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가시밭의 백합화 (아가 2:1-2)
아 2:1-2=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루 하루 산다는 것이 주의 은혜이고 사랑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속에 술람미와 같은 마음을 주셔서 오로지 예수그리스도 한분만 바라보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변함없이 성령의 감동으로 솔로몬과 술람미의 노래를 예수님과 우리의 노래로 들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가(雅歌)서는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천하기 그지없는 종을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왕이 비천한 종에게 매력이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아가(雅歌)서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예표하고 있어요. 그러니 솔로몬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 어떻게 임하였는지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사랑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우리로서 남아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신분도 차별도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나라는 존재는 없어요. 우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강제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야 할 수가 있습니다.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서 사랑하였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왕이 종을 사랑한 것에는 왕의 자기 비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란? 사랑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 사랑이라고 느껴져야 사랑입니다. 나는 사랑하였다고 하여도 상대방이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고 힘에 눌려서 마지못해서 사랑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힘에 굴복 당한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항상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자신을 상대 속에 태워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기(利己)가 아니고 이타(利他)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것은 종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입니다. 이걸 체휼이라고 합니다. 종의 입장에서 종을 이해하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으로 있을 때 우리처럼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아픔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빌 수가 있어요. 우리와 같기 때문에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이 중보자의 사랑입니다. 왕의 신분이 아닌 한 남자의 신분으로 사랑을 주었습니다. 술람미도 한 여자로서 사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구절절 사랑이 사모함이라는 한이 되어서 님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토해지는 겁니다.
술람미는 왕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솔로몬이라는 한 남자를 사랑했어요. 이는 솔로몬도 자기를 비우고 술람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왕을 사랑했지만 술람미는 한 남자를 사랑했어요. 솔로몬의 조건을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천한 종이지만 왕과 사랑을 나눌 수가 있었던 겁니다.
만약에 술람미가 솔로몬을 왕으로 보았다면 진심으로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이는 마음 속에 서로 간에 허물 수 없는 신분이라는 벽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 신분을 버렸어요. 낮아져서 다가갔어요. 왕을 포기하였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를 비웠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것과 같아요.
사랑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조건을 보고 사랑하면 그 조건이 상실되면 사랑도 날아갑니다. 세상에서의 사랑은 조건적 사랑입니다.
이 시대 결혼 풍속도를 보면 잘 이해가 갈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결핍을 채우고자 결혼 상대를 찾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미모를 원하고 여자는 돈을 원합니다. 그러니 여자는 미모를 남자에게 주고 돈을 받아 내는 겁니다.
이 시대 왜? 그렇게 성형이 들불처럼 번집니까? 미(美)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곧 힘이고 능력입니다. 이 시대의 가치관으로 보면 아름답지 못한 여자는 죄인이에요.
개그콘서트에 보면 오나미 라는 여자 개그맨이 있어요. 이 시대 여자들의 미(美)적 기준으로 보면 아주 못 생겼어요? 어떤 코너를 보면 여자들이 호신용 무기를 소지하고 다닌다고 하자 오나미도 호신용 가스총을 지니고 다닌다고 자랑합니다. 그러자 곁에 있는 남자가 넌 왜? 갖고 다니느냐고 물으니 누가 자기를 겁탈하면 어쩌느냐고 합니다. 이에 남자 친구가 하는 말! 야~아! 너는 네 얼굴이 무기야! 무기! 그것도 아주 흉악한 무기야! 남자들은 네 얼굴을 보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가! 못 생긴 얼굴을 곧 남자를 도망치게 만드는 무기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왕궁에도 이런 결혼이 있었어요. 수많은 미모의 황후들이 그들입니다. 아가(雅歌)서에선 황후들을 예루살렘 여자라고 합니다.
솔로몬과 예루살렘 여자들은 정략적인 결혼을 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왕이라는 조건과 결혼했어요. 솔로몬이 아니에요.
이건 마치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예수의 능력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가 행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고 있어요. 자기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 예수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런 예수는 필요가 없어요.
예수의 능력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 앞에서 온 갖가지 자기 소원을 아뢰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그런 예수는 필요 없어요. 바다를 걷고 오병이어를 만드는 예수를 원해요. 떡 주는 예수를 왕으로 두고자 해요. 그래서 자기는 예수를 이용하여서 편하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여자가 돈 많은 놈 잡아서 팔자를 고치겠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이 시대 예수는 교인들에게 아이스크림 다 빨아먹고 버려지는 막대기와 같아요. 쮸쮸바를 다 빨아먹고 버려지는 껍데기와 같아요. 그래서 교회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예루살렘 여자들만 가득한 겁니다. 이해타산으로 예수를 쫓아다니는 스토커들만 가득해요.
이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좋아하는 겁니다. 사랑은 자기 버림이 일어나지만 좋아하는 것은 자기 유익을 챙겨요. 주산 알을 튕겨요.
마치 예루살렘 여자들이 자기 친정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 궁리하는 것과 같아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왕을 사랑했지 솔로몬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계산 적인 사랑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솔로몬과 술람미와 사랑은 계산이 없어요. 계산도 뭔가 격이 맞아야 되어요. 왕과 노예는 격이 맞지 않아요.
격이 맞지 않은데 사랑을 했다! 그래서 사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했다!이건 그 어떤 것으로 해석해도 격이 맞지 않아요. 불가능해요. 그런데 사랑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겁니다.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가(雅歌)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왕의 은혜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왕이 어떻게 자기를 비워서 종을 사랑했는지를 말해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아가(雅歌)서가 솔로몬의 아가(雅歌)인 겁니다. 술람미의 아가(雅歌)가 아니고 솔로몬의 아가(雅歌)임을 명심하세요.
