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대숲 속으로
글/김덕길
“자기야 결혼 16주년인데 그냥 보낼 거야?”
아내가 말했습니다.
“어디 가게?”
“뭔가 특별한 곳에 가보고 싶어.”
특별한 곳, 아내는 지금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나 봅니다. 변화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결혼 16년, 참 많이도 살았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자네 그때 그 여자랑 지금도 같이 살아?”라고요.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우린 살아온 날보다 같이 살날이 더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나도 뭔가 특별한 곳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휴일이면 산행을 주로 하다 보니 산행 외의 곳을 놀러 간다는 것은 영 어색합니다. 휴일이면 등산복이 전부인 양 입고 다니다 일반 옷을 입은 여행객과 섞인다는 것이 군대 간 군인이 휴가 나와서 민간인과 섞이는 기분처럼 묘합니다.
일찍 용인을 출발했습니다. 화이트데이가 결혼기념일이다 보니 주로 하는 선물이 사탕 바구니 이었습니다. 말이 사탕 바구니이지 아주 작습니다. 커다란 바구니를 보낸다는 것이 사치 같아 보여 싫습니다. 상술의 이기에 나도 한몫 끼어드는 것 같아 어색합니다. 아내는 세상에 한번뿐인 결혼기념일에 고작 사탕이냐고 핀잔을 주지만 저도 지지 않습니다. 결혼은 같이 해놓고 왜 나만 선물을 줘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아내도 지지 않습니다. 나 좋다고 데려와 살았으면 남들 하는 만큼은 해 줘야 하지 않느냐고 아내가 따집니다. 아내가 선물해준 주홍색 가디건을 깜박 잊고 마치 선물을 받지 않은 듯 말하는 내가 미안해집니다. 그래서 이번엔 특별한 여행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대나무에 반한 것은 울산 대숲 십릿길 을 보고 난 후였습니다. 3년 전 울산에 잠시 일을 하러 갔다가 휴일에 머리도 식힐 겸 대숲을 방문했는데 대숲은 태화강변을 끼고 장장 십리나 되는 길이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 뼘으로 잡히지 않는 대나무는 그 굵고 강직한 성품으로 쭉쭉 치고 올라가 하늘을 가리고 가린 하늘에 뜬 태양은 이따금 부는 바람결에 눈부셨다가 다시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눈부셨습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울산 대숲을 생각하며 울산보다 더 유명한 담양 대숲을 떠올렸습니다. 차는 어느새 용인을 떠나 백양사 나들목을 빠져나갑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훈풍입니다. 창문을 조금 열어 놓으면 훈풍은 부드럽게 차안으로 밀려듭니다. 얼굴에 밀려와 흔적 없이 부서지는 봄바람이 내내 싱그럽습니다. 장성을 지나자 대숲이 시작됩니다.
갈아엎은 논바닥의 흙이 일제히 물구나무를 서서 하늘 바라기를 합니다. 양지 녘 잡초가 먼저 발아해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풋풋한 풀냄새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길은 호젓했습니다. 전형적인 시골길입니다. 포장이 된 도로라 먼지는 없었지만 마치 옛날 시골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를 달리는 기분입니다.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우린 생각합니다. 살아 꿈틀대는 봄의 싱싱함을 느끼기엔 조금은 이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처음 도착한 곳이 죽녹원입니다. 죽공예품을 파는 곳에 잠시 들립니다. 대나무로 만든 각종 공예품이 장인의 손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 손님을 맞이합니다. 6만 원짜리 삿갓 모자를 쓰고 배시시 웃으며 사진을 찍고는 그 가격에 놀라 그 자리에 다시 내려놓습니다. 아내가 웃습니다. 12,000원으로 알고 있던 죽부인은 싼 것이 2만 원이고 비싼 제품은 3만 5천 원입니다.
“나, 부인 한 명 더 얻을까 싶은데 당신 괜찮겠어?”
“왜? 자기도 죽부인 하나 사려고?”
아내는 금세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주인께 묻습니다. 우린 비싸다고 놀란 시늉을 합니다. 주인은 국산이라 그렇다고 에둘러 말합니다. 과연 국산일까? 호기심만큼이나 의심이 많은 저는 믿지 못합니다. 대신 죽부인은 포기하고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고릅니다. 어머니께는 대쪽이 갈라져 두드리면 안마가 되는 죽채를, 아들에게는 대나무 입구를 불면 탁구공처럼 생긴 볼이 하늘에서 춤추는 장난감을, 아내는 예쁜 대나무 찻잔을 고릅니다.
