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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전인대 제11기 6중 총회에서 호요방 총서기가 주석으로, 화국봉 주석이 부주석으로, 등소평이 당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
← 북경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회 총회 모습. 의장단석에 앉은 중국수뇌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당주석에으로 승격된 호요방
1976년 4월 7일 4인방에 의해 세번째로 실각했다 4인방 제거후 1977년 7월 19일 다시 국방상 섭검영의 도움으로 세번째 부활에 성공한 등소평이 1981년 6월 29일 전인대 제11기 6중 총회에서 아직 파워게임에 미숙한 모택동 후계자 화국봉을 실각시키고, 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등소평은 ‘포스트 毛의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의 개방-실용노선을 주도함으로써 ‘모택동 시대’와 결별하는 길을 걸었다. 6중 총회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전면 부정하는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기도 했다. 이 역사결의 7항에서는 모택동의 무오류성도 부정되었다./조선
[2003년] 캐서린 헵번 사망
← 1933년 출연작 `크리스토퍼 스트롱`에서 열혈 여자 비행사로 등장한 캐서린 햅번
2003년 6월 29일, ‘할리우드의 전설’이 숨을 거뒀다. 60년 영화 이력 동안 네 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캐서린 헵번이 파킨슨병을 포함한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다 이날 편안히 눈을 감은 것이다.
헵번은 1930~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연기파 여배우’의 대명사였다. 또렷한 광대뼈, 적갈색 머리, 상류층 억양 등이 특징인 그녀는 강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 헵번은 ‘모닝 글로리’(1933)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 ‘겨울의 사자’(1968) ‘황금연못’(1981) 등으로 네 차례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 모두 12차례 후보로 지명되는 진기록도 남겼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의 전설’이라는 별명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동시대 여성들은 그녀를 역할 모델로 삼을 정도였고, 1985년 한 여성잡지는 헵번을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뽑기도 했다.
1907년 5월 코네티컷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여성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볼티모어의 증권사에서 일하다 1928년 뉴욕에서 ‘요즘 나날’이라는 연극으로 데뷔했다. 그해 사교계 인사 러들로 오그덴과 결혼한 헵번은 6년 만에 이혼한 후 “결혼은 사랑과 명예를 갉아먹는 끔찍한 일”이라며 “결혼을 믿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 믿음대로 그녀는 이후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9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26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헵번은 ‘미국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바지를 입힌 여배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배우’(1999년 미국영화연구소(AFI))등에 선정되기도 했다./조선
[2002년] 북한 해군, 서해안에서 무력도발. 북한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아군 5명 전사, 고속정 침몰
←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 당시 북한 경비정 PCF684호(215t)가 우리 해군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채 또다른 북한 경비정에 의해 황해도 등산곶 쪽으로 예인되고 있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가 월드컵 축제로 들떠있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쯤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측 경비정의 기습 포격으로 남북 해군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27명이 탑승했던 우리 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했으며, 이 고속정을 지휘하던 윤영하(28) 대위 등 우리 해군 5명이 전사했고, 19명이 부상당했다. 해군 고속정으로부터 집중 대응사격을 받은 북한측의 발포 경비정에서도 화염이 발생, 또 다른 경비정에 의해 예인됐다. 군 당국은 50명승선 규모인 이 경비정에 탔던 북한 병사들 가운데 적어도 10명 이상 사망하고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날 교전으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협력 분위기를 보였던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냈다. 남북 해군의 교전은 1999년 6월의 ‘연평해전’ 이후 3년 만의 일이었다. 국방부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오전 11시, 전 군에 경계강화 지시를 내렸다. 유엔사령부는 북한측에 경위 설명을 요구하기 위한 장성급 회담을 이날 오후 6시에 갖자고 제의했으나 북측의 불응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모두 11차례에 걸쳐 군사적 도발을 했으며, NLL 침범은 2002년 들어 14차례, 6월달 만 6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조선
[2001년] 국세청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
← 2001년 6월 29일, 손영래 서울지방국세청장이 국세청 12층 회의실에서 `조선일보 등 6개 신문사를 검찰에 고발한다`는 내용의 발표를 하고 있다.
