하고 있다가 그를 붙잡으러 온 포교에게 체포되어 강영원과 함께 정읍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여기서 뒤에 붙잡혀 들어온 최성화를 만났다. 그도 최성화․강영원 등과 함께 나주로 이송되어 12월 초에 읍내 감옥에 갇혔다가 뒤에 석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이들 세 사람은 배교자들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앙을 증거한 이야기가 어떤 증언 자료에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성화가 증언하면서 풀려난 사람들을 ‘죄인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서윤경과 임군명도 1872년 2월 10일 최성화와 함께 석방되었다고 이해된다.
다음으로 세 명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강영원은 그의 이름이 ‘성운’으로도 나오고 ‘영운’으로도 나온다. 그는 본래 충청도 홍산 사람으로 선대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며, 부형이 홍산 포교에게 잡혀 죽은 뒤에 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도망가 살았다. 그는 전라도 용담(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으로 가서 살다가 뒤에 다시 정읍 남면 이문동으로 가서 품을 팔며 살았다.
강영원의 세례명은 그와 함께 감옥에서 지내다가 석방되어 나온 최성화의 증언에는 ‘요셉’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다른 자료에는 모두 ‘바오로’로 표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요셉’은 감옥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다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이기 때문에 무시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26년이 지난 훗날의 증언이므로 세례명에 대한 그의 기억에 착오가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는 모두 ‘바오로’로 되어 있으며, 역시 감옥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다 풀려난 서윤경의 목격 증언에도 ‘바오로’로 밝혀져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세례명은 ‘바오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강영원이 체포될 당시 품팔이를 하고 있던 집이 ‘조 이냐시오의 집’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임군명(니고나오)의 집’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 가운데 ‘임군명(니고나오)의 집’으로 증언한 경우가 더 많고, 또한 그와 감옥에서 함께 생활하다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에도 그가 ‘임군명의 집’에 있다가 체포되었다고 밝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체포될 당시 품팔이를 하고 있던 집은 ‘임군명(니고나오)의 집’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강영원이 체포된 시기는 "치명일기" 791번과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63번의 기록에 따라 모두 1871년 11월 23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다 풀려난 서윤경의 목격 증언에 보면, 그가 11월 13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진영의 감옥에 갇혔을 때, 거기에는 강성원 · 유치성 · 유문보가 먼저 잡혀와 이미 형벌을 한 차례씩 당하고 갇혀 있었다고 밝혀져 있다. 이러한 서윤경의 증언이 맞는다면 강영원 · 유치성 · 유문보는 이미 11월 13일 이전에 체포되어 나주 읍내 감옥에 갇힌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서윤경의 증언은 역시 강영원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최성화의 증언과 모순된다.
최성화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11월 26일 나주 포교와 정읍 포교에게 잡혀 정읍 읍내 감옥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강영원과 임군명이 먼저 잡혀와 갇혀 있었으며, 그와 강영원 · 임군명 등은 12월 초에 나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에는 이미 유치경과 유문보가 먼저 잡혀와 갇혀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최성화의 증언은 서윤경의 증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또한 강영원이 체포된 시기를 11월 23일로 증언한 다른 자료들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강영원이 체포된 시기는 11월 23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서윤경이 증언하면서 12월 13일을 11월 13일로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시기를 12월 13일로 수정하면 다른 자료들과 모순되지 않고 잘 들어맞는다.
강영원이 순교한 장소는 여러 자료들에 무학당 앞이라고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를 처형하는 데 사용한 형벌의 종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견해가 엇갈려, 태장(笞杖)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는 설도 있고,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자료들마다 형벌의 종류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인데,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는 자료도 있고, 매맞아 죽었다(杖斃, 장폐)는 자료도 있으며, 형장(刑杖)을 받아 치명했다는 자료도 있고,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는 자료나 매맞아 죽었다는 자료나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는 자료는 모두 전해들은 것을 가지고 증언한 것들이라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는 자료는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서윤경의 목격 증언으로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서윤경은 자신의 증언 내용에 대해 “자신이 다 보아 알 뿐만 아니라 그 외에 포교에게 들어도 다름이 없다”고 덧붙여 그 신빙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강영원이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기 때문에,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그가 매맞아 죽었다거나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매맞아 죽었다는 증언과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는 증언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때 강영원은 태장 30대를 맞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강영원이 순교한 날짜는 "치명일기" 791번의 기록에 따라 모두 1872년 3월 9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1872년 3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며, 1872년 1월 망념간(15일~20일)으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므로 그 자료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여러 자료들 가운데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와 1872년 1월 망념간으로 증언한 자료는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강영원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1872년 2월 12일에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 내용 가운데에 강영원과 유치성의 처형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증언에도 다 2월 이후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들은 1872년 2월 12일 이후에 처형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872년 3월로 증언한 자료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강영원이 품을 팔았던 집 주인을 조 이냐시오로 증언한 점에 모순이 있고, 1871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도 옥에서 병사한 유문보가 강원영․유치성과 한가지로 무학당 앞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증언한 점에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자료는 최성화의 목격 증언 내용과 모순되지 않으므로 믿고 따라야 할 것 같다. 이 가운데 날짜를 좀더 구체적으로 증언한 1872년 3월 9일을 강영원이 순교한 날짜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강영원이 순교할 당시의 나이는 51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근 60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이 가운데 51세로 증언한 예가 하나 더 많고 또한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51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음으로 유치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무장 암티점 사람인 유치성은 이름이 ‘치경’으로도 나온다. 그는 세례명이 안드레아였고, 교회에서 회장을 지냈다. 그는 본래 경상도 사람으로 그의 부모가 천주교를 믿다가 정해박해(1827) 때 유배를 가게 됨에 따라 고향을 떠나 충청도로 가서 오래 살았으며, 뒤에 전라도 무장 암티점으로 가서 살다가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그가 나주 포교에게 체포된 시기는 1871년 11월 22일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1년 10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어 다소 차이가 난다.