그래서 전 아가(雅歌)서를 솔로몬에게 포카스를 맞추어서 풀어가는 겁니다. 그 어떤 설교를 보더라도 그 한편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가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가(雅歌)서를 강해 할 때마다 사설 같은 말들을 반복하여서 하게 됩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아니고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설레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을 해 보지 않으면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몰라요. 비록 안다고 하여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에요.
사랑 속에 얼마나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지 몰라요.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랑이 바로 연인(戀人)들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아가(雅歌)서도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과의 사랑은 성령께서 해 주시기 때문에 인간들의 사랑과는 달라요.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사랑을 통하여서 하나님 사랑을 알도록 해 주셨어요. 인간의 사랑은 표상적인 것이지만 그 속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있어요. 그 사랑이 바로 연인(戀人)간의 사랑이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은 연인(戀人)의 사랑으로 말해주고 있고! 하나님이 성도를 사랑하는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그리워하는 사랑은 연인(戀人)의 사랑이에요. 연인(戀人)이란? 사모하고 그리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했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바로 연인처럼 사랑하는 그 사랑이에요.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겁니다. 성령이 이런 사랑을 주세요.
흔히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하잖아요. 거기에 보면 사랑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던 것들이 점점 선명하게 또렷하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과학의 발달로 거울은 모습 그대로를 비추어 주지만 그 당시의 거울은 희미했어요. 마치 물 속에서 비취는 모습과 같았어요. 희뿌옇게 보였어요. 희뿌연 것으로 대충 이렇다 짐작을 했어요.
만약에 고린도 전서를 지금 쓴다고 한다면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다고 하지 않겠지요. 거울 속에 비췬 자기 모습은 너무도 실물처럼 선명하니까요.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를 몰라요.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는 예수에요. 그러니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요. 예수님의 사랑도 희미해요.
그래서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을 할 때 연인(戀人)간의 사랑이야기로 예수님과의 사랑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장 실감 나게 알 수 있게 하려고 연인(戀人)이야기로 또는 부부(夫婦)이야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혼인잔치 비유로 말하는 것도 다 이와 같아요. 이스라엘의 풍습 속에 다 담아 놓은 겁니다. 어렴 풋이라도 알라고! 우리는 인간의 제도 속에 담겨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나 연인(戀人)간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아가(雅歌)서를 강해하면서 남녀(男女)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이야기를 첨가하는 것도 이해를 돋으려는 겁니다. 그냥 추상적(抽象的)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런 맛이다 라고 이해하라는 뜻으로 말하는 겁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觀念的)으로 이해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어디까지가 자기 머리로서 소설을 쓰는 거예요. 그건 실제가 아니고 동화에요.
모두가 그대 없이는 못살아 하는 간절하고도 애틋한 사랑을 다 해 보았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말하는 겁니다. 다 그런 사랑 해 보셨잖아요? 미치도록 보고 싶고! 미치도록 그리워해 보았잖아요.
그래야 앞으로 몽유병화자처럼 자다가 말고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님을 찾아 달라고 하는 술람미의 애달픈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어져요. 이건 미치도록 가슴 절절히 사랑 해 본 사람만이 이해가 되어요.
누군가를 사랑해 보세요. 행복해요. 그것이 부모이든 자식이든 애인이든 부부이든! 그리운 사람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겁니다.
사랑은 살아가는 에너지에요. 살아가는 의미에요. 사랑은 생명이고 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을 완성품으로 주되 미완성으로 두셨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솔로몬이 술람미를 분명하게 사랑했어요. 이미 경험했어요. 완성품으로 주었어요. 그리곤 떠나갑니다.
이는 미완성으로 두기 위함이에요. 이는 사랑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란 말입니다. 항상 오늘이고 지금이에요. 부부간에 떨어져 있어도 연인 간에 떨어져 있어도 항상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랑은 살아가는 삶인 겁니다.
그러니 미완성이란 말은 부족하다거나 미완료라는 말이 아니에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완료이면서 미완료시제로 쓰고 있어요. 이건 아가(雅歌)서만이 갖는 독특한 시제법이에요. 항상 진행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이야기를 말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왜? 미완성으로 두었는가 하면 신앙생활이란 예수 믿자 말자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뭔가 하여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이 성도를 구원한 이야기는 창세전에 언약을 위한 겁니다. 구약에선 장차 성도를 구원할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라는 대망 사상을 주셨어요. 그래서 구약 마당에선 메시야와의 사랑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했듯이 예수님이 죄인을 사랑해 주셨어요. 감히 세상에선 볼 수 없는 사랑을 해 주셨어요.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은 진정으로 술람미처럼 예수님을 사랑했어요.
12제자도 그렇고 바울도 그랬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약속을 남겨둔 채로 먼 길을 떠나셨어요. 내가 너희가 본 대로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신 후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이 사실을 믿게 하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만약에 말이죠. 예수 믿자 말자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성령을 주시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그냥 믿게 하고 데려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어요. 이는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는가 하면 세상의 악함을 고발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남아서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왜? 이 세상이 멸망을 당하여야 하는지 증거자로 남아 있어야 해요. 이 세상 배후에 인간들을 장악하고 조정하는 악마를 폭로시켜주어야 한다구요. 악마의 핍박을 이기게 하려고 사랑을 주고 떠난 겁니다.
이미 받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겁니다. 마치 술람미처럼 그 혹독한 예루살렘 여자들의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솔로몬이 준 사랑 하나로 이길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가(雅歌)서의 결론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는 거예요. 사랑은 죽음조차도 갈라놓지를 못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과 이미 사랑을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오마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먼 길을 떠나셨어요. 마치 주말 부부처럼 그리움을 남겨 두셨어요. 그럼 성도는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움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반드시 그리움으로 나타나요. 그립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부부라 할지라도! 연인이라 할지라도 그립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에요. 보고 싶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그래요. 이미 경험한 완성된 사랑이지만 그리움이라는 미 완료로 두었어요. 만남을 주고선 떠나갔어요. 그래서 그립고 사모하는 겁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예수님께서 사랑을 주시곤 떠나가셨어요. 다시 오마 약속을 하신 채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마치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집을 잠시 떠났어요. 집을 잠시 떠났지만 여전히 집 주인이에요. 이 사실을 알고 산 자들이 바로 달란트를 남긴 종들입니다. 성경은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항상 곁에 있다는 자세로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금 술람미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살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의 마음속엔 솔로몬이 떠나 간 것이 아니에요. 항상 있어요.
