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드인은 누구이며, 그들이 왜 중요할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플루언서(influencer) 들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들의 행동거지가 유행을 만들어내고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살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한 인플루언서들이 권력이나 권위에만 기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적 연결망, 특별한 지식이나 상품, 혹은 화려한 문화로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 인플루언서는 대륙과 문화를 초월해서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의 통신 기술 속에서 새롭게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플루언서들이 결코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약 2000년 전에도 그러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수적으로 소수이고, 권력도 제한적이었지만 주변 세계의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소그드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공간이 바로 '비단길(Silk Road)'입니다. 물론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다양한 교역로가 있었기 때문에 보다 정확히는 '비단길들(Silk Roads)'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소그디아나(혹은 트란스옥시아나)의 주요 도시
소그드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그들의 고향인 소그디아나(Sogdiana)는 비단길 교역로의 한가운데인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에 위치해있습니다. 그들은 기원전 5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영토로 처음 기록에 등장했습니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을 겪었고, 기원후 4세기부터 8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이 시절 소그디아나는 아시아의 제국들 사이에 위치한 오아시스 마을, 풍족한 경작지, 혹은 특이한 공간의 집합체였습니다.
소그드인은 어쩌면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비단길을 경제적으로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중국과 다른 아시아 지역을 연결하는 상인 집단을 조직하여 막대한 부를 얻었습니다. 소그드인은 기동성, 다국어 구사능력, 상업성, 통역 그리고 숙련된 가공 기술을 살려서 동떨어진 지역들을 연결하고, 물건과 사상을 운반했으면, 국제 교역과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타지키스탄 판지켄트 출토 채색 벽화, 에르미타주 미술관
우즈베키스탄 바라크샤 출토 채색 벽화, 에르미타주 미술관, 7~8세기
이 디지털 전시회는 소그드인과 그 문화를 살펴보고, 현전하는 유물을 통해서 그들이 물질문화에 미친 영향을 알아볼 것입니다. 우리는 소그드인의 황금기였던 기원후 4~8세기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소그드인의 거주지는 중국, 중앙아시아 초원, 몽골 곳곳에 퍼져있었습니다. 소그드인 거주지는 그들이 관리하는 교역와 관개 농업을 통해 부를 누렸고, 그들의 고향인 소그디아나 역시 이 시대에 번성했습니다. 이 시기에 세련되면서도 독특한 도시 문화가 발달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고위층의 저택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벽화는 20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유적지에서 꾸준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옥수스 강(아무다리야 강)에서 장안까지 이어지는 비단길 교역로
소그드인이 미친 영향 중에서도 놀라운 부분은 그것이 정치적/군사적 힘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소그디아나의 정치 구조는 제국이 아니라 독립된 지도자를 가진 여러 소국의 집합체였습니다.
소그드인은 이러한 오아시스 도시에서 벗어나 상인 집단을 조직했고, 다양한 제국의 시대를 살아갔습니다. 물론 소그디아나에도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사 원정에 참여했고, 오아시스 도시는 소그드인의 부를 노리는 초원 유목민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요새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성공이 군사력으로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그드인은 기동성, 유연성, 개성의 미덕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들은 기동성을 통해 동떨어진 지역들을 연결했고, 상품을 팔 수 있는 머나먼 곳의 시장을 찾아가 사업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유연성을 통해 외국의 문화, 언어를 받아들여 가는 곳마다 새로운 기회와 이익을 창출했습니다. 그들 문화 속의 개성이란 특수성과 차별성이었고 이는 상품이 되어 외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이국적인 문화를 선호했던 당 왕조(기원후 618-907)의 문화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곳에서 소그드인의 교역품은 독보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좌) 당나라의 서역인 도용, 중국국가박물관 소장 (우) 호복(胡服)과 호모(胡帽)를 입은 당나라 여성,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업성이라는 측면에서 소그드인은 비단 등 고가의 상품을 매매했습니다. 개중에는 페르가나 계곡의 말, 인도의 보석, 티베트의 사향, 북방 초원의 모피, 당나라에서 '사마르칸트의 황금 복숭아(golden peaches of Samarkand)'라고 불렀던 상품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소그드인들은 숙련된 장인이기도 했기에, 화려한 금속 장신구와 직물을 직접 만들어 초원과 중국에 판매했습니다.
소그드인이 상품만 매매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즐겼던 패션과 예능은 당 왕조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당의 궁정 여인들은 카프탄(Kaftans)을 비롯한 호복(胡服)을 입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복장들은 중앙아시아의 남성의류였지만, 중국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입었습니다.
