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G-Life 2009년 9월호
융건릉과 풍수 콘텐츠 개발 이야기
문화유산을 보러 가거나 답사를 할 때, 그것이 존재하게 된 이유나 사연을 알지 못하면, 어떤 느낌이나 감회가 있을 수 없다.
지난 7월호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에 대한 관광콘텐츠 개발을 경기도가 주도적으로 하되, 그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가 풍수여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왜냐하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까닭 가운데 하나가 풍수이고, 경기도 전역에 조선왕릉의 4분의 3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 왕릉들을 가본 사람들은 느끼는 것이겠지만, 한번 왕릉을 본 사람들은 그 다음에 찾아가는 다른 능에서 새로운 흥미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표소에서부터 왕릉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릉들이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매표소→홍살문→참도→정자각→왕릉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거의 비슷하고, 또 그 양식이나 규모도 비슷하다. 왕릉 주위에 세워진 석상도 거의 비슷하다. 왕릉에 대한 소개나 왕릉의 여러 구조물에 대한 소개 글 역시 어느 왕릉이나 비슷하다. 호기심이나 역사적 상상력을 유발시킬 수 없다.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만큼 이제는 심화된 관광콘텐츠가 필요하다. 왕릉을 소개하는 내용면에서도 그러해야하고, 또 왕릉을 구경하는 코스 역시 새롭게 짜져야한다.
경기도가 자랑하는 화성과 융릉도 그 한 예이다.
화성과 융릉, 이 둘 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어느 것이 먼저일까? 물론 등재순으로 보면 화성이다. 그러나 융릉을 전제하지 않는 화성은 존재이유가 없다.
다음과 같은 내용 정도가 융릉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안내되어야한다. 우리글만이 아니라 영어나 일어, 중국어로 번역되어서 말이다. 지면 때문에 대폭 줄이고 줄여서 정리한 것이다.
아, 불효한 이 아들(정조)이, 천지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 지금껏 멍하고 구차스럽고 모질게 목석 마냥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은, 소자에게 중사를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그 뜻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지극한 심정으로 빕니다. 아, 하늘이시여.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하늘이 들어주는 것인데, 이 소자는 감히 기필코 이렇게 해야만 소자가 죽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천하 후세에 떳떳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1789년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융릉자리로 이장하면서 손수 쓴 지문(誌文) 내용이다. 정조 임금이 여기서 자신에게 맡겨진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아버지 무덤 옮기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였을까?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과 그 후 양주 배봉산(拜峰山: 현재 서울 시립대 부근)에 묻힌 사도세자의 무덤이 흉지라는 소문을 세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이 임금이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으로 아버지 무덤을 옮기는 것을 삼았다. 그는 세손시절인 1774년부터 본격적인 풍수공부를 한다. 정조임금이 자신의 풍수공부 방법과 과정을 서술한대목이다:
“처음에는 옛사람의 풍수지리를 논한 여러 가지 책을 취하여 전심으로 연구하여 그 종지를 얻은 듯하였다. 그래서 역대 조상 왕릉의 용혈사수(龍穴砂水)를 가지고 옛날 방술과 참고하여 보았더니, 하자가 많고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을 갖지 못하여 세속의 지사로서 안목이 있는 자를 널리 불러 그 사람의 조예를 시험해 본바 그들의 언론과 지식이 옛 방술에 어긋나지 않아 곧 앞뒤로 전날 능원을 논한 것을 찾아 살펴보았더니 그들의 논한 바가 상자에 넘칠 정도였다.”
이렇게 풍수공부를 하면서 흉지에 계신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옮길 생각을 하던 정조임금에게 뜻밖의 불행이 닥친다. 1786년의 일이다. 서른이 넘도록 자녀가 없던 정조가 뒤늦게 얻은 문효세자를 잃은 것이었다. 정조는 다섯 살 난 세자가 홍역을 앓게 되자 의약청을 설치하고 자신이 친히 약을 달여 먹일 정도로 온 정성을 기울여 아들을 살려냈다. 그리고 이를 몹시 기뻐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과거를 실시하고, 조세를 탕감해주는 등 온 나라를 축제 분위기로 이끌던 터에 갑자기 세자가 죽는다. 독살설이 나돌았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효세자를 낳았던 의빈 성씨가 다시 임신을 하여 잠시 기뻐했는데, 갑자기 의빈성씨 마저 사망한다. 또 같은 해에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 담이 갑자기 죽는다. 사도세자의 후손들이 모두 죽어 나가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정조임금의 고모부 박명원이 사도세자 무덤이장을 권하는 상소를 올린다. 정조의 불행이 사도세자 무덤이 흉지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해서 화성에로의 이장 작업이 추진된다.