그래서 떠나고 없지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고 사는 겁니다. 솔로몬과의 사랑을 회상한다는 것은 늘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떠난 사람이 아니고 마음속에 항상 남아 있는 거지요.
현철이라는 가수가 불렀지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한다고 했잖아요. 그게 사랑이에요.
지난 시간 솔로몬의 왕궁은 백향목으로 지었다고 했지요. 술람미의 마음속엔 솔로몬이 백향목 기둥처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어요. 술람미는 백향목 궁전의 푸르른 침실에서 나눈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요. 백향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로 은은한 침실에서 사랑을 나눈 것이 너무도 황홀하고 잊을 수가 없어요.
이를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주어지는 죄사함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주신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피는 백향목처럼 우리를 그 어떤 죄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주어요. 성도는 이 피 뿌림에 은혜를 잊으면 안 되어요. 그렇기 때문에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사는 겁니다.
술람미는 천하디 천한 촌 여자가 왕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 너무도 황송하기도 하고 기뻤어요. 그래서 잊을 수가 없어요. 늘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회상하는 겁니다.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이 사랑을 입었어야! 라고 감격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겁니다.
그리고 토해내는 말이 오늘 본문입니다.
아 2:1절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1절은 술람미가 자신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독백(獨白)이에요. 스스로를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에 핀 백합화라고 합니다.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에 핀 백합화라는 말은 자신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인적이 없는 황량한 들판에 덩그러니 한 송이 홀로 핀 들꽃이라는 말입니다.
샤론이란? 사막과 같이 드넓은 광야란 뜻이에요. 수선화란? 들꽃이란 말입니다. 비바람이 불면 그만 부러져서 말라 시들고 흔적 없이 없어질 들풀이에요.
이는 스스로를 버려진 자라는 의미에요. 술람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여자였어요. 자신은 그냥 광야에서 하루 피다가 사라질 들꽃과 같은 무가치한 존재란 말입니다. 그런 존재에게 왕의 성은(聖恩)이 임한 겁니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조차 모를 사람이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에 감격하는 겁니다. 왕궁엔 수많은 아름다운 왕후들이 있어요. 그들은 모두가 이름 있는 화려한 꽃들이에요. 다 내로라 하는 재색(財色)을 겸비한 왕후들이 즐비 했어요.
그들과 비교하면 술람미는 길을 가다가 사람들에 밟혀서 사라져갈 들풀과 같아요. 이런 무가치한 죄인이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는 것은 왕의 순전한 은혜에요. 이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겁니다. 술람미는 자신에게서 사랑 받을 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감사가 끊이지 않는 겁니다.
전 부부간에 이런 말을 잘 해요. 이따금씩 아내가 푸념을 해요. 무능력한 신랑을 만나서 이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전 어김없이 내가 당신 만나서 이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하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남을 탓합니다. 자기는 문제가 없는데 모든 것이 상대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원통한 겁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핑계 삼고 내가 저 인간 만나서 이 고생한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왜? 역으로 생각하지 못합니까? 나 때문에 이 사람이 이 고생을 하는구나 를 생각하지 못합니까? 이는 모두가 죄 때문이에요.
죄는 항상 잘못을 남에게 전가시켜요. 자기는 항상 빠져요. 그래서 항상 불평불만인 겁니다. 죄인의 입술에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다 죄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도 술람미처럼 이름 없이 살다가 지옥 불에 들어갈 죄인이에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죄인이에요. 우린 교회 밖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보다 못한 자들이에요. 우리가 저들보다 나아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셔서 믿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에겐 사랑받은 만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덮쳐온 겁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주어졌어요.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해 보아야 해요. 과연 나 같은 것이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되는가 하고! 없어요.
여러분들은 자격이 있을지 몰라도 전 없어요. 전 아무리 봐도 목사가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등 떠밀어서 된 겁니다.
그런데 황송하게도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어요. 많이 배우고 똑똑한 목사들도 그렇게 많이 있는데도 저같이 무식한 사람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단 말이죠.
솔직히 전 세상에 태어 날 수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태어난 것도 그런데 거기다가 복음 전하는 목사가 되었어요. 이건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일이에요. 아무리 내 조건에서 찾고자 하여도 찾을 수가 없어요.
전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없어요.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에요. 할 말이란 오직 하나 감사하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어요. 속된 말로 그저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할 수밖에 없다구요.
그럼에도 이 못난 인사가 눈만 뜨면 감사하기 보단 불평불만 한다구요. 뭐가 그리 잘난 것이 있다고 꼴값을 떨어요. 뭐 복음 증거하는 것이 대단 한 거라고! 제 것이면 대단하지요.
그러나 제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주셨잖아요. 말씀을 깨닫는 지식도 하나님 것이고 말씀을 풀이하는 지혜도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럼에도 순간 순간 잘난 척 꼴값을 떨어요.
오늘 술람미의 고백을 보면서 부끄러워요. 술람미는 보세요. 자신은 그져 이름 없이 잠시 피다가 사라질 들꽃이라고 하잖아요. 있으나 마나 한 인간이란 말입니다. 왕이 사랑을 해 주지 않아도 불평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에요.
