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는 술잔 속 빛나는 센스… 연말 '건배사' 고민 덜어드립니다
진실로 달콤한 내일 "진달래" 지금부터 화합하자 "지화자"
오래도록 '징그럽게' 어울린 친구들끼리 만나면 "오징어" 짧고 굵게 "도전"도 인상적
외국인에겐 "위하여"가 쉬워
잔이 짠하고 맞닿을 때마다 믿음과 정이 쌓이는 게 연말 술자리다. 하지만 '건배사'가 숙제. 너무 뻔한 얘길 했다간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 것이고, 너무 경박하면 그것 역시 민망하다. 각계 인사들의 괜찮은 건배사를 들어봤다.◆줄인 말로 간결하게, 해석하며 멋스럽게
주량이 "소주 한 병 정도"라는 정운찬 국무총리는 술을 즐기는 편이다. 정 총리의 건배사는 "나가자!". '나라를 위해, 가정을 위해, 자신을 위해'라는 뜻이다. 정 총리는 또 지난달 21일 중소기업인들과 등산 후 가진 오찬에서 한 기업인이 "한국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고 근로자의 88%가 중소기업에 근무한다"며 건배 구호로 '9988 파이팅'을 외치자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자"고 화답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는 "지화자". 정 대표가 "지화자"를 선창하면 나머지가 "좋다"를 받아치는 형식이다. "지화자"는 '지금부터 화합하자'를 줄인 말. '친박'도 '친이'도 아닌 모두의 화합을 강조하는 말이다.
신용보증기금 안택수 이사장은 "오바마! 오바마! 오바마!"를 외친다. '오래오래,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루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동부화재 김순환 사장은 "진달래~ 위하여!"를 외친다. '진실로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라는 뜻.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계급장 떼고 나이는 잊고 릴렉스(relax)하자'는 뜻에서 "계나리"를 건배사로 제안했다.
사자성어를 자주 쓰는 삼성 농구단 안준호 감독은 "不狂不及(불광불급)"을 외친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는 뜻. 엠넷미디어 박광원 대표는 '불법 음원 근절'의 약자인 '불끈불끈'이 건배사다. 만화가 신예희씨는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재건축(재미있고 건강하게 축복받자)' 같은 멘트가 직장인들의 사기를 높이기에 그만이라고 했다. '당신멋져(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살자)' '사우나(사랑과 우정을 나눕시다)' '소녀시대(소중한 여러분의 시간에 잔 대보자)' '오징어(오래도록 징그럽게 어울리자)' 등도 인기 건배사다.
- ▲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건배사=짧은 연설
신한카드 이재우 사장은 "(술잔 올리며) 기쁨은 더하고, (술잔 내리며) 슬픔은 빼고, (술잔 뒤로 빼며) 희망은 곱하고, (술잔 합치며) 사랑은 나누자!"라는 건배사를 제안했다. 동작을 취하는 이유는 "술잔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과정에서 일치된 마음으로 화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사칙연산 단어를 이용한 건배사는 활용법이 다양하다.
건배사는 '짧은 연설'이 되기도 한다. 직원들과 실미도 극기훈련을 다녀온 롯데카드 박상훈 사장은 "변화하지 않으면 변화 당합니다. 적극적으로 변화합시다!"를 외친다.
산악인 엄홍길씨는 술자리마다 굵고 강한 한 마디로 청중을 압도한다. 소설가 박범신씨의 '촐라체' 피로연에서도 "도전"이란 말 한마디로 주변 사람들을 압도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도전 영원히!" "우리는 하나다!"라는 건배사를 쓴다. 그는 "히말라야 원정처럼 목숨을 걸고 모험에 나설 땐 대원 간의 믿음과 신뢰, 팀워크가 중요하다"며 "인생의 삶 자체가 도전의 연속인 것처럼 모두 함께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를 읊듯 부드럽게 "위하여~!"
그래도 역시나 가장 보편적인 건배사는 "위하여"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주로 "위하여" "~~를 담아서" 같은 간단한 건배사를 한다. 프랑스계 손해보험사인 AXA다이렉트의 기 마르시아 사장은 우리말로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를 외친다. 프랑스인이지만 평소 폭탄주와 막걸리, 족발을 즐기는 스타일로 우리말로 "막걸리 합시다" "족발 주세요" 등을 말하며 직원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 술자리 문화에 익숙지 못한 외국인과의 만찬이라면 군대식의 거친 고함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가 방한했을 때 만찬 중 누군가 갑자기 큰소리로 "위하여"를 외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프라다와 자리를 함께했던 간호섭 홍익대 교수는 "외국인들은 '위하여'에 받침이 없고 'w' 'h'가 발음하기 쉽고 부드러워 잘 따라 한다"며 "군대식으로 거칠게 고함치는 것보다는 시를 읊듯 부드럽게 전달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월간 아웃도어 발행인 박요한씨는 "'위하여'라는 건배사가 식상하게 들려도 외국인들은 독특한 우리나라 건배 문화에 즐거워한다"며 "조금씩 변형하거나 리듬을 실어서 부드러운 건배사를 제안하면 술자리가 부드러워진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