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종말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황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제는 세상일에서 눈을 돌려 자기 영혼을 돌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누구나 딱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야 하고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은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데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 말씀을 온전히 따라 살기 힘든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은 우리가 왜 주님 말씀을 온전히 따라 살지 못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대신 할까 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는 감정적 존재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사람은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존재인지라 그 마음이 전쟁터와도 같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어떤 것들은 내 마음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불안하고 황량한 폐허 같은 날들이 적지 않은지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기도할 때는 괜찮다가 밖에만 나가면 금방 마음이 불편한 것은
성당에서 기도할 때는 건드리는 사람이 없는데
밖에 나오면 내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이 많아서 불편한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 감정적 동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괜찮아진다, 어른이 되면 나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허나 어릴 때는 어린 대로, 나이 들어서는 나이 드는 대로 속이 뒤집히는 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른이 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하는 말은 무지에서 비롯된 말인 것입니다.
두 번째 변명, 우리는 약간 맛이 간 사람들을 보면 미친놈이니 뭐니 욕을 해댑니다.
그리고 그러는 자기는 무척이나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평균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일 뿐이고,
사람의 자아는 정신병자의 자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즉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엄마개구리 말 안 듣는 청개구리처럼
꼴통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변명,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욕구와 갈등들이 뒤엉킨 실타래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평상심을 가지고 기도에 집중하거나 명상에 몰입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뒤엉킨 실 뭉치 같은 한의 응어리가 풀려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실의 끝이 아주 작고 가는데다가
실 뭉치에 파묻혀서 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급한 마음으로 실 끝을 당기면 더 엉켜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 인생을 끝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장탄식하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불안증까지 생겨서
주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버겁고 힘겹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 변명, 사람은 누구나 개과천선하고 새롭게 변화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에 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욕구는 마치 힘이 비슷한 씨름선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듯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어서
결국 오도 가도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새롭게 살고 싶어 하는데도 불구하고
변화나 성장을 하기가 참으로 어렵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실행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다섯 번째 변명은 우리가 우리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주님 말씀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나누는데
이 무의식이란 것은 깊고 깊은 바다 속과 같아서 그 속을 아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의식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문제가 큽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이나 행동, 생각 등등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의해서 가장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쓰나미가 덮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발생한 쓰나미에 대해 깊이 이해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무의식 안에서도 수많은 흐름들이 오고가는데
우리는 그것을 끝까지 들여다보기가 거의 불가능하기에
속절없이 ‘심리적 쓰나미’에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한 삶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에
주님 말씀 따라 살지 못한다고 심하게 자신을 자책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 마지막 날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심판하시는데
처음에는 “그게 무슨 죄냐. 별것 아니니 잊어 버리거라” 하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다독이시던 분이
너무나 많은 사람을 심판하시면서 지치시는 바람에
시간이 갈수록 짜증을 내시고 별것 아닌 죄를 지었는데도 화를 내시면서
지옥행 티켓을 남발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다 못한 베드로사도가 나서서 건의하였습니다.
“주님, 그렇게 일하시다가 자칫 병에 걸리실 터이니 간단하게 하시지요.”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사도에게 심판권을 주시면서 “그럼 니가 해봐라” 하셨습니다.
명을 받은 베드로사도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십계명 중 일 계명을 어긴 사람들.
하나이신 천주를 모시지 않고 점을 쳤거나 굿을 했거나 한 사람들은 모두 왼편에 서거라.” 하였더니
십 분의 일되는 사람들이 왼쪽에 섰습니다.
다시 베드로사도가 “이번에는 주일미사 빠졌거나 신자답게 살지 못한 사람들은 왼쪽에 서라.”
그러자 다시 십분의 일이 왼쪽에 섰습니다.
“이번에는 거짓말을 했거나 누굴 조금이라도 미워한 적 있는 사람들은 왼쪽으로 가라.”
또 십분의 일...
“이번에는 육 계명. 남의 배우자를 탐했거나 야동을 본 사람들은 모두 왼쪽으로 가거라.” 하였더니
갑자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왼편으로 가고 오른쪽에는 수도자 한 사람만 달랑 남았습니다.
이 수도자는 부모가 아기를 수도원에 버리고 가서 수도자들이 키운 사람인지라
평생 수도원 밖에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그 수도자 한 사람만 천당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자기만이 선택받았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죽을 지경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수도자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지요.
어쨌건 지옥에 간 사람들은 거기도 사람 사는 세상인지라
PC방도 만들고 술집도 만들고 지옥불로 바비큐도 해먹으면서 세상에서 살던 대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지옥에 사는 사람 중에서 천당에 가고 싶은 사람을 선착순으로 한 명 뽑는다는 공지였습니다.
그 큰 천당에 사람이라곤 수도자 한 명뿐인지라 말벗 하나 두려고 하신 처방인데,
공지가 붙자마자 단거리선수출신인 사람이 번개같이 달려가서 천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들의 뒤늦은 발걸음을 원망하면서 밤새 폭음하였고...)
그런데 한 달쯤 지난 후에 그 사람이 얼굴이 핼쑥해져서 제 발로 지옥으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궁금해서 그 사람의 주위를 에워싸고 질문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천당이 살만 하더냐 어떻더냐? 묻자 대답하길 천당의 첫날은 너무 좋았다는 것입니다.
넓고 아름다운 방에서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고.
그런데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열흘째가 되자 돌아버리겠더랍니다.
하루 다섯 시간 기도하는 것은 둘째 치고 도대체 술집이나 PC방 같은 건 하나도 없고
하다못해 혼자 재수 패라도 떼어보려고 하는데 그 흔해빠진 화투짝조차 하나 없고
있는 거라곤 성경책과 기도서뿐이고 거리에 보이는 건 성당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도자는 아예 문화가 달라서 같이 놀기도 어렵고
결국 참다 참다 못해서 야밤에 천당 담을 타고 넘어서 지옥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한 달 후, 하느님께서 다시 메시지를 지옥으로 보내셨습니다.
천당에 오고 싶은 사람은 아무나 좋으니 면접을 보라는 공지문이었습니다.
수도자 혼자 천당을 지키다가 우울증에 걸려서 내건 조치였는데
소문을 이미 들은 지옥주민들은 아무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하느님께서 천당에 들어오는 조건을 파격세일 하듯이 확 낮춰버리고
가라오케, PC방, 화투 방을 만들었다는 믿거나말거나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신의학자 스캇 펙박사는 Life is difficult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삶이 고되고 힘들다는 것은 주님께서도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이 고난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요구를 절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 머리 위의 짐을 내려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 이리 무거운가?
우리가 주님 앞에서 병자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병자들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치유자이시고 성당은 병원이 되는 셈이지요.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받듯이
주님 안에서 마음과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이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홍성남(마태오)신부: 가톨릭 1급 영성 심리 상담가