그래서 자신은 골짜기에 핀 백합화라고 합니다. 골짜기란? 낮고 천한 곳이란 말입니다. 찾는 사람도 없는 그런 첩첩 산중에 있는 시골 사람이란 말입니다. 아무도 찾아 주는 이 없는 두메산골에서 오빠들의 억압에 시달리며 포도원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그런 인간이었어요.
술람미가 스스로를 들에 핀 수선화이고 골짜기에 핀 백합화라고 한 것은 자신을 비하(卑下)하여서 한 말이에요. 비하한다는 것은 받은 은혜가 너무도 황송스러워서 자신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비록 들에 핀 들꽃도 스스로는 살 수가 없어요. 비록 보잘 것 없는 풀이지만 하나님이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해 주셨어요.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고 자라게 하셨어요. 우리 역시도 하나님이 살게 해 주셔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이러쿵 저러쿵 불만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들에 핀 백합화를 말했지요. 천부께서 들에 피는 한낱 보잘 것 없는 꽃들도 기르시는데 하물며 자기 백성들을 기르시지 않겠느냐 라고 할 때 백합화를 말했어요. 지금 술람미가 백합화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바로 한낱 보잘 것 없는 들풀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가(雅歌)서를 볼 때 유념하여야 하는 것은 동일한 것을 술람미가 말을 할 때와 솔로몬이 말을 할 때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술람미가 스스로를 백합화라고 하지요. 그런데 2절에 보면 솔로몬도 술람미를 백합화라고 해요.
술람미는 이름 없는 들꽃으로 말했지만 솔로몬은 화사하고 고결한 의미에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동일한 백합화라고 하여도 그 의미는 누가 하는 말이냐에 따라서 천지차이가 나요.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런 것이 어려워요. 누가 왜? 이런 말을 하였는가 깊이 탐사(探査)해 보아야 그 말의 의미를 건질 수가 있어요.
그러니 1절의 백합화와 2절의 백합화는 해석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 의미를 염두(念頭)에 두고 들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정낙원 목사는 왜? 동일한 것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처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느냐 라고 시비 걸 소지가 있기 때문에 미리 말해두는 겁니다.
암튼 술람미가 고백하고 있는 것은 자기 실존을 분명하게 보고 말하는 자기 비하발언이에요. 신세타령이 아니고 감사하는 겁니다. 이를 겸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제일 꼴불견이 뭔 줄 아세요. 자기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겁니다. 쥐뿔도 모르면서 나대는 사람들을 보면 꼴값 떤다고 하잖아요.
꼴값이란? 꼴뚜기가 값을 떤다는 말입니다. 값을 떤다는 것은 값어치 없는 놈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값어치 있게 논다는 말이에요.
꼴뚜기는 고기 축에 끼지도 못해요. 그런데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 놓았는데 다른 고기들과 잡혔어요. 버리기도 그래서 바구니에 담아 놓았더니 자기도 고기라고 까부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하도 눈꼴이 시어서 갖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꼴값 떨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주제를 좀 알라는 겁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엄청 꼴값을 떨었어요. 남보다 쬐끔 더한 열심과 충성으로 남을 판단하고 그랬어요.
남을 판단 할 땐 항상 내 열심과 충성이 기준이 되었어요. 당시엔 성경도 많이 보았으니 문자적으로는 성경을 하는 지식도 조금 있었어요 그러니 그걸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참 많이 했어요. 심지어 목사님들 설교까지 비평하면서 나댔으니까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 얼마나 부끄러운지요. 세상에! 돌아보니 이건 완전히 미친년 나대듯이 했었어요. 복음 앞에서 나도 역시 정죄당하고 비판 받아야 하는데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꼴불견이었겠어요.
마치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들고 자기 꼬라지를 살펴야 하는데 남들 정죄한다고 하였으니 죽지 않고 배기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길이 참으심 중에서 만삭되지 못한 놈처럼 나대던 저에게 은혜를 주셨어요. 은혜를 받고 보니 내가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이 보여져요. 내 꼬라지가 보여지니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나대면 과거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이해는 가요. 하지만 아이쿠~ 이 사람아! 자기 눈에 들보를 보아야지 남에 눈에 티를 보아서 되나! 라고 조언을 합니다만 어디 말을 들어 먹나요. 다 자기가 격어 보아야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에서 허경환이가 말하듯이 “이 짜슥이~ 혼쭐이 나봐야! 아~ 이래서 우리 아버지가 나대지 말라고 했구나” 를 알게 될 겁니다.
나대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깊은 은혜를 몰라요. 그러니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특징이 자기 주제를 알기 때문에 나대지 않아요.
술람미가 솔로몬왕의 총애(寵愛)를 받는다고 잘난 척하지 않았어요. 항상 겸손했어요. 마치 바울이 복음에 빚진 자처럼 살았듯이 술람미도 왕궁의 궁녀들에게 빚진 자로 살았어요.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를 낮추게 해요. 자연히 낮추어져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거저 주는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아는 것도 공짜이고! 구원을 받은 것도 공짜이고! 은혜 받는 것도 공짜이고! 모든 것이 공짜에요.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와요. 그러니 잘난 척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바울은 잘난 척 하고 나대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다 안다고 하는 자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라고 했어요.
암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자기 주제를 알게 되는 복(福)을 받게 됩니다. 자기 주제를 알기 때문에 상석(上席)에 앉지 않고 말석(末席)에 앉는 겁니다. 자기 부족을 알고 겸손해 지는 겁니다. 이건 인간 윤리적인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자기 주제를 아는 것이에요.
술람미는 수넴이라는 두메산골 여자에요. 요즘말로 시골 촌뜨기에요. 그런 여자가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어요. 이건 세상 가치관으로는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일어났어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났다고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에 신부로 간택(揀擇)이 되었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사실이 믿겨진다면 더 이상 행복할 수는 없어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지요. 물론 이 사실은 말년에 고백합니다만! 그래도 바울은 자신이 엄청난 은혜를 입었음에 늘 빚진 자로 살았어요.