장장 142일 간에 걸쳐 23개 중앙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로 2001년 한 해 내내 여야간의 정쟁 심화와 국론 분열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국민들도 `내편 네편`으로 갈라졌고, 언론과 지식인들도 이분법 잣대로 서로를 부정했다.
`엄정한 징세권 사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정부의 주장에 일부 마이너 신문과 정부소유의 방송, 시민단체들이 가세해 해방직후 이 사회를 지배했던 좌우갈등과 흑백논리가 재연됐다. 2001년 6월 29일 국세청이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매출액이 중소기업 수준에 불과한 언론사에 총 1,000명이 넘는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 조사한 결과가 철저하게 비판언론사를 표적으로 삼았음이 확인되자, 야당과 조선-동아일보 등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사들은 `비판언론 길들이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비판적인 신문사에는 최고 864억원이라는 추징세액을 집중 부과하고, 조선-동아-국민일보 대주주(사주)는 검찰에 고발, 구속시킨 데 반해, 매출액이 신문사에 비해 3∼4배나 많은 KBS MBC 등 방송사에 대해서는 "조세범칙 혐의가 없다"며 검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이 형평성을 잃은 단적인 예로 지적됐다. 특히 국내 신문사들이 지난 10년간 낸 세금의 총액보다 많은 2936억원의 법인세 등을 납부한 조선일보가 추징세액이 가장 많고, 1988년 창간 이후 12년 동안 법인세를 단 한 번도 낸 일이 없는 한겨레신문에는 11억원 만을 부과해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언론사 전체에 5056억원의 세금을 추징하고, 사주를 고발, 구속케 한 국세청 발표에 한나라당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려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언론 상황을 조성하며,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고 평가했다./조선
[2001년] 해군-해병대 여성 장교 국내 첫 탄생
← 처음 선발된 해군, 해병대 여성 예비 장교들이 경남 옥포만 거북선 앞에서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감청색 제복이 해병대이다.
해군 및 해병대에 창설 이래 처음으로 여군 장교들이 생겼다. 2001년 6월 29일 거행된 제96기 해군사관후보생과 제87기 해병간부후보생 수료 및 임관식에서 해군 13명, 해병대 7명 등 모두 20명의 여군장교(소위)가 처음 배출됐다.
2001년 3월 해군 32대1, 해병 17대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이들은 이후 14주간의 혹독한 군사훈련을 단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끝마쳤다. 4시간 동안 연병장 50바퀴를 도는 명예구보도 해냈다. 이중에는 해군의 경우 함정을 타는 항해병과가 7명이며, 해병대의 경우 병사들과 함께 발로 뛰어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보병병과가 4명이다./조선
[1997년] 마이크 타이슨, 경기 도중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어 실격패
← 1997년 6월 29일 WBA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오른쪽)의 귀를 물어뜯고 있는 마이크 타이슨
‘세기의 대결’로 관심을 모은 1997년 6월 29일(한국시각) 에반더 홀리필드(챔피언)와 마이크 타이슨(도전자)의 WBA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타이슨은 3회 홀리필드의 귀를 두차례나 물어뜯는 복싱사상 초유의 반칙 끝에 실격패했다. 타이슨은 경기가 풀리지 않자 핵주먹 대신 강력한 이빨을 사용했다.
3라운드 40여 초를 남긴 시점. 초반 클린치 작전으로 애를 먹던 타이슨은 홀리필드가 팔을 붙들고 늘어지자 이빨로 오른쪽 귀 윗부분을 덥석 물어뜯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중상이었다. 타이슨은 3회전 때 마우스 피스를 물고 있었지만 뱉어버린 뒤 일을 저질렀다. 그리곤 타이슨은 입을 우물거리다 귓조각을 뱉어 내 버렸다. 타이슨은 고통 때문에 펄쩍펄쩍 뛰는 홀리필드를 쫓아와 한방 먹이려는 태세였지만 경기는 4분 동안 중단됐다.