(좌) 취호왕(酔胡王) 가면, 나라 정창원 소장, 8세기 (우) 소사욱(蘇思勖, ?~745)묘 벽화 속 소그드인 무용수
이러한 외국 의복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외국 음식, 음악, 악기, 무용의 인기와 연결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소그드인의 춤(호무, 胡舞)은 계층을 막론하고 중국 사회에서 사랑받았습니다. 이러한 춤은 지역 여관에서 종종 공연했는데, 이는 소그드인이 중국에서 주점을 운영했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어쩌면 중국과 일본 문화에서 확인되는 '술 취한 소그드인(취호, 酔胡)'이라는 이미지가 여기서 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소그드어는 비단길에서 국제어로 사용되었고, 많은 소그드인이 상거래와 통역업에 종사하며 다양한 언어를 배웠습니다. 또한 그들은 외교관 혹은 경전과 사상의 전달자로도 활약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몇몇 초기 불교 경전 번역본은 소그드인의 것이었습니다. 소그디아나와 그들의 대중국 교역로는 불교 확산에 있어서 고속도로 역할을 했습니다. 기독교와 마니교 역시 부분적으로 소그드인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좌) 날개 달린 낙타 무늬 물병,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7~8세기 (우) 신화적 장면을 조각한 목판,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이 밖에도 섬세한 비단 직물, 금은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공예품, 화려하게 조각된 목제 예술품과 점토 모형들이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소그드인의 물질문화를 보다 자세하게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소그드인의 예술은 다양성을 가지면서 동시 공통된 주제로 묶이기도 했습니다. 주로 사냥, 연회, 예능과 같은 사회적활동을 강렬하게 묘사하고, 추가적으로 주변 지역의 문화 요소를 녹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소그드인이 비단길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랜 시간 역사 속에서 잊혀 있었습니다. 기원후 7~8세기 이슬람 세력의 동진으로 소그디아나의 지역 사회는 붕괴했고, 소그드인들이 점차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그들은 이슬람 제국에 흡수되었습니다. 한편 당 왕조에서는 기원후 755년 소그드-투르크계 장군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진압 과정에서 소그드인 거주지가 감소했고 그들은 의심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 내의 소그드인들은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고, 몇 세대 만에 소그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좌) 소그드어로 쓴 편지. 영국의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이 1907년 발견했다. (우) 아우렐 스타인이 촬영한 막고굴 16굴
소그드인이 소멸하면서 그들의 언어, 역사 기록, 건축물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19~20세기 고고학자들이 유적지를 발굴할 때까지 잊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조사 과정에서 소그드인의 화려한 물질문화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와 여러 문서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와 같이 흩어진 파편들은 통해서 소그드인의 역사와 물질문화를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그드인의 영향력은 비교적 최근까지 저평가 받아왔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소그드인이 역사 기록에 있어서 비교적 적게 활약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 중 대부분이 왕이나 장군,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상인, 기술공, 예능인, 농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비록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뿐 소그드인이 아시아 문화에 미친 영향력이 강렬했음에도 저평가 받아왔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소그드 사회가 단독 정치체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지역에 묶여 있지 않았음에도 오늘날의 국가 중 그 누구도 그들을 조상으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 학자들이 소그드인과 같은 방랑자보다는 국사 편찬에 몰두했기 때문에 그들은 졸지에 노숙자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이러한 흐름은 최근 30년 동안 크게 변화했습니다. 학자들이 과거의 지배층 중심의 역사보다는 오늘날과 같이 사회 문화적으로 연결된 세계사에 보다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기동성'과 '잡종성(hybridity)'이라는 분석 방식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학계의 관심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즉 국제 정세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 확립과 유동성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 시대 말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압 벽화 디지털 복원도
이러한 관점에서 소그드인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군사력이나 권력보다는 다국어 구사 능력과 높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동하며 번성했고, 문화적 개방성과 평화로운 교역과 농업에 힘썼던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그드인은 행동하는 세계주의의 성공 사례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과장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소그드인이 군사 원정을 꺼려 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한 그들 역시 확고한 계층 사회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평등과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소그드인은 노예 거래나 매춘업과 같은 비단길의 어두운 면에도 발을 담갔습니다. 소그드인은 결코 21세기 자유 민주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유물들은 소그드인의 삶과 문화의 긍정적인 면이나 매혹적인 부분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디지털 전시회는 전 세계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수년의 작업 끝에 만들어낸 것입니다. 연구 대상인 소그드인의 삶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었던 만큼 다양한 기관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미국 프리어 미술관, 아서 M. 새클러 갤러리, 에르미타주 미술관, 바드 대학원(Bard Graduate Center), 뉴욕 대학교 XE: Program in Experimental Humanities and Social Engagement와 그밖에 고대사 연구 기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연구팀은 예술, 음악, 연회, 종교, 장례풍습 등 소그드 문화를 다양하게 조명하고 오늘날까지 전하는 그들의 물질문화를 알아볼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소그드 미술, 문화 분야의 전문가들을 소집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물들을 촬영했으며, 3D 모델들을 새롭게 제작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소그드 유물을 보다 깊이 있게 알아보고, 상호작용 지도로 비단길을 여행할 것이며, 학자들로부터 최신 연구성과를 들음으로써 아마도 지금까지 당신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중요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