그런데 1871년 11월 22일로 증언한 자료는 그가 잡히는 것과 치명하는 것을 목격한 그의 아들 유군명(아우구스티노)이 재판 때 증인으로 나와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 것이므로 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 따라서 유치성이 체포된 시기는 1871년 11월 22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유치성이 순교한 장소는 여러 자료들에서 무학당 앞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를 처형하는 데 사용한 형벌의 종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둘로 나뉘어, 태형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고, 돌에 맞아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와 같이 견해가 다른 것은 자료들마다 형벌의 종류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인데, 돌에 맞아 죽었다는 자료도 있고, 매맞아 죽었다(杖斃, 장폐)는 자료도 있으며,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는 자료도 있고, 강영원과 마찬가지로, 즉 태형 30대를 맞고 백지사형으로 죽었다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강영원의 경우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여기서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는 자료나 매맞아 죽었다는 자료나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는 자료는 모두 전해들은 것을 가지고 증언한 것들이라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반면에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는 자료는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서윤경의 목격 증언으로 신빙성이 높다. 그리고 유치성이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은 것은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매맞아 죽었다거나 장형을 받아 치명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유치성은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유치성이 순교한 날짜는 1872년 3월 9일로 보는 견해도 있고, 1872년 1월로 보는 주장도 있어 서로 차이가 난다. 이와 같이 견해가 서로 다른 것은 자료마다 그의 순교 날짜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1872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2년 3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며, 옥에 갇힌 지 다섯 달 후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며, 1872년 1월 망념간(15일-20일)으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이 여러 자료들 가운데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와 1872년 1월 망념간으로 증언한 자료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1872년 3월로 증언한 자료와 1871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소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옥에 갇힌 지 다섯 달 후로 증언한 자료와 합치되므로 믿고 따라야 할 것 같다. 특히 옥에 갇힌 지 다섯 달 후로 증언한 자료는 그가 잡히는 것과 치명하는 것을 목격한 그의 아들 유군명이 재판 때 증인으로 나와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크다. 이 둘 가운데 날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증언한 1872년 3월 9일을 유치성이 순교한 날짜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치성이 순교할 당시의 나이는 48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근 50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이 가운데 48세로 증언한 예가 하나 더 많고 또한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48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유문보에 대하여 살펴보자. 장성 삭별리 사람인 유문보는 이름이 ‘작객’으로도 나오고 ‘윤보’로도 나온다. 그의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그가 나주 포교에게 잡힌 시기는 "치명일기" 793번에 강영원과 한가지로 나주 포교에게 잡혔다고 언급되어 있는 것에 따라 거의 다 1871년 11월 23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된 시기를 1871년 11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하여 구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유문보가 강영원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치명일기" 793번의 내용은 사실과 잘 맞지 않은 것 같다. 강영원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최성화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그는 1871년 11월 붙잡혀 정읍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그때 거기서 먼저 잡혀와 갇혀 있는 임군명과 강영원 두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 두 사람과 함께 나주로 이송되어 12월 초에 나주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그때 거기서 다시 먼저 잡혀와 갇혀 있는 유치성과 유문보를 만났다.
여기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유문보와 강영원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체포되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같은 날 체포되었는지는 확인할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유문보가 체포된 시기를 "치명일기" 793번의 기록에 따라 1871년 11월 23일로 보는 견해는 사실과 잘 맞지 않는다. 그가 12월 초에 나주 읍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므로 11월로 증언한 자료에 따라 그가 체포된 시기는 1871년 11월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유문보가 순교한 장소는 모두 다 나주 읍내 감옥으로 이해하고 있다. "치명일기" 791번에 유문보가 강영원, 유치성 두 사람과 함께 무학당 앞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증언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치명일기" 79번을 제외하고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서윤경의 증언을 비롯하여 다른 자료들에는 그가 혹독한 형벌을 받고 병이 들어 감옥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의 순교 장소는 나주 읍내 감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유문보의 순교 날짜는 1871년 11월쯤으로 보는 주장도 있고, 1871년 2월로 보는 설도 있고, 1871년 12월 혹 1872년 1월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1872년 3월 15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서로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에 대한 견해가 다양한 것은 자료마다 그의 순교 날짜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1872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며, 1871년 12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1년 12월 혹은 1872년 1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이 가운데 1872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는 "치명일기" 791번의 기록으로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잘못된 것이고,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명백히 틀린 것이다. 또한 1871년 12월로 증언한 자료와 1871년 12월 혹은 1872년 1월로 증언한 자료도 신빙성이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1872년 2월 12일에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을 보면, 강영원 · 유치성 · 유문보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으나 유문보가 감옥에서 죽은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유문보가 감옥에서 순교한 시기는 그가 풀려난 2월 12일 이후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여러 자료들로 볼 때, 그가 강영원 · 유치성 두 사람보다 먼저 순교한 것이 분명하므로 그가 감옥에서 순교한 시기는 1872년 2월 12일에서 3월 9일 사이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유문보가 순교할 당시의 나이는 50여 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근 60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50여 세로 증언한 "치명일기" 793번의 기록에 따라 그의 순교 당시의 나이를 50여 세로 보고 있다. 그러나 "치명일기" 793번의 기록은 그의 체포 시기를 1871년 12월 3일로, 순교 시기를 1871년 12월 혹은 1872년 1월로 잘못 증언한 것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반면에 근 60세로 증언한 자료는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따라서 그의 순교 당시의 나이는 최성화의 목격 증언에 따라 근 60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서종태,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나주 무학당 순교의 역사적 고찰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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