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편제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윤석각은 각기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특히 김수가 두드러졌는데 영천, 청도,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와 경상 좌우병영성이 모두 증축되거나 새로 쌓았다. 단순한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 보지도 않았다. 기존 왜구는 대마도를 거점으로 섬이 많은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침탈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만약 왜구의 침탈 정도로 생각했다면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강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왜구의 주 공격루트가 아니었던 경상 좌도 방어에도 심혈을 기울여 2개의 첨사진만 있던 부산-동래 방면에 1개 만호진을 통합시키고 6개 만호진을 이전시켰다.
김수는 축성 인원 확보를 위해 백성들 뿐 아니라 유생들까지 동원했다. 향교 교생을 뽑는 고강을 엄격히 실시하여 낙강유생들을 모조리 충군시켰고 이로인해 지역 사족층과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선조는 재위기간 내내 방군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570년대부터 부족한 군액을 보충하는 작업이 행해졌고, 1590년대에는 30만 이상의 군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이나 식자층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김수는 사족층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전쟁 발발 후에 곽재우와 크게 충돌했고 선조는 성을 높일수록 민심이 피폐해졌다며 전쟁 준비로 인한 민심이반을 인정했다. 의병장 곽재우의 첩 장인인 이로는 동년배 친구였던 류성룡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올 수 있겠나?"며 축성에 반대했다.[18] 전근대 시대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민간에 끼치는 피해를 감안하면 김성일의 주장은 당대의 여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은 꿋꿋이 전쟁 준비를 진행시켰고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이 반격을 감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맥없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조선이 찌질하다고 비판하는 사람 중에 초기 전역을 면밀히 살피고 여타 전쟁사와 비교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조선의 진짜 문제는 왜군의 규모를 기껏해야 1만에서 수만 정도로 예상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당시로선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조선 조정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는 1555년의 을묘왜변에 크게 거슬러 올라가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었다. 역사를 통틀어봐도 거의 20만에 육박하는 대규모 침공은 고려 초 거란과의 전쟁이 가장 최근이었다. 그 이상 올라가면 삼국시대 수당과의 전쟁이다. 중국을 지배한 유목민족 몽골조차 여몽전쟁 때 이 정도 대군을 파병하진 않았다. 게다가 왜구의 노략질 수준이 아니라 일본의 중앙 정권이 작정하고 바다를 건너서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보낸 사례는 731년 신라 성덕왕 때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이끄는 300여척의 일본 함대가 신라를 공격했다가 격퇴당한 게 마지막이었다.
당시 조선군은 실제로 군대에 가서 복무하는 정군들의 대거이탈로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정원이 실제 복무하는 군인과 일치하는 병영은 중앙의 근위대, 신립이 이끌던 북방기병대, 4군 6진과 평양을 지키던 북방군뿐이었다. 이외에도 약 6만~8만명의 5위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훈련을 받지 못하고 놀고있은지 오래였고, 사실상 조선의 육군은 북방기병대, 북방군과 근위대뿐이었다.
국정의 혼란과 군역의 문란으로 조선군의 병력은 줄어들었긴 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조선은 상당수의 정예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전투기록으로 보건데, 조선군은 약 8천명의 신립의 정예기병대 (북방에서 전투경험보유), 1만여명의 북방군, 8천여명의 충청도 야전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병농일치제였던 조선과 달리 이들은 모두 직업군인이었으며, 여진족과 왜구를 상대로 상당한 실전경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3금청 (내금위, 우림위, 금군)의 근위군과 근위기병대인 겸사복등 약 4천명의 근위군까지 합하면 조선의 정예군은 2만까지 늘어난다. 북병사 한극함이 거느리고 있던 6진의 궁기병들과 팽배수들까지 합하면 조선은 무려 3만8천여명의 실전경험이 있는 정예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전쟁초기의 탄금대 전투, 평양성전투, 임진강 전투 등에서 전멸해 버려서 전쟁내내 조선왕조는 정예병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두 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짚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21]
아래 편제를 보면 서일본 내의 주요 무장들은 거진 다 참가 했으나 동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하지만 개중에도 참전했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서일본에서 주요무장은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다 히데이에, 큐슈 섬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초소카베 모토치카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그러나 동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에 등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다만,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케카츠[22], 난부 노부나오[23] 등은 이후에 참전한 것으로 나와있다. 다만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본인이 아닌 나오에 카네츠구 휘하 일부 병력만 보낸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24]는 병 때문에 빠졌고 왜란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일본의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가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25]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26]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 신분 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가등청정이라는 한자이름으로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명성이 조선에서는 더 높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처조카이다. 카토 기요마사와는 이미 출발부터 다르다. 실제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나이도 더 많고 힘도 쎄서 시종 시절부터 두목급이였다. 시즈카다케 전투로 처음 다이묘로 임명될 때부터 후쿠시마만 영지 5천석이 주어지고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나머지는 죄다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후쿠시마가 이들 시종출신의 리더로 활약한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었고, 임진왜란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다. 즉 1,2,3,5군 대장은 일본내에서는 네임드 무장이라고 할수 없는 무명의 젊은 장수들이다. 심지어 우키다 히데이에는 가문빨은 상당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 버프로 십대중반의 어린 나이로 8군 대장이자 총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턱이 없는 조선에서는 가토 기요마사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을 대표하는 장군 정도로 착각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종의 외교사절인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네가 히데요시를 죽이고 왕을 하라!" 라고 설득하게 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천황은 만세일계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불가능!" 이라고 하자 사명대사가 "히데요시가 왕이 아닌감? 천황은 또 뭐요?"라고 하는 촌극이 일어났다.