주심 밀스 레인은 실격패를 선언하려 했다. 그러나 링 닥터의 판단은 경기에 지장이 없다는 것. 주심은 타이슨에게 경고한 뒤 게임을 속행했지만 이성을 잃은 타이슨은 3라운드 종료 직전 다시 상대의 왼쪽 귀를 물었다. 먼저번처럼 살점을 떼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실격패 당하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조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사망 5백1명, 부상자 9백30명을 기록하는 등 해방 이후 단일사고로는 최대규모였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57분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 5층 건물 2개동 북쪽(정문에서 왼쪽)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501명이 사망하고 939명이 부상했다.
단일사고로는 건국이래 최대의 사망자를 낸 사고로 기록됐다. 사고당시 백화점안에는 고객 1천여명과 직원 5백~6백명이 있었다. 백화점 건물은 폭격을 맞은 듯 폭삭 가라앉아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으며 수십명이 피투성이가 돼 밖으로 튀어 나오는 등 현장주변은 아비규환을 이뤘다. 사고현장은 콘크리트 잔해와 철근 구조물이 수북이 쌓였고 파편이 인근 법원건물에까지 튀었다. 삼풍백화점 건물은 며칠전부터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이날 오전 일찍부터 4층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삼풍백화점 사고는 부실설계,부실시공에 의한 품질사고로서 사고원인이 매우 복합적이었다. 설계와 시공만 부실한 것이 아니라 유지관리의 부실, 기술을 무시한 건축주의 독선, 부정부패와 뇌물관행을 기본으로 한 건설업계의 비리 등 총체적인 부실의 결과였다./조선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로 선출
←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사민당 당수)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위원장이 1994년 6월 29일 신임 일본총리로 선출됐다. 자민당과 신당측의 지원을 받은 무라야마 위원장은 이날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행해진 총리선출 투표에서 연립여당측의 추대를 받은 뒤 자민당을 탈당, 출마한 가이후 전총리를 누르고 하타 후임으로 총리에 선임됐다. 일본총리에 사회당 의원이 선출된 것은 지난 1947년의 가타야마 내각 이후 처음이었다.
무라야마 신임 총리는 1924년 오이타현 출생으로 파란만장의 지방 출신 야당 정치인이다. 명치대 전문부 정경과 졸업 이후 오이타 시의회 2기, 현의회 3기, 사회당 오이타현 본부위원장 등 중앙보다는 고향인 오이타현에서 뼈가 굵어온 노야당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성격은 온화한 편이나 정치와 노선에 관해서는 결단-실행력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또 사람을 가리지 않는 무던한 성격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서민파 대중정치인 타입의 한 사람이다. 무라야마 총리는 1996년 1월 5일 퇴임했고 자민당 총재인 하시모토 류타로가 그 뒤를 이었다./조선
[1987년]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선언 발표
←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을 포함한 8개항의 시국수습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개헌논의 금지 및 제5공화국 헌법하에서 차기 대통령을 뽑도록 한다는 4.13호헌조치 이후 이에 대한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 집회 및 시위가 전국민적 차원으로 확산되면서,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던 노태우 의원이 1987년 6월 29일 전격적으로 8개항의 시국수습대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여야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 2.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도록 대통령선거법 개정 3.김대중씨를 포함한 시국사범에 대해 광범한 사면,복권 실시 4.구속적부심 등 인권보장 조항의 강화 및 기본권 신장 명시 5.언론자유 창달을 위한 언론관계법 개정 및 언론의 자율성 보장 6.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위한 지방 교육자치제의 실시 7.정당활동의 자유보장 및 육성 8.맑고 밝은 사회건설을 위한 과감한 사회정화조치 및 사회비리척결 등이었다.
6.29선언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개인의 견해로 전격발표되었으나 7월1일 전두환 대통령의 ‘시국수습에 관한 대통령 특별담화’로 정부와 민정당의 공식입장으로 확정됐다./조선
[1986년] 86년 멕시코 월드컵서 ‘축구의 신’ 마라도나 탄생
← 공중으로 뛰어올라 슛을 쏘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 마라도나(오른쪽)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에 이어 또 한 명 ‘축구의 신’이 탄생했다. 6월 22일 잉글랜드와의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 `신`으로 거듭났다.