저 역시도 죄인 중에 괴수에요. 이건 은혜 받은 성도라면 당연하게 뱉어질 고백이에요. 세상에 이런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어요. 이름 없이 살다가 지옥불구덩이에 들어갈 자가 천국에 부르심을 입었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오늘 본문 1-2절을 번역본마다 차이가 있어요. 어떤 것은 술람미의 고백이라고 하고 어떤 것은 솔로몬의 고백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의미에선 모두가 동일해요.
예수님이 술람미를 통하여서 저기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선 아름 없는 들풀과 같았어요. 당시 유대사회의 배경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천민이에요.
바닷가에서 목수로 일했다는 것은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흔히들 바닷가에 살면 뱃놈이라고 합니다. 밑바닥 인생이란 뜻에서 비하하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전 어려서 바닷가에 살아서 잘 알아요. 언제 죽을지 몰라요.
바다는 아침엔 잔잔하다가도 금새 풍랑이 일어 파도가 쳐요. 그러면 거룻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들어오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래서 바닷가엔 과부들이 많은 겁니다. 옛날엔 그랬어요.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도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을 천민(賤民)으로 여겨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엔 그랬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라서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이 바닷가 출신이에요. 배 만드는 목수나 어부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다 거기서 거기에요. 천민이긴 매 마찬가지에요. 이처럼 예수님의 출생 자체부터 천민으로 출생 했어요.
이사야 선지자도 예수님을 아주 보잘 것 없는 천민으로 표현했어요. 한번 살펴보고 갑시다.
사 53:2-4=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보세요. 예수님은 연한 순 같다고 하지요. 연하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냘프다는 말입니다. 그냥 바람에 훅하고 꺾일 풀과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하지요. 여러분 마른 땅이란? 가뭄이 든 밭 같아요. 거기서 싹이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어요. 속된 말로 방글라데시 난민들처럼 피골이 상접해서 볼 게 있겠어요. 그래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술람미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마른 광야에 핀 들꽃과 같아요.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담고 계세요. 뉘라서 이걸 알겠어요.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가는 그 주님을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았겠어요. 그러니 마음껏 조롱하고 핍박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했던 겁니다. 마치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던 술람미와 같이 예수님도 조롱당하셨어요.
이건 비단 예수님만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도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는 보잘 것이 없어요. 뭐 변변하게 내 세울 것이 없어요. 다 찌질이에요. 저부터 그래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나갔더냐!
아니면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려고 나갔더냐?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궁중에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왜? 광야에 나왔느냐? 그도 아니면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옳도다! 광야에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광야란? 화려한 세상과 반대되는 곳이에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화려한 궁중에서 사는 사람들과 같지 않단 말입니다.
이 시대 궁중이 어디 입니까? 화려한 교회들이에요. 그 속엔 선지자가 없어요. 선지자는 그런 곳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광야로 내 몰리는 겁니다. 이 시대 광야란? 기득권층으로부터 멀어진 곳이에요. 기존에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내 몰린 것을 말해요. 그러니 누가 알아주겠어요. 누가 그 속에 생명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다고 믿겠어요.
복음은 세상에 것을 담고 있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으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복음 속엔 육신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없어요. 복음 속엔 광야의 들풀과 같은 운명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메마른 광야에 내렸어요. 모세를 예로 들어 봅시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막았어요.
공주의 아들에 신분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면 하나님이 가려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박탈하는 일을 벌리신 겁니다. 애굽에 백성을 죽인 살인자를 만들어서 광야로 몰아냅니다. 왕자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극과 극의 인생으로 전락했어요.
모세는 광야에서 애굽에 왕자로 살았던 세월만큼 혹독하게 자기 비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왕자로 산 40년을 양치기 목동으로 40년을 살게 하면서 완전히 애굽에 때를 벗겨 냅니다.
그리곤 하나님이 모세 나이 80세 때에 마른 광야에 가시떨기나무 속에서 모세를 부릅니다. 이상한 것은 분명하게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겁니다. 모세가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겁니다. 그러면서 모세를 부릅니다. 그리고 사명을 줍니다.
이는 모세가 바로 가시떨기나무와 같은 존재란 겁니다. 하나님이 이제 가시떨기나무 같은 모세 안에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40년 동안 모세는 양을 치면서 광야의 들풀과 같이 이름 없는 존재로 살았어요.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난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가시떨기나무 같은 종들을 사용하세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종들에게 생명의 말씀들을 주셨어요.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거지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과거 엘리야가 이런 모습으로 살았어요. 오죽 했으면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으로 살았겠어요. 이는 그 시대 철저히 외면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어느 시대이고 외면당해요. 이는 선지자들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을 세상 만물의 찌끼 같다고 했어요. 한마디로 거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갖가지 위협에 시달리며 살았어요.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화려하게 대접받으며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고 난 후 처절하리만치 과거의 화려한 삶을 토해 내듯이 내침을 받게 되었어요. 하지만 바울은 불평 할 수가 없는 것은 예수를 핍박하고 죽인 원수가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고백처럼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니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호사스러운 복임을 알았어요. 그러니 고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버림당하셨기 때문에 종들이 그 대접을 그대로 받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세상이 나를 미워하였은즉 너희도 미워한다고! 그러니 복음을 받으면 핍박도 함께 받게 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 술람미처럼 솔로몬의 사랑을 받으니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시대나 복음의 맥(脈)은 같이 흐르는 겁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반드시 육적 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술람미는 자신은 들꽃과 같은 비천한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왕의 사랑 때문에 고난을 받아도 모든 것이 감사가 되는 겁니다. 솔로몬으로부터 사랑 받은 것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당하는 것이니 감사한 거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감사해요. 심지어 죽는 것 까지도 축복임을 알게 되어요.