고니시 유키나가
제1군 - 큐슈 서부 세력, 18,700명 (선봉 겸 평안도 침략)[28]
고니시 유키나가(7,000명)
소 요시토시(5,000명)[29]
마쓰라 시게노부(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2,000명)
고토 스미하루(700명)
오오무라 요시아키(1,000명)
제2군 - 큐슈 중부 세력, 22,800명 (선봉 겸 함경도 침략)
가토 기요마사 (10,000명) [30]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사가라 요리후사(800명)
제3군 - 큐슈 동부 세력, 11,000명 (황해도 일대 침략)
구로다 나가마사(6000명)
오토모 요시무네(5,000명)
제4군 - 큐슈 남부 세력, 17,000명 (강원도 일대 침략)
모리 요시나리(2,000명)
시마즈 요시히로(10,000명)
아키즈키 다네나가(1,000명)
이토 스케타카(1,000명)
다카하시 누로(1,000명)
다카하시 모토타네
시마즈 다다토요
제5군 - 시코쿠 세력, 24,700명 (충청도 일대 침략)
후쿠시마 마사노리(5,000명)
토다 카츠타카(4,000명)
쵸소카베 모토치카(3,000명)
이코마 치카마사(5,500명)
하치스카 이에마사(7,200명)
제6군 - 큐슈 북쪽 세력, 15,700명 (전라도 일대 침략)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0,000명)
고바야카와 히데카네(1,500명)
타치바나 무네시게(2,500명)
타카하시 나오츠구(800명)
츠쿠시 히로카도(900명)
제7군 - 주코쿠 서쪽 세력, 30,000명 (경상도 일대 침략, 일종의 후방 예비대, 보급대 성격이 강했다.)
모리 데루모토
모리 히데모토
제8군 - 주코쿠 동쪽 세력, 10,000명(명목상의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우키타 타다이에
제9군 - 간사이 세력, 11,500명
하시바 히데카츠
호소카와 타다오키
수군 9,450명
구키 요시타카(1,500명)
도도 다카토라(2,0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1,500명)
가토 요시아키(1,000명)
구루시마 미치후사(700명)
구와야마 마사하루(1,000명)
도쿠이 미치토시(700명)
스가이 에몬쇼(250명)
호리우치 요지요사(850명)
스기와카 덴사부로(650명)
부교(奉行, 히데요시에 의해 군 전체를 감독하고 비상시에 의견을 조율, 보고하는 군감직을 맡음.)
이시다 미츠나리
부교로 끝난게 아니라 실제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게 행주대첩.
오오타니 요시츠구
마시타 나가모리
가토 미츠야스
마에노 나가야스
기타 참전 인원
구로다 요시타카
히데요시의 명으로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귀국했다.
아사노 요시나가
나카가와 히데마사
미야베 나가후사
난조 모토키요
이나바 사다미치
가메이 고레노리
키노시타 시게카타
사이무라 마사히로
아카시 노리자네
벳쇼 요시하루
가키야 츠네후사
후속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있었다.
일본의 지역을 보면 서쪽부터 큐슈, 시코쿠, 주코쿠, 간사이, 주부,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 지역등 8분할 된다. 그런데 위의 1군~9군의 지역을 보면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만 참전했다. 동부 지역의 다이묘들은 10군~16군 등으로 예비대로 편성되었고, 뒤이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