그는 잉글랜드 골키퍼와 1대1 상황에서 공중에 뜬 공을 손으로 쳐 넣었다. 주심은 보지 못했고, 경기 후 마라도나는 ‘그것은 신의 손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가 두 번째로 뽑아낸 골은 완벽한 개인기로 빚은 신기(神技)였다. 마라도나는 센터라인에서부터 잉글랜드 수비 5명을 제치며 드리블한 뒤 득점하고 포효했다. 마라도나는 당시 서독과의 결승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아르헨티나에 월드컵을 안겼다. 숱한 화제 속에 끝난 멕시코 월드컵은 지금도 전세계 축구팬에게 ‘마라도나의 월드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경기장에서는 신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천재였지만, 사생활에선 끊임없이 광기를 뿜어낸 ‘문제인간’이었다. 아르헨티나 역대 최연소인 16세에 국가대표로 뽑혔고, 1982년부터 1994년까지 네 차례 월드컵에 출전해, 1986년 우승, 1990년 준우승했다. 마라도나는 국가대표 외에도 그가 소속했던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와 이탈리아의 나폴리팀에 무수한 우승트로피를 헌납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진출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기자들에게 공기총을 쏘아대고, 툭하면 여자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마라도나는 1994년 미국월드컵 조별 리그 도중 도핑 테스트에서 흥분제를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쫓겨났다. 마라도나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고, 악동과 축구의 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마라도나의 선수생활도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조선
[1971년] 최초로 과학적인 용도의 유인정류장을 만든 소련의 우주비행사 도브로볼스키 사망
1971년 6월 6일 발사되어 24시간의 우주비행과 궤도 스테이션 `살류트`와의 도킹을 성공시킨 소련 유인우주선 소유즈 11호가 지구귀환을 위해 대기권에 돌입, 낙하산으로 예정지점에 연착륙을 시도했지만 3명의 비행사는 좌석에 앉은 채로 사망했다.
세 비행사의 사망원인은 명확치 않지만 계기류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우주선내에 화재 흔적도 없었기 때문에 우주선내의 기압이 어떤 이유로 해서 갑자기 저하되어 세 비행사의 혈액이 비등해 절명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 사고는 획기적인 유인우주 정거장의 실험을 성공시켰고 게다가 24일에 가까운 장시간기록도 수립했지만 후의 비극적인 사고로 막을 내렸다./조선
[1956년] 마릴린 먼로, 극작가 아더 밀러와 결혼
← 미국 신문은 이 둘의 결혼을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미국의 위대한 육체의 결혼’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가 `세일즈맨의 죽음` 극작가로 알려진 아더 밀러와 뉴욕에서 1956년 6월 29일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신문은 이 결혼을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미국의 위대한 육체의 결혼`이라고 표현했다. 신혼여행을 위해 여권을 신청했으나 공산주의운동을 이유로 신청이 기각된 밀러가 국무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이어서 이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못하는 먼로는 밀러에게서 지성의 경외로움과 아버지의 정을 느끼며 유태교의 밀러를 위해 유태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었던 그녀는 매스컴의 집요한 추적, 결혼한 아서 밀러에 대한 열등감, 우수한 연기자가 되려는 강박 관념 등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다 1962년 8월5일 자살해 또 한번 전 미국을 놀라게 했다./조선
[1950년] 학도의용군 참전
← 인천상륙작전중인 한미연합 해병대원들
1950년 6월 29일 학도병이 6·25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직후 서울 시내 각급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학생들이 모여 '비상학도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교복을 입은 채 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아 6월 29일 한강 방어선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학생들은 대전에서 대한학도의용대를 새로 조직하고 실전에 적극 참여했다. 학도의용군의 활약은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요충인 포항에서의 공방전에서 특히 돋보였다. 같은 해 8월초 학도의용군 1,500여 명은 국군 유격부대에 편입되었고, 국제연합(UN)군에 소속된 700여 명은 인천상륙작전에 UN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38°선 이북 수복지역의 학생들은 학도호국단·학도의용대·대한청년단 등의 이름으로 학도의용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1951년초부터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이승만 대통령과 문교부는 학도병의 복교를 촉구했다. 6·25전쟁 중 실전에 참여한 학도병은 모두 2만 7,700여 명, 선무활동에 종사한 학도병은 20만 명에 달했다./브리태니커
[1944년] 만해 한용운 서거
← 만해 한용운의 초상화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독립운동에 힘썼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44년 6월 29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풍으로 눈을 감았다.
