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970
우리는 『정토경(淨土經)』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정토경』 가운데서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우리가 임종 때 우리가 그 간절한 마음으로 해서 우리가 참 평소에는 그냥 그렁저렁 살다가도 죽을 때는 인제는 뭐 다시 여유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때는 하여튼 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믿어야 되겠구나, 내가 의지할 데는 부처님밖에 없구나, 임종 때 그 간절한, 그 절박한 일념으로 해서 꼭 일념으로 부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일념一念 그것으로 해서 극락세계에 우리가 이제 비약적으로 초승(超昇)한다 말입니다. 그런 도리가 불교는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즉 그런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이제 사람을 참 그야말로 많이 살인도 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한 그런 악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우리 본래 불성 자리는 오염이 안 된다 말입니다. 오염이란 것은 이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오염이 되는 것이지, 모양이 없는 우리 마음은 이것은 오염이 안 됩니다. 오염이 안 되기 때문에 비록 몇 사람의 사람을 죽이고 그런 무서운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참회懺悔를 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다 죄가 삭혀지는 것입니다. 죄가 소멸된다 말입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시죠. 부처님 당시의 앙굴리말라는 사람은 몇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렇게 죽였지만 부처님을 만나서 참회를 하고 바르게 닦아서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말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사형대에 올라가서 있는 순간도 역시 우리 마음은 그 순간도 구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도 구제를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위대한 것입니다 위대한 것이 하나의 참 징표(徵標)입니다.
비단 부처님 가르침만 그런 것에 대해서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바이블Bible」을 보면 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예수님이 자기 제자한테 하는 말로 해서 그대들이 가령 겨자씨 한 알만한 그런 신심만 있다고 할지라도 앞에 있는 이 산 더러 저쪽으로 옮겨가라 하면 옮겨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말입니다 「마태복음서」에 있습니다[마태복음 7:20].
우리 부처님 법문에 그 『능엄경』이나 또는 『유마경』 보면 이런 법문도 있습니다. ‘모탄거해(毛吞巨海), 개납수미(芥納須彌).’ 겨자씨, 겨자씨 하나 가운데 개납수미(芥納須彌)라, 수미산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수미산인데 겨자씨 하나 가운데 수미산이 들어가고, 들어가서도 조금도 좁아졌다는 생각도 없고 말입니다. 좁다는 생각도 없고, 또는 물방울 하나 가운데 사해(四海)가 들어간다 말입니다. 모든 그런 광대무변한 바다가 다 들어간다 말입니다. 들어가고도 오히려 여유가 있단 말입니다. 겨자씨 하나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산이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물방울 하나 가운데 이 사해(四海)의 물이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우리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되겠지요. 납득이 안 가는 것이 부사의(不思議) 법문인데, 불가사의 법문인데, 그런 법문이 가능한 것입니다. 왜 가능한가? 겨자씨나 또는 수미산이나 또는 물방울 하나나 또는 사해의 바다 같은 물방울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로 그것이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을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 그런 상을 내고 또는 탐욕심(貪慾心)을 내고 또는 진심(瞋心)을 내고 또는 치심(癡心)을 내고 그런 마음 때문에 가려서 우리가 지금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이 참다운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우리가 상(相)을 내지 않아야 됩니다. 어떻게 상을 내지 않을 것인가? ‘나’라는 것이 본래 없고 ‘너’라는 것이 본래 없고 사실은 ‘나’라는 것이 본래 없거니 내 것이란 것도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도리만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한국의 무서운 그런 경제난 이런 것이 어디 가서 붙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말씀으로 우리가 표현하면 홍로일점설(紅爐一点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가 눈 한 줌 넣으면 순식간에 녹아버리겠지요. 어떤 것이나 경제고(經濟苦)나 또는 사상고(思想苦)나 우리 인생고(人生苦) 모두가 다 부처님 사상을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홍로일점설입니다. 그냥 다 없애 버린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참 잘못 삽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한 누구나가 다 꼭 승려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가르침은 아닙니다. 자기 몸은 어디가 있든지 간에 부처님 가르침은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로 가는지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더디고 빠를뿐인 것이지, 모두가 다 부처가 꼭 되어야만 됩니다. 몇 생 뒤에도 되어야 됩니다 잘못되면 그냥 쉽게 못 되면 그때는 윤회하겠지요. 우리가 어머니 되고 또는 아버지 되고 남편 되고 아내 되고 자식 되고 뭐다 그런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인연이 굉장히 참 소중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그래서 그런 인연을 함부로 할 것이 그건 못됩니다.
허나 그런 인연들을 가장 잘, 가장 효과적으로 하는 인연이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길입니다. 자기 남편이 부처님을 오로지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자기 아내를 부처님같이 생각해야 되겠지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한테 대하던지 간에 가장 그 사람을 좋게 대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부처님같이 우리가 대하는 것이 가장 좋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평화스럽고 더 화평한 것은 없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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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