죽녹원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쭉쭉 뻗은 대나무가 장장 5만 평이나 됩니다. 영화 알 포인트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우린 대숲을 따라 걷습니다. 죽마고우 길, 운수 대통 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등을 걸으며 모처럼 호젓한 나들이에 빠져봅니다. 산을 좋아하는 우리는 그곳에서도 역시 가장 높은 산을 오릅니다. 특히 선비의 길은 더없이 대숲으로 우거져있습니다.
“자기야. 여긴 선비의 길이 아니라 뽀뽀의 길로 정했으면 좋겠어. 호호”
아내가 대숲으로 우거지고 인적이 뜸한 길을 걷다가 말합니다.
“그러게 연인의 길이나 아님 19금 길로 해도 무방하지 싶어. 하하”
우린 사진을 찍습니다. 뒤따라오던 여행객들이 부럽다고 난리입니다. 나는 잠시 허공을 올려다봅니다. 대숲엔 바람이 쉬지 않습니다. 수런대는 대숲의 언어가 허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였다가 벌어졌다가 대숲은 하늘과 태양을 가지고 놉니다. 만남과 이별은 대숲처럼 저렇게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인연에 대해서 한참 사색하고 있는데 아내는 벌써 저만큼 가버리고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한편의 동영상을 찍고 죽녹원을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소쇄원을 방문합니다. 아침을 거른 탓에 이동 중 죽통 밥을 먹습니다. 대나무 안에 밥을 해서 내 놓은 것인데 시장이 반찬인지 맛있게 먹습니다. 소쇄원 입구 탱자 가로수가 시골의 탱자나무를 연상시켜서 좋습니다. 소쇄원 안의 산수유가 실감 나게 피었습니다. 이곳의 대나무는 가꾸지 않는지 제멋대로 자라있습니다. 가지가 꺾여 드러누운 대나무가 많이 보입니다. 어떤 대나무는 허벅지 굵기만큼이나 굵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자연 그대로의 대숲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음으로 가사문학관에 들러 옛 가사를 음미하다 촉박한 시간 때문에 우린 서둘러 메타세쿼이아 길로 향합니다.
대숲처럼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의 가로수가 인상 깊어 꼭 와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가로수는 무궁무진한데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이파리가 아쉽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많이 나와 자전거도 타고 신이 납니다. 우리도 자전거 부부용을 타고 한 바퀴 돕니다. 가로수 끝에서 우린 논길로 자전거를 돌립니다. 땅의 속삭임이 풀잎에 전이되어 자전거 안으로 빨려듭니다. 나의 페달 밟음에 아내도 동참합니다. 내 페달이 움직이면 따라서 뒤 페달도 움직입니다. 호흡이 척척 맞아 들어갈 때 자전거의 속도는 빨라집니다. 우린 빨리 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최대한 천천히 담양의 싱그러움을 담습니다. 때론 느린 여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껴봅니다. 마음 같아서는 내려서 걷고 싶습니다.
다음 행선지가 대나무 테마공원입니다. 어느 신문 기자가 늙어서 이사와 살겠다고 젊을 때부터 땅을 사서 대나무를 키운 지 어언 이십여 년, 그 노력의 결실이 이곳 대숲에 그대로 나타나있습니다. 대숲에 들자 나는 세속을 잊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딱 한군데만 들리라고 하면 나는 당연히 이곳 대나무 테마공원을 선택하겠습니다. 호젓한 대숲의 그 웅장함이 죽녹원과는 또 다릅니다. 적당히 소나무 산길도 있습니다. 전설의 고향 촬영지이기도 한 이곳을 언제 밤에 한번 찾고 싶어집니다. 으스스한 기운이 현란하게 내 심장을 쿵쾅거리겠지요. 나오는 길에 비닐하우스 딸기밭에 들립니다. 직접 딸기를 따서 한입 깨물면 딸기의 그 상큼함이 입속 가득 퍼집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배가 부릅니다. 현장에서 먹은 딸기는 덤입니다. 우린 딸기를 산 후, 마지막으로 담양의 자랑거리인 떡갈비를 먹습니다. 맛있습니다. 그렇게 즐기고 먹다보니 하루해가 저물었습니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입니다. 다시 일상 속으로…….
삶은 부대낌의 연속입니다. 우린 가끔 이 반복되는 삶에 휴식을 줘야 합니다. 휴식은 재충전입니다. 재충전은 낯섦에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낯선 길, 낯선 바다, 낯선 지방, 낯선 동네, 홀연 어느 날, 문득 그리운 것들이 나를 유혹하거든 이렇게 훌쩍 떠나보시면 어떨지요. 다시 돌아오는 그 길이 희망의 길이기를 빌어보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