본명이 정옥(貞玉)인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법호인 만해(萬海)와 법명인 용운(龍雲)으로 더 친숙하다. 충청남도 홍성 출생인 그는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는 등 일찍이 글과 독립운동에 눈을 뜬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1896년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온 그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러던 1910년 한ㆍ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ㆍ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919년 3ㆍ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6년 희대의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으며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조선일보가 중심이 된 일제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발기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한편, 지난해 8월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 마다 찾았던 백담사 소재 강원도 인제에 ‘백담사 만해마을’이 준공돼 운영되고 있다. 조선일보사는 지난해 12월 18일 이곳에 ‘조선불교유신론’ 1913년 초판본, ‘불교대전’ 1914년 초판본 등 만해의 저서 원본들과 관련된 희귀자료 115점을 전달한 바 있다./조선
[1903년] 문학평론가·소설가·시인 김기진(金基鎭, 김팔봉) 출생
← 김기진
1903. 6. 29 충북 청원~1985. 5. 8 서울.
본관은 안동. 필명은 팔봉(八峰)·팔봉산인·동초·여덟뫼.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 문학의 이론을 내세웠으며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함경도 군수였던 아버지 홍규(鴻圭)와 어머니 김현수(金現洙) 사이의 4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형 복진(復鎭)과 함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 뒤, 형과는 친구처럼 붙어다녔다. 같은 해 아버지가 춘천군수로 옮김에 따라 가족이 서울 소격동으로 이사했다. 8세 때 다시 아버지를 따라 황간으로 옮겨가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형이 친구들에게 구타당한 사건으로 함께 자퇴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영동군수로 옮기자 다시 영동으로 이사가 영동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갔다.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박영희와 사귀게 되었다.
1919년 3학년 학기말시험이 끝나고 탑골공원에 나가 3·1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신문을 인쇄해서 돌리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배재고보에서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1920년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채 박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1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에 입학, 학과 공부보다는 아소 히사시[麻生久]로부터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러시아 문학에 대해 배웠다. 1922년 박승희·이서구·김복진 등과 토월회를 만들고, 이듬해 귀국하여 토월회 귀국공연을 준비했으나, 9월 토월회 2차 공연을 끝으로 탈퇴했다. 그뒤 박영희·안석주·이익상·김복진 등과 '파스큘라'를 만들어 '인생을 위한 예술'을 내세우는 문예운동을 벌였다. 1924년 매일신보사에 취직, 1925년 시대일보사로 옮겼다. 그해 8월 일본에 있을 때 존경했던 나카노 니노스케[中西伊之助]가 우리나라에 오자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합쳐 'KAPF'를 만들었다. 1926년 박영희와 내용·형식논쟁을 벌였다. 이듬해 논쟁이 끝난 후 KAPF의 주도권은 박영희에게 넘어가고 곧이어 임화·윤기정 등의 소장파가 KAPF를 장악했다. 1928년 함경도 이원에 정어리공장을 차렸다가 실패했는데, 이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장편 〈해조음 海潮音〉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1929년 임화와 예술대중화논쟁을 벌이면서 평론을 많이 썼다.