지금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려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는가에 비례하여서 감사의 깊이가 달라져요. 많이 탕감 받음을 알면 많이 감사가 되고 적게 탕감 받음을 알면 적게 감사가 되어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이 깨달아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말하는 백합화를 살펴봅시다. 술람미가 자신을 이름 없는 백합화라고 하자 솔로몬은 아니다 너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합니다.
아 2:2절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솔로몬은 술람미를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자들과 술람미를 구분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하지요. 이는 다른 여자들은 가시나무이고 술람미는 백합화란 말입니다.
가시나무와 백합화를 의인화 하고 있어요. 그럼 가시나무는 누구고 백합화는 누구입니까? 백합화는 술람미라고 했으니 다른 여자들은 가시나무인 겁니다. 다른 여자란? 궁중에서 사는 왕후들을 말해요. 백합화를 둘러싸고 콕콕 찌르는 가시나무는 예루살렘 여자들을 말해요.
가시나무는 땔감도 할 수 없어요. 남에게 피해만 주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가시나무와 같이 쓸모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술람미는 가시나무들 틈에 홀로 고결하게 핀 백합화에요.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고 귀한 꽃이란 말입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란 말은 최상의 가치를 표하는 말이에요.
가시나무와 꽃은 가치가 달라요. 백합화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만 가시나무는 불에 태워질 겁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는 것을 두고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합니다.
술람미는 수많은 닭의 무리 속에 학(鶴)처럼 탁월하게 빼어나고 예뻐요. 가시덤불 속에 한 송이 백합화가 있는 겁니다. 지금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가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에요.
수많은 닭(鷄)들 속에 학(鶴)처럼 고결하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출중해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고 아름다워요. 그래서 솔로몬이 감탄을 하는 겁니다.
야! 어쩜 저리고 고울까! 저리도 예쁠까! 천사가 따로 없네! 당신이 바로 천사야! 천사! 그러고 있는 겁니다.
이건 인간적으로 보면 맞지 않아요. 왕궁에서 사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학(鶴)처럼 아름답고 예뻐요. 도리어 술람미가 가시나무처럼 볼품이 없어요. 얼굴도 검고 손발도 노동으로 투박하고 몰골이 말이 아니에요. 예쁘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솔로몬의 눈에는 연예인들처럼 화려한 왕궁의 여자들을 가시나무처럼 볼품이 없고 술람미가 영화배우들처럼 예쁘게 보여요. 그러니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하지요.
앞서 아가(雅歌)서 2강에서 솔로몬의 사랑은 콩깍지 사랑에서 그랬지요. 솔로몬 눈에 술람미라는 여인이 콩깍지가 씌었어요. 눈에 콩깍지가 씌우면 다른 것은 안 보여요. 콩깍지만 보여요.
지금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라는 콩깍지가 씌웠어요. 그러니 천하디 천한 시골 촌 여자를 백합화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겁니다. 결국 눈입니다.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느냐 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에요. 예수님 눈에 성도라는 콩깍지가 씌워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가 제일 아름답게 보이는 겁니다. 이건 마치 엄마 눈에 자기 자식만 보이는 것과 같아요.
예쁜 기준은 판단하는 사람에게 달렸다고 했지요. 솔로몬이 예쁘다고 하면 예쁜 겁니다. 신랑이 예쁘다고 하면 되어요. 같이 살 사람이 예쁘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합니까.
성경에서 가시나무는 저주 받은 죄인을 상징해요. 그렇다면 왕궁에서 스스로 잘난 자라고 의인인체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은 저주 받은 자란 말입니다.
솔로몬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죄인이고! 자신이 들에 풀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의인이라고 보고 있어요. 왕궁에 사는 예루살렘 여자들은 왕의 사랑을 입지 못하여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고! 들에 있는 술람미는 왕의 사랑을 입어서 구원받은 겁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겁니다. 우리는 원래 가시나무와 같이 저주 받은 죄인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였어요.
우린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자가 사랑을 입었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 사실을 잊으면 감사가 사라져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귀함을 받는 백합화가 되었어요. 술람미는 자신을 들풀로 보는데 솔로몬은 백합화로 보고 있어요. 솔로몬이 백합화라고 하면 백합화입니다.
왜? 솔로몬이 술람미를 백합화라고 합니까? 이는 솔로몬 자신이 백합화이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으니 백합화인 겁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학(鶴)이 목을 빼고 바라보듯이 술람미가 자기만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겁니다. 오로지 님을 그리워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겁니다. 님의 사랑이 아니면 살아갈 의미조차 없는 그 마음이 너무도 귀한 겁니다.
사랑이란? 님을 바라보는 거예요. 생각만 하여도 좋아요. 보고 또 보아도 또 보고 싶어요. 오매불망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온통 머릿속엔 님 생각뿐이에요. 이게 사랑이에요.
그져 님만 생각하면 좋아요. 동그라미 그리다가 님을 그렸어요. 먼 산을 보다가 님의 얼굴을 보았어요. 이리 보아도 님이고! 저리 보아도 님의 얼굴이에요.
온 사면이 거울처럼 이리 둘러보아도 님이고! 저리 둘러보아도 님이 보여요.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아도 거기에 님의 모습이 있고! 엎드려서 방바닥을 보아도 거기에 님의 모습이 있어요.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온 사방에 님의 모습이 어른 거려요. 의식 속에서 헤엄치고 다녀요. 이건 사랑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이 준 사랑을 못 잊어 가시에 찔려 가면서도 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마치 성도가 고난 속에서 천국을 사모하는 것과 같아요. 솔로몬의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겁니다. 그러니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하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지금 세상을 보고 계세요. 한국교회를 보고 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 여자들과 같은 교인도 있고 술람미 같은 성도도 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아쉬울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을 다 소유했어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처럼 곡식이 많아서 창고를 짓고 또 지어요. 교회마다 교인들이 차고 넘쳐서 눈만 뜨면 창고를 늘리듯이 새로운 성전을 넓게 짓는다고 난리들이에요. 교육관도 짓고! 주차장도 넓히고! 기도원도 세우고!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공동묘지도 구입하고! 요즘은 비젼 센터를 짓는다고 지랄들을 떨고 있어요.