정조 임금은 이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였는데,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57권과 58권 두 권에 수록되어있다. 특히 홍재전서 57권은 전적으로 풍수지리에 대한 내용으로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입문서이다. 융릉의 산의 내력(來龍), 혈의 모양(穴象), 좌향, 안대, 천광의 깊이, 당대 최고 풍수사들의 의견 등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가히 조선 최고의 현장 풍수이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만 따로 출판하여 융릉을 찾는 이들에게 판매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은 현재의 융릉자리로 이장된다.
이장이 끝나고 정조 임금은 이장에 참여하였던 지관으로 하여금 길흉을 점치게 한다.
그 점괘의 일부분이다:
“山水(風水)의 성정은 온전히 산봉우리의 모양에 있는데, 금성(金星)의 산봉우리로부터 아래로 18자에 이르기까지 왼쪽도 18자이고 오른쪽도 18자이니, 모두 합하면 36자입니다. (....) 용의 기운이(龍氣)가 자(子)수로 관통하는데, 子는 바로 9의 수치이며 9는 양(陽)의 극치여서 밖으로 나타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9개월 안에 꼭 자손의 조짐이 있을 것인바 나라의 큰 경사입니다. (....), 이로 미루어 보면 나라의 경사를 반드시 불러올 것인바 실록 억만년 끝없는 터전입니다.”
이러한 점괘의 예언대로 그 다음해인 1790년 정조가 그렇게 바라던 왕자가 탄생한다. 이 왕자가 훗날 34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린 순조 임금이다. 흉지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명당에 모신 발복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연히 융릉 참배를 자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행궁으로서 화성이 축성된다. 융릉과 화성과의 관계이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생겼다는 알게 한다면, 화성을 본 사람들은 당연이 융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정조임금이 죽는다.
평소 아버지 무덤 옆에 묻이고 싶었던 정조임금의 능이 이곳에 조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이덨다. 그러나 그렇게 풍수에 능했던 정조임금이었겄만 정작 본인의 자리는 물구덩이가 되고 말았다.
1800년 6월 28일 승하한 정조임금은 그해 11월 6일 현륭원(顯隆園) 동편 둘째 산등성이에 있던 비교적 낮은 지대인 강무당(講武堂) 옛터를 정조임금의 무덤자리로 정하였는데, 정할 당시에는 참여했던 지관 6인이 대길지라고 하여서 정한 것이다. 이때 참여한 지관들은 김양직․김응일․최익․윤수구․정지선․강필제 등 6인이었다.
그러나 얼마후 조정의 실록사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이 한 장의 상소를 올린다.
상소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정조임금이 묻힌 능의) 산기슭이 약하여 웅장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없으니 주세의 강약은 논할 것조차도 없고, 묘역이 높은 것은 오로지 보충해 쌓은 것이므로 질고 습하여 사철 내내 마르지 않으니 수토의 깊고 얕음은 논할 것조차도 없고, 가로로 떨어진 줄기가 도움이 없이 고단하게 내려가 오른쪽은 닿아서 높고 왼쪽은 기울어져서 푹 꺼졌으니 혈도의 바르고 치우침은 논할 것조차도 없고,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가 갖추어지지 않고 안산(案山)이 참되지 않는가 하면, 독성(禿城)이 높이 솟아서 바위가 쫑긋쫑긋 서 있고 넓은 들판이 바로 연하고 큰 시내가 바로 흘러 달아나니 역량의 온전하고 온전하지 않는 것은 논할 것조차도 없으니, 능의 잔디가 항상 무너져 줄어드는 것과 습한 곳에서 벌레가 생기어 서식하는 것은 다만 미세한 근심입니다. 밖으로 나타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다면, 안에 숨겨져 볼 수 없는 것은 또한 어떻게 반드시 평안하고 반드시 길하여 만에 하나라도 근심이 없으리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20년만에 능을 현재의 건릉자리로 옮기는 천릉이 이뤄졌다.