1930년 중외일보·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냈고, 1931년 KAPF 제1차 검거사건 때 종로경찰서에서 자술서를 쓰고 10일 만에 풀려났다. 1934년 금광사업에 실패한 뒤 형과 함께 인쇄소 애지사(愛智社)를 세워 〈청년조선〉 창간호를 펴냈으나, 러시아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혐의로 형제가 동대문경찰서에서 보름 동안 갇혀 지냈다. KAPF 제2차 검거사건 때는 형과 함께 전북경찰서에 70여 일 구금되었다. 1945년 애지사를 다시 세워 인쇄·출판에만 전념했다. 6·25전쟁 때 애지사 인쇄공들이 고발해 인민재판에서 즉결처분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뒤 대구로 피난해 종군작가로 입대했으며, 1953년까지 〈전선문학〉에 글을 발표했다. 1954~57년 수필과 문단회고의 글을 주로 썼다. 1960년 〈경향신문〉 주필, 1961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을 지냈다./브리태니커
[1900년] 생 텍쥐페리(Antoine(-Marie-Roger) de Saint-Exupéry)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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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6월 29일 태어남 / 1944년 7월 31일 죽음
생 텍쥐페리 "대지는 우리 자신에 관해 온갖 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대지와 싸워나갈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앙투안 드 생 텍쥐페리
생 텍쥐페리는 프랑스의 작가이며 비행사이다. 1921년 항공대에 복무하면서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26년 라테코에르사에 들어가 아프리카 북서부, 남대서양 및 남아메리카를 통과하는 항공우편항로를 개설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남방 우편기 Courrier Sud>(1929)·<야간 비행 Vol de nuit>(1931) 등의 작품들을 썼다. 1935년 리비아 사막에서의 추락, 1938년 과테말라 비행장에서의 추락 등으로 중상을 당하기도 했다. 비행할 때 겪었던 모험들을 기록한 <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s>(1939)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찰기 조종사로 입대했고, 프랑스가 함락되자 잠시 미국에 피신했다가, 1943년 북아프리카 공군에 들어가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격추당했다. 그는 일체의 문학적 기교를 초월해 순수하고 고결한 시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근원적 진실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썼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1943)에서는 인간 사회에서 정신적인 연대감을 이루려는 자신의 이상을 꿈의 세계를 무대로 해 현실과 연결시키고자 했다./브리태니커
[1883년]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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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독립전쟁은 일제하 무장투쟁사의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꼽힌다. 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홍범도와 김좌진은 훗날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봉오동과 청산리의 승리는 한두명의 영웅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항일투사,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해 일궈낸 대승리였다. 우리가 ‘항일 영웅’ 김좌진과 홍범도에 가린 독립군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좌진과 홍범도에 가려진 대표적 인물은 간도 국민회군 사령관 안무(安武:1883~1924)다. 본명은 안병호(安秉鎬)로 함북 종성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뒤 1900년 대한제국 군대 진위대(鎭衛隊)에 들어가 1907년 군대해산 때까지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1910년 일제가 나라를 병탄하자 안무는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다. 간도에 망명해서 화룡현에 정착, 학교를 세우고 교육운동을 벌인다.
안무가 독립군 부대에 투신하게 된 것은 대한국민회에 가입하면서부터다. 3·1운동 직후 간도에서는 종래에 결성됐던 한인자치기관 간민회를 기초로 대한국민회가 조직된다. 당시 북간도 전역에 지회를 둘 만큼 방대한 조직을 거느렸던 대한국민회는 직할로 ‘국민회군’(일명 대한국민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에 안무를 임명한다. 국민회군은 독립군 부대이면서 대한국민회의 조직을 보호하는 경찰군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국민회군의 대원은 500명 정도였다. 1920년 5월 국민회군은 대한국민회의 독립군 통합정책에 따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북로독군부 등과 연합한다. 당시 연합부대의 명칭은 대한북로독군부. 독군부 사령관은 최진동, 부관은 안무, 연대장은 홍범도가 맡았다.
독립군들은 때로는 개별 독립군 단위로, 때로는 연합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은 8차례에 걸쳐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습격했으며, 홍범도 역시 수십차례 일본 국경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봉오동전투는 안무와 홍범도 연합군이 치러낸 가장 유명한 전투. 1920년 6월7일 대한북로독군부 연합군은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두만강을 넘은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 150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가 홍범도부대 단독으로 치른 전투가 아닌 것처럼, 그해 10월21일부터 6일간 벌어진 청산리 전투도 김좌진부대만의 전투는 아니었다. 청산리 대첩은 간도 일대 독립군들이 일군 승리였다. 특히 홍범도와 안무부대는 봉오동 및 청산리 전투 모두에 참가해 큰 공훈을 세웠다. 청산리에서는 일본군 1,2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산리 전투 후 독립군 부대들은 사실상 해체된 채 일본군 토벌작전을 피해 중·소 국경지대로 옮겨간다. 김좌진은 흑룡강 넘어 영안현으로 옮겼고, 홍범도와 안무는 러시아로 건너갔다. 그러나 안무는 김좌진과 홍범도가 영안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독립군 재건을 위해 1924년 만주 간도에 잠입한다. 그러나 용정시 모아산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돼 기습 총격을 받고 부상당해 용정자혜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하다 숨을 거둔다. 당시 나이 41세였다.
