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국보1호 :
600년 역사의 숭례문 화재 사진
누구를 원망하랴?
잘못 뽑은 지도자의 말로와 함께 이조의 국보가 잠적
2월10일 화재로 무너져내린 숭례문은 서울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목조건축물로 1962년 12월20일 국보1호로 지정됐다 현존하는 한국성문으로서도 가장 규모가 커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였다.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 8개 문중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 불렸다.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됐으며 600여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됐다. 이후 몇 차례의 소규모
정비 공사가 이뤄졌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이 자리잡은 구조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때 사다리꼴 형태의 ‘우진각지붕’인데 지붕 처마 아래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또
하나의 공포(貢包)를 넣은 화려한 다포 양식으로 돼 있다.
임진왜란 때 성안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몇채 남지 않은 건물 중의 하나로 조선전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 받고 있다. 조선중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崇禮門(숭례문) 현판은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양녕대군이 여느 건축물의 가로 현판과 달리 세로로 썼다고 기록돼 있 으나 세종의 셋째 아들로 조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현재 힐튼호텔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된 형태였다.
서쪽으로는 서소문으로부터 이어진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드나들 수 없었다.
그러나 광무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해 동대문과 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면서 훼손이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도시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가 심하기도 했다.
1907년 일제가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서 도로에 둘러싸여 고립돼 오다가 이명박 서울시장이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하고 2006년 3월에는 100년만에 일반에 개방됐다.
개방 시간은 오후 8시까지로 제한됐으며 화재가 난 2층 문루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돼 왔으나 경비나 수위 등 관리자를
두지 않은 실정이었다.
위의 사진은 화재 이전의 평화로운 숭례문의
모습 사진이고, 아래 사진은 금번의 화재로 인하여 불타고 있는 모습의 숭례문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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