교회마다 돈이 차고 넘치는 겁니다. 쿄회가 부흥하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교인들도 먹고 살기 좋아지면 복 받았다고 합니다. 온통 돈입니다. 돈 때문에 전부 돌 아이가 되었어요. 눈에 뵈는게 없어요. 오로지 돈이에요.
부족한 것이 없어요. 돈이 넘쳐나니 목사들은 최상위 생활을 누리고 있어요. 교인들도 그져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고 바치고 또 바칩니다. 돈 놓고 돈 먹기인데 안 바치고 되겠어요. 서로 경쟁적으로 바치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마다 목사들마다 세상에서 연락을 즐기고 있어요. 마치 요한계시록 18장의 음녀처럼 포도주에 취하였어요.
계 17: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계 17: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성경은 타락된 교회를 음녀라고 해요. 목사들이 세상 영광으로 둘둘 말았어요. 거기다가 금잔에다 성도들 피를 담고 마시고 있어요.
성경은 교회 이야기에요. 교회가 세상과 짝하여 음행하고 있어요. 타락한 교인들은 창녀에요.
교회 안에 세상 가치관이 가득해요. 교회나 세상이나 하나가 되었어요. 교회에서 하늘에 이야기가 선포되지 않고 뱀의 말이 선포되고 있어요.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라고 하고 있어요.
이런 것을 두고 야고보 사도는 세상과 간음 한다고 했어요. 이는 마치 노아 시대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한 것과 같아요.
이 시대 교회는 세상 것으로 취하였어요. 목사나 교인들이 값싼 구원론으로 취하였어요. 그런데 이 놈들이 어디에 취하였는가 보니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어요. 세상에!
성도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가 뭐겠어요.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거지요. 십자가 피 전한다고 교단에서 제명하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성화를 말하면 정통이고 십자가 피를 말하면 이단이에요. 그래서 사도 요한이 기이히 여기는 겁니다. 놀라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교회가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자들을 죽일 수 있느냐 에요. 교회라면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예수의 증인들을 보호해야지 어떻게 죽일 수가 있느냐 에요. 그래서 기이하고! 크게 기이하다고 놀라는 겁니다.
이건 반역이에요. 예수의 교회가 아니라 마귀의 교회에요.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예수의 증인들을 죽이느냐 말입니다.
이게 세상의 본질이에요.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듯이! 예수의 증인들도 교회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예루살렘 성중에 가득하다고 한 겁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예수의 증인들을 죽인 피가 가득해요.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그래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어요.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고 했어요. 가시밭에 백합화처럼 두셨어요.
이건 죽으라는 말입니다. 죽어서 그들의 소속을 들추어내라는 겁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폭로하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그러지요. 백합화가 가시나무 사이에 있다고 하지요. 가시나무들이 가시로 백합화를 찌르고 있어요. 그러니 백합화는 진액(津液)을 토하여 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술람미가 그러고 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있어요. 피를 뚝뚝 흘리고 있어요.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맞아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듯이 말이에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얼굴에 선혈(鮮血)이 낭자합니다. 손과 발이 못에 박히어 피를 뚝뚝 흘리고 있어요. 옆구리에 창으로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아냈어요. 예수님의 온 몸은 피로 범벅이 되었어요.
술람미가 백합화처럼 가시에 찔릴 때마다 예수님처럼 피를 토해내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가 당하는 아픔은 솔로몬이 당하는 아픔이에요. 또한 예수님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를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냈듯이 예루살렘 여자들 속에 두신 겁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가시나무 같은 예루살렘 여자들 숲에 둔 것은 이들이 악에 속하였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왕후라면 당연히 왕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여야 해요. 왕과 왕후는 하나에요. 생각도 하나고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한 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의 왕후라고 하면서 솔로몬의 마음을 갖지 않고 있어요. 솔로몬의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면 솔로몬이 사랑하는 술람미도 사랑하여야 해요. 그럼에도 사랑하기는커녕 투기하고 있어요.
솔로몬이 사랑하는 여인을 투기한다는 것은 곧 솔로몬을 투기하는 것과 같아요. 솔로몬의 뜻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솔로몬이 사랑하는 술람미를 핍박하는 겁니다.
왕이 백성을 자애(慈愛)하면 국모(國母)도 백성을 자애(慈愛)하여야 해요. 그래야 국모다워요. 왕은 백성을 자애하는데 국모가 백성을 핍박한다면 그것은 왕을 욕보이는 거예요. 백성들로부터 왕을 욕하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 왕후라고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그러고 있어요. 왕은 시골에 천하디 천한 백성을 자애하는데 왕후라는 것들이 왕에게 은혜를 입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백성을 시기하고 핍박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과 같아요. 맏아들은 죽었다가 살아온 동생을 아버지는 너무도 기쁘게 맞이하는데 형이라는 놈이 뿔따구를 내고 있어요.
맏이는 부모 앞잡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동생들 앞에선 부모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그 아비의 마음이 없는 겁니다. 이게 악이고 저주 받을 죄에요.
그러니 아버지에게 왜? 저런 놈을 받아 들이냐고 따지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왜? 저런 천한 것을 사랑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과 같아요. 맏아들에겐 아비의 마음이 없어요.
죄란? 아비의 마음을 모르는 겁니다. 아비의 마음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겁니다.
술람미에겐 솔로몬의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므로 자신을 핍박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을 용서하는 겁니다. 가시에 찔려도 용서를 토해내는 겁니다.
이는 자신이 용서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솔로몬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가시에 찔릴 때마다 솔로몬의 사랑이 토해지는 겁니다.