안무의 국민회군 활동기간은 2년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안무는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숨은 영웅이었다. 또 모든 독립군들이 일본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북만주로 떠났을 때 그는 간도로 돌아와 독립군 재건을 꿈꾸다 일본군의 흉탄에 숨을 거뒀다.
안무의 비통한 소식이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간도의 한인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하소설 ‘두만강’에 안무의 죽음을 상세히 기록한 작가 이기영은 소설에 당시의 조시(弔詩)를 소개했다. ‘하늘에 사무친 유한은 구름빛을 시꺼멓게 물들이고/땅 위에 거꾸러진 충혼은 피꽃이 붉게 피었더라.’(遺恨充天雲色黑 忠魂塗地血花紅).
안무가 희생된 후 그의 시신은 용정 일본영사관 지하실에 6일간 보관됐다 용정 시내 영국덕이에 묻혔다고 한다. 장례식 때 유혈폭동을 우려한 일본 경찰이 취한 선제 조치였다. 그만큼 안무는 일본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만주 무장항일투쟁을 연구하고 있는 고구려연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은 “안무가 부각되지 못한 것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2인자였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그는 20년대 간도지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독립군을 이끌고 일관성 있게 무장투쟁을 벌인 항일운동가”라고 평가했다.
그밖에
200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1995년) 10주년
2004년 우초 방일영 선생 송덕비 제막
2004년 황온순 원불교 종사 열반
2002년 한국 월드컵 3-4위전서 터키에 2대3 패배. 아쉬운 4위 달성
2000년 이한동 제33대 국무총리 취임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 대동은행-동남은행-동화은행-경기은행-충청은행 등 5개 퇴출은행을 확정
1995년 미국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 러시아우주정거장 미르에 도킹 성공
1994년 황낙주 국회의장 피선
1993년 육군 상록수부대, 유엔평화유지군(PKO)으로 소말리아 파병
1992년 박준규 국회의장 피선
1986년 멕시코월드컵대회에서 아르헨티나가 서독을 3대2로 이겨 우승(MVP는 마라도나)
1984년 정래혁씨 의원직 사퇴
1981년 전두환 대통령, 말레이시아 도착
1980년 북한주민 1명 이영우 월남 귀순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1977년 밴스 미국 국무장관, 남북한 미국 중국 등 당사국회담 개최 촉구
1970년 서울서 제37회 세계 작가대회 개최
1962년 최고회의 5개항 언론정책을 발표
1959년 미국, 폴라리스 유도탄 발사 성공
1958년 주한 유엔군경제조정관실(oec), 미국 원조단(usom)으로 개편
1951년 트루먼, 리자웨이에게 한국휴전교섭 지령
1950년 극작가 함세덕 사망
1950년 맥아더원수 한국전선 시찰
1949년 주한미군 철수완료
1946년 민족통일총본부 구성(총재 이승만)
1938년 전국에 방공훈련 실시
1913년 제2차 발칸전쟁 발발
1912년 제5회 스톡홀름올림픽 개막
1911년 국유미간지이용법 공포
1906년 이민보호법 반포
1906년 광업령 공포
1903년 카프(KAPF)의 실질적 지도자인 팔봉 김기진 출생
1895년 영국 생물학자 T.H.헉슬리 사망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원받은 청군(淸軍), 인천 상륙
1873년 청나라 동치제(同治帝), 처음으로 외국 사신 인견(引見)
1868년 헤일 망원경(1948)을 개발한 미국의 천문학자 헤일 출생
1861년 영국의 여류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사망
1849년 러시아 제국 헌법에따라 임명된 초대 총리 비테 출생
1762년 에카테리나 2세 러시아 황제 즉위
1593년 임진왜란에 진주성 함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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