천릉을 할 때 옛 능을 파보니 김조순이 걱정한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천릉도감이장계한 내용이다:
“… 판자 안 틈에서 물이 계속 솟아나와 삽시간에 네 통(桶)에 가득하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한결같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외재궁의 동쪽 옆에 있던 판자 안에서도 물이 새어나왔으며 지판(地板) 밑에서도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무덤 속에 물이 찬다는 것은 풍수상 가장 꺼려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현재 융릉의 오른쪽에 건릉이 자리하게 되었다. 아주 편안한 자리이다. 이때 이 자리 선정에 참여한 풍수(지관)들은 남양진․김경인․최상일․신희․방경국 등이었다. 이전의 지관이 모두 물러나고 새로운 지관들로 터잡기기 이뤄진 것이다. 당연히 흉지를 잡았던 지관들에 대한 징계나 처벌이 있었을 것이디. 그들 지관 하나하나의 생애를 추적하여 이야기거리를 구성하는 것도 앞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왕릉을 이야기할 때 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이렇게 각 왕릉에 대한 풍수 콘텐츠 개발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왕릉 관광의 내용이 너무 부실하게 된다.
이어서 각 왕릉의 관광코스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매표소에 표를 사서 홍살문을 통과하여 정자각에 이르면 그만이다.
특히 융건릉의 경우, 도표의 화살표처럼 융릉을 그렇게 보고 난 뒤, 되돌아나와 건릉(정조임금의 무덤)을 보러간다. (그림 43)
그림처럼 관광코스를 바꿔보자.(그림42)
융릉의 뒷산(풍수로 현무)을 올라가 전체를 조망한다. 좌청룡우백호가 어떻게 뻗어갔는지를 살피고, 안산에 해당되는 산에 어떤 난개발이 자행되고 있는지도 직접 눈으로 보게 한다. 자연보호라는 말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보호의 절실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림의 화살표처럼 계속 산능선을 타고 건릉의 뒷산(현무)으로 걷게 하면서 풍수에서 말하는 龍(산줄기)을 타보게 한다. 용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스스로 느끼게 한다. 저절로 자연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림의 화살표대로 내려와 건릉의 정자각에 도달하여 주변을 보고 홍살문을 빠져나옴으로써 관광을 마무리하게 한다.
이전에 판에 박힌 관광이 아니라 왕릉마다의 새로운 추억이 각인되면서 건강까지 가져다주는 관광이 될 것이다.
그림 1: 융건릉의 기존 관광코스
그림 2: 융건릉 관광코스 제안.
사진: 융건릉
첫댓글 죽어서도 아버지 발 아래 묻히고 싶은 효심의 초장지 터가 흉지로 들어나 더이상 효심을 운운하면서 콘크리트 아파트 공사 하는것이 모순으로 들어 나는 순간 같습니다.경기문화연대, 용주사의 주장이 허구로 들어나 유봉학,이남규 교수님의 입지나 정호스님의 입지에 관심이 듭니다. 흉지를 효심터 라고 했으니 참 무섭다?
흉지를 사적지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이사실을 알고 있는지 의십이 가는군요.모른다면 읏음거리. 알고도 주장한다면 그들에 심사는?
잘 읽어보면 정조의 첫번째 무덤이 흉지고 두번째 건릉이 명당자리이며 윤건릉의 사연을 관광특화프로그램에 활용하여 문화재적 가치를 부가하자는 재안입니다. 읽어보시고 댓글을 다셨으면 하네요.
얼마전 경기도에 관광 프로그램도 아니 된다고 하면서 효의 얼이 서린 초장지가 발견 되었으니 풍수와 효 사상에 중요한 위치라고 하면서 전 주지스님이 합의한 사항도 초장지 발견되여 번복 한다고 했으니 지금 흉지 때문에 정호스님은 불교계를 입장을 곤란 하게 만든것 같고 경기 문화연대는 학자의 자존심을 뭉게는 글 같은데요?sbs 스페셜 pd가 조선왕릉의 보도 하면서 국회에서 포럼까지 연 풍수에 해박한 정호스님 한테는 인터뷰를 안 했는지?중요한 것은 sbs가 사과하든지 용주사가 사과 하든지 해야 될것 같은데요//
성군이었으며 개혁군주였던 정조의 묻혀진 역사들, 밝혀지지 않아도 될 비참했던 과거사들이 하나 둘 밝혀져가고 있는 오늘,
현재로도 족할 사안들이 들러리집단에 편승한 용주사의 어두운 탐욕에 또한번 멍들어 어두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음에 통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