술람미의 모습은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원수들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고 있어요. 이리저리 찔려요. 사도바울은 이걸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성도를 통하여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요. 성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계세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가 토해내는 그 사랑을 보고 있어요. 술람미가 용서를 토해내는 것은 솔로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술람미를 가시밭의 백합화라고 칭찬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빚진 자에요.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입었어요. 달리 사랑이 아니고 십자가 복음이 믿어진다는 사랑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고 있어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는 은혜가 임한 겁니다. 천국이 믿어지고! 영생이 믿어지고! 부활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러니 기다리는 겁니다. 이건 아무나에게 임하는 은혜가 아니에요.
마치 노아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노아에게만 방주를 짓는 은혜가 임한 겁니다. 우린 지금 예수라는 방주에 타고 있어요. 아무 공로 없이 공짜로 타고 있어요.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비록 가시밭에 있어도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린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어요.
전 로마서 7장과 8장을 참 좋아해요. 거긴 반전(反轉)이 있거든요.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서 해 주셨어요. 그리고 그 사실이 믿어지게 성령을 주셨어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약속을 주셨어요.
한번 볼까요. 이것 보고 마칩시다.
롬 8:33-39=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보세요. 하나님이 그럽니다. 누구야! 어떤 놈이 내 새끼를 건드려! 내가 의롭다고 하는데 어느 놈이 불의하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 너희들 안심하고 살라고 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표준 새 번역본으로 보면 더 실감이 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나는 확신 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 구원을 훼방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좀 보세요. TV만 보지 말고! 성경을 보면 든든하고 근심걱정이 사라지는데 맨 날 TV만 쳐다보고 있으니 기쁨이 없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지요.
TV를 보면 없던 염려근심도 만들어져요. 새로 생겨나요. TV에 나오는 예쁜 여자들 보면 얼굴도 갈아보고 싶고 온 전신을 성형수술로 스무 살 꽃다운 처녀로 만들고 싶잖아요. 축 늘어진 뱃살도 지방 흡입술로 빼내고 싶어져요.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 하는 게 TV에요. 맨 날 신제품만 쏟아져 나오는데 어찌 불만이 안 생기겠어요.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을 보면 지금 살고 있는 남편이나 아내가 어디 인간입니까? 괴물이지! 밥맛이 떨어지지요.
남편이라는 인간이 어디 말을 고분고분 하게 합니까? 완전히 식순이 취급을 하고 있잖아요.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어디 여자로 보입니까? TV보다가 아내 보면 기겁을 해요. 그러니 남편들이 아름다운 연예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거든 마스크 쓰고 계세요.
하~하~하~ 우습지요. 그러니 남편도 갈아보고 싶고 여편도 갈아보고 싶어지지요.
마누라는 박신양이 나오면 헤벌레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저 새끼 왜? 또 나오고 지랄이야! 라고 합니다. 아내는 박신양이 쳐다보고 남편 쳐다보면서 벌레 씹은 얼굴을 해요. 속으로 어이쿠 이 화상아! 그러는 것 같아요. 비교당하는 놈은 엄청 기분 나빠요.
그럼 어디 비교당하는 인간은 가만있나요. 남편은 전지현이를 보면 그래 여자는 저래야지! 저렇게 들어갈 때 들어가고 나올 때 나와야지 여자지! 어디가 허리이고 어디가 궁뎅인지 모르는 드럼통은 여자가 아니고 괴물이야 괴물 그래요. 그러면 죽겠다고 하지요. 집을 나가라고 고리 고래 소리치잖아요. 다시는 밥을 안 해준다고 하잖아요.
누가! 여러분이 그러잖아요. 괜히 TV가 가정에 평화를 깨고 있어요. 그러니 제발 TV에 목을 놓고 살지 마세요.
웃고자 말을 만들었지만 언중유골(言中有骨)이에요. 그러니 제발 TV는 나의 목자시니 그만 하세요. 예수님을 목자로 삼으세요. 쓸데없이 백화점도 싸돌아다니지 말고! 친구들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그럴 시간이 있으면 블로그에 들어와서 설교 한편이라도 읽으세요. 그러면 소망이 생겨요.. 소망이 생기면 자신감이 생기고 관대함이 묻어나오잖아요.
여러분 술람미가 왕후들을 보면 못 살아요. 자기도 여자인데 왜? 비교하지 않겠어요. 비교하면 자신이 비참해지고 콱 죽고 싶어요. 자기도 전신 성형수술을 해서 예뻐지고 싶다고요. 얼굴과 몸을 통째로 바꾸고 싶어진다구요.
그래서 술람미는 오로지 솔로몬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솔로몬과 나누었던 사랑을 회상하고 그리워하고 살았어요. 삶에 고통도 솔로몬에게 받은 사랑이 있기에 이겨냈어요. 솔로몬의 약속을 믿고 살았어요.
분명히 말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행복해 집니다. 하지만 십자가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염려 근심걱정에 사로잡혀 불행해집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세요. 그러면 범사가 감사가 될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신부라는 것에 놀라고 놀라세요.
405장 찬송가도 크게 불러 보세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가 너무도 놀랍지 않습니까. “어 메이징 그레이스” 아닙니까.
찬송을 부를 떼에도 가사를 음미 하면서 불러 보세요. 그럼 은혜가 되어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도 하고 기도가 되기도 해요.
은혜가 물밀듯 밀려오면 가시밭에 백합화처럼 가시에 찔려가면서도 주님께 받은 사랑을 토해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삶도 분에 넘치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현재 있는 것으로도 족한 줄 알고 감사하게 되어집니다.
부디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가시밭에 백합화처럼 강권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디 천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못난 죄인이 용서받고 사랑받고 산다는 것이 기적임을 알게 하옵소서. 이 